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예절교육은 물리치료가 제맛 (3)
뽀옵!
“……흡!”
황도 중심부의 별궁 한의원.
이곳에서는 성물 반쪽이 어느 뱀파이어 변이증 환자의 뱃가죽에 촵 달라붙어 효과 확실한 부항 자국을 야물딱지게 새기고 있었다.
“자아, 움직이지 마시고.”
라키엘은 정신을 집중하며 아스라한 심법을 발동했다.
키이이잉-!
포효하듯 역회전하는 마나써클. 이내 생성되는 강력한 흡입력. 뱃가죽을 통과해서 성물 부항컵(?) 안쪽으로 알차게 고여드는 환자의 혈액. 변이증에 오염된 피가 성물과 만나며 정화되었다.
‘좋아.’
역시나 발렌티노를 치료했던 때와 똑같은 반응이다. 효과가 있다. 라키엘은 새삼스러운 확신을 느끼며 만족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의 피로감 또한 느꼈다.
‘이거, 내가 일일이 아스라한 심법을 사용해야 하는 점이 조금 빡쎄네.’
효과는 좋은데, 대신 좀 피곤했다. 게다가 앞으로의 일정도 조금 막막했다. 당장 별궁 한의원에 격리되어 입원 중인 변이증 환자들? 백 단위가 넘어가는 터였다. 한데 그들만 전부 치료한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닐 듯해서 더 막막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실시간으로 뱀파이어에게 물리는 사람이 계속 생겨나고 있을 거니까. 이건 막아도 막아도 끝이 없는 건데.’
물론 자신에겐 손해가 없다. 밀려오는 변이증 환자? 계속 이렇게 부항으로 치료하면 된다. 그만큼 보너스 수명을 거듭 얻을 테니까. 오히려 이득이다.
‘짧게만 본다면 말이지…….’
라키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생각을 조금 더 해보면 조만간 생길 문제점을 예상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이 부항 요법으로 환자를 확실하게 치료할 수는 있지만…… 환자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아지면 그때부터는 감당이 안 될 거야. 부항 요법 순서를 기다리는 사이에 변이증이 지나치게 진행되면서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가 생길 거니까.’
웅녀 테라피로 변이증의 진행을 늦추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대기 환자의 숫자가 몇백이 아니라 수천, 수만이 되어 버리면? 그땐 감당이 안 된다. 대기표 뽑고 기다리다가 죽거나, 완전히 뱀파이어로 변이되는 환자가 줄줄이 나올 거다.
그러면 끝이다.
별궁 한의원의 명성에도 금이 갈 것이다.
‘나한테 와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별수 없이 죽었다는 소문이 왕창 퍼질 거니까. 특히나 별궁 한의원을 믿고 찾아왔다가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더 널리 퍼뜨리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기대를 품었다가 실망한 사람들이 제일 반감을 가질 것이다. 사람의 심리가 그런 거니까. 팬이었다가 안티가 된 사람이 제일 무서운 법이니까.
‘그러니 변이증 환자가 더 생겨나는 걸 막아야 해.’
치료는 질환이 생겨난 후의 대처법일 뿐.
애초부터 질환이 생겨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그게 이번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법이다.
그러자면…….
‘사람들을 물고 다니는 그 모기 새ㄲ…… 아니, 뱀파이어를 때려잡아야지.’
한 놈인지, 일당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건 박멸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뱀파이어의 송곳니를 챙기면 더 이득일 것이다. 드래곤의 충수염을 수술해 주며 챙긴 맹장의 독성을 중화할 수 있을 테니까. 엄청난 약재로 써먹을 수 있을 거니까.
‘슬슬 뱀파이어 방역법을 생각해봐야겠어. 아, 이럴 때 그 드래곤이 도움을 주면 참 좋을 텐데.’
라키엘은 문득, 등갑룡 포르티스를 떠올렸다. 현재 포르티스는 충수염 대장내시경 수술 이후의 몸조리를 위해 입원해 있는 중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체의 모습으로 별궁 정원 한쪽 구역을 차지한 채 쿨쿨 잠들어 있는 중이었다.
단순한 낮잠?
아니었다.
‘포르티스의 말을 따르자면…… 원래 드래곤의 신체는 마나의 조화가 완벽한 상태라고 했지. 그런데 자신은 수술을 받으며 맹장이 제거가 됐고, 그렇게 신체 장기의 일부가 사라진 까닭에 마나의 조화가 상당히 깨졌다고 했어.’
그 조화를 회복하기 위한 잠이라고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고, 1~2개월만 있으면 눈을 뜰 거라 했던가. 대신 그 전에는 절대로 잠을 깨우면 안 된다고도 하였던가.
“…….”
쯧.
필요할 때에 도움도 못 주는 드래곤 환자 따위라니.
‘그쪽 도움을 받는 건 기대하지 말자.’
어쨌건, 황도에서 여름밤 모기처럼 설치고 있는 뱀파이어 방역법은 자력으로 생각하고 실천을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전하! 큰일이 났습니다!”
벌컥!
다급한 외침과 함께 진료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라키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진료 중에 이렇듯 경우 없이 소란을 피우는 걸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문을 열고 들어온 별궁 근위대장, 프란델 경의 이어진 보고에 팥빙수 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진료 중에 송구합니다! 황도 시가지 외곽에서 원인 불명의 대폭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뭐?”
대폭발?
원인 불명의?
“사상자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황도 의용 소방대가 소식을 접하자마자 출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알겠어. 응급환자가 실려 올 거란 소리지?”
“예, 전하. 아마도…….”
“제법 많을 수도 있겠지.”
라키엘은 혀를 찼다.
갑자기 원인 불명의 폭발이라니.
그는 진행 중이던 부항 요법을 꼼꼼하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조만간 몰려들 응급환자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응급실 병상을 최대한, 싹 비워둬. 간호사도 입원 병동 필수 인력만 빼고 전부 호출하고. 비번도 예외 없어. 의사도 마찬가지야. 각 과의 의사들 일반 진료는 전부 연기시키도록. 당장.”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별궁 한의원이 분주해졌다.
물론 라키엘도,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모두 까맣게 몰랐다. 오늘 별안간 터진 원인 불명의 폭발 사고. 그로 말미암아 몰려들 환자들이 어떤 이들일지를 말이다.
♣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어.’
……꿀꺽.
혈염의 흑마법 지파.
그 유일한 후계자 아난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눈앞에 있는 존재를. 어째서? 저 존재와 방금 정면으로 격돌한 여파 때문에. 그 여파가 준 정신적 충격 때문이었다.
‘소드마스터가…… 원래 이렇게까지 강했나?’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확신할 수 있다.
소드마스터라면 이미 개인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13년 전 로사코타 지방. 소속 없이 산에서 검을 단련하던 소드마스터를 죽인 적이 있어. 그때도 쉽진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정말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존재는 과거에 죽인 소드마스터와 아예 차원부터가 달랐다. 13년 전에 죽은 놈은 맨손으로 오러 소드를 뽑아내지는 못했으니까.
그런데 저놈은 그게 된다.
아니, 애초부터…… 그게 가능한가?
하지만 아난샤에게 더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방금 그를 경악시킨 앙부아즈의 몰락한 소드마스터, 쟈빌론이 두 손을 이글거리며 앞으로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네놈…… 날 속였군?”
저벅…… 저거걱…….
천천히 내딛는 걸음. 온통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그 아래에 밟혔다.
이미 아난샤가 아지트로 삼던 저택은 사라졌다. 평범하게 지은 건축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격돌의 충격파였으니까. 단 한 번의 폭발에 저택의 절반이 먼지가 되어 날아갔고, 나머지 절반은 무너졌다. 그리고 수십에 달하는 뱀파이어 권속들이 모조리 깔렸다.
“……크아악.”
“사, 살려…… 누가 좀…….”
“꺼내…… 줘어…….”
“……주군!”
애타는 신음과 비명, 애걸. 타오르는 불길을 더욱 불길하게 반사하는 깨진 유리조각들. 그 사이를 쟈빌론이 천천히 가로질렀다. 기묘하게 광기가 서린 그의 눈길이 아난샤의 안면에 꽂혔다.
“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쟈빌론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최근과 달랐다. 어찌 보면 그 모습은, 앙부아즈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야심차던 시절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실제로 쟈빌론의 머릿속도 근래 드물게 맑아진 상태였다.
‘난……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혼란을 느꼈다.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은 앙부아즈의 마법 실험실이었다. 내전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 실험체로 전락했다. 끔찍한 실험실. 그곳에서 정신 마법의 실험을 위한 구속구가 머리에 씌워지던 광경이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그런데 이곳은 어디인가.
난 왜 이런 꼴인가.
저놈은 또 누구인가.
‘일단 반쯤 죽여두면 뭐라도 들을 수 있겠지.’
쟈빌론의 눈빛에 서늘한 살기가 깃들었다. 덕분에 아난샤는 더욱 긴장했다.
‘…….’
확실히 저놈,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왜 그걸 알 수 있느냐고. 간단하다. 아까 첫 격돌을 했을 때, 자신이 저놈의 정신을 흐트러뜨리는 마법을 썼으니까.
‘뇌로 올라가는 동맥의 혈액 흐름을 온통 뒤흔들었는데. 그러니 뇌혈류에 이상이 생기고, 심각한 정신 착란이 와야 하는데…….’
……그런데 어째서 저놈은,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진 거 같지?
‘설마 내가 괴물을 건드린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상황 또한 나쁘다.
아지트가 날아가 버렸다. 너무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외부에서 충돌을 감지하지 못하도록 결계를 쳐두었는데, 그 결계마저도 단숨에 찢어져 버렸다. 덕분에 황도의 모든 사람들이 이쪽의 충돌을 감지할 수 있게 됐다.
아마 지금쯤이면 황도의 수비대가 달려오고 있겠지.
“…….”
계획이 어그러졌다. 여기서 미적거리다간 포위될 것이다. 판단을 내린 아난샤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쟈빌론을 쳐다보았다.
“그쪽, 이름은?”
“나?”
“그래. 내 새로운 권속으로 삼기 전에 이름을 알고 싶은데.”
이미 망쳐 버린 계획. 수많은 권속이 건물에 깔려 쓸모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괜찮다. 만약 저놈을 지배하여 권속으로 부리게 된다면, 오늘 입은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을 것이다.
아난샤는 내심 회심의 술법을 준비하며 물었다.
한데 그때였다.
쟈빌론의 서늘하게 번득이던 눈빛이 흐릿해졌다. 잔혹하게 내뱉던 말투도 잠시, 다시 예전처럼 어눌해졌다.
“리한…… 군의관?”
“…….”
“데려온다며. 옆집이라며.”
“그건…….”
“혹시 리한 군의관도 이렇게 속여서 때리고 납치한 거야? 그런 건가?”
“뭐?”
“용서 못 해!”
“…….”
x발.
아난샤는 울고 싶어졌다.
뇌혈류 저주 마법의 부작용(?)으로 잠깐 제정신이 돌아왔던 쟈빌론이 다시금 정신줄을 놓고선, 건물 잔해를 박찼다.
투콱-!
쟈빌론의 양손에 살벌한 오러 소드가 생성되었다. 검? 필요 없었다. 인간의 뼈는 단련하기에 따라서 검만큼 단단해질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오러 소드의 토대로 사용될 수 있으니까.
……콰학!
“크읏!”
가까스로 마법진을 생성하여 오러 소드를 막아낸 아난샤. 하지만 반탄력까지 해소할 수는 없었다. 막대한 충격이 그를 수십 미터 밖으로 날려 보냈다.
쟈빌론도 즉시 땅을 박차며 그를 몰아쳤다.
“리한 군의관! 내가 구해줄게!”
“……이런 미친!”
콰앙-!
더욱 강맹한 충격이 아난샤의 마법진을 후려쳤다. 그의 몸이 더욱 멀리 날려갔다. 하지만 그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쟈빌론의 집요한 추격과 맹공이 이어졌다.
콰콱! 투컹! 콰직!
“……!”
날려가고.
추격하고.
부딪치고.
격돌할 때마다 주위의 풍경이 바뀌었다. 황도의 외곽 시가지, 더 외곽의 빈민가, 상단의 물류창고 지대, 성벽을 지나, 밭과 양떼가 보이는 들판, 인적 드문 야산까지.
‘젠장……!’
그렇게, 아난샤와 쟈빌론의 모습이 아지트에서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붕괴한 저택에는 그의 권속 뱀파이어들만이 남겨졌다. 대다수가 건물 잔해에 깔린 채 신음하는 모습으로. 아무도 돌보아 주는 이 없이 애처롭게.
하지만 그들에게도 곧 희망(?)이 찾아왔다. 의문의 폭발 사고 소식을 접하고 부리나케 달려온 시민들의 영웅, 황도 의용 소방대원들이었다.
“……이런! 많이 다쳤어! 어서 의사에게로!”
제법 어둑해진 저녁이었다. 소방대원들은 일반인에 가까웠다. 매몰된 뱀파이어 권속들도 엉망진창 흙먼지투성이인 상태였다.
따라서 건물 잔해에 깔려 신음하는 뱀파이어 권속들의 정체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소방대원들의 눈에는 그저 비극적인 사고에 휘말린 응급환자로만 보였다.
“어서 옮겨! 부목과 들것 가져오고! 환자들을 의사에게 보낼 수레도! 어서!”
“하지만 대장님? 지금 시간이…… 너무 늦은 저녁이라 진료 준비가 된 의사들을 수소문하기가…….”
“멍청한! 이런 때를 대비하여 황태자 전하께서 별궁 한의원에 응급실을 개설하셨다는 사실을 잊었나?”
“……아하!”
“다들 응급실로! 별궁 한의원으로 옮겨! 어서!”
“알겠습니다!”
소방대가 구조 작업에 열을 올렸다.
그렇게 졸지에, 아난샤의 권속 뱀파이어 수십 명은, 사주팔자와 오늘의 운세란에도 없던 별궁 한의원 응급실로의 로켓배송(?)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