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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128화 (128/166)

#서리명가 검술천재로 회귀했다 128화

128화. 변치 않는

이 무슨 불충인가.

비록 글렌이 황자란 사실을 미처 몰랐다는 점이 있지만 그딴 것은 변명 거리가 되지 못하였다.

알지 못한 채 저질렀다 하여 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이젠 더 이상 불도마뱀의 심장을 가져가니 마니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황가의 물건을 황가의 자손이 가져가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까.

문제는, 아무리 몰랐다곤 하나 자신들이 커다란 무례를 범했단 점이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이 일은 모두 제 지시로 일어난 일이니 부디 부하들은 용서해 주십시오.”

카자크가 깊이 읍소하며 칼을 꺼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틈도 없이.

서걱-

그의 오른팔이 하늘을 날았다.

“큿…….”

스스로 팔을 자른 그가 고통을 참으며 글렌의 앞에 부복했다.

당장 피가 철철 쏟아지고 얼굴이 새하얘지고 있는데도 그 자세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것으로 용서를…….”

그러나 그 절절한 자세에도, 글렌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아무런 감흥 없는 표정으로 그가 카자크를 보았다.

“이게 특암부의 방식인가?”

“며…… 면목 없습니다.”

글렌이 힐긋 보니 유릭은 이미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불도마뱀의 심장은 얼추 해결된 것 같으니 자신은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단 뜻이리라.

속으로 살짝 혀를 찬 글렌이 부복한 카자크에게 턱짓했다.

“지혈해라.”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피가 쏙 빠져 새하얘진 얼굴의 카자크가 절단면에 하얀 가루 같은 걸 뿌리더니, 천을 꺼내 꽉 동여매었다.

순식간에 붉게 물든 천이었으나 애초에 검은 천이었던지라 크게 눈에 띄진 않았다.

지혈을 마친 그를 보곤 글렌이 얘기했다.

“베르넘과 특암부에선 제국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모양이더군.”

“맞습니다! 말년엔 부패해 스러졌다고는 하나 제국은 위대한 대왕의 피를 이은 국가입니다. 그러니 그 시절의 영광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 이렇듯…….”

“그만.”

구구절절 나오려는 설명을 글렌이 한 마디로 끊었다.

“니들이 뭘 하고 있고, 뭘 하려는 지에 난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황자님…….”

“황자님이라고 부르지 마. 난 글렌이다.”

아무렇지 않게 던진 그 한마디엔 글렌이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담겨 있었다.

카자크도 그걸 느꼈는지 눈을 크게 뜨며 멍해졌다.

그에게 있어 글렌은 여생의 목표와 다름없는 남자.

그런 남자의 입에서 관심 없다는 말이 나오니 눈이 흔들리는 것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글렌은 신경 쓰는 기색도 없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가 자신에게 뭘 바라고 있든, 그걸 이뤄줄 의무 따윈 없었다.

“우릴 찾지 말고 뭘 하려고도 하지 마라. 과거는 잊고 새로운 주군을 찾아라. 네가 진정으로 황가에 충성을 바치고 있다면…… 황가의 마지막 명령을 들어라.”

“…….”

카자크가 멍하니 글렌을 올려다본다.

그의 입은 달싹거리기만 할 뿐 차마 대답이 나오진 않았다.

기다리지 않고 글렌은 성벽 아래에서 밧줄을 준비하는 유릭에게 돌아왔다.

“괜찮겠냐?”

“괜찮다니 뭘.”

“이 벽을 넘으면 돌아올 수 없게 될 텐데.”

지금 당장 글렌이 뒤로 돌아 베르넘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강력한 암살 집단인 특암부의 충성을 받게 되고, 모든 검사의 별이라 불리는 검성 베르트랑 역시 강력한 그의 아군이 되어줄 것이다.

베르넘이 보관 중인 황가의 나머지 보물들을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아직 제국을 그리워하는 구시대의 세력들이 그의 앞에 조아리게 된다.

그것들은 부귀영화라는 단순한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힘.

이 성벽을 넘는다는 것은 그걸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멍청한 놈. 섀도우가 주인을 두고 딴 길로 새는 거 봤나?”

글렌은 여느 때와 같이 퉁명스레 대꾸할 뿐이었다.

유릭이 피식 웃었다.

항상 건방지고 경우 없는 놈이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하나만큼은 인정한다.

이 녀석은 변치 않는 녀석이다.

주변이 아무리 난리 치더라도 자신이 정한 것을,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을 변화시킬 놈이 아니다.

“그럼 주인 욕하는 섀도우는 있다냐?”

“수틀리면 황제 욕도 한다는데 그것 좀 할 수 있지.”

“그건 없는 자리에서 욕하는 거고, 임마.”

유릭이 밧줄을 돌려 강하게 집어 던졌다.

끝에 단검을 묶어둔 밧줄이 성벽 위에 단단히 걸렸다.

잘 걸렸는지 두어 번 확인한 후 유릭이 밧줄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글렌이 밧줄을 잡았을 때.

“저희는 언제나 기다릴 것입니다! 황자님께서 돌아오실 날을! 그러니 부디 옥체 보중하시옵소서!”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글렌은 무시하고 성벽을 올랐다.

저것은 황자에게 하는 소리지 글렌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었으니까.

* * *

야밤에 그런 일이 있었지만 해가 떠오른 베르넘의 영지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밤중에 떠올랐던 태양에 대해 떠들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것 아닌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넘어갔다.

밤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지금 시점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뜬 지금, 이제야 그 일을 알게 된 사내가 있었으니.

“……잠깐. 밤중에 성벽을 넘어 도주했다고?”

“그렇습니다, 엘가이아 경. 그러니 아무리 기다려도 그 남자는 오지 않습니다.”

약속 시각이 한참 흘러도 오지 않는 유릭을 기다리던 엘가이아였다.

얘기를 전달해 준 것은 카를.

글렌이 황자였다든가 그런 것은 비밀로 하였지만, 유릭이 떠났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려주었다.

“어디로 간다고 했느냐?”

“모릅니다.”

“…….”

엘가이아가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왕국에 휴가를 제출하고 온 참이다.

그동안 딱히 휴가를 가지 않아 쌓였던 것을 모두 쓴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길진 않았다.

베르넘과 스카디의 거리를 생각해 본다면 며칠 후에는 귀향길에 올라야 한다.

더 이상 옆으로 샐 시간은 없었다.

‘……여기까진가.’

씁쓸한 맛이 올라왔다.

놈과 검을 겨뤄보면 가슴속에 살짝 응어리진 이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한편 실망하는 그에게 카를이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

“시간 되면 저랑 대련이나 해주시죠.”

“대련 말인가?”

카를이 엘가이아를 찾아온 이유는 유릭의 얘기를 전해주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단 이쪽이 더 컸다.

이 베르넘에서 카를의 위치는 꽤나 미묘해졌다.

글렌이라는 더 정통성 높은 황자가 나타났으니 베르넘은 카를이 아니라 글렌에게 더욱 집중할 테지.

지금껏 알게 모르게 카를을 도와주던 베르넘의 지원은 사라지게 되리라.

그러나 카를에게 그런 것들은 하등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지금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루빨리 강해져야 그자를 다시 만났을 때 설욕전을 치를 게 아닙니까.”

유릭을 꺾기 위해 검을 단련하는 것.

다시 만날 것을 한 치도 의심치 않는 그의 말에 엘가이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카를의 말을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으니.

이번엔 놓쳤다곤 하나 이것으로 끝도 아니고 다음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오늘이 아니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다음에 만났을 땐 마스터가 되어 있겠지.’

그웬델에서 보았을 때와 얼마 전 스카디에서 보았을 때.

시간상으론 얼마 되지 않지만 유릭의 경지엔 굉장한 차이가 있었다.

그 빠른 성장세를 본다면, 다음 만났을 땐 이미 마스터에 올라 있지 않을까.

그때가 되면 비로소 놈은 자신과 같은 무대에 서는 셈이다.

‘어서 올라와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

긍정적인 마음을 되찾은 엘가이아가 기꺼이 검을 들어 카를의 앞에 섰다.

마스터와의 대련에 카를이 싱글벙글하며 대검을 들었다.

그들의 뒤쪽에선 마야가 대련이 끝날 때를 위해 물과 수건을 준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가문이 카를에 대해 미묘한 입장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그녀는 아직 카를의 곁에 남았다.

그렇듯, 주변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엘가이아와 카를, 그리고 마야는 의외로 변치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 *

성벽을 넘은 유릭과 글렌은 가까운 마을에 도착해 말 두 필을 구매했다.

‘한동안 베르넘도 시끌시끌하겠군.’

글렌의 등장으로 베르넘의 내부에서도 여러 말들이 오갈 것이다.

더불어 제국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구시대의 세력들.

겉으로 드러난 건 베르넘과 특암부뿐이지만 속으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담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 모든 이들이 글렌의 등장에 동요하겠지.

‘거기에 알테라도 오고 있다 그러고.’

뿐만 아니라 거목림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마경을 연구하기 위한 마도성 알테라의 방문도 있다.

연구가 목적이니 하루 이틀만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닐 터.

심지어 이조차 끝이 아니다.

용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당연히 그들도 베르넘에 찾아올 터.

‘바리도 이쪽으로 오려나?’

티르옌 일족 역시 베르넘의 상황에 주목하며 사람을 보낼 테지.

아무리 베르넘에서 입막음을 하려고 해도 조사단의 인원이 목격했고, 알테라의 마법사들이 브레스의 흔적을 발견할 것이다.

용의 소문이 퍼지는 것은 막으려야 막을 수 없다.

‘하나 아쉬운 건 또 나랑 용이 엮였다는 걸 티르옌이 알게 된다는 건데.’

그웬델에서의 한 번은 정말로 우연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한 번, 베르넘에서 두 번.

두 번이나 같은 사람이 용의 존재와 엮이게 된다면 더는 100% 우연이라 생각하긴 힘들겠지.

어쩌면 다시 티르옌에서 자신에게 접촉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뭐 그건 어쩔 수 없고.’

다만 그것까지 유릭이 컨트롤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고.

그것관 별개로 베르넘은 당분간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폭풍의 핵.

다양한 세력의 다양한 목적들, 그리고 이익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유릭은 이미 그곳에서 한 발짝 멀어져 있다.

아무리 거대한 폭풍이라 하나 그것은 알맹이 없는 폭풍이다.

‘심층의 입구를 여는 펜던트도 나타난 용도 모두 이쪽에 있으니.’

정작 폭풍을 일으킨 요소들은 모두 유릭에게 있다.

이제 와서 뭘 조사하든 간에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적으리라.

그 유릭은 이미 베르넘에서 벗어나 다음 장소를 향하는 중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냐?”

마을을 벗어난 초원에서 글렌이 물어왔다.

그의 허리춤에는 빛의 신검 라엘라가 얌전히 매달려 있었다.

평소 이만한 사이즈의 장검이 아닌 단검을 주로 쓰는 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장검을 쓰지 못하는 건 아니다.

모든 무기를 수준급으로 다룰 줄 아는 그였기에, 장검 하나 달고 다닌다 하여 어색한 건 없었다.

그보다는 일행의 전력에 강력한 무기가 추가된 걸 기뻐해야 할 테지.

“다음은.”

유릭이 고삐를 움직여 말머리를 틀었다.

그 방향은 동쪽.

“성국(聖國) 루메루스로 간다.”

치유와 재생, 생명과 탄생을 관장하는 여신 루메나를 섬기는 성국 루메루스.

루메루스의 ‘성역’은 대륙에 남아 있는 신비(神祕) 중 가장 기이하다 불리는 장소다.

즉사만 아니라면 어떤 상처라도 순식간에 치유해 주는 곳.

그곳에서 유릭은 폭탄과 다를 바 없는 불도마뱀의 심장을 복용하고, 내친김에 폭심공까지 모두 익혀 나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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