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27화
127화. 찬란한
이 자리의 누구보다 놀란 것은 다름 아닌 카자크였다.
대체 왜 카를이 이곳에 있단 말인가?
별빛밖에 보이지 않는 모두가 자고 있을 시간에, 성문도 아니고 성문에서 조금 떨어진 이 후미진 곳에 나타나다니.
“음? 그쪽은 카자크 아저씨 아닙니까?”
카를이 카자크를 보더니 그렇게 얘기했다.
복면을 쓰고 있다지만 눈빛과 체격, 그리고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 등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카자크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스르륵 복면을 내렸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죠?”
카를과 카자크는 이미 구면인 듯 무척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황제의 밤놀음 상대를 하나하나 추적하다 카를이란 사생아의 존재를 찾아낸 것이 카자크와 특암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비밀 임무라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카를 본인조차 카자크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단순히 베르넘의 기사 중 하나로 알고 있을 뿐.
“어째 보통 기사 같지는 않더라니, 꽤 대단한 직책을 가지셨나 봅니다. 부하분들의 살기도 장난이 아니군요.”
“…….”
카자크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특암부의 정체를 밝히고 충성을 맹세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타이밍은 아니었다.
아직 황족으로서의 자각이 많이 부족한 지금의 카를에게, 황가의 어둠이라 할 수 있는 특암부의 존재를 알리고 싶진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아니면 그의 정체에 대해 큰 관심은 없는 것일까.
“아무튼 그래서 지금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카를은 카자크의 정체에 대해서는 딱히 캐물어 오지 않았다.
그에 미미한 안도감을 느끼며 카자크가 얘기했다.
“물러나 있거라. 중요한 거래 얘기를 하는 중이니.”
“당신네들은 칼을 들고 거래를 하나?”
유릭의 비아냥에 카자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때론 검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애초에 왜 받아들이지 않지? 불도마뱀의 심장보다 훨씬 귀한 것들을 안겨준다는데도.”
“나한테도 사정이 있어서.”
“……그렇담 그 사정을 말해보아라. 도울 수 있다면 충분히 힘을 보태주겠다.”
“퍽이나.”
유릭이 카자크의 꼴을 턱짓하며 코웃음 쳤다.
지금은 내리고 있다지만 복면을 쓰고 찾아온 카자크. 더불어 주변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는 특암부의 부하들.
이런 상황에 믿어 달라 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카자크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가 눈짓하여 부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카를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을 테니 유릭 일행을 습격하여 심장을 가져오란 신호.
물론 원만히 끝내라는 베르트랑의 명이 있으니 목숨까지 빼앗진 않겠지만, 다치는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카를의 등장으로 잠시 흐트러졌던 살기가 다시 밤하늘을 가득 메우며 쏟아졌다.
살기라곤 하지만 실상은 유릭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위협이다.
그러나 유릭 역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고.
“과연. 살롱에서의 그 일 때문인가.”
카를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납득했다.
살롱에서 베르트랑이 날뛰며 월터를 나무랐던 광경.
카를도 그 자리에 있었기에 당연히 보았다.
그리고 불도마뱀의 심장이 제국의 물건이며, 베르트랑이 제국의 물건에 심한 집착을 보인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일은 살롱에서의 그 일의 연장 선상이리라.
“카를. 잘 알았으면 끼어들지 말거라. 결투라면 나중에 언제든지 해줄 테니까.”
“하지만 아저씨. 그는 저를 이기고 정당하게 상품을 타낸 겁니다.”
“우리도 그의 승리를 모욕할 생각은 없다. 그저 서로가 더 만족할 만한 방안을 위해 대화를 해볼 뿐이야.”
“칼로 하는 대화 말입니까?”
“너도 좋아하지 않더냐. 결투 같은 거.”
카자크는 어떻게든 말을 꺼내며 카를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솔직한 말로 특암부의 방식은 빈말로도 깨끗하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더러운 일 처리를 본 카를이 황족의 피에 환멸을 느끼게 되진 않을까.
그런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그런 확실하지도 않은 걱정으로 제국의 보물을 놓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미치겠군.’
일이 이렇게 흘러가니 괜스레 더 원망스러웠다.
이 밤에 잠도 안 자고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것인지.
“…….”
카를은 그 모든 것을 보았다.
눈앞에서 복잡한 표정으로 찡그리고 있는 카자크.
메르에게 신호를 보낼 타이밍만 재고 있는 유릭.
보이지 않는 밤의 장막 속에서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특암부의 부원들.
“아저씨. 만약 제가 우승했다면 어떻게 했을 겁니까.”
“뭐?”
갑작스러운 질문에 카자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제가 우승하고, 그리고 그와 같이 불도마뱀의 심장을 내어달라 했다면 저에게도 이렇게 칼을 겨눌 생각이었습니까?”
“무슨 소릴……. 황족의 피를 이은 네가 제국의 보물을 가진다 하여 무엇이 문제겠느냐. 나는 그저 자격 없는 이가 가지는 것을 막고 싶을 뿐이다.”
“그런 거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군요.”
“……?”
카자크는 카를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카를이 반보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유릭이, 아니, 그 옆에 있는 글렌이 있었다.
“거기 너. 글렌이라고 했던가?”
갑작스러운 호명에 글렌이 의아해했고.
휘리리릭-
그에게 대뜸 검 한 자루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손가락 하나는 가볍게 절단할 진검이 빙그르르 날아오자 글렌이 눈을 크게 뜨며 그것을 잡았다.
그래, 잡았다.
아까부터 무슨 일인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던 신검 라엘라를.
“……!”
“흡!”
곳곳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카자크 역시 찢어져라 벌어진 입을 다물 기색조차 없었다.
라엘라를 잡았다.
그리고 그 어떤 거부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보통 자격 없는 이가 라엘라를 잡게 되면 어떤 형태로든 거부 반응이 있게 마련이었다.
검이 갑자기 무거워진 듯 움직이질 않거나, 제멋대로 기운을 내뿜어 주인을 공격하거나, 기타 등등.
그러나 어떤 반응도 없다.
파앗-!
오히려 라엘라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처음 카를이 뽑았을 땐 기껏해야 광장을 채울 정도의 빛이, 지금은 도시 전역을 뒤덮을 정도로.
잠이 얕은 이라면 해가 떴나 착각하여 창을 열어볼 만큼, 그 빛은 찬란했다.
“어, 어찌…… 어찌…….”
카자크는 방금까지의 날카로움을 잃고 어린애가 된 것마냥 같은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아침 햇빛과 같은 빗살 속에서 글렌이 쓴웃음을 지었고.
“어쩐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닌 것 같더라니.”
카를이 피식 웃으며 예정된 결과를 마주했다.
처음 검을 뽑았을 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
마경 안에서 글렌이란 자와 마주했을 때 느꼈던 검의 아우성.
그리고 이 밤에 검이 자신을 이 성벽까지 인도한 이유.
화아-
빛이 차츰차츰 옅어져 간다.
드디어 바라던 자의 품에 들어왔다며 편안히 잠에 빠지듯.
이윽고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어, 어머니가 어떤 분이신지 물어봐도, 아, 아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카자크는 어느새 경어를 사용하며 글렌에게 묻고 있었다.
* * *
테메레르 대왕은 빛의 신검을 들고 빛의 힘을 사용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확실히 대륙의 암운을 걷어내는 영웅으로서 빛의 힘을 쓴다는 건 매우 어울린다.
하지만 의문인 점은 있었다.
글렌의 말로는 테메레르 대왕의 능력은 본디 빛이 아닌 어둠에 있다 하였는데, 어째서?
‘라엘라를 쓴 건 저거 때문이었나.’
도시 전역을 뒤덮은 빛의 한중간에 서 있는 글렌을 보고 유릭은 납득했다.
빛의 신검을 든 글렌의 뒤쪽으로 짙은 그림자가 일렁거린다.
보통의 그림자보다도 훨씬 짙고 불길한 그것은 틀림없는 신검의 힘이었다.
정확히는 신검에 의해 증폭된 글렌의 힘이라 하는 것이 옳겠지.
‘빛과 그림자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뭐 그런 건가.’
강한 빛이 있으면 강한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
어째서 카를이 신검을 제대로 다루어내지 못했는가도 이젠 알겠다.
단순히 신검을 처음 써봐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신검의 진정한 힘을 끌어낼 능력의 편린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의 오러는 진동을 사용하는 잿빛 오러로 무척 상급의 기술로 보이긴 했지만, 글렌이 타고난 그림자와는 결이 전혀 달랐으니.
“용케 눈치챘군.”
글렌이 복잡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라엘라를 보았다.
지금은 빛을 감춘 채 새하얀 도신밖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방금 환한 빛을 흩뿌린 검이다.
그건 그야말로 진정한 신검의 주인이라는 의미였다.
“검이 알려줬나 보지. 본래의 주인을 찾아가고 싶다고.”
그리 얘기하자 글렌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는 눈으로 유릭을 보았다.
“검은 그냥 물건인데 알려주긴 뭘 알려주나?”
“너 말조심해라. 그러다 삐질라.”
“삐져? 검이?”
“그렇다던데?”
“…….”
어느새 유릭을 보는 글렌의 눈은 이젠 안쓰러운 병자를 보는 것 같은 눈이 되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릭은 피식 웃고만 있었다.
나중에 이 녀석도 한번 마크 로헨의 공방에 데려가 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자크가 더듬거리며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어, 어머니가 어떤 분이신지 물어봐도, 아, 아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왜?”
“그것이…….”
글렌이 퉁명스레 답하자 카자크가 어찌 말하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기 시작했다.
손바닥 뒤집듯 변한 태도. 그가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글렌이 들고 있는 신검만 힐끔거리고 있으려니.
“내 어머님은 에시리아란 이름을 쓰신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
그 이름을 듣고 카자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벌써 수십 년은 지난 어렸을 때의 일이긴 했지만, 그는 에시리아란 이름의 후궁을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었다.
상기된 기억을 가지고 글렌을 뜯어본다.
화사한 금발에 옅은 비취색의 눈.
그 이목구비와 얼굴선에선, 확실히 그녀의 모습이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화, 황자님을 뵙습니다!”
엄청난 사실에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감출 수 없었다.
카를의 모친은 황제가 여자놀음을 하였던 수많은 여자 중 하나.
황가의 족보에 이름은커녕 존재조차 기록되지 않은 그런 여인이다.
하지만 에시리아는 당당히 족보에 그 이름이 적힌 후궁이었다.
비록 권세 높은 황후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26번째 후궁이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당당한 황실의 일원이다.
그 말은 즉 눈앞의 남자가 바로…….
‘직계!’
황가 클라인 가문의 직계라는 뜻.
26번째 후궁의 아들이라니 보통이라면 직계 취급도 받지 못할 말석이지만, 지금에 와선 얘기가 다르다.
그 정통성은 사생아인 카를과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제국 재건의 뜻을 함께하는 동포들을 더욱 뭉치게 하고, 아직 떨떠름한 중립 세력들조차 돌아보게 만들 비장의 카드.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 테메레르 대왕의 직계 후손이 아직 남아 있단 사실에 그는 감동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 영웅의 핏줄이.
찬란히 빛나는 검을 들고 자신의 앞에.
“지금껏 어떻게 살아오셨던 겁니까! 에시리아 님은 어떻게 돌아가신 거죠? 그리고, 그리고…….”
“거기 멈춰.”
카자크가 크게 감격한 표정으로 다가오려 하자 글렌은 한 걸음 물러나며 선을 그었다.
그 정색한 표정을 보고 카자크는 이제야 지금까지의 일을 돌아볼 수 있었다.
불도마뱀의 심장을 되찾기 위해 강압적으로 실력 행사를 하려 했던 일.
위협용이라곤 하지만 살기를 내뿜어 겁먹게 하려 했던 일.
부하들을 소집해 둘러싸 린치를 가하려 했던 일.
그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제국이 멀쩡했다면 구족을 멸하고도 남았을 죄목들.
이미 망한 제국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멀쩡’한 제국을 다시 세우는 것.
“부, 부디 용서를…….”
다시 말해 그것은 카자크에게도 죽어 마땅할 죄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