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 파는 황태자-398화 (397/468)

398화. 그는 답을 알고 있다 (2)

“주군, 새 숙영지의 정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으음.”

귓가를 두드리는 익숙한 목소리.

변경백, 알칸타르 아스라한은 상념에 잠겨 있던 눈길을 들었다. 부관의 모습이 보였다. 제법 초췌한 모습. 며칠째 이어 온 강행군의 피로에 전 걸까. 아니. 아마도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신 ‘방사능’이라는 것의 영향이겠지.

부관도.

병사들도.

나 또한.

변경백은 사적으로는 조카인 부관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생 많았군.”

“별말씀을.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아니. 되었네. 오늘은 이만 쉬게.”

“예?”

부관이 눈을 끔벅거렸다.

변경백이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나 아직 할 일이 많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아, 예. 물론…….”

“내가 대신하지. 병사들의 야간 경계 상태를 점검하고, 전하의 의료 활동에 대한 지원을 감독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맞지?”

“맞긴 합니다. 하지만…….”

“되었다니까. 오늘은 쉬게. 내일부터는 쉼 없이 굴려줄 터이니.”

“……죄송합니다, 주군. 아니, 면목이 없습니다. 숙부.”

“까불지 말고.”

“예, 주군.”

부관은 군소리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이 모시는 변경백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주군은 아무런 반론을 받지 않는다. 오직 따르는 것만이 도리일 뿐.

“하면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하룻밤이나마 푹 쉬는 데에 전념하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부관이 물러났다.

변경백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살짝 메슥거리는 위장. 가끔씩 흐릿하게 느껴지는 현기증의 끝자락. 황태자 전하는 이 증상을 일컬어 이렇게 말했던가.

- 그거, 방사능 피폭 증상이야.

“…….”

황태자의 권고에 따라 무너진 요새를 벗어났다. 그것도 모자라 요새로부터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까지 나와서 새 숙영지를 꾸려야 했다.

그렇게 반나절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도 솔직히, 아직껏 모르겠다. 방사능이 무엇이고 피폭이 무슨 뜻인지.

‘사악한 중독 마법 비슷한 것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따위와 비슷한 듯했다. 자신이나 부관, 병사들이 보이던 증상으로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말이다.

‘그럼 나도 쉬고만 있을 때가 아니겠군.’

지금 이 순간에도 피폭된 병사들이 황태자 전하의 응급진료를 받고 있을 터다. 증상이 미약한 자들도 밤을 보내는 사이에 어떤 상태가 될지 모른다. 부관을 억지로 휴식의 침상에 눕혔으니, 오늘 밤 병사들을 보살피고 관리하여야 할 직접적인 책무가 자신의 어깨에 놓였다.

“후우.”

다시금 살짝 엄습하는 어지럼증.

짐짓 한숨과 함께 고개를 흔들어 각오를 다잡은 변경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아, 이렇게 시침이 끝났고. 일어날 수 있겠어?”

“아, 옙, 전하.”

“어어? 그렇다고 확 일어나진 말고. 천천히. 워워.”

“서, 성은이 망극합니다.”

“망극은 개뿔. 아프지나 말고. 다음!”

임시로 세워진 의료용 막사에서 라키엘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차례를 기다리던 다음 병사가 막사로 들어왔다.

라키엘은 능숙한 손길로 의료용 간이 침상을 팡팡 쳤다.

“누워.”

“옙, 전하.”

약간은 창백한 안색의 병사가 빛의 속도로 침상에 누웠다. 아마도 황태자를 코앞에서 직관(?)하게 된 덕분에 군기가 바짝 든 모양이었다.

라키엘은 병사의 맥을 짚었다.

딩동!

[진맥을 시작합니다.]

[스캔 중.]

[3…… 2……1……]

[진맥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래의 <종합검진표>를 확인해 주세요.]

라키엘은 진맥 결과에 주목했다.

[종합검진표]

[검진 대상 : 우고 기스타]

[종족 : 인간]

[성별 : 남자]

[연령 : 21세]

[신장 : 174.3cm]

[체중 : 66.7kg]

[혈액형 : Rh+ A]

[종합 소견 : 대체적으로 건강한 신체입니다. 다만, 최근 짧은 기간 사이에 0.9 Sv(시버트) 가량의 방사선에 피폭되었습니다. 또한, 그에 따른 급성 증상으로 일시적 복통과 메스꺼움, 피로감과 어지럼증, 남성 불임증이 감지됩니다.]

역시나.

라키엘은 미간을 찡그리며 진맥 스킬에 참여한 오장육부를 불렀다.

‘다들 상담 결과 보고해줘.’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딩동!

[당신의 오장육부가 우고의 오장육부와 상담을 나누며 진단한 결과를 보고합니다.]

[심장 : ……남성…… 불임증…… 쟤가……고자라니…… ㅜㅜ]

[허파 : 후우…….]

[대장 : 허파 형님? 담배 끊으셨던 거 아닙니까?]

[간장 : 놔둬라. 지금 같은 비극적인 참상을 목도한 순간만큼은.]

[위장 : 야, 저쪽 위장도 장난 아닌데? 메슥거린다잖아. 근데 불임증 하나에만 주목하는 게 말이 됨?]

[콩팥 : 당연히 되는 거 아님?]

[비장 : 안 그래도 인구 감소가 우려되는 시대에!]

[방광 : 그런데 저거 전부 일시적인 증상이던데? 잘 먹고 쉬고 관리하면 얼마 안 지나서 없어질 거랬음. 오버 ㄴㄴ]

[오장육부 리포트 : 전반적으로 급성 피폭 증상이 감지되는 것은 확실함. 다만, 피폭의 정도가 경미하여 세포의 자가복구 기능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범위 이내의 수준임. 걱정 노노. 추가 피폭 막으면서 잘 쉬고 관리하면 자연적으로 없어질 증상들임. 이상ㅋ]

……역시, 그런가.

“후우.”

다행이다.

검진 결과를 본 라키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눈앞의 병사도 1 시버트를 넘지 않는 피폭량을 보이고 있었다.

일시적으로는 경미한 급성 증상이 보이는 정도. 그러나 잘 관리하면 자연적인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딱 그 정도 수준.

‘서둘러서 변경백을 추격해 오길 잘했어.’

이틀, 아니, 하루만 늦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만큼 변경백을 포함한 병사들이 더 많은 피폭을 당했을 것이다.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이르렀겠지. 한의학? 아무리 전설의 명의라도 방사능 오염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으니까.

“…….”

라키엘은 문득,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변경백이 데미안에게 멀티 마나하트의 기예를 가르치고. 말도 안 되는 멀티 태스킹을 강요당하던 데미안이 연일 탄식을 내뿜고. 자신은 그걸 구경하며 종일 낄낄대고.

잠시나마 평화롭던 날이었다.

그 와중에 국경의 파발이 달려왔다. 변경백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사색이 된 채로 급보를 내밀었다. 당시 자신은 변경백과 함께 급보의 내용을 읽어볼 수 있었더랬다.

[국경 재난 발생. 원인 불명. 역병 발생을 강력히 의심 중. 다수의 촌락이 궤멸에 준하는 타격을 입고 있음. 신속한 조사 및 사태 확산 방지 요망.]

변경백은 즉각 조사대를 조직하였다. 당시 자신도 동행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하지만 변경백이 고개를 저었던가.

‘이럴 때일수록 전하께서는 안전한 곳에 머무르시어 옥체를 보중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저의 관할에 방문하신 전하께 행하여야 할 저의 의무입니다.’

……라고 대답하던 변경백의 눈빛과 태도가 어찌나 단호하던지. 게다가 자신을 말린 이는 비단 변경백만이 아니었다. 황제가 딸려준 호위 군단의 군단장도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워가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기세로 말렸다.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차라리 자신의 목을 베시라고. 아니, 끝끝내 고집을 부리며 가신다면 자신은 그날부로 독약을 삼킬 것이라고.

결국, 주위 사람들의 성화에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한 발짝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여 변경백 저택에 남았다. 그런데 계속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딘가 쌔했다. 그 쌔한 감이 정확했음을 확신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변경백과 조사단이 떠나고 사흘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국경 지대에서 달려온 두 번째 파발이 변경백 저택에 당도했다. 재난이 벌어진 현장에서 가져온 몇 가지 증거물과 함께였다.

촌락민의 것으로 보이는 주검이었다. 파발의 말에 따르면 그나마 멀쩡한 상태로 보이기에 가지고 왔노라 하였다. 주검의 상태를 낱낱이 파헤쳐 역병, 혹은 흉수의 정체를 밝혀낼 것을 희망한다 했던가.

그때였다.

촌락민의 주검으로 시선을 던지자마자 붉은 경고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더랬다.

[WARNING!]

[근거리의 특정 대상에게서 고위험 수준의 방사성 동위원소, 나트륨(Natrium)-24 가 감지됩니다. 경고! 경고! 즉시 방사성 물질로부터 거리를 두어 신체를 보호하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방사성 동위원소.

나트륨-24.

경고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원래 나트륨은 인체에 필수적인 구성요소다. 세포의 삼투압을 보존하고, 신경 내부에서 신호의 전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연히 인체에는 나트륨이 풍부하게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트륨-24는?

다르다.

모종의 이유로 인체가 중성자선에 피폭되었을 때, 인체 안에 존재하던 평범하던 나트륨이 변화하며 생기는 방사성 동위원소니까.

그 뜻은 즉…….

‘멀리 떨어져! 다들! 어서!’

외쳤더랬다.

동시에 깨달았더랬다.

국경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본질을 말이다.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고위험 수준의 방사선을 뿌리면서 활보하고 있어. 곳곳이 타오른 촌락? 아마도 임계질량을 넘긴 핵분열성 물질이 핵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뿜어내는 고열 때문일 거고.’

그러니까 간단하다.

이건 방사능 오염 사태다.

한데 변경백도, 조사단도 방사능에 대해선 무지할 것이다. 대응? 못 하겠지. 아예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할 테니까. 놔두면 다 죽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하여 자신도 급히 출발을 서둘렀다.

여전히 강력하게 만류하는 호위 군단장? 명령으로 찍어눌렀다. 자신의 뜻에 더 반한다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엄명과 함께였다.

그리고 출발했다. 앞으로 방사능 사태의 대응에 필요할 몇몇 물건들을 변경백 저택의 창고에서 잔뜩 챙기고서. 데미안과 우루스, 특근대원, 그 밖의 필요한 인력들과 함께.

다행히 변경백의 흔적을 추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워낙 대규모의 조사단인 덕분이었다. 그 뒤를 따랐다. 몇몇 촌락의 참상을 목격했다. 변경백이 그곳에 남겨둔 수습 인원도 모조리 다 합류시켰다. 남겨두면 방사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것이 뻔했으니까.

잿더미가 된 촌락에서 입을 수 있을 방사능 낙진 피해를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두건과 방풍의로 전신을 감싸고, 임시 마스크로 입을 가렸다. 고글처럼 생긴 수경으로 눈을 뒤덮었다.

그렇듯 낮과 밤을 아껴가며 달리고, 달렸다.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 변경백을 따라잡았다. 곧바로 변경백에게 상황의 위험을 알렸다.

다행히 변경백은 이쪽의 권고에 순순히 따랐다. 여전히 방사능이나 피폭에 대해 이해하지는 못하는 듯했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만큼은 피부로 느낀 듯했다.

“후우. 자아. 다 끝났으니 일어나도록.”

“아, 예, 전하.”

상념에 잠긴 사이 시침이 모두 끝났다. 병사의 신진대사를 북돋고, 이뇨작용을 돕는 혈자리에 꽂았던 가시를 거두며 라키엘이 당부했다.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도록. 미지근한 물을 홀짝홀짝 나누어서 자주, 많이 마시는 것도 잊지 말고.”

“명을 바, 받들겠습니다, 전하.”

병사가 황송해하며 의료 막사 밖으로 나갔다.

라키엘은 기계적으로 다음 병사를 불렀다.

“다음.”

펄럭!

막사 출입구가 젖혀졌다.

엄청나게 잘생긴 할리우드 배우 스타일의 미중년 남성이 자체발광 다이오드처럼 빛나는 얼굴을 스윽 들이밀며 들어왔다.

“변경백?”

“전하, 제가 도울 일이 없겠습니까?”

“어. 있어. 나가줘.”

“……예?”

“병사들 진료해야 하잖아.”

“어, 음, 그렇기는 한데…….”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러 온 것이겠군. 맞나?”

“그렇습니다, 전하.”

“그럼 잘 왔어. 안 그래도 오늘 밤 진료가 끝나면 내가 찾아가려고 했는데.”

라키엘은 피로감을 털어내듯 싱긋 웃었다.

변경백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하면 전하,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그는 궁금했다.

방사능인지 피폭인지.

뭔지도 모를 사악한 마법 비슷한 것 때문에 그야말로 국경이 초토화되는 중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흉수를 추격하여 격멸해야 한다. 한데 어떻게?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초조함은 들지 않았다. 무작정 정체불명의 흉수를 추격하던 때에는 막막하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황태자 덕분이었다.

그에게는 대책이 있을 것이라고. 뚜렷한 길을 제시하여 줄 것이라고. 근거가 없지만 강력한 믿음이 들었다.

그리고 과연, 라키엘은 변경백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대책은 간단해. 방사능을 뿌리고 다니는 흉수를 최대한 빠르게 추격해서 섬멸해서 피해 확산을 막는 것. 그걸 위해 소수정예의 추격대를 구성해야 할 거야.”

“소수정예를…… 말입니까?”

“으음.”

“하지만 전하? 전하의 말씀이 이해가 잘 되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굳이 소수정예의 추격대를 꾸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변경백이 의아함을 느끼며 물었다.

왜 꼭 소수정예여야 하는 것일까.

신속한 진군 속도 때문에?

그러한 변경백의 짐작은 틀렸다.

“이유야 있지. 추격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입을 방사능 피폭을 막으려면 특수한 장비가 필요할 텐데, 그 장비를 빠른 시간 안에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을 거라서.”

“특수한…… 장비라고 하심은?”

변경백이 물었다.

라키엘이 자르듯 답했다.

“마법 재료와 납으로 도금된 전신 갑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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