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263화 (263/468)

263화. 별궁 한의원의 이빨요정 (1)

“옮겨! 어서, 빨리!”

“…….”

와글와글.

시끌시끌.

청각이 온통 유린당하는 느낌. 혼란스럽고 아픈 감각. 전신 어디 한 군데도 빠짐없이 알차고 야물딱지게 뻐근한 기분. 아니, 부러진 것 같은 예감.

뱀파이어 블라도는 온몸이 아팠다. 정신이 온통 몽롱한 와중에도 통증만은 너무나 또렷했다. 그래서 억울했다.

차라리 내가 인간이었으면 이럴 땐 기절했을 텐데. 뱀파이어라서. 인간보다 튼튼해서. 그런데 그 튼튼함이 딱 애매한 정도라서 다칠 건 죄다 다친 채로 이렇게 기절도 못 하고 아픔을 느껴야 하다니.

‘내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건물 잔해에 깔리지도 않았을 텐데.’

블라도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흐릿한 눈길을 들었다. 자신을 들것으로 옮기느라 바쁜 사람들이 보였다. 황도 의용 소방대라고 했나. 한낱 사냥감, 인간 주제에 자신을 구해주겠다며 저렇듯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이라니.

실소가 나왔다.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이토록 뭉클한 기분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것이 언제였을까. 저도 모르게 감동으로 눈시울이 젖는 마음을 품어본 적은 그 언제였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적어도 뱀파이어로 지내는 동안에는 없었던 것 같다. 인간의 굴레를 벗어던진 먼 과거, 주군을 만나 뱀파이어의 새 삶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감동 따위의 말랑한 감정은 버렸으니까.

한데 그런 내가 틀렸던 걸까.

‘세상은…… 아름다운 거였어.’

곤경에 빠진 타인을 스스럼없이 돕는 사람들. 아무런 대가 없이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이들. 이토록 이타적인 자들 덕분에 험난하고 거친 세상 한쪽에서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꽃 한 떨기가 피어나는 것이겠지.

블라도는 새삼스러운 감격 속에서 힘겹게 손을 들었다. 자신을 싣고 있는 들것. 그 손잡이를 들고 있던 소방대원의 땀에 젖은 손등을 간신히 건드렸다.

“고마……워요…….”

실낱같은 목소리로나마 말했다. 진심이었다. 소방대원도 이쪽의 마음을 알아준 걸까. 온통 거친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이쪽을 향해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괜찮을 겁니다. 이제 곧 응급실에 도착할 테니까요. 두려워하지 마시고, 부디 완쾌되시길 바랍니다.”

“그, 그래……요…….”

응급실.

어떤 곳일까.

그곳에선 또 어떤 따스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날 받아주고, 구해줄까. 그래. 알고 보니 인간은 이렇듯 친절하고 따스한 종족이었어. 나는 그런 인간의 굴레를 함부로 벗어던진 채 그들을 사냥해 왔던 것이고.

“……흑, 흐흑.”

내가 수십 년을 충성한 주군은 날 버렸는데…… 이들은 내가 뱀파이어라는 걸 알면서도 편견 없이, 스스럼없이 날 구해주고…….

“크흡!”

블라도는 저도 모르게 참회의 눈시울을 적셨다. 후회, 미안함, 또는 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가슴을 사무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다짐도 품었다. 이제는 인간을 사냥하지 않겠노라고. 저들을 위해 속죄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그때였다.

“여기! 응급환자입니다!”

“환자의 상태는?”

……드디어 도착한 걸까.

주위가 분주해졌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응급실은 어떤 곳일까. 나는 이곳에서 어떤 이들의 어떤 보살핌을 받게 되는 걸까.

블라도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가 시선이 마주쳤다.

“…….”

낯익은 사내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로 보이는 비쩍 마른 은발의 남자였다. 한데 은발 사내가 다가오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싹 바뀌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소방대원들의 표정과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소방대원 모두가 긴장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목소리마저 떨리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그러자 황태자라 불린 은발 사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지금이 예나 올릴 때야? 나머지 환자들은?”

“이송되어 오는 중입니다.”

“잔해에 깔린 이들에 대한 구조 작업은?”

“원활합니다. 다행히 황도 수비군의 공병대가 직접 나서 주어서 무거운 잔해를 빠르게 치울 수 있었습니다.”

“잘됐군. 그럼 이 환자는…… 어?”

황태자가 이쪽을 돌아보다가 멈칫했다. 왼쪽으로 고개를 갸웃. 이쪽의 손목을 살며시 매만졌다. 그러더니 미간을 살포시 찡그리며 말했다.

“뱀파이어네?”

“…….”

아, 네.

죄송한데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하는 걸까.

뱀파이어 블라도는 어쩐지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었다. 그리고 주위 소방대원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이들은 날 변호해 줄 거야.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편견 없이 날 구조해서 여기까지 데려와 줬…….

“……으어억?”

“배, 뱀파이어?”

“물러나!”

소방대원 모두가 샤샤샥 빛의 속도로 멀어졌다. 이쪽을 보는 눈빛에도 두려움이 배어났다. 특히나, 어느 소방대원은 자신의 손등을 연신 살피기도 했다. 마치 물린 곳이 없나를 확인하는 듯한 모습. 아까 자신을 향해 힘내라고 말해 주었던 그 소방대원이었다.

비로소 블라도는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

아, 이 인간들.

편견이 없는 게 아니었구나.

그냥 눈썰미가 없는 거였구나.

어두운 저녁이라서. 건물이 무너진 혼란스러운 환경이라서. 이쪽의 대략적인 겉모습이 인간과 거의 똑같아서. 그래서 뱀파이어인 줄을 모르고 그저 다친 사람이라 여겨서 구조를 해온 것이었구나.

‘그럼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병원에서 치료는커녕 이대로 산 채로 화형을 당하는 건 아닐까.

‘그건…… 싫어!’

블라도는 다급한 심정이 되었다. 이대로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면 도망쳐야 한다. 탈출해야 한다. 힘을 짜내야 한다. 전신 골절이 심하지만, 어떻게든 몸을 일으켜서…….

“가만히. 섣불리 움직이거나 무리하게 힘을 주면 부러진 곳들이 더 어긋날 거야.”

터억.

별안간 뻗어온 황태자의 손이 가슴을 지그시 눌러왔다. 의외로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억지로 억누르거나 위협하는 느낌이 전혀 들지가 않았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의식은 있는 것 같고.”

“…….”

“의용 소방대원 전원은 잘 듣도록. 나, 마젠타노의 황태자 라키엘 아드리아 마젠타노가 당부하노니, 그대들은 오늘 밤 발생한 붕괴 사고의 희생자들에게 어떠한 형태의 편견도 갖지 말기를 바란다.”

황태자가 소방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엄격하고도 진지한 목소리였다.

“다친 이가 뱀파이어이든, 사람이든 상관없다. 예기치 않은 사고에 휘말려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데에 있어 종족이 무슨 상관인가. 그러니 모두 데려오도록. 물론 이송 과정에서 물리지 않도록 조심은 하고. 혹여나 물리면 당장 와서 치료를 받도록 하고. 알았나?”

“……예, 예 전하!”

“명을 받듭니다!”

소방대원들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실은 잠깐 동요하고 있던 소방대원들이었다. 자신들이 허겁지겁 이송한 환자가 사람이 아닌 뱀파이어였다니. 그 사실에 크게 놀라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 까닭이었다.

하지만 때맞추어 날아든 황태자의 당부가 그들의 생각을 두들겨 일깨웠다. 반성하게 하였다. 그래. 상대가 뱀파이어이든 뭐든 다쳤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않나. 그리고 우리는 화재와 재난을 수습하며, 다친 이를 구조하고 이송하는 의용 소방대가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을 전하께서 하실 줄이야…….’

‘역시 황태자 전하……!’

‘우린 아직 멀었어.’

‘반성하고 또 반성하자.’

꾸욱, 소방대원들은 새삼스러운 반성과 깨달음 속에서 구조 활동의 의지를 다시금 활활 불태우며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뱀파이어, 블라도의 감동도 섭씨 100℃로 보글보글 타올랐다.

‘…….’

나, 이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아니야? 뱀파이어인 걸 알게 됐으면서도…… 치료를 해주는 거야? 환자로 받아주는 거야?

“……흐흑!”

“자아, 울지 마시고. 얼른 이리로. 일단 응급처치부터 합시다. 어이쿠, 많이 부러지셨네.”

“그, 그게…….”

“건물에 깔린 거죠? 쯧쯧. 많이 아프셨겠네.”

“그흑…….”

“그럼 통증부터 해결합시다. 편안히 힘 빼시고. 눈 감으시고오.”

황태자가 숨을 골랐다.

이제부터 뭘 해주려는 걸까.

이윽고 다가오는 손길. 부러진 자리들을 손바닥으로 살살 쓸어주듯 매만지는 감각. 그리고 이어지는 노랫가락.

“내 손은 약손~ 내 손은 약손~ 에헤이야↘↗”

“…….”

아, 이거 소문으로 들어본 적이 있는데. 황태자가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환자를 만져주면, 아픈 곳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던데.

블라도는 최근에 들었던 어느 소문을 문득 떠올렸다. 그리고 그 소문을 들었던 당시에 자신이 보였던 반응도 떠올렸다. 그래. 그때 나는 비웃었더랬지. 그따위 능력이 어디 있느냐고. 말도 안 된다고. 차라리 개똥을 달여서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믿겠다고.

그런데 소문이 진짜였다.

자신이 틀렸다.

아픈 곳이…… 진짜로 사라져 갔다!

“…….”

이게 무슨…….

블라도는 경이로움을 느끼며 눈을 홉떴다.

“어때요? 아직도 아프거나 불편한 곳은?”

“…….”

없습니다. 당신 덕분에요.

진심을 담아서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것은 놀라움? 아니, 그것을 한참 넘어선 경외감이며 존경심이었다.

그를 보는 황태자, 라키엘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따사롭게 맺혔다.

‘허허허.’

이 복덩이 같으니라고.

사실은 라키엘도 내심 많이 놀란 터였다. 붕괴 사고가 났다는 소식에 급히 진료 준비를 서둘렀다. 응급실로 달려왔다. 그런데 정작 실려 온 환자가…… 뱀파이어였다.

경혈 스캐닝으로 살펴보는 순간 기이함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니다. 비슷한 ‘그 무언가’이다. 하여 곧바로 진맥을 실시했다. 오장육부의 상담 기능을 활용했다. 그들의 보고 덕분에 답을 얻어냈다.

뱀파이어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두 마리 토끼를 한 큐에 잡았다는 예감이 들은 까닭이었다.

최근 뱀파이어 변이증을 퍼뜨리던 뱀파이어가 실려 왔으니 방역이 자동으로 달성될 것이라는 예감. 거기에 그토록 원했던, 드래곤 맹장의 독성을 중화할 재료인 뱀파이어 송곳니를 얻게 되었다는 확신까지.

‘게다가 어쩌면…… 이런 뱀파이어들이 더 실려 올지도 몰라.’

건물이 붕괴했다고 했다. 수많은 이들이 깔렸노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그들 중에 뱀파이어가 추가로 없을까? 아니, 어쩌면 그들 모두가 뱀파이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일부러 소방대원들의 의욕을 고취시켰다. 혹시나 현장에서 환자가 뱀파이어인 걸 깨달아 버리면 곤란해지니까. 구조가 중단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안 되니까.

‘당연히 안 되지. 뱀파이어라면……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잡아와야지!’

그래야 방역이 완성된다.

송곳니도 왕창 얻는다.

게다가 뱀파이어의 송곳니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뽑혀도 계속해서 또 자라난다고 했어. 왜냐. 송곳니야말로 뱀파이어의 생존에 가장 필수적인 신체기관이니까!’

즉, 그 결론은…….

뱀파이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송곳니가 무한 리필이라는 뜻!

무조건 치료하고 살려야 한다.

강제로라도 소생시켜야 한다.

그래야 내 이득이 커진다.

“……그러니 이제 본격적인 치료를 해봅시다.”

라키엘이 한결 따사롭게 웃으며 블라도를 치료실로 인도했다. 그때 블라도는 미리 알았어야 했다. 라키엘이 허리춤 뒤로 숨기고 있는 오른손. 그 손에 발치용 뺀찌가 야물딱지게 들려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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