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화. 인과응보 (1)
“이런 미친놈들이!”
라키엘은 달렸다. 저도 모르게 뚜껑이 열리도록 빡친 심정을 담아서. 기도소의 문을 박차고 광장을 향해 달렸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설마하니 기병대원들의 가족을 건드릴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최소한의 선은 지킬 줄 알았다. 아무리 종교를 중시하는 이들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로 막 나가는 짓을 벌일 줄은 몰랐다.
그런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 안일했다.
‘제발. 내가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이 없기를…….’
라키엘은 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더욱 세차게 달렸다.
♣
타닥! 떨그렁!
마지막 장작 조각이 던져졌다. 이미 쌓여 있던 장작더미에 보태지며 작은 산을 이루었다.
기병대원 구스타프의 아내, 발리예바는 초점이 풀린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멍하니 생각하였다.
아, 저게 내 몸을 태울 재료가 되는 거구나.
생각해보면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에는 유난히 기분이 상쾌했다. 요리도 잘 되었다. 수프는 너무나 적당하게 고소했고, 달걀은 남편이 딱 좋아하는 정도로 익혀졌다.
완벽한 도시락이었다. 즐거웠다. 이걸 기도소에서 요양 중인 남편에게 전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걸 먹으며 더욱 건강을 찾아갈 남편을 생각하니. 절로 행복해졌다.
적어도 심문관들이 집 문을 부수고 들이닥치기 전까지는,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는 정화의 말씀을 들으라!”
귓가를 두드려 오는 카랑카랑한 외침. 그 소리가 발리예바의 상념을 일깨웠다. 그녀는 천천히 눈길을 들었다. 비로소 보였다. 자신을 꽁꽁 묶어 매단 화형대. 그 아래에 쌓인 장작더미. 기름 누린내. 그 너머에 서 있는 새하얀 법복의 사람들.
신관.
내뱉는 말이 교리이며, 곧 법인 존재들.
그래. 심문관들에게 끌려온 뒤로 저 부신관장에게 고문을 당했지. 아팠다. 괴로웠다. 무서웠다. 어째서 그런 일을 당해야 했던 건지, 지금도 솔직히 이해가 되지가 않았다.
‘우리 남편이…… 기도소에서 불신자의 치료를 받고 있어서?’
생각나는 이유라고는 그게 다였다.
불신자의 치료. 사실 처음에는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불신자의 치료라니. 행여나 남편에게 부정이 타는 건 아닐까 싶었다. 나중에 회개의 값으로 치러야 할 기부금이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돈보다는 남편의 건강과 회복이 우선이었다. 게다가 남편을 치료하는 불신자, 마젠타노 제국의 황태자라고 했다. 이미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 꽤나 유명하고 유능한 의사라고 했던가.
하여 기꺼이 남편을 맡겼다. 이후로는 거의 매일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기도소의 뒷문을 드나들었다. 뜻밖에도 제국의 황태자를 수차례나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 딱히 일부러 만날 생각이 있던 건 아니었다. 먼저 다가온 이는 황태자 쪽이었으니까.
더욱 뜻밖에도, 황태자는 너무나 친절했다. 당신의 남편은 이러이러한 상태이고, 앞으로 어떠한 치료를 받을 것이며, 이후의 회복 상황에 따라 이러저러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매번 말해 주곤 했다.
자세한 용어나 내용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 내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진심이로구나, 라고.
하여 매일 남편의 것과 함께 황태자의 도시락도 함께 마련했던 자신이었는데.
‘그게…….’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화형에 처해질 만큼의 잘못이었던 걸까. 내 남편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것이. 내가 그런 남편과 의사를 지지하는 것이.
죽을 만큼 잘못된 일인 거였나.
‘…….’
그녀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모르겠다.
이건 이상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눈앞에서 여전히 카랑카랑하게 소리치는 부신관장도. 그 너머에 웅성웅성 모인 채 눈치만 보고 있는 시민들, 몇몇 아는 이웃들의 모습도. 모두 다. 거짓말 같고. 잘못 꾸는 악몽 같고. 그래서 부정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고.
모르겠다.
정말로.
나는.
“하여 불신자의 손길이 닿은 그의 팔뚝이 썩은 것을 보고 선지자께서 이르시되, 신을 거부하는 부정한 마음이 깃들어 모든 것이 타락하고 썩었도다 하시며! 썩고 뒤틀린 것을 파하는 것에는 정화의 불길이 으뜸이라 하시었으니!”
“…….”
그래서 태울 거라고?
나를? 산 채로?
그저 남편이 낫길 바랐기 때문에?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마침내 횃불을 건네받은 부신관장의 저 웃음도. 이쪽을 올려다보는 무감정한 눈길도. 그 너머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이웃들. 차마 그런 티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 너머에서 달려오는 낯익은 은발의 사내, 부신관장의 어깨를 움켜잡는 황태자의 모습 또한.
“잠깐!”
터억!
국경도시 테니온의 부신관장은 화들짝 놀랐다. 갑작스러운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달려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돌려세운 까닭이었다.
“어엇?”
감히?
누가?
곧 알 수 있었다.
익숙한 은발의 사내. 최근 무단으로 기도소를 점거한 불신자.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 이거 뭐 하는 짓이야?”
부신관장은 기도 차지 않는 기분을 느꼈다.
신의 부름을 받아 세상에 봉사하는 신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 것도 모자라, 이렇듯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라니. 신관의 법복을 걸친 이후로 처음 겪어보는 안하무인의 무례한 태도였다.
게다가 지금은 수많은 시민, 신도들이 보는 앞이었다.
부신관장은 모멸감을 느꼈다.
“이거 놓으십시오.”
황태자의 손을 뿌리쳤다.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꾸했다.
“저 여인은 신의 이름을 모독하는 잘못된 사상을 전파하였으며, 회개소에 불려간 이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부정하였고, 마침내 신의 이름 앞에 정화될 소중한 기회를 얻었습니다. 한데, 불신자인 그대가 설마 우리의 정화 의식을 방해하려는 것이신지?”
“방해? 당연하지.”
라키엘이 달려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짓씹듯이 말했다.
“정화는 개뿔. 멀쩡하고 죄 없는 사람을 대낮에, 산 채로 불에 태우는 미친 짓을 그렇게 포장해? 제정신인가?”
“하하. 신을 향한 믿음을 상실한 불신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요.”
부신관장은 히죽 웃었다.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됐구나 싶기도 했다. 사실 최근 도시 내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였다.
당연했다.
기도소가 불신자인 황태자에게 점거당했다. 황태자는 신관장님의 허락을 받았노라고 말했지만, 그건 너무나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신관장님은 그럴 분이 아니다. 그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항의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평소와 다른 상황이었다. 미증유의 괴수가 나타나 성막이 발동되었고, 도시가 30일간 고립된 상황이었다. 특히나 눈앞의 황태자는 시장에게 공공연한 비호를 받고 있기도 했다.
“…….”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괴수를 방어하는 데에 약간의 공로를 세웠다고 해서 쉽사리 영웅 대접이라니. 심지어 타국의 불신자를!
‘어쩌면 황태자, 당신이 오히려 저 괴수와 한패인지도 모르지. 아마도 그럴 거야. 괴수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돕는 척해서 도시로 태연하게 들어오고, 이 사태를 기회로 삼아 불신자의 타락한 사상을 도시 가득 퍼뜨리려는 속셈이겠지!’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더러운 계획을 좌절시켜 줄 것이다. 이 도시의 신성한 믿음을 기필코 지켜내고 말 것이다. 부신관장은 이참에 잘 됐다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마젠타노의 황태자여. 불신자의 아들이여. 안타깝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겠지요. 앞으로도 느껴볼 일이 없겠지요. 신의 사랑과 믿음이 충만한 하루를 말입니다. 오르무스의 이름을 부르며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감사의 기도와 함께 식사를 누리며, 내 주위를 둘러싼 신자들과 함께 보람찬 일상을 보내는, 그런 행복한 인생을 말입니다.”
“어, 많이 느껴봤는데.”
“……뭐요?”
“혹시 돈의 든든함으로 충만한 하루를 당신이 알아?”
“무슨……?”
“내가 황태자가 되어보니까 알겠더라고. 일어나자마자 보석 박힌 24k 황금 물잔에 담긴 천연수 원샷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밥이랑 반찬까지 다 차려주고 설거지해주는 시종, 시녀님들의 친절 서비스와 함께 식사를 누리며, 내 주위를 둘러싼 듬직한 특근대, 근위대원들과 함께 보람차고 럭셔리한 일상을 보내는, 그런 행복한 황족 라이프를 말이지.”
“…….”
이 작자가 무슨 궤변을 펼치려는 걸까.
부신관장은 신의 이름으로 증발하려는 어처구니를 가까스로 부여잡아야 했다. 솔직히 황태자의 말을 들으면서 아주 잠깐, 아주 살짝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흔들려선 안 된다. 멘탈을 재정비한 그는 지엄하고도 성스러운 교리를 떠올리며 반박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반박은 나오기도 전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황태자가 이미 발동한 혓바닥 놀림을 극한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려서? 그건 아니었다. 또 다른 훼방꾼(?)은 뜻밖의 방향에서 나타났다.
“저기, 신관님? 늙은이가…… 간곡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웬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돌아보니 허리가 완전히 꼬부라진 노파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슨?”
지금이 어느 때라고 감히 이쪽과 불신자의 언쟁 사이에 끼어드는 걸까. 하지만 부신관장은 노파를 제지하지 못했다. 무어라 호통을 치기도 전에, 노파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소매를 붙잡아 왔기 때문이었다.
“존경하는 신관님. 신관님 앞에 감히 저를 밝히자면, 저는 기병대원인 뮐러의 늙은 어미랍니다. 예, 제 아이 뮐러는 기도소에서 불신자의 치료를 받고 있는 기병대원이기도 하지요.”
“…….”
“신관님께서도 익히 아실 테지만, 제 못난 아들놈은 괴수와의 장렬한 싸움 끝에 많이 아프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은총을 바라며 기도소에 누워 있는 처지이지요. 그래서 죄송합니다. 제가 배운 것 없는 늙은이지만, 불신자의 치료를 함부로 받으면 신께서 진노하신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제 아들, 조금이라도 이런저런 치료를 더 받아보면 안 될는지요?”
“그건…….”
당연히 안 된다.
그렇게 자르듯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노파가 주름진 눈가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제가 마흔이 다 되어서 어렵게 얻은 막내입니다. 몸이 약해 열 살이 넘도록 업어가며 키운 자식입니다. 그랬던 아이가 이제 겨우 헌앙한 청년이 되어 이 나라와 신의 이름 앞에 도움이 되려던 참이었습니다, 존경하는 신관님.”
“…….”
“그러니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비록 무식하고 배운 바 없는 늙은이라지만, 저 마젠타노의 황태자가 아주 유능한 의사라는 소문만큼은 들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 늙은이를 보아서라도 제 아들놈이 나을 수 있도록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제 아들이 살아나면, 이 무례하고 볼품없는 늙은이를 대신 벌하여 주세요. 제발. 한 번만, 제 아들이 황태자의 치료를 계속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노파의 호소가 점점 흐려졌다.
눈물과 울음으로 젖어들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노파에게 소매를 붙잡힌 부신관장도. 그와 마주하고 있던 라키엘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민들도. 누군가는 숙연한 마음으로, 또 누군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저런 호소라면 들어주겠지.
이번만큼은 부신관장도 한발 물러나겠지.
이제는 다들 예전처럼 그럭저럭 불신자의 치료를 받은 후에, 회개의 기도와 기부금으로 신의 노여움을 풀어드릴 수 있게 되겠지. 원래 다들 그렇게 해 왔으니까. 이번 일에만 신관들께서 유독 원칙을 내세우고 계셨던 거니까.
이쯤이면.
저런 호소라면.
눈물과 진심 앞에 부신관장님도 평소의 인정과 자비를 되찾아 주시겠지.
……라고 모두가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감히!”
짜악-!
부신관장의 채찍이 노파의 뺨을 호되게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