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20화 : 어린 사제는 생각한다 (2)
* * *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야 겨우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와아~ 햇빛이다~ 와아아~"
숲을 나가자마자 정신이 아픈 사람처럼 두 팔 벌리고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나를 향한 두 사람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햇빛! 따뜻한 햇빛!!
역시 사람은 햇빛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대강 한 바퀴 달린 다음, 기지개를 켜고 다시 돌아왔다.
메린이 건조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다 했냐?"
"응."
얌전히 말에 올랐다.
딱 사흘 지낸 것도 이렇게나 힘든데, 숲 속에 아예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다.
저 숲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나무가 많은 만큼 새벽에 맺히는 이슬 양도 장난 아닌 것 같았다.
바닥이 축축한 건 그렇다치고, 공기 자체가 습해서 옷 속으로 푸우욱 스며들어오는 게 참…….
하루만 더 있었어도 분명 감기 걸렸을 거다.
으으, 숲은 나랑 안 맞아…….
어쨌든 이제 축축한 습기와는 당분간 작별이라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그리고당분간은 누가 자꾸 만드는 야생 요리를 먹을 필요가 없어서 더 좋았다.
아쉽게도숲을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기 시작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다시 길을 가는 건 내일로 미루기로 하고, 야영할 곳을 먼저 찾았다.
마침 오늘은 내가 저녁 당번이다.
드디어 미루고 미루던 보존식품 개방이다!
그때, 메린이 저편을 향해 목을 쭉 빼더니 중얼거렸다.
"아, 데이노다."
"……"
젠장! 망했어!
데이노는 길다란 주둥아리를 가진 잡식동물로, 사람 키 절반쯤 오는 크기이다.
두 발로 뛰어다니며 무리지어 다니는데, 양동 작전을 쓸 정도로 지능이 좀 있는 놈이라 되게 성가시다.
다행히 겁이 많고 피부도 그리 단단하지 않아서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편이다.
하지만 아무튼 망했다.
무리 사냥을 해서? 물리는 것보다 할퀴는 게 더 아파서?
전부 아니다.
“데이노? 그게 뭔데요?”
“음…… 달리기가 엄청 빠른 새? 구우면 맛있어.”
바로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젠장, 왜 하필 지금 나타나고 지랄이야?!
“맛있어요?”
“응. 마을에서 양치는 일할 때 간간이 먹었거든. 닭보다 더 맛있을걸?”
“오.”
닭보다 맛있다는 말에 로나가 두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아, 로나가 물들고 말았다.
어릴 때일수록 더 멀쩡한 걸 먹어야 되는데…… 크흡…….
……결국 오늘 저녁 메뉴도 야생동물 고기요리가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지도와 나침반을 확인했다.
벌써 무슨 습관이 되어버렸다.
안 보고 그냥 자면 뭔가 허전하다고 할까?
“어디 보자…….”
방향은 맞는 거 같군.
여기서 동쪽으로 더 가면 커다란 호수가 나오는데, ‘마녀의 숲’은 그 호수 중앙에 있다고 되어 있다.
뭐…… 배라도 타야 되나?
근처에 빌릴 데가 있는지 모르겠네.
지도와 나침반을 집어넣고, 다른 일행을 살펴보았다.
“……”
메린은 식기를 정리하자마자 잠들었고, 로나는 취침기도를 올리고 있다.
기도하는 로나의 모습은 낮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라서,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그러고보니 저 애랑 함께 여행한 지 이제 나흘째다.
겉으로는 아직 그런 기색이 없긴 한데, 슬슬……
……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품고 있지 않을까?
구체적으로는 실망하지 않았을까!
옆에 풀어 두었던 칼집에서 검을 살짝 뽑아 보았다.
스릉, 하는 쇳소리와 함께 평범한 철검이 나왔다.
……이거 뭐 바뀌는 조건이라도 있나?
왕성에서는 바로 성검으로 튀어나오더니, 검 주제에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건지, 원.
한숨을 쉬며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
여기까지 오면서 치른 전투는 대여섯번 정도 된다.
대부분이 늑대나 뱀 같은 짐승이지만, 간간이 오크와 고블린도 튀어나왔다.
짐승들은 나도 그럭저럭 대응할 수 있었지만, 오크와 고블린을 상대론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나로선 공격을 막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기 때문에, 놈들을 처치하는 건 메린과 로나의 몫이었다.
……목초지나 무투회 때 있었던 일들은 꿈이었던 걸까?
특히 목초지에선 내가 직접 놈들을 해치웠다던데…….
“오, 심각한 표정! 혹시 고민 있으세요, 용사……가 아니라 카엘 님? 그럴 땐 사제인 저에게 맘껏 털어놓으시면 된답니다!”
그새 기도를 마쳤는지, 로나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음, 밝다. 모닥불만큼 밝다.
그 반동인지, 나는 왠지 그림자에 더욱 파묻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민은 아니고…… 아니, 고민인가? ……저기, 로나, 넌 정말 내가 용사가 맞다고 생각해?”
“네! 왜요?”
한줌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는 이 믿음을 보라!
게다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이다.
왠지 머쓱한 기분이 들어, 모닥불의 장작을 괜히 나뭇가지로 툭툭 건드렸다.
“그…… 너도 여태껏 봤잖아? 싸울 때, 특히 오크를 상대할 때 내가 허둥대던 거. 너나 메린은 힘 하나 들이지 않고 해치우는데 말야. 그, 뭐냐…… 실망했지?”
하……왜 나는 꼭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게 되는 걸까?
모닥불 앞이라 그런가?
……실망했더라도 솔직히 그렇다고 할 리 없는데.
다 큰 놈이 어리광 피우려 하다니, 나도 참 한심스럽다.
로나를 흘긋 보자,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었다.
“실망? 왜요?”
“응? 그야 나 싸움 못하고……”
“그래서 메린 님이 같이 있는 거잖아요?메린 님이 카엘 님의 검인 거죠! 제가 창조주의 뜻을 전하는 도구인 것처럼!”
……색다른 견해인데?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역시 사제는 사제구나.
신께 삶을 바친 사제라서 그런지, 사고방식이 좀 특이한 것 같다.
그래도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그, 이제까지 뽑은 것도 성검이 아니라 그냥 검이고……”
“응? 카엘 님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해서 안 나온 거 아니에요? 악마가 있던 것도 아닌데, 괜히 뽑아 봤자 눈에 띄기만 하니까요.저 있죠, 꼭 필요할 때만 성검을 꺼내시겠다는 그 신중함에 감격했답니다! 역시 카엘 님은 용사님이세요!”
“……어, 그래, 고맙다……”
진짜 무한 긍정이구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건, 아니, 나에 대한 건모두무조건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의심스럽다.
나는 넌지시 물어보았다.
“……혹시 나 놀리는 거니?”
“제가요? 설마요! 왜요? 제가 이상한 말씀을 드렸나요?”
“어어, 뭐라고 할까…… 나를 너무 좋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좋게 봐줘서 부담스럽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로나는 내 말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모닥불 빛을 받아서 그런지, 평소보다도 더 잔잔해 보이는 미소였다.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비밀? 뜬금없네.”
그녀는 제 나이대 소녀처럼 까르륵 웃었다.
“있잖아요, 사실 용사와 동행할 사제엔 저 말고도 다른 후보가 있었답니다!”
“……엥?”
로나만 준비시킨 줄 알았는데……?
“아트라토스가 깨어난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대언자님이특별사제를 여럿 육성하고 계셨어요.”
“특별사제……? 뭐 특수임무라도 맡는 거야?”
내가 말해놓고도 잘 상상이 안 간다.
사제들이 맡는 특수임무라니, 뭐야, 그게?
“으음…… 특수임무이긴 하죠? 아트라토스 토벌만을 위한 사제니까요. 그래서 각 보직별로 가장 최고가 되도록 엄청난 훈련을 받았답니다.”
힘들었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로나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꼽으며 말을 이었다.
“전투, 보호, 치유, 예언, 해석. 각각의 보직에 저 같은 특별사제가 한두 명씩 소속되어서, 대언자님을 돕고 있어요. 사제님들 중에서도 대사제님만 겨우 아는 비밀 중의 비밀이랍니다.”
으악.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거야? 아니, 말해도 돼?!”
“물론 안 되죠! 그러니까 꼭 비밀로 해주셔야 돼요. 근데 왜 하냐면…… 음, 그러니까 말이죠. 용사에 대한 예언이 내려진 날 밤, 대언자님이 우리를 한데 부르셨어요.”
대언자, 즉 율리아 공주는 그 특별사제들에게 ‘그들 중 한 명이 용사와 동행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어느 보직에서 차출될지는 아직 모르니,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한 명이 토너먼트로 뽑는 거냐고 여쭈었거든요? 그때 대언자님이 뭐라고 하셨게~요?”
응? 여기서 문답이야?
어딘지 기대에 찬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대강이라도 답을 말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제비뽑기로 뽑을 거다?”
“땡!!”
……엄청 신나 보인다.
로나는 히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답은 ‘귀찮게 무슨 토너먼트냐, 그냥 내가 지명할 거야’ 입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맞혀?!”
얘 그냥 ‘땡’을 외치고 싶었던 거 아냐?
안 지 나흘밖에 됐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사제복을 입은 소녀는 까르륵 웃었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어요. ‘어느 보직이 되든, 최고 실력자를 보낼 거다.’ 즉, 저는 전투사제 중에선 최고 실력을 가진 사제랍니다.”
엣헴, 그녀는 일부러 더 과장되게 가슴을 쭉 폈다.
“……그리고 대언자님이 말씀하셨어요, ‘왜냐면 용사에게 가장 부족한 걸 보충해야 되니까.’. 카엘 님,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내게 가장 부족한 걸 보충하기 위해, 공주는 전투사제를 붙였다.
내가 마을을 떠나기 전 했던 말을 공주는 진지하게 들었던 것이다.
그건 즉,
“……전력(戰力)으론 전혀 기대 안 하고 있다는 거지…….”
내 입으로 말하니 더 울적하다.
저절로 몸이 땅 위로 녹아들듯이 축 쳐지는 나를 보며 로나가 화들짝 놀랐다.
“어라라?! 아니에요, 카엘 님! 보기보다 비관적이시네요?”
“객관적인 거야…… 실제로 도움 안 되고 있잖아…….”
“도움이 안 되긴요. 카엘 님이 한쪽을 맡아 주셔서 덜 바쁘게 사냥하는 건데.”
흑. 이걸 두둔해주네. 참 착한 아이야.
근데 그거 진짜 사냥 아닌데.
정말로 악마 상대하는 거 아니면 그냥 사냥으로 치는 건가.
특별 전투사제 되게 무섭네.
“아무튼, 요지는 이거에요. 강해서 용사가 되는 것도, 약해서 용사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 강해야 용사가 될 수 있다면, 애초에 용사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요.”
“필요 없어……? 왜?”
로나의 미소는 더더욱 깊어졌다.
“모든 종족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가서 때려 패면 되니까요. 애초에 그런 사안이라면 대언자님 선에서 끝날 거고.”
“……”
공주가 그렇게 강한가?
의문스러워하는 중에, 로나는 내 손을 마주 잡으며 밝게 웃었다.
“그러니까 자신을 가지세요! 카엘 님이 용사가 되신 건, 그럴 만한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카엘 님을 좋게 본다니, 천만에 말씀!
저는 그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을 뿐이랍니다.”
“……”
……난생 처음이다.
이렇게 누가 나를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건, 정말 처음이다.
쑥스러워서 얼굴이 다 달아올라……
아, 이런. 쑥스러운 게 아니었나?
안 돼, 안 되고 말고.
나는 있는 힘껏 벅찬 마음을 가라앉혔다.
눈가가 촉촉해진 건 먼지가 들어가서 그런 걸로 해두자.
그렇게 홀로 감상에 젖어 있는데, 갑자기 로나가 내 손을 놓더니 두 눈을 반짝였다.
“그나저나 스스로를 그렇게 낮추실 수 있다니, 이 로나, 카엘 님의 그 겸허함에 감격했어요! 아앗, 아까 최고 실력 운운한 제가 너무 부끄러워요!”
“……”
객관적인 거라니까.
하지만 말해봤자 분명 얘는 또 다르게 해석할 거다.
나를 일부러 좋게 보는 건 아니라고 했지?
그럼 답은 간단하다.
얘 눈에 뭐가 씐 거다.
“……나 참, 무슨 말을 못하겠네.”
실소가 터져나왔다.
“히히, 아무튼 자신을 가지세요! 카엘 님은 틀림없는 용사이니까.”
“……응, 고마워.”
나는 멋쩍게 웃으며, 로나에게 잘 자라고 인사했다.
본의 아니게 내가 첫 불침번을 서게 되었지만, 오히려 잘 됐지.
지금 당장은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
감정이 좀 차분해진 다음 돌아보니, 로나는 이미 잠에 들어 있었다.
낮에는 베일에 감춰져 있던 연갈색 머리카락이 얼굴 양옆으로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눈꺼풀이 굳게 닫힌 얼굴을 보고 있으니, 방금 전에 두 눈을 빛내며 했던 그녀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자신을 가지세요! 카엘 님이 용사가 되신 건, 그럴 만한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이에요.
자질…… 무슨 자질 때문에 성검이 나에게 온 걸까?
그리고 기껏 와 놓고 왜 내 의지대로 꺼낼 수 없는 걸까?
진짜로 내 무의식이 ‘지금은 필요 없다’고 안 꺼내는 건가?
진정으로 나를 용사로 믿고, 진심으로 대단하다며 감탄하는 이 소녀는 그 답을 알고 있을까?
나는 모닥불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메린이 태평하게 쿨쿨 자고 있다.
저 녀석 생각은 어떨까?
내일은 쟤한테 물어볼…… 필요는 없겠네.
저 녀석, 분명히 ‘다들 네가 용사라니까 용사겠지.’ 라고 할 게 뻔해.
그럼 카엘 에스트렐이 정말로 용사가 맞는지 의심하고 있는 건, 지금 나 자신 하나밖에 없는 건가?
“……”
그렇다면, 나도 믿어주어도 되지 않을까?
용사가 낯간지러워서 싫다면, 북의 대재앙을 물리칠 특별 원정대의 대장으로 하면 되잖아?
좋네, 원정대.
왠지 반지를 둘러싼 원정대 이야기가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그래, 이 독실한 사제님이 믿어준다면, 그리고 저 무시무시한 소꿉친구가 의심하지 않는다면 나도 믿도록 하자.
믿는다고 뭐 손해보는 것도 아니고.
“……나는, 용사다.”
모닥불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려보았다.
왠지 그래야 나 자신이 납득할 것 같았다.
나는 용사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용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