제21화
누군가는 임비화가 먹은 단약을 알아본 듯, 다급히 소리쳤다.
폭혈단은 왕급하품의 금약으로, 가격이 은자 백만 냥에 달했다.
임씨세가의 오인철 광산에서 꼬박 1년을 벌어들이는 수입과 비슷한 것이다.
높은 가격답게 효능이 빨라, 복용한 자는 단시간에 현재의 무위보다 두 단계나 상승한 무위를 얻을 수 있었다.
“임씨세가가 통이 크긴 크군. 폭혈단까지 등장하다니!”
“운청휘가 의외의 실력으로 승리할 줄 알았더니, 이렇게 되면 승부는 다시 임비화 쪽으로 기우는 것인가?”
“그런데 폭혈단은 금약이라고, 후유증이 만만치 않아. 운이 좋으면 무위가 사라지는 것으로 끝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남은 생은 전신이 마비되어 침대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놀라기는 운씨세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폭혈단을 알아본 것이다.
“가주님, 폭혈단입니다! 지금의 임비화는 이미 월경 1단계의 고수라고 봐야 합니다!”
“흥! 갈수록 가관이군. 자상검도 모자라서 이제는 폭혈단이 나오다니!”
“가주님, 결투를 멈춰야 합니다!”
운씨세가 모든 이들의 시선이 가주의 몸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이미 가주의 한마디에 뛰쳐나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운한도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결정을 미루고 곁에 있는 아들에게 물었다.
“현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운현이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결투 전에, 청휘가 소자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떤 일이 생기든, 결투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고.”
“청휘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느냐?”
모두의 시선이 이번에는 운현에게 모였다.
“예!”
운현이 짧게 대답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 그리고 가문의 어르신들. 청휘를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청휘는 3년 전과 다릅니다. 지금의 청휘는……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낼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일단……, 지켜보자꾸나.”
잠시 침묵하던 운한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걱정하는 운씨세가의 사람들만큼이나, 임씨세가의 무인들도 표정이 어두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결에서 이기더라도, 그 대가가 너무나 컸다.
천 명의 적을 잡기 위해 팔백의 아군을 희생하는 방식이나 다름없다.
임성양은 결투가 끝난 후 임비화의 무위가 소진되더라도, 몸만큼은 성하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운청휘 이 씹어 먹을 놈, 곱게 죽어줄 것이지 결국 내 아들에게 폭혈단까지 취하게 하는구나!”
임성양의 두 눈이 원한으로 번뜩였다.
“운씨세가, 네놈들은 언젠가 전부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마!”
임성양이 임비화에게 준비해 준 것은 자상검 뿐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자상검만으로도 승산이 충분했으니까.
그러나 임비화는 더 확실한 승부를 원했다. 가주에게 폭혈단까지 받아낸 것이다. 지금에 와서 보니 폭혈단이 없었다면, 이 결투를 빙자한 도박은 임씨세가의 대패로 끝났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오인철 광산을 내주게 된다.
임씨세가의 명맥을 잇는 주요한 산업 하나를 눈 뜨고 빼앗기는 셈이다. 그뿐인가?
십 년도 안 되어 천우성 삼대 세력에서 밀려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편, 운청휘는 임비화가 폭혈단을 복용했지만 분노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금의 임비화를 조금이나마 무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비록 후안무치하나, 그 각오와 세가에 대한 책임감은 인정해줘야겠군.”
상위 포식자인 운청휘는 대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들을 존중했다.
‘세가의 영광을 위하여’. 그 한마디가 운청휘의 마음을 움직인 셈이다.
어떤 집단이든 그 일원들이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그들의 안위를 위해 뒤에서 묵묵히 희생하는 이들이 있다. 그게 설령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지라도…….
임씨세가의 쇠락을 막기 위해, 임비화는 자신의 몸을 내던져 희생하는 자였다.
운청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임비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형님의 영해를 부순 놈이 네가 아니라면, 목숨은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네 뜻을 존중하는 의미로, 고통 없이 보내주마!”
운청휘는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비무장 주위에 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월경 1단계의 고수를 앞에 두고 저렇게 거창한 헛소리를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저 거만한! 잘도 지껄이는구나!”
“혈기가 넘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정도가 지나치군.”
“크크, 겁에 질린 게 분명해. 제정신이 아니니 저렇게 헛소리하는 거야!”
임비화는 실로 뻔뻔했다. 먼저는 자상검을 빼 들더니 이제는 폭혈단이라는 금약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뻔뻔함보다, 사람들은 운청휘의 거만함에 더 반감을 가졌다.
“고통 없이 죽여줘? 하하하하!”
임비화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큰소리로 웃어댔다.
“의도를 모르겠어. 건방진 거냐, 아니면 어서 곱게 보내 달라는 거냐? 유감이야. 네놈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 버리면, 폭혈단까지 복용한 스스로에게 고개를 들 수 없을 테니!”
임비화에게서 폭발적인 영기가 흘러나왔다. 영기는 이윽고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번개들을 이루기 시작했다.
펑!
강렬한 파공음과 함께, 임비화가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운청휘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기세에 눌려 꼼짝도 못 하는 듯했지만, 눈썰미가 좋은 이라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터였다. 지금, 운청휘의 눈에는 공포가 아니라 모든 것을 꿰뚫어 본 자의 여유가 넘친다는 것을.
폭혈단으로 무위를 끌어올린 만큼, 임비화의 공격은 월경 1단계의 무인이 낼 수 있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월경 고수의 힘에는 미치지 못했다. 억지로 끌어낸 힘은 고작해야 6할뿐, 그것도 흉내 내기에 그쳤다.
피하면 그만인 공격이지만, 운청휘는 가만히 서 있었다. 피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켜야 했다.
임비화를 고통 없이 죽인다. 임비화는 무조건, 고통 없이 죽어야만 했다.
윙윙윙……
자상검이 운청휘의 손아귀에서 기이하게 울어 댔다. 잠시 후, 자상검을 높게 치켜 든 운청휘는 그대로 정면을 향해 내리 그었다.
꽈지직!
족히 일 장은 될 법한 검기가 자상검에서 쏘아져 나오며, 비무장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상검이 뿜는 거대하고도 눈부신 빛에 좌중의 사람들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콰르릉!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천둥처럼 광장을 울렸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귀를 막기 급급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눈앞에 자욱하게 피어난 안개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바…… 방금 그거, 운청휘가 그런 거야?”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맞아, 운청휘가 자상검으로 만들어 냈어…….”
다른 누군가가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전투가 끝났음을 알리듯 스산하게 바람이 불어오며 비무장을 메운 안개가 걷혔다.
비무장 바닥 전체에 균열이 가 있었다. 무수한 조각으로 갈라진 바닥은 깨진 꽃병 조각 같기도, 이제 막 갈라지는 빙판 같기도 했다.
그 가운데, 운청휘가 뒷짐을 진 채 평온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임비화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기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임…… 임비화는? 죽었어도 시체는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사람들은 얼른 비무장 전체를 훑어보았지만 임비화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체뿐만이 아니야, 기마저 느껴지지 않아. 맙소사, 누가 좀 말해봐. 임비화는 어디 간 거야?”
“……죽었어!”
누군가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 버린 거야!”
“이제야 운청휘가 말한 ‘고통 없이 죽여주겠다.’가 무슨 뜻인지 알겠구만.”
“어떤 죽음이든 고통이 있기 마련인데……. 그대로 소멸시켜 버리면 고통도 없다는 건가?”
누군가가 잊고 있었다는 듯 소리쳤다.
“그렇다면 이 승부의 승자는 운청휘라는 말이네? 운청휘가 금약을 복용하고 월경 1단계가 된 임비화를 이긴 거야?!”
“그래, 운청휘가 이겼어! 심지어 그냥 이긴 게 아니라 완벽하게 이겼다고!”
“…….”
승패는 가려졌다. 제각기 떠들던 사람들이 점점 하나둘 입을 다물 더니, 광장은 정적으로 물들었다.
“비화, 비화가……. 정말 죽었단 말이냐?”
임성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임비화가 없는 비무장을 향해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 아아악! 운청휘, 이놈! 가만두지 않겠다!”
멍하니 서 있던 임성양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비무대로 달려들었다.
“목숨을 건 결투였다. 임비화가 죽은 것이 억울하단 말인가?”
태연히 대답한 운청휘가 자신을 향해 뛰어드는 임성양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 살기를 품은 채.
“목숨으로 갚아라!”
살기를 한껏 내뿜으며, 임성양이 비무대에 올라섰다.
“대장로! 진정하십시오!”
임성양이 막 출수하려는 순간, 임씨세가의 다른 이가 뒤따라 올라와 소리 쳤다.
“대장로,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장로님은 저 녀석의 상대가 못됩니다!”
그는 대장로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는 것을 알았지만 간언을 미루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임성양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거두었다.
운청휘의 실력은 그도 직접 목격했다. 그의 상대가 못 된다는 것은 더더욱 잘 알았다.
“대장로, 비화가 세가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은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부디 고정하십시오.”
그자는 얼른 임성양만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가주님도 지금쯤이면 준비가 끝났을 것입니다. 영수(靈獸)만 얻는다면 운씨세가 정도는 저희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운성양은 이제 완전히 싸우기를 단념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곤 운청휘를 노려보았다.
“너의 승리다, 운청휘! 오늘부로 오인철 광산은 운씨세가의 것이다! 다만…… 그 자상검은 이번 일과 무관하니, 돌려다오.”
억눌린 목소리를 말을 내뱉은 운성양은 점차 말끝을 흐렸다.
두 세가가 공공연히 적대하게 된 와중에, 운청휘가 검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운성양도 그 점을 알고 있었지만,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임성양이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 지금에 와서 검을 돌려달라고?”
“그러게 말이야. 자상검은 오인철광 보다 더 값진 것이라고! 이미 손에 들어온 물건을 돌려줄 이유가 없잖아.”
“허? 운 장로가 실성한 모양이군. 지금에 와서 검을 돌려달라는 건가?”
“그러게 말일세. 자상검은 오인철보다 더 값진 것이 아닌가! 게다가 이미 손에 들어온 물건을 돌려줄 이유가 있나?”
운씨세가 무인들은 저마다 한심하다는 듯 비웃어댔다. 입에 떡하니 물려 준 고기를 뱉을 멍청이가 어디 있을까.
“결투와 무관하다고 검을 돌려받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시오?”
운청휘는 비웃음이 섞인 얼굴로 임성양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왕급하품의 단약 한 알. 그리고 은자 십만 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