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예절교육은 물리치료가 제맛 (2)
‘리한 군의관은…… 어디에 있는 걸까.’
만나고 싶다.
사로잡고 싶다.
영원히 도망치지 못하도록 곁에 두고 싶다. 평생 주치의로 잡아두어서 내 머리만 쓰다듬게 만들고 싶다.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두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조금은 웃으며 살 수 있을 듯하니까. 그러니까 제발…….
‘리한 군의관, 내 앞에 나타나 줘.’
지금껏 얼마나 되뇌었던가. 하지만 그런 기적은 일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애타는 애원과 갈망은 단호한 침묵과 냉대로 돌아왔다. 길에서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들을 수 있는 답이라고는 무시, 혹은 ‘모르는데요’라는 건조한 대꾸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가슴속에 희망이 피어났다. 더는 침묵이나 부정적인 대답을 듣지 않을 수 있을 듯했다. 지금 자신을 안내하는 이가 무려 리한 군의관의 옆집에 산다고 했으니까!
‘리한 군의관은…… 어떤 곳에 살고 있을까.’
두근두근.
쟈빌론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서 걸었다. 그동안 주위의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시가지의 대로에서 외곽 지대의 인적 없는 골목으로. 오가는 이라고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와 생쥐가 전부인 삭막한 곳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지?”
빨리 도착하면 좋겠다.
어서 리한 군의관을 보고 싶다.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보채듯이 물었다. 안내를 하던 이가 난처한 듯이 웃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예? 아,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그런가…….”
“예, 저쪽 골목 모퉁이를 돌면 되니까요.”
“그럼 다 온 것이로군?”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그렇지. 그거지.”
쟈빌론은 콧김을 풍 뿜어냈다.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리한 군의관을 본 지가 너무나 오래되었다. 그래서 한편으로 걱정도 들었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리한 군의관이 자신을 못 알아보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었다.
그사이 자신은 나쁜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이상한 실험을 많이 당했는데. 괴롭힘도 많이 당했는데. 그래서 리한 군의관이 이쪽을 기억 못하면 어쩌지.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할까.
걱정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안내인이 웃으며 문을 열었다.
“이쪽입니다.”
끼이익…….
낡은 저택이었다. 열린 문 안쪽으로 관리가 덜 된 아담한 정원이 보였다. 정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보였다. 숫자는 열하나. 다들 인상이 창백하고 송곳니가 유독 뾰족한 자들이었다.
“…….”
이 안내인, 식구가 많구나.
나처럼 외롭거나 하진 않겠어.
‘부럽다…….’
그런데 어째서 다들 이쪽을 쳐다보는 눈길마저 뾰족한 걸까. 날 경계하는 걸까. 아니면 유달리 수줍음이 많은 가족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쟈빌론은 안내인을 따라 정원을 통과하여 건물 본채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는 어두웠다.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진 탓이었다. 햇볕을 싫어하는 건가. 피부 관리에 관심이 많은 가족이구나. 난 햇볕이 좋던데. 쬐고 있으면 따뜻하고. 기분이 좋고.
“그나저나, 리한 군의관은?”
“아, 제가 미리 연락을 넣었습니다. 곧 올 겁니다.”
“그래?”
“예.”
“옆집이라면서.”
“그렇지요.”
“그런데 왜 옆집으로 찾아가질 않고?”
“…….”
쟈빌론은 문득 떠오르는 의문을 건넸다. 안내인이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허겁지겁 침묵을 옆으로 치워내듯 대답했다.
“……아, 집이 많이 어질러져 있어서, 당장 손님을 받기에는 부담스럽다고 했습니다.”
“리한 군의관이?”
“예에, 예. 리한 군의관이요.”
“정말?”
“아무렴요.”
뱀파이어 블라도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방금은 조금 섬뜩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듯한 이 인간, 까닭은 모르겠지만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듯해서 조금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무난하게 아지트로 유인해냈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방금 받은 질문은 의외로 날카로웠다.
‘끝까지 조심해야겠어.’
자신의 주군이 이놈을 처리하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블라도는 새삼 긴장하며 열심히 변명을 입에 담았다.
“보통 아무런 연락 없이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면 좀 부담스러워하는 게 일반적이니까요. 아마 리한 군의관도 그런 것 같았습니다. 대신 제가 리한 군의관에게 특별히 일러둔 말이 있긴 합니다.”
“특별히? 무슨 말을?”
“아주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셨으니, 다른 바쁜 일이 있어도 잠시 미뤄두고 얼른 오라고 말이지요.”
“그, 그래……?”
“예.”
“그거 고맙군. 고마워. 진심으로.”
“아, 예에. 하하하…….”
다행이다.
잘 속여넘겼다.
블라도는 목덜미에 배어나는 진땀을 몰래 훔쳐냈다.
“이쪽으로 올라오시죠. 2층의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그래, 어서 가지.”
쟈빌론의 가슴이 더욱 뛰었다. 이게 곧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2층에 올라왔는데 리한 군의관이 보이지 않는 걸까. 또 어째서 2층에 있던 저 사람은 저런 눈길로 이쪽을 쳐다보는 걸까.
예를 들자면, 세수를 하다가 바퀴벌레를 발견한 것 같은 눈빛 말이다.
“이건 뭐지.”
뱀파이어들의 아지트, 그들의 주군인 흑마법사 아난샤는 내심 경악했다. 처음에는 멍청한 권속 하나가 멋대로 외부인을 아지트에 데려온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보니 아니었다. 아지트에 온 인간의 얼굴이 낯익은 탓이었다.
‘저건…… 황도에 처음 당도하였을 때 마주쳤던 미친놈 같은데?’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당시에 리, 무슨 군의관인지 뭔지를 아느냐고 물었던 거한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거한에게서 노골적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무슨 이런.’
그는 감탄했다.
보통이 아니다.
정상이 아니다.
일반적인 사람에게서는 느껴본 적이 없는 종류의 위세였다. 마치 목줄이 풀린 괴물과 맞닥뜨린 듯한 느낌이었다. 피부가 저릿해졌다. 만만한 먹잇감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
아난샤는 자신의 권속을 쳐다보았다. 잔뜩 위축되어 있는 권속을 보자마자 자초지종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감당이 안 되는 괴물을 사냥하려다가 죽기 싫으니, 아지트로 꾀어온 것이겠지. 무능한 놈 같으니라고.
하지만 지금은 권속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리한 군의관은…… 언제 오지?”
거한, 쟈빌론은 연신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물었다. 기대감과 설렘 때문에 마나가 들썩거리는 걸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초조했다. 어째서 온다는 리한 군의관은 소식이 없는 걸까. 옆집이라면 금방 올 텐데. 그런데…….
“온다는 리한 군의관은 안 보이고. 혹시 날 속인 건 아니겠지?”
그의 눈빛이 불안정해졌다.
아난샤는 의자에 앉은 채 꼬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어느새 그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결심했다. 상대의 마나가 심상치 않든 말든 상관없다. 이미 아지트에 들어왔으니, 온전하게 내보낼 수는 없게 됐으니까.
그러니 차라리…….
스윽.
아난샤가 한 손을 들며 우아하게 웃었다.
“그럴 리가요. 내 거처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또한, 내 먹잇감이 되실 것을 미리 축하합니다, 방대한 마나를 지닌 탐스러운 이여.
그가 되뇌는 순간.
치켜든 손에서 검붉은 마력이 방출되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12갈래의 흑마법사 지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베일에 감싸여 있던 혈염의 권능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보아라, 이것이 바로 부항의 권능이다.’
같은 시각, 별궁.
라키엘은 흐뭇함이 쑴펑쑴펑 돋아나는 눈길을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야물딱지게 떠오른 메시지창을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딩동!
[당신은 성물의 과감한 활용과 부항 요법의 응용으로 환자 : 발렌티노의 뱀파이어 변이증을 성공적으로 진료하였습니다. 그는 심각한 변이성 질환에서 벗어났으며, 적절한 안정을 취할 시 별다른 후유증 없이 완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료비 청구 (Lv.2) 스킬이 발동됩니다.]
역시나 환자를 치료하는 보람은 마지막에야 팍 하고 온다. 한국에 있던 시절에는 수납되는 진료비, 여기서는 쌓여가는 보너스 수명으로!
[환자 : 발렌티노는 당신의 치료를 통해 총 41년 9개월의 기대수명 연장 혜택을 받았습니다. 이에 당신은 41년 9개월의 1/1950에 해당하는 보너스 수명을 정산받습니다.]
[7.7 일의 보너스 수명이 계산되었습니다.]
[정산되는 수명의 최소 단위는 1일입니다.]
[정산되는 보너스 수명이 반올림 처리됩니다.]
[총 8일의 보너스 수명이 정산됩니다.]
[당신의 예상 기대수명 : 1,061일]
‘……좋았어.’
가뜩이나 크라노스에서 왕창 쌓아둔 보너스 수명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뱀파이어 변이증을 치료하며 쌓는 수명이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아주 만수무강을 해줄 테다!’
이미 부귀영화 라이프가 확정된 몸이었다. 거기에 딱 하나 아쉬운 수명까지 잔치국수 면발처럼 길이길이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 로또 1등과 강남 초역세권 인기 아파트 청약 당첨이 줄줄이 이어지는 겹경사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기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라키엘은 흐뭇한 심정을 침착하게 갈무리하며 환자, 발렌티노의 상태부터 살폈다.
“어때, 정신이 좀 들어?”
“아…… 전하?”
“이제 사람으로 돌아왔구만?”
“…….”
발렌티노는 대답하지 못했다. 일순간, 그동안의 흐릿했던 기억들이 또렷하게 좌라락 정리되며 머릿속으로 훅 몰려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약혼녀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밤거리. 낯선 행색의 사람. 깨물리던 목덜미. 몽롱하던 동안의 기억들. 그리고 쑥과 생마늘에 시달려야 했던 나날들까지…….
“……우웁?”
그동안 차곡차곡 적립(?)했던 구역질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다음 순간, 그는 황태자 앞이고 뭐고 없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입을 틀어막고서, 식도를 힘차게 두드리는 마늘향의 역류를 느끼며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라키엘이 빵긋 웃었다.
“허허, 팔팔하게 뛰는 걸 보니 정상이구만.”
경혈 스캐닝으로 다 보였다.
발렌티노의 신체를 잠식하고 있던 뱀파이어 변이증. 그로 말미암아 흐트러져 있던 기혈의 흐름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급하게 뛰는 뒷모습, 구토의 기미를 보이며 꿀렁거리는 위장의 움직임을 보니 확실했다.
‘됐다. 이젠 할 수 있겠어.’
확신이 피어났다. 성물을 활용한 부항 요법, 효과가 확실하다. 하니 다른 변이증 환자들도 똑같이 치료하면 될 것이다.
“그렇겠지요, 대주교님?”
“허허허……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주교도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게 되네.
그리고 한편, 같은 시각.
황도 시가지 외곽의 낡은 대저택.
그곳에서는 어느 거구의 소드마스터와 혈염의 흑마법사가 고래 같은 격돌로 대폭발을 일으키며 애꿎은 일반 뱀파이어들의 등짝을 새우꽁 봉다리처럼 팡팡 터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