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97화 (396/468)

397화. 그는 답을 알고 있다 (1)

어딜 보아도 아프다.

눈을 감아도 아프다.

치를 떨며 감은 눈꺼풀 속으로 방금까지 목도한 광경이 낙인으로 찍힌 듯 선명히 떠오른다.

변경의 백성들. 나의 영지민들. 내가 지켜야 했던 이들. 그들의 처참한 주검이 낱낱이 다가와 속삭이듯 외친다.

억울하다고.

우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이냐고.

“대체 어쩌다가 이런…….”

변경백, 알칸타르 아스라한은 치를 떨며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파발의 급보를 받고서 급히 출발했던 것이 이틀 전. 그리고 오늘 도착한 참사 현장. 이곳을 표현할 말이 있을까. 참사 현장? 아무래도 이곳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안일한 낱말일 것 같았다.

“주군, 생존자의 모습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보고하는 조사단장의 목소리도 침통함에 젖어 있었다. 어쩌면 망연자실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생존자 제로의 촌락.

아니.

한때 촌락이었던 곳.

이제 이곳엔 어떠한 생명도, 삶의 흔적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이 불타 있었다. 주민뿐만이 아니었다. 가축. 개와 양, 돼지, 닭도 모조리 나뒹굴고 있었다.

심지어 촌락과 딱히 연관도 없었을 참새나 까마귀 따위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

까마귀마저 죽어 있다라.

“조사단장.”

“예, 주군.”

“자네는 짐작이 가는 곳이 있는가.”

“……죄송합니다.”

변경백의 조카인 조사단장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변경백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곤혹스러웠다. 실은 그도 혼란스러웠다. 워낙 정상적인 모습의 현장이 아닌 까닭이었다.

“분명 산적 같은 도적 떼의 습격은 아니야. 그런 놈들의 소행이었다면 이런 무차별 살육을 벌이진 않았을 테지. 놈들에겐 사람도, 가축도 모두 돈으로 보였을 테니까.”

“그렇겠지요.”

과연 그러했다.

만약 이것이 도적 떼의 소행이었다면, 최소한 젊은 남녀와 아이는 죽이지 않고 잡아갔을 것이다. 인신매매를 통한 노예장사는 언제나 돈이 되니까.

양이나 돼지 따위의 가축도 마찬가지다.

“주군의 짐작대로 집안의 물건들에 손을 댄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혹시…… 국경 너머에서 온 놈들이 벌인 짓일까요?”

“하르미온?”

“예, 주군.”

“아니. 내 짐작에 하르미온은 아니야.”

변경백은 고개를 저었다.

하르미온.

대대로 마젠타노와 국경을 맞댄 인접국 연합의 대표. 적수가 없는 마젠타노에 그나마 대적할 수 있을 후보로 거론되는 국가. 하지만 그들은 이번 일과 연관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르미온에서 소수정예의 분견대를 조직해서 국경을 넘어왔을 수는 있겠지. 실제로 우리와 그들 사이에 그런 식으로 비공식적인 소규모 충돌이 간혹 일어나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이번 일은…… 선을 너무 많이 넘었어. 이건 지나쳐. 하르미온의 입장에서 우리 마젠타노를 상대로 이런 일을 벌여서 얻을 뚜렷한 이득도 딱히 없을 테고.”

“오히려 국경 지대 주민들의 반감과 경계만 사게 되겠지요.”

“그렇겠지. 유사시엔 언제든 점령지의 주민이 될 수 있을 사람들에게 미리 반감과 경계심을 심어서 무엇이 좋을까. 하니 놈들의 소행은 아니야.”

“하면 대체…….”

“나도 모르겠어. 모르겠군. 어쩌면 보고되지 않은 강력한 몬스터가 벌인 짓인지도.”

변경백이 곤혹스럽게 중얼거렸다.

조사단장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몬스터의 소행이라기엔 시신들이 지나치게 깨끗합니다.”

“포식의 흔적이 없었나?”

“예, 주군.”

“…….”

변경백의 눈빛이 더욱 난감해졌다.

도적 떼의 습격도 아니다.

인접국의 테러로 아니다.

몬스터의 사냥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뭘까.

이 사태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추가로 벌어질 참사를 예방할 수 있을까. 그러한 변경백의 막막함은 현장을 보다 자세히 둘러볼수록 더욱 짙어지고 말았다.

“…….”

꿀꺽.

이상했다.

살펴볼수록 더 이상했다.

주민들의 시신은 불에 타 있기는 하되, 앞으로 웅크리지 않은 자세의 시신이 더 많았다. 즉, 다른 이유로 죽은 뒤에 시체가 된 상태에서 불에 탔다는 뜻이었다.

대체로 사람이 불에 타서 죽으면 전신의 근육이 오그라드니까. 보통 상체의 전면부에 더 많은 근육이 있는 관계로 상반신이 앞으로 움츠러들게 되니까.

이상한 점은 더 있었다.

사람이나 가축과 달리 참새나 까마귀, 날벌레 따위의 시신은 불에 타지 않았다. 그것이 시사하는 점도 의미심장했다.

새와 날벌레가 시신을 파먹으러 왔다가 모종의 이유로 죽었다는 뜻이었다.

‘대체 어째서? 무슨 이유로?’

게다가 어찌하여 주위의 촌락 식물이 모조리 시들어 있단 말인가. 볼수록 괴상하고 수상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저주가 촌락을 휩쓸어 버린 듯하다는 비이성적인 짐작마저 들었다.

‘아니, 아니다.’

변경백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변경백령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서든 냉철한 판단력을 잃어선 아니 된다.

이성과 지성에 따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저주? 아니다. 그런 막연한 핑계를 방패막이로 들면 앞으로 막을 일도 못 막는다.

그때였다.

“이쪽! 뭔가가 있습니다!”

촌락을 조사하던 병사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변경백은 얼른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발견할 수 있었다.

촌락 바깥으로 이어지는 오솔길. 숲으로 통하는 길목을 따라 인상적인 흔적이 대놓고 남겨져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것은 그을린 자국이었다.

마치 엄청난 열기를 지닌 무언가가 이동한 듯한 흔적. 길 양쪽의 나무가 모조리 시들었다. 지면의 풀은 까맣게 타 버렸다.

심지어 흙바닥 일부는 고열에 녹았다가 굳었는지 유리 결정마저 보였다.

흔적은 깊은 숲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전원. 집합.”

변경백은 병사들을 빠르게 모았다. 그리고 현장 수습을 위한 20여 명의 병사만을 촌락에 남겨두고서 급속 행군을 지시하였다.

“이제부터 우리는 조사단이 아닌, 토벌군으로서 흉수를 추적한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막아야 한다.

잡아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변경백은 자신의 근거지인 변경백저를 향해 병력 증원을 명령하는 전령을 보냈다. 그리고 500의 조사단 병력과 함께 흉수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흔적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 흔적을 따르며 매일같이 죽음이 만연한 광경을 목도하여야 했다.

불타버린 갈대밭. 살아남은 것이 없는 개울과 연못. 누렇게 말라버린 침엽수림. 파괴된 마을과 널브러진 주민들의 주검. 무너진 소규모 거점 요새까지.

그렇듯 변경백과 그를 따르는 500의 조사단, 이후 합류한 3천의 증원 병력은 열흘이 지나는 사이에 몰살당한 8개의 촌락과 무너진 2개의 요새를 발견했다.

심지어 두 번째로 발견한 요새는 국경에서는 제법 중요한, 300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거점 요새였다. 그러나 역시 생존자는 없었다.

어딜 보아도 널브러진 병사들의 불탄 주검뿐. 정체 모를 가공할 열기에 녹았다가 굳은 돌벽이 끔찍한 참상을 말없이 전할 뿐.

“…….”

변경백은 참담한 시선으로 이를 갈았다.

정체불명의 흉수.

잡고 싶었다.

격멸하고 싶었다.

한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벌써 열흘째 놈을 추격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놈의 모습을 코빼기조차 볼 수가 없었다.

놈의 이동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아니었다. 이쪽의 행군 속도가 느려서였다. 열흘째 놈을 추격하는 사이에 이쪽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주군. 이대로는 무리입니다. 병사들의 상태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알고 있다.”

“절반이 넘는 병사들이 아침저녁으로 구토를 하고 있습니다. 어지럼증은 물론이고, 두통이나 이명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

변경백은 주먹을 으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내가 병사들을 이토록 나약하게 관리하였단 말인가. 어찌하여 변경백령의 강인한 병사들이 고작 열흘 남짓의 행군에 이런 추태를 보인단 말인가.

자책감이 치밀어올랐다.

그는 명령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행군 속도를 높이도록.”

“……알겠습니다.”

부관인 조사단장도 고개를 떨어뜨리며 명을 받들었다. 사실은 당장 병사들을 쉬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거의 매일 촌락과 요새가 정체불명의 흉수에게 몰살을 당하는 판국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이야.’

변경백은 이를 갈았다. 사실은 그도 최근 몸 상태가 심상치가 않았다.

부관이나 병사들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오늘 아침에도 병사들처럼 구토를 했던 그였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듯 의혹에 빠져들 때마다 멀쩡한 모습으로 죽어 있던 촌락의 날짐승들의 모습이 떠오르긴 했지만, 더 짐작이 가는 곳이 없었다.

다만 굳은 결의를 다지며 추격의 의지를 다질 뿐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리라.

나의 책무를 다하는 것.

그것만이 나의 사명이리라.

“전군!”

변경백은 갈라지려는 목청을 애써 다잡으며 이동 명령을 내렸다. 아니, 내리려 하였다. 한데 그의 명령보다 어디선가에서 날아온 외마디 외침이 한 박자 빨랐다.

“잠깐! 스톱!”

“……!”

어?

폐허가 된 요새의 성벽 위로 낭랑하게 울려 퍼진 외침.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당연했다. 황태자의 목소리였으니까.

‘어째서?’

황태자의 목소리가 여기서 들리는 걸까. 분명, 파발의 급보를 받은 날에는 변경백저에 안전하게 머물러 계시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는데. 하여 함께 출발하겠다는 황태자를 간신히 말릴 수 있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저분이 미노타우로스를 타고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돌진해 오는 모습을 여기서 목격하게 된 걸까.

“……전하?”

변경백은 황망한 심정으로 누구보다 먼저 황태자를 맞이하였다.

“전하. 전하께서 어찌 이런 곳에…….”

“어찌 이런 곳에는. 빨리 알려줘야 할 일이 있으니까 왔지.”

“예?”

“하려던 진군, 당장 멈춰. 여기 있는 병력들 전부 다 빼.”

“빼라니요? 대체 어디로 말입니까?”

“안전한 곳으로.”

“…….”

그럼 여기는 안전하지 않다는 뜻인가.

변경백은 의아한 눈초리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무지막지한 기세로 달려온 황태자. 그가 일으킨 흙먼지 뒤쪽으로 일군의 무리가 뒤늦게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저들은…….’

황태자의 직속 호위인 근위대와 특근대. 그리고, 참상을 겪은 촌락들과 요새의 수습을 위해 자신이 남겨두었던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변경백은 황태자를 향해 어째서 자신이 남겨둔 병력을 데려왔느냐 묻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그는 황태자가 방금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황태자가 현장 수습 병력을 죄다 빼서 데려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그 현장들도 위험이 남은 곳이었다는 뜻이십니까?”

“눈치챘어? 역시 이래서 그대가 마음에 든다니까.”

“하면 이곳도…….”

“마찬가지야. 여기 있는 병력, 최소 10킬로미터 밖으로 다 빼야 해. 당장.”

“…….”

황태자의 명령은 단호했다.

변경백은 굳은 눈길로 황태자를 마주 보았다.

솔직히 그는 황태자가 왜 여기까지 이토록 다급하게 달려왔는지, 어째서 이곳이 위험하다며 호들갑을 떠는지, 그 어떠한 이유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황태자를 의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지켜본 황태자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오히려 더없이 계획적인 인물이었다고. 때론 설명에 앞서 일을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의 결정이 옳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그렇기에 믿을 수 있노라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

변경백은 황태자의 닦달을 순순히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궁금하였다. 그가 물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하오나 사태의 원흉인 흉수를 추적하는 일이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우선적인 철군을 명하시는 전하의 이유를 제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 여기서 당장 병력을 다 빼야 하는 이유는…….”

빠르게 대꾸하는 라키엘.

그는 시선을 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눈앞에 떠올라 있던 검붉은 경고 메시지가 보였다.

[WARNING!]

[주위에서 고위험 수준의 방사선(radioactive ray)이 감지됩니다. 경고! 경고! 방사능 피폭(radiation exposure)을 방지하기 위하여, 즉시 방사선 차폐 대책을 마련하고 위험 지대에서 벗어나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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