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60화 (260/468)

260화. 예절교육은 물리치료가 제맛 (1)

옛날 옛적, 드래곤이 대장내시경 받고 아야했던 시절에 골목길을 거닐던 어느 뱀파이어가 있었어요. 그 뱀파이어는 몹시 배가 고팠답니다. 그래서 골목에서 마주친 거한에게 애절한 심정을 담아서 ‘한 입만?’이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글쎄, 거한이 친절하게 손을 내밀었지 뭐예요? 덕분에 뱀파이어는 아구창이 따뜻해질 수 있었답니다. 주먹이 전달하는 충격력의 일부는 국지적인 규모에서 소량의 열에너지로 변환될 수도 있다는 열역학적 사실, 우리 모두 기억해 두자구요?

……콰직!

“……!”

경쾌하게 골목을 가득 채우는 파열음. 두개골을 온통 뒤흔드는 충격. 그 속에서 뱀파이어 블라도는 경악했다.

‘뭐……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저 사냥감을 덮쳤을 뿐이었다. 평소와 똑같았다. 접근은 완벽했고, 상대는 이쪽의 정체를 깨닫지 못한 듯했다. 거의 아무런 경계심도 내비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그렇게 보였으니까.

그러니까 인간 따위는 뱀파이어인 자신이 근거리에서 감행한 습격에 반응하지도 못할 텐데. 마땅히 그래야 하는데. 그게 정상인 건데.

그런데 왜…… 지금 내 고개가 홱 돌아가고 있는 걸까. 어이없게 헤에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하얗고 뾰족한 무언가가 허공을 뱅글뱅글 가로지르며 날아가고 있는 걸까.

익숙한 색깔.

낯익은 모양.

그래, 주군께서는 내 송곳니가 유달리 길고 예쁘게 잘 빠졌노라고 칭찬을 하셨더랬지. 덕분에 나는 송곳니가 잘생긴 뱀파이어로 동료 권속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기도 했어. 내 아름다운 송곳니. 내 자부심. 그런데 그게 왜…….

‘저기로 날아가고 있지?’

블라도는 눈을 홉떴다.

부러져서 뱅글뱅글 날아가는 송곳니 한쪽. 분명 자신의 송곳니였다. 삽시간에 받은 충격 때문에 다리가 풀려서 영덕대게 스텝을 밟는 와중에도 그것만은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어째서? 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으려 노력했다.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분명, 성공적으로 덮쳤다고 생각했는데.’

실패했다.

사냥감의 목덜미를 깨물기 직전이었다. 섬뜩하고도 강맹한 기세의 돌풍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안면을 후려쳤다. 무엇이? 그래, 저 사냥감의 커다란 주먹이 내 얼굴에 쾅 하고.

‘날 쳤다고? 고작 인간 주제에?’

어이가 없었다.

……터턱!

상황을 깨달은 블라도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넘어지기 직전에 균형을 회복했다. 어처구니가 가출하며 생겨난 마음속의 공백지에 분노의 감정을 가득 채웠다. 감히. 인간 따위가. 내 송곳니를.

‘죽인다!’

이번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아무리 주군의 엄명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냥감을 죽이지 말고 변이증에 시달릴 정도로만 살려두라는 신신당부가 있었다지만, 이건 경우가 달랐다.

‘날 쳤어. 그러니 이제부터 이건 사냥이 아니다. 전투다. 죽인다! 반드시!’

사냥감이 아닌 전투 대상.

그러니 주군의 명을 따르지 않아도 되리라. 내 송곳니를 부러뜨린 치욕을 백 배, 천 배의 고통으로 갚아주리라.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신세로 만들어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리라!

……라는 다짐은 블라도의 희망사항으로 끝나고 말았다.

콰직!

“……!”

또다시 울리는 골통.

흔들린 우정, 아니, 밤하늘의 별빛.

‘어?’

블라도는 저도 모르게 다리가 완전히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쪽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는 거한의 실루엣이 달그림자 사이로 엇비쳤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눈길. 그러니까, 도마 위의 생선을 바라보는 듯한 무심한 눈초리.

……오싹!

어째서 소름이 돋는 걸까.

나는 뱀파이어인데.

저쪽은 사냥감인 인간에 불과한데.

그런데 왜, 어떻게?

그는 곧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만 묻고 싶은데.”

츠스스스스!

거한의 손에 들린 각목에서 찬란한 섬광이 피어났다. 검붉은 태양의 일부가 지상에 강림한 것만 같은 압도감. 죽음의 근원을 긁어내어 눈앞에 보여주는 듯한 초월적 섬뜩함.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저건…… 오러소드?’

언젠가 문헌에서 본 적이 있다. 검에서 찬란한 섬광을 피워내는 이들이 있노라고. 그저 한순간의 검기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라고. 그 오러소드의 빛을 밝힐 수 있는 이들을, 사람들은 ‘소드마스터’라 부른다고.

……꿀꺽.

그럼 설마.

내가 소드마스터를 건드렸다고?

‘소드마스터가 왜…… 여기서 나와?’

블라도는 억울해졌다. 그저 평소처럼 사냥을 했을 뿐인데 하필이면 상대가 소드마스터라니. 심지어 검도 아닌, 한낱 나무토막으로 오러소드를 생성하는 괴물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잖아!’

만약 이게 소설이라면 글쓴이의 멱살을 잡아다가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다. 어째서 저런 괴물이 거지 같은 행색으로 골목길을 배회하고 있던 거냐고. 이게 말이 되느냐고. 개연성은 어디 개밥그릇에 던져넣었느냐고. 진심으로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당장 오러소드를 이글이글 불태우는 소드마스터가 저벅저벅 다가왔으니까. 더욱 이해 불가능한 질문을 던져왔으니까.

“리한 군의관을 본 적이 있나?”

“……예?”

저절로 공손(?)하게 나오는 반문.

심지어 블라도는 주저앉은 자세마저 다소곳해졌다. 즉, 그는 무의식중에 무릎을 꿇고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잘 못 들었습니다?”

자고로 최고의 예절 주입기는 물리력! 그러한 동서고금의 진리(?)를 블라도가 체감하는 사이, 거구의 소드마스터, 쟈빌론이 물었다.

“리한 군의관을 아느냐고…… 물었는데…….”

“리한 군의관……이요?”

“그래. 혹시 아나?”

“어, 그건…….”

“모르면 어쩔 수 없지.”

스윽.

쟈빌론의 각목이 치켜 들렸다. 이글거리는 오러소드가 섬뜩한 빛을 토해냈다. 그걸 본 순간 블라도는 다급해져서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압니다!”

“……정말?”

“예!”

“어떻게?”

갸웃.

쟈빌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편으로 그는 기쁨을 느꼈다. 황도 마젠타에 도착한 이래로 이때껏 수많은 이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던 그였다. 리한 군의관을 아느냐고. 불행히도 긍정적인 대답을 한 번도 받지 못하였다.

하여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말로 리한 군의관을…… 알아?”

“예, 예! 정말입니다! 압니다!”

블라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모른다. 리한인지 리한나인지 처음 듣는다. 그래도 지금은 살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소드마스터는 무서우니까. 당장 죽을 판이니까.

그는 재빠르게 입을 놀렸다.

“사실은 그가 제 이웃입니다!”

“이웃……이라고?”

“예, 예! 리한 군의관 말씀이시죠? 옆집에 삽니다! 제 집에 딱 붙어 있는 초록색 지붕 집이요!”

“정말로……?”

“예, 정말입니다. 진짜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좁을 줄이야. 제가 이렇듯 당신을 만난 것이 어쩌면 운명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하늘이 제게 이런 기회를 베풀어 당신을 리한 군의관에게 안내할 수 있게 된 것인지도요?”

“그, 그런…… 가?”

“아무렴요!”

됐다.

통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앞의 이 소드마스터, 뭔가 정신이 온전하지가 않은 것 같다. 사고체계가 망가진 사람 같달까. 혹은 머리를 다쳐서 바보가 된 것 같달까. 어쨌건 순진하게도 이쪽의 말을 넙죽 믿는 모양새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착각이었다.

“하지만…… 넌 날 덮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예에?”

“조금…… 전에.”

“어, 그건…….”

“내 목을 깨물……려고…….”

“아닙니다!”

“……아니야?”

“예. 제가 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생사람 목을 어떻게 깨물…… 어휴, 소름 돋아. 그런 야만스러운 말씀은 하지도 마시죠.”

“어? 그, 그래?”

“아무렴요. 제가 당신의 목을 깨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까는 왜…….”

“저는 그저 당신께 가까이 다가가서 귓속말을 건네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귓속말을?”

“예에. 리한 군의관을 찾고 계셨잖아요?”

“그, 그랬지.”

“그런데 리한 군의관이 어디어디 산다고 크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 않겠습니까?”

“어째서……?”

“리한 군의관에게도 개인의 존엄이 있으니까요. 누군가가 들을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집 주소가 알려지고 퍼뜨려지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건 민폐지요. 저도 리한 군의관의 이웃인데, 그런 짓을 함부로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 그, 듣고 보니…… 그렇군.”

“그렇지요?”

“그래…….”

쟈빌론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뒤엉킨 의식과 이성 때문에 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상대가 하는 말이 복잡해서 그럴듯하게 들리긴 했다.

덕분에 블라도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니 말입니다. 저를 더 때리지만 않아 주시면…… 제가 당신을 리한 군의관에게 안내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러면…… 좋아…….”

스르륵.

오러소드가 불 꺼지듯 사라졌다.

쟈빌론은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기뻤다. 드디어 만날 수 있다. 그리웠다. 리한 군의관을 나만의 주치의로 내 곁에 둘 수 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못하게 확실히 잡아둬야지. 평생 내 머리를 쓰다듬게 해야지. 그래야 지옥 같은 두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어서…… 안내해 줘…….”

“아, 예. 그런데 제가 아직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아서…….”

“어서…….”

“그, 크읏! 힘내겠습니다! 으으읏, 윽! 돼, 됐습니다!”

“좋아…… 훌륭해…….”

“예, 예! 그럼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고맙군…….”

“아유, 별말씀을요!”

블라도도 웃었다. 진심으로 기뻤다. 이렇게도 살아날 수 있구나. 안심이 되었다. 이제는 이 괴상한 소드마스터를 아지트로 유인할 수 있겠다. 그곳에서라면 이놈을 확실히 제압할 수 있겠지. 주군이 계시니까. 주군께 이놈의 피를 바쳐야지. 그래야 내 지위도 더욱 올라갈 테니.

‘……크크큭,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블라도는 살벌한 속내를 숨기며 더욱 친절하고 공손하게 쟈빌론을 안내했다. 물론 자신 일당의 아지트를 향해서였다.

그는 확신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주군의 힘을 감당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우리 주군은 강력하시니까. 위대하시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소드마스터 하나쯤은 순식간에 찜쪄먹으실 테니까.

물론 블라도는 꿈에조차 몰랐다.

이쪽의 계략에 걸려든 쟈빌론. 주군의 먹잇감으로 바쳐지기 위해 아지트로 유인당하는 소드마스터. 몰락한 앙부아즈의 반란자.

이 거구의 사내가 내전에서 패배한 이후로 얼마나 혹독한 시련의 나날을 견디었는지. 가혹한 마법 실험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어떤 지옥을 버텨내었는지. 그리하여 지금은…… 일반적인 소드마스터의 상식을 가볍게 찢어 버릴 초월적 괴물이 되어 있다는 사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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