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성장
이벤트 매치가 끝나고 일주일 후, 서울에 위치한 사설 테니스 코트.
지혁은 12월 최고의 화제였던 슈퍼 매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곧바로 한국으로 복귀했다.
여러 기업들에서 제안이 물밀 듯이 들어왔지만 돈보다 비시즌기의 휴식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세레나 윌리엄스와의 경기를 받아들인 것도 금전적인 이유보다 호기심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굵직한 계약들은 이미 한참 전에 성사된 터라 이 결정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도 없었다.
“후···. 아깝다.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이길 수도 있었는데 마무리가 약한 게 패착이었어.”
“이번 경기는 내가 이겼네. 오늘따라 컨디션이 엄청 좋아서 그런가 봐. 이제 전적이 16전 9승 7패지?”
“···맞아. 동점에서 또 멀어졌네.”
정민과 니시오카 요시히토는 코트에서 서로의 장단점을 짚어주며 경기를 복기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유명한 라이벌 관계로 지겹도록 싸워왔기 때문일까.
그들이 아무렇게 내뱉는 말들은 마치 베테랑 코치처럼 날카로웠다.
그렇게 주변을 완전히 배제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지혁의 아카데미 동기이자 훈련장의 유일한 여성인 구지연이었다.
“다음 연습 차례는 나야. 너희들 아까 약속한 걸 벌써 까먹은 건 아니지?”“아! 지연이 누나.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맞아요. 저라도 괜찮다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무조건 경기 상대를 해드릴게요.”
“와. 자신있다 이거지? 나를 이기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나 봐?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걸?”
“아니, 그게 아니라···.”
예쁜 이성에 대해 전혀 면역이 없는지 허둥지둥하는 니시오카와 그 반응을 재밌다는 듯이 놀려대는 지연.
이 이상한 조합의 녀석들이 지혁의 개인 코트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건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지연과 정민은 다음 시즌까지 남는 시간 동안 지도해주려고 불렀지만 니시오카는 니시코리의 한국 방문에 덤으로 딸려온 것이다.
“재밌는 주니어 선수들이네. 게다가 재능도 훌륭한 편이고. 네가 신경을 쓰는 이유를 알겠어.”
“네. 조금만 코칭해주면 금방 메이저 대회까지 올라올 녀석들이에요. 특히 저기 정민은 니시코리도 긴장을 해야 할 걸요?”
“글쎄. 그 정도까진 아닌 것 같은데? 같은 한국 선수라고 너무 높게 평가하는 거 아니야? 피지컬도 탑랭커하고 그렇게 어울리지 않고 말이야. 나는 엄청 잘 풀려도 100위권 문턱이 한계라고 생각하는데.”
니시코리는 중3치고 유독 작은 정민의 키를 지적하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정민이 180 후반까지 크는 미래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점쟁이도 아닌데 당연한 일이었다.
170 초반의 상위 랭커는 단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다.
아무리 스트로크 실력이 높아도 단신의 선수는 피지컬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2~3년만 기다리면 실력 있는 베이스라이너로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할 거니까 기대하고 있으세요.”
“세계 랭킹 1위의 지도를 받은 주니어 선수라···. 무섭네.”
전혀 무섭지 않은 얼굴로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니시코리.
이미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슈퍼 유망주인 그는 정민이 절대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솔직히 저 안경 쓴 꼬맹이에게 니시코리가 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몇 년 뒤에 경기에서 패배하고 나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 그때가 되면 두 사람의 랭킹도 거의 비슷해지니까.’
원래 역사에서도 아시아 탑을 두고 피 터지게 경쟁했으니 분명 흥미로운 라이벌 관계가 되어줄 것이다.
“그보다 우리도 슬슬 연습 경기나 할까?”
“지금요?”
“아마 쟤들한테도 상당한 도움이 될 거야. 탑랭커의 대결은 보는 것만으로 훌륭한 수업이니까.”
니시코리는 처음부터 한국에 방문한 목적이 확실했기에 적극적인 태도로 지혁을 설득했다.
“음···. 지난 며칠 동안 열심히 코칭을 도와줬으니 그럴게요. 마침 제대로 경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거든요.”
“좋았어! 드디어 너랑 붙어보는구나!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넌 짐작도 하지 못할 거야.”
지혁은 환호를 하며 코트로 달려가는 니시코리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이미 탑10급으로 성장한 선수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 꽤나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열정이 있었기에 부족한 피지컬을 극복하고 지금의 랭킹까지 도달한 거겠지.
끈질긴 집념을 바탕으로 경기에서 승리하는 베이스라이너와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다.
***
스트레칭을 마치고 각자의 코트로 올라가는 지혁과 니시코리.
지난 며칠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모습에 시끄럽게 떠들던 꼬맹이들은 입을 다물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설마 형이랑 니시코리가 드디어 경기를 하는 건가?”
“맞는 것 같은데? 마침 이벤트 매치가 끝난 지도 일주일이 넘었잖아. 그 정도 시간이면 체력을 전부 회복했을 거야.”
“오빠가 탑랭커랑 경기하는 건 처음 봐···. 이때까지 대회에 참가하느라 챌린저를 보는 게 고작이었거든.”
“저희들도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느라 그건 마찬가지예요. 한가하게 그랜드슬램을 쫓아다닐 시간은 없었으니까요.”
“상위 랭커들이 진심을 다하면 얼마나 대단할까? 영상으로 보는 것하고 완전히 다르겠지?”
“···얼마 전에 아주 조금 경험해봤는데 형은 인간이 아니에요. 어떻게 빅4의 수좌가 되었는지 알겠더라구요. 솔직히 저 형이 패배하는 경우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어요.”
정민은 아직도 그 충격이 생생한지 몸을 가늘게 떨며 진저리를 쳤다.
난생 처음 겪어본 빅4의 실력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와···. 그 정도라고?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나도 더 기대되네.”
“아마 뭘 상상하던지 그 이상일 거야. 만약 모든 부분에서 완벽한 선수가 있다면 그건 지혁이형일 테니 말이야.”
지혁과 니시코리의 대결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기에 코트 주변은 금방 북적거리게 되었다.
[플레이어 레디. 서브 리.]
동전을 던져 순서를 정한 결과, 먼저 서비스게임을 가져가는 건 지혁이었다.
휙!
심호흡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토스되는 공.
느릿하게 하강한 공은 훈련장을 가득 채우는 굉음을 내며 반대편 서비스 코트에 내려 꽂혔다.
그 무시무시한 위력에 니시오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며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테니스 명문인 닉 아카데미에서도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퉁!!
사람들이 내심 퍼스트 서브를 받아내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코트에서는 묵직한 임팩트 소리가 들렸다.
니시코리가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위태위태한 자세로 리턴을 성공해낸 것이다.
과연 탑10급 선수의 명성에 어울리는 반사신경이었다.
‘그동안 가만있지는 않았네. 니시코리도 지난 1년 동안 몰라보게 성장했어. 하긴 갑자기 랭킹이 그냥 오를 리는 없지. 분명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을 거야.’
은근히 지혁에게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으니 실력이 정체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일단 랠리가 시작되자 니시코리는 베이스라이너의 진가가 뭔지 제대로 보여줬다.
비록 테니스 선수치고 작은 178cm의 키를 가지고 있어 여러 조건에서 불리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승부를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스트로크가 팽팽하게 흘러갔다.
‘적당히 하면서 이기기는 힘들겠어.’
이렇게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는데 건성으로 플레이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상대는 이번 경기를 단순히 연습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랠리에 넋이 완전히 나간 상태로 멍한 얼굴을 하는 정민들.
그들은 첫 포인트가 무려 18구 만에 지혁의 포핸드 위닝샷으로 종료되자 허억! 하고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차렸다.
“후···. 이게 고작 경기 초반일 뿐이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상위 랭커는 정말 수준이 다르구나.”
“이런 괴물 같은 선수들을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앞으로 성장한다고 가정해도 답이 없어 보이는데.”
“어렵겠지. 저 형들은 격이 다른 천재들이니까.”
“지혁 오빠랑 리그가 달라서 다행이야···.”
“저도 가능하다면 WTA로 도망이라도 가고 싶네요. 형이 버티고 있는 한 그랜드슬램 우승은 물 건너 간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게다가 나이도 저희랑 3살 차이밖에 나지 않잖아요.”
“빅4와 동시대에서 경기를 해야 한다니 진짜 최악의 세대야······.”
[게임 리 1-0.]
······.
[게임 니시코리 3-3.]
어느새 1세트 중반을 넘어가는 경기.
사람들은 경기를 시작한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브레이크가 나오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선수의 명성과 실력을 생각하면 이쯤에서 결판이 나는 게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형이 봐주고 있는 거 아니야? 아직도 동점이라니 이상하잖아.”
“저 살벌한 랠리가? 말도 안 돼.”
“그런데 일주일 전에 했던 슈퍼 매치보다 훨씬 수준 높은 것 같지 않아? 니시코리가 세레나보다 훨씬 경기력이 뛰어난 것 같아. 분명 세레나 윌리엄스는 레전드 선수인데···.”
“아무래도 저희의 생각보다 리그 간 실력 격차가 심각한 모양이에요. 저는 지금 경기하고 있는 니시코리가 세레나에게 지는 그림이 전혀 상상되지 않거든요.”
“나도 너랑 생각이 비슷해. 이게 그랜드슬램 정상에서 일어나는 진짜 경쟁이겠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코트 주변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정작 지혁은 스코어가 쌓일수록 니시코리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니시코리의 세계 랭킹이 11위였나? 지금 실력이면 내년에는 진짜 탑10 안에 들어오겠는데?’
과장을 보태지 않고 칠리치나 송가가 연상되는 압박감이다.
두 선수는 랭킹 6, 8위이니 마침내 니시코리도 그랜드슬램과 마스터즈의 우승권을 바라보는 레벨에 도달한 것이다.
‘원래 4위까지 올라가는 선수이니 이상한 것도 아니지. 시간이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야.’
아무리 그랜드슬램을 휩쓴 지혁이라고 해도 탑10급 선수에게 여유를 부리면서 승리하는 건 힘들었다.
지난 3년 동안 쌓인 탑10과의 상대전적은 90%가 간당간당했으니 말이다.
물론 지혁은 중요도가 높은 대회의 승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았기에 그랜드슬램은 이야기가 많이 달랐다.
‘한계가 어디인지 시험해보고 싶네. 랠리의 수준을 조금 더 높여보자.’
그렇게 점점 템포가 빨라지는 경기.
스트로크의 위력과 왕복 속도가 증가하자 정민과 니시오카는 긴장감으로 인해 숨이 막히는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도 꿈에서도 보기 힘든 명경기가 펼쳐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눈빛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평생의 목표로 설정해도 부족하지 않는 선수가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한 눈을 팔 수 있겠는가.
그들은 지금 같은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