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레오넬(Don Leonel) (1)
정말 오래 기다린 순간이었다.
올해는 유독 국빈 방문이 없었다.
손님을 맞이하기보다는 직접 해외 순방을 다녀오신 탓에 국내에서는 정상 회담 일정이 거의 잡히지 않았다.
“연말이 거의 다 되어서야 만찬주로 선정되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
“그래도 이제라도 선정되는 게 어디야. 자칫 잘못했으면 올해 품평회 대통령상 받는 술이랑 경쟁할 뻔했어.”
“하긴 올해 품평회도 이제 곧 접수 시작하지?”
작년에 우리가 출품한 주류 품평회가 올해 연말에도 진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올해는 오저당에서 출품하는 술이 없기에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벽향주와 오풍주 모두 상을 받은 터라 몇 년간 출품 자격이 아예 없었다.
그렇다고 아직 출시도 안 된 소담을 내놓을 수도 없는 일이고 퍼플 라벨은 수출용이라 제외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올해는 건너뛰고 내년에 신제품을 내놓는 스케줄 밖에 안 나왔다.
2년 연속 대통령상 수상이라는 업적도 조금 탐났으나 그건 욕심이겠지.
“그래도 예전에 외교부나 장차관급 행사에서는 종종 우리 술 써줬잖아.”
“그거랑 청와대는 급이 다르지.”
“어쨌든 잘된 일이니까 준비해놨던 홍보 기사들 준비해서 뿌리겠습니다.”
황동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저당에 입사하기 전부터 관련 작업을 미리 해놓은 상태였다.
어느 만찬에서 사용되는 건지 내용 일부를 바꾸면 되는 터라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영국 총리면 어제 귀국한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수호는 나를 보며 물었지만,
외교와 정치 쪽 뉴스는 잘 보는 편이 아니라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만드는 술이 거시 경제에 좌지우지되는 편은 아닌 것도 한몫했다.
글로벌 주류 회사 수준은 아니기에 아직은 경제면만 봐도 충분했다.
잠시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심태섭 대리가 어제 귀국한 게 맞다고 대답을 해주었다.
“선사용 후보고 개념인가?”
“청와대 행사인데다가 정상 회담이잖아. 보안상 미리 공지하지 않았나 보지.”
“그러면 이 기사는 어떻게 나온 거야?”
“저번에 협회에 물어보니 만찬이 끝나면 청와대 출입 기자가 써주는 것 같더라.”
이렇게라도 알려주는 게 어디야.
청와대 만찬주가 되면 영광인 것도 있지만, 일단 매출의 단위가 달라지기도 했고 위상 자체가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
국빈을 대접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이라는 자리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사가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온라인 주문량이 급상승했다.
온라인 판매를 관리하는 이모가 평소답지 않게 깜짝 놀라서 허둥대고 있을 정도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최근에 구매 수량 제한을 풀어놨는데 평소 몇 배나 되는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당연히 주류 상사 쪽에서도 반응이 곧장 나왔다.
[부산의 거성 주류입니다. 벽향주 주문을 넣으려고요.]
[안녕하세요. 울산의 기린 주류인데 벽향주 2만 병 받을 수 있을까요?]
[여기 태백 물산인데요. 벽향주 재고 수량이 얼마나 되나요?]
당연히 그중에는 현송도 있었다.
권택경 대리는 마음이 급했는지 사무실 전화가 아니라 내 개인 전화로 연락했다.
하지만 그걸 탓할 수는 없었다.
현재 오저당의 전화는 계속 울려대고 있었는데 통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지금 오는 전화 대부분은 구매 문의였고 종종 아직 오저당과 계약을 맺지 않은 중소 규모의 주류 상사도 있었다.
[이렇게 사장님한테 직접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유수호 실장님도 계속 통화 중이셔서···.]
“괜찮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현송이잖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급하게 발주 메일을 넣긴 했는데 물량 확보가 가능한지 여쭤보려고요.]
“잠시만요. 일단 메일 확인부터 할게요.”
오저당의 공식 메일로 접속하자,
여러 주류 상사에서 보낸 발주서가 보였다. 그중에 현송이 보낸 메일에서 파일을 다운받아서 열어봤다.
“4만 병이나 주문하시려고요?”
[안 그래도 주문할 시기인 것도 있고 지금 확보해야지 부족할 게 뻔하잖아요. 다른 곳도 주문 많이 넣었죠?]
“청와대 만찬주 효과가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요.”
[이 효과 품평회보다 더 오래 갈 겁니다.]
나도 권택경 대리의 말에 동의했다.
일단 한 번 이름이 알려지면 그 뒤로도 판매량에 꽤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예전에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을 당시 만찬주로 쓰인 술은 6년이 지난 지금도 선착순으로 판매하고 있을 정도다.
손으로 빚는 술의 특성상 판매량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있었고 맛을 본 이들의 재구매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혹시 4만 병 전부 받을 수 있나요?]
“아직 확답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최대한 맞춰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사장님만 믿고 있을게요.]
그걸로 통화는 짧게 끝났다.
아직 전체 주문량을 확인한 것은 아니나 권 대리에게 그런 약속을 해줄 수 있었던 이유는 창고에 가득한 벽향주 덕분이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벽향주의 재고는 4만 병이었다.
다음 달에 나갈 술을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인데 언제 수출 요청이 들어올지 모르기에 준비를 해놔서 다행이었다.
“4만··· 5만 5천··· 8만.”
각각의 발주서를 취합한 결과.
오늘 하루만 8만 병의 주문이 들어왔다.
그중에는 KR 마트에 납품하는 심양이 물량 확보를 위해 보낸 발주서도 있었다.
가뜩이나 판촉물 이벤트도 진행하는 터라 이번 달의 판매량이 많아지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매출이 어마어마했다.
오늘 들어온 발주까지 합치면 이번 달의 오저당 매출은 역대급일 것 같았다.
열심히 계산하고 있을 무렵.
황동선 이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판촉물 세트 판매를 잠시 뒤로 미루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지금 그걸 끼워 넣지 않아도 살 사람은 살 거란 의미였다. 하지만 판촉물은 당장의 매출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니요. 예정대로 진행하죠.”
“구매력이 크게 상승한 터라 판촉물 효과가 거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의 효과를 바라고 진행하는 거는 아니라 괜찮습니다.
사람의 무의식은 생각보다 강렬하다.
자주 우리 상표가 노출될수록 나중에 술을 선택할 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벽향주가 마시고 싶은 날이 생기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다.
못생긴 에펠탑도 자주 보면 정이 드는 에펠탑 효과라는 것도 있고 익숙함을 거부할 수 없는 습관 지향의 법칙도 있다.
우리는 그 밑바탕을 깔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타깃층이 조금 달랐다.
오졌다 잔은 20대에서 30대에서 주로 반응이 나왔고 공식 만찬주로 선정된 것은 30대에서 50대에 어필되고 있었다.
인생과 술의 맛을 아시는 분들에게는 청와대 만찬주 선정은 어지간한 인증 마크나 수상보다 더 큰 영향력이 있다.
당연히 황 이사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이내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벽향주를 주문한 고객들 중에 몇 명을 추첨해서 연말에 퍼플 라벨을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요?”
“반응이 꽤 좋을 것 같습니다. 몇 병 정도 가능할까요?”
퍼플 라벨은 여전히 숙성 중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숙성하고 있던 테스트 용도의 술이 제법 있기에 수십 병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요. 라니 실장에게 말해서 이벤트 페이지 준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아! 그리고 이번 멕시코 출장은 다음에 가는 걸로 미뤄도 될까요? 이런 상황에서 자리를 비우는 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긴 홍보 기사부터 시작해서 해야 할 일이 갑자기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었다.
지금은 생산 라인 못지않게 홍보 쪽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시기였다.
“어쩔 수 없죠. 호세한테 연락해서 일정을 바꾸는 걸로 말해놓겠습니다.”
“아니요. 여기는 저만 남으면 됩니다.”
“저 혼자 가라고요?”
“브랜드 작업은 제품 리뉴얼이 완료된 후에 들어가도 되니까요. 대표님은 가셔서 거기 있는 우리 직원 데리고 오셔야죠.”
황동선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나중에 따로 작업해도 되니 여기는 맡겨 놓고 다녀오라고 권유했다.
“제가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뭘 걱정하십니까. 벽향주는 조택훈 공장장이 알아서 만드실 테고 그 옆에 유수호 실장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죠.”
거기에 새로 입사한 직원의 숫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었다. 현장 실습을 나온 학생들은 술을 빚는 것은 돕지 못하나 포장 같은 일은 가능했다.
“중요한 일이 생기면 연락드릴 테니 전화만 잘 받아주시면 됩니다.”
“하하! 이거 잘 때도 손에서 놓으면 안 될 것 같네요.”
“멕시코와 여기의 시차를 생각하면 그러셔야 할지 모르죠.”
당분간 꿀잠 자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순간을 대비해서 사람을 뽑아 배치해 놓은 거다.
언제까지 생산 라인에서 일을 도와줄 수는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직원을 더 뽑아서 붙여주는 게 효율이 높았다.
불안한 마음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한 번 맡겨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이제 막 오저당에 들어온 황 이사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직책상으로는 황 이사보다 낮으나 오저당의 핵심은 나와 수호다.
우리 둘이 없으면 오저당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공장장인 조택훈이 빠진 이유는 누룩 때문이다.
아무리 그가 애를 써도 수호가 빚는 오저당의 누룩 없이는 벽향주를 빚을 수 없다. 당연히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오저당을 맡게 되는 것도 황 이사가 아니라 수호가 될 것이다.
‘균형을 맞추려면 녀석도 이사급으로 올려줘야 하나?’
조만간 한 번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너무 빠른 승진이라고 하기에는 녀석이 하고 있는 일이 상당했다. 그리고 호세도 이미 승진 시기가 지나버리고 말았다.
멕시코 출장에서 제때 돌아왔다면 녀석도 이삭 기획의 직원들이 합류할 때 대리로 승진을 했을 것이다. 오풍주를 맡아서 생산하던 것을 생각하면 그 이상 되는 자리를 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상의하고 싶은 게 있는데 유수호 실장을 이사로 올리는 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장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시면 되죠. 제 의견을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나마 체계적인 기업에서 일해보신 분이 이사님밖에 안 계시니까요.”
황동선 이사가 들어온 후부터.
오저당도 조금씩 체계가 잡히고 있었다.
문서 양식도 전부 바뀌었고 연차와 월차 같은 것들을 망라한 사규도 작성 중이다.
내가 계속 바라보고 있자 그는 자신의 의견일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대답을 했다.
“유 실장이 초창기 멤버인 것도 있고 업무의 중요성도 높기에 그 자리에 올라간다고 해도 이상할 거는 없습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금 당장은 아니다.
기왕이면 연말에 성과금을 줄 때 승진도 같이 진행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직원들 월급 인상도 병행해야 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 대상은 아니었다.
이제 막 입사한 이삭 기획 출신과 현장 실습을 나온 학생은 제외될 예정이다.
그들도 어느 정도는 챙겨줄 생각이나 금액에서 차이가 제법 많이 날 것이다.
올해 초부터 정말 고생했던 이들이다.
지금 주문 폭주하는 거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때는 정말 밤잠도 줄여가며 병입하고 물건을 내보냈다.
당시에는 쌍둥이랑 호세가 야밤에 나와 수호 몰래 도주할까 걱정될 정도였는데 그에 따른 보상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내 월급도 조금 올려야 했다.
직원들이 많아지니 은근히 나가는 돈이 늘어나서 슬슬 부담될 정도였다.
이제는 커피 한 잔씩만 돌려도 10만 원이 넘어간다. 법인이 된 후로 돈을 함부로 쓰기 어려우니 더 절실해졌다.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
그로부터 사흘 뒤.
나는 다시 캐리어를 쌌다.
그 안에는 호세에게 줄 라면과 여러 위로품이 담겨 있었는데 멕시코에 올 때 꼭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호세의 할머니께 드릴 한복과 여러 선물도 있었기에 내 짐은 생각보다 엄청나게 커졌다. 지난해 미국에 가져간 이민 가방이 다시 등장해야만 했다.
그때 수호가 차 키를 흔들며 다가왔다.
“진짜 안 데려다줘도 되겠어?”
“택시 불러서 가면 돼. 그냥 나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일이나 해.”
“하긴 태백 터미널 한 번 찍고 오면 1시간쯤 걸리니 조금 애매하긴 하다.”
“이게 하루 이틀 다녀오는 거면 내가 아예 차를 끌고 나갈 텐데.”
이번 출장은 일정조차 없었다.
제품 개량이 어느 정도 자리 잡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라 귀국 티켓은 예약도 하지 않고 떠나는 상황이다.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냐?”
“그래도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돌아올 테니 걱정 마.”
“한 달 넘게 거기서 지내려고?”
“리뉴얼해봐서 알잖아. 이게 언제쯤 끝날지 예상도 안 되고 쉽게 마무리되지도 않잖아.”
진짜 마음먹고 개량 작업을 한다면 두세달 이상 숙성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머물러야 하는 게 정상이긴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대한 일찍 와야지. 아마 호세가 그 전에 내 멱살 잡고 비행기 탈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