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는 소꿉친구 검성이 무섭다-73화 (73/475)

〈 73화 〉 71화 : 담론, 그리고 결심 (3)

* * *

잦은 병치레, 금방 지치는 몸, 의자 하나 제대로 옮길 수 없는 약한 팔.

강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놋지빌에서, 나는 돌아볼 가치도 없는 존재였다.

보살펴줘도 얼마 안 가 죽을 테니까.

그런 존재에 신경을 쓰고 공을 들이느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다른 아이를 갖는 게 훨씬 낫다.

직접 낳는 게 힘들다면, 부모를 잃은 애들 중에서 데려오면 될 일.

……그게 내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

매일같이 몬스터와 싸우며 살아가는 마을,

놋지빌의 풍조였다.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 부모님은 굉장히 특이했겠지.

나 말고는 다른 아이를 갖지도 않고, 들여오지도 않았으니까.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앓아 눕던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어떻게든 삼 개월에 한 번 앓는 걸로 만들었으니까.

물약 만드는 치료사에게 우리 엄마는 그야말로 모성애의 화신이었고, 다른 마을 사람들에겐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애처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평가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

제 수명대로 살지 못할 애인데 공을 들이니까.

앓아서 죽든 몬스터에게 잡혀서 죽든, 아무튼 곧 죽을 게 뻔한데.

어쨌든 조만간 죽을 놈.

그게 나, 카엘 에스트렐에게 내려진 판정이었다.

어차피 그렇게 될 거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서 해가 떨어진 후, 어둠이 깔린 숲을 걸었다.

태어난 건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 적어도 죽는 건 내 뜻대로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내 바램을, 그 녀석은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뭐야. 역시 살아 있잖아.”

나는 화를 냈다.

겨우겨우 찾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걸 왜 방해하냐고 성냈다.

“죽으려고? 왜?”

“살아봤자 쓸데없으니까! 어차피 조만간 죽을 거고! 나, 나는 짐덩어리야. 약값으로 돈 잡아먹는 짐덩어리. 어차피 죽을 거, 빨리 죽는 게 엄마 아빠한테도 나을 거라고……!”

앉아 있는 나를 보며, 어디 걸어가는 나를 보며 수군대던 목소리들.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소리들.

­­그 부인도 정말 정성이야. 쯧쯧, 자식 복이 없어서 참 안 됐어.

­­그 집 양반이 그래도 글씨 쓰니까 배 안 곯는 거 아니겠어요? 어휴, 그래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잖아요!

­­쉿, 애 듣겠어!

다 들리게 말해놓고, 내가 못 견디고 근처를 지나가자 그때서야 입을 닫곤 했다.

기운이 없다고 귀까지 먹진 않았는데 말야.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잘 들리는지, 그들 스스로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어쩌면 별로 비밀로 할 생각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들이 하다 만 말들을, 아이들이 내 앞에서 쭉 읊었으니까.

­­너네 집, 약값 때문에 기우뚱기우뚱한다며? 네가 너네 집 기둥뿌리 뽑는다며?

그럼 이 나무도 뽑을 수 있겠네? 뽑아 봐, 뽑아보라고! 못 뽑냐? 거짓말쟁이잖아, 이거!

­­푸핫, 허우적대는 거 봐! 진짜 그거다, 그거. 쟤를 어디다 써먹겠어? 써먹을 데가 없어!

저들끼리 속삭이던 말들.

­­와, 와, 운다, 또 울어. 괜히 울고 지랄이야. 저렇게 툭하면 울어서 세상 어떻게 살아?

­­아, 짜증나. 그래, 울어라, 울어. 더 크게 울어! 안쓰러운 너네 엄마 들리게 울라고!

밑 빠진 독. 돈 잡아먹는 귀신.

기둥뿌리 뽑는 놈.

어디 써먹을 데 없는 놈.

다들 그렇게 말하는 거다.

그럼 그게 맞는 말이겠지.

그래서 숲에 들어왔다.

이 마을은, 숲에서 사라진 사람은 죽은 걸로 치고 찾지 않는다.

어른이건 아이건 똑같이.

그러니 엄마 아빠도 나를 빨리 잊어버릴 수 있겠지.

그 다음은 행복하게 사는 것뿐이다.

이야기의 끝맺음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나 없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근데 왜 울어? 죽고 싶다며?”

“시, 시끄러! 저리 가!!”

녀석에게서 달아나려고 뛰었다.

더 안쪽, 더더 깊은 안쪽으로 달렸다.

이제 따돌렸겠다 싶어 멈춰 섰는데,

“찾~았다~!”

“으아악?!”

나무 위에서 내 앞으로 뛰어내렸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허둥지둥 또 달렸다.

숨이 차서 멈추었다.

녀석이 또 튀어나왔다.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달리고 멈춰 설 때마다 내 뒤에서, 옆에서 들리는 녀석의 목소리.

“히히히, 찾~았다~!”

무서웠다.

숲에 들어올 땐, 심지어 몬스터들이 다가올 때도 안 무서웠는데,

저 녀석이 쫓아오는 게 엄청나게 무서웠다.

“저리 꺼져! 꺼지란 말야!!”

“히히, 히히히~”

뭐냐고, 진짜.

왜 웃으면서 쫓아오는 거냐고.

붙잡은 다음엔 아무 짓도 안 하고 내 주변을 왜 폴짝폴짝 뛰는 거냐고?!

진짜 무섭다고!!

“또 찾았다~”

덤불 속에 들어간 나를 향해 빙긋 웃는 얼굴.

대체 어떻게 찾은 거냐고 따질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뭔 짓을 하든 따돌릴 수 없다.

저 미친놈한테서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

머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마자, 공포가 순식간에 몸을 장악하며무너져내렸다.

녀석은 땅에 드러누운 나를 내려다보며 킥킥 웃더니, 갑자기 나를 들쳐업고 걷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 뭐하는 거야! 내, 내려줘! 내려줘어어!!”

“더 놀려고? 근데 너, 더 못 뛰잖아. 나도 졸려.”

“그럼 가!! 너만 가면 되잖아, 난 왜 데려가?! 내려줘내려줘내려줘어어!!”

“싫어. 술래잡기 재밌었단 말야.”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분명히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데, 내 말뜻이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무서웠다.

눈물이 아른거릴 정도로.

그 공포의 반작용으로 나는 더욱 악을 썼다.

개지랄 떨지 말고 내려달라고, 생전 처음으로 욕까지 하는 내게, 녀석은 히히 웃으며 말했다.

“두고 가면 너 죽잖아! 그럼 술래잡기 못할 거고. 싫어. 내일 낮에 또 놀자!”

“……뭐? 싫어, 내가 왜……!”

“왜? 너 쓸데없다며? 그럼 시간 많잖아.”

말문이 막혀버렸다.

녀석의 그런 헛소리를 깨부술 논리를 짜내기엔 나는 너무 어린 데다, 너무 무서워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바짝 얼은 채 녀석에게 업혀갈 수밖에 없었다.

숲 입구에 도착하자, 녀석은 나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너네 집 어딘지 모르니까 네가 알아서 가라. 그럼 내일 봐!”

만날 장소도, 시간도 정하지 않은 채, 녀석은 그렇게 대강 약속만 던지고 휑하니 가버렸다.

다시 숲으로 들어가면 죽을 수 있는데, 태어나서 처음 만난 미친 또라이가 너무 무서워서, 내 머릿속이 완전히 새하얘져 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멍하니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한차례 숨을 돌렸다.

어느새 눈물은 그쳐 있었지만, 로나는 여전히 내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잠자코 내 말을 기다렸다.

“……그 다음날, 집 앞에 앉아 있는데 그 녀석이 놀자며 갑자기 달려들었어. 진짜 맹수가 달려드는 거 같더라. 정신을 차리니 죽어라 뛰고 있었어. 그렇게, 본의 아니게 또 하루종일 술래잡기를 했지.”

힘겹게 울타리를 넘어도, 집 벽 뒤에 숨어도, 심지어 짐마차 바닥에 엎드렸는데도 들켰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녀석이 우리 엄마와 알게 된 것도, 내가 결국 집 안으로 튀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은 결국 앓아 누웠는데…… 이 미친놈이 집에 찾아온 거야. 어제 그 잠깐 온 걸로 우리집 위치를 외워버린 거지.

그리고는…… 엄마한테 간병하는 법을 배웠어.”

그렇게 시작되었다.

멀쩡할 땐 술래잡기, 아플 때는 집에서 간병.

매일매일, 정말 말 그대로 매일매일 녀석과 얽혀지냈다.

……밤의 숲에 다시 가야 한다는 생각 따위 전혀 할 틈도 없이.

“……아무도 찾지 않는 나를, 그 녀석만 매일 찾아줬어. 안 나가고 누워 있으면, 집에 들어와서는 또 아프냐고 물어보고. 그 뿐만이 아냐. 녀석은 날 지켜줬어. 괴롭히는 놈들을 피떡으로 만들어서 그렇지.”

“카엘 님, 그건…….”

“……알아. 녀석은 단순히 그냥 놀고 싶었던 거겠지. 내 이름도 모르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거 아무 상관없었어. 그 녀석은 나를 찾아주니까. 놀이상대로 써먹어주니까. 더럽게 무섭긴 했지만.”

그렇게 난 메린 덕분에 살아났고, 메린 덕분에 좀더 살기 좋아졌다.

아플 때마다 메린이 간병해주니까, 우리 부모님도 좀더 숨이 트이게 되었다.

녀석에게 죽자사자 쫓겨 다녀서 체력도 늘었는지, 삼 개월에 한 번 앓던 것도 일 년에 한 번으로 줄었다.

의자도 못 들던 팔도 나무상자를 집어 던질 정도로 강해졌고.

물론 난 매일 공포에 떨었지만.

“……그러다 어느 날, 우리 부모님이 녀석을 교육시키기로 했어. 마을에 섞이도록 만들기로 한 거야.”

마을 모임을 다녀오자마자, 엄마는 나와 메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카엘, 엄마랑 아빠가 너에게 가르쳐준 걸 메린에게도 가르쳐주렴. 메린, 카엘이 앞으로 잔소리를 할 거야. 귀찮아도 잘 들어줘.

너희 둘이 사이좋게 서로서로 도와주는 거야! 알겠지?

……그때의 심정을 누가 알까?

망했구나, 얼마 안 가 내가 이 녀석 손에 목숨이 끊어지겠구나.

제 명에 못 산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과장 하나 안 보태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엔……

……마침내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빚을 갚을 기회인가요? 다시 살게 해준 은혜를 갚는 기회요?”

“……모르겠어. 뭐였을까? 그 녀석을 가르치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마을에 융화시키는 게 내 일이었어. 내가 맡은 역할. 세월이 흐르고, 또다른 일을 맡고, 마을의 누구도 더는 요구하지 않아도 나는 그 녀석을 계속 봤어.

녀석은 그럭저럭 마을에서 살 수 있게 됐지만…… 여전히 겉돌았거든. 나 말고 다른 사람과는 잘 이야기도 안 하고.”

어쩌면 욕심이 생겼던 건지도 모른다.

야생동물이나 다름없던 애가 마을에 발붙이고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좀더 노력하면 정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웃고, 울고, 춤추게 되지 않을까?

사람들 틈에 섞여서, 누구에게도 거부당하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만약에 정말 그렇게 된다면……

……이런 내가 태어난 것에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인정하기 싫으셨군요.메린 님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버리면, 당신의 삶에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니까.”

“……그래.”

인간성이 비틀린 사람은 고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존재를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

나는 신이 아니니까.

일개 인간인 내가 힘껏 노력해봤자, 사람을 흉내내기만 할 뿐인, 어디까지나 이질적인 존재로 남을 뿐이겠지.

‘정말 그 이유뿐이야?’

마음속의 내가 물었다.

그 녀석에게 그렇게 매달리는 게, 나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두고 싶은 것뿐이냐고.

……모르겠어.

정말로 모르겠어.

하지만……떠오르는 건 있다.

가을 수확제의 밤, 온 마을 사람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춤을 추는 광장.

그러나 그 녀석만 거기에 없었다.

괜히 신경 쓰여서 찾아보니, 녀석은 아무도 없는 들판에 있었다.

홀로,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주홍빛 눈동자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보고, 녀석은 웃었다.

­­……아, 카엘이다.

평소처럼 달려들지 않고 조용히 웃기만 하는 그 얼굴……

그 얼굴이 무척 싫었다.

나보다도 강하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면서 혼자 있다는 게납득이 가지 않았다.

팔팔한 애가 힘 좀 과하게 썼다고 손가락질 받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녀석의 힘이 필요하면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들 저기 광장에서 웃으며 춤추고 있는데,

이 녀석만 여기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게 싫었다.

……그래, 싫었다.

메린이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게 싫었다.

누구보다도 강한 덕에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탓에 사람들이 배척하는 존재.

그렇게 고독한 존재가 되게 둘 순 없었다.

……아니, 그렇게 둘 수 없다.

절대로.

그러니 녀석이 진짜 사람이 아니라 해도 그만둘 수 없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고독하게 두지 않는다……? 카엘 님, 당신은 메린 님이 사람이 아닌 걸 인정했어요. 그런데도,”

“……그래. 내 목표는 변하지 않아. 나는 메린을 사람으로 만들 거야.”

“사람이 아닌 존재를 사람으로 만들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알아. 그래도…… 그래도 난 계속 믿을 거야. 희망이 있거든.”

2년 전, 엄마가 숲에서 실종된 후 치른 장례식에서, 텅 빈 무덤 앞을 떠나지 못하는 내 곁을 메린이 지켜주었다.

다들 가버린 뒤에도, 녀석은 하염없이 무덤만 바라보는 내 등을 끌어안은 채 떠나지 않았다.

­­……다들 갔잖아. 너도 가.

­­싫어. 너, 숲에 들어갈 거잖아.

­­……안 가. 안 갈 테니까 걱정 말고,

­­싫어, 못 믿어. 안 믿을 거야. 너 혼자 두고 절대 안 가. 그러다, 그러다 너까지……!

그날, 메린은 처음으로 울었다.

녀석의 그 눈물이 실제로 어떤 의미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확신한다.

녀석은 그날, 우리 엄마가 없어진 걸 슬퍼했다.

나까지 없어질까 무서워했다.

이미 다 흘려버려서 메마른 줄 알았던 내 눈에서 또 눈물이 나올 정도로, 녀석은 울고 또 울었다.

그 전에도, 녀석은 우리 가족이 돌보기 전부터 이따금 사람을 도왔다.

마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고, 몬스터의 습격을 받는 사람을 도와주었다.

설령 그 사람이, 한 시간 전에 자신을 괴물 취급했다고 해도.

그러니 메린은 희망이 있다.

진짜로 사람 아닌 존재들과는 달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그건 그냥 변덕이었을 수도 있다.

2년 전 그 일도, 사실 큰 의미는 없었을지도 몰라.

나 혼자 희망이라 애써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더라도 나는 믿는다.

메린에겐 사람의 마음이 있다고.

작디 작은 빛이지만, 그래도 녀석의 텅 빈 눈동자 속에서 확실히 반짝이고 있다고.

“메린은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있어.”

나를 안타까이 여기고 있는 이 사제님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노력하면 될 수 있어. 녀석은 사람이니까.”

“카엘 님.”

“알아. 나도……나도 알아. 그래도 녀석은 사람이야.사람처럼 안 보이지만 사람이야.

……미안, 로나.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 건 알지만, 난 절대 포기 못해.”

“……그런 것 같네요.”

로나는 깊이깊이 한숨을 쉬며, 내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어딘지 슬픈 듯한 눈으로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카엘 님은 정말 착하시네요. 바보 같을 정도로요. 저라면 그딴 말을 한 사람들, 가만 안 뒀을 텐데.”

“그런 거 아니야. 맞는 말이니까 납득했을 뿐이지.”

“납득하는 시점에서 착한 거에요. 바보이고. 속 편하게 남 탓하고 비난하면 될 것을. 아니다, 그냥 바보네요. 바보. 바~보.”

“……”

뭐지?

나 그렇게 잘못 살았던 걸까?

어째 등신 호구 새끼라고 들었을 때보다 더 푹푹 박히는 것 같은데?

한숨을 푹 쉬면서, 로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그럼 저도 그런 쪽으로 도와드릴게요.”

“엉?”

“왜요? 제가 뭐, 메린 님을 버리자고 할 줄 아셨나요? 메린 님이 없으면 카엘 님이 죽을 확률이 확 높아지는데 제가 왜요?

원래는 교정만 하자고 설득하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 진심이시니, 저도 메린 님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쪽으로 도와드릴게요.

카엘 님의 말씀을 들으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고요.”

어어……

엄청나게 딴죽을 걸고 싶은 말이 앞에 들렸는데, 뒷말이 너무 의외인 탓에 홀라당 까먹어버렸다.

“방법……? 어, 네가 아까 말한 대책? 그게 뭔데?”

“훗훗훗, 그건 비밀이에요. 그래도 무슨 해를 끼치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걱정마세요. 아, 그 대신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약속?”

로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무 자신을 몰아세우지 마세요. 당신의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으니까.”

“……”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린 여자애 앞에서 한심한 꼴을 하루에 두 번이나 보일 순 없으니까.

북받쳐 올라오는 것을 가까스로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잘 웃고 있으면 좋을 텐데.

“……고맙다.”

“히히, 고맙긴요. 카엘 님을 돕는 게 제 역할인걸요. ……남 얘기인 것도 아니고.”

“응?”

뒷말은 거의 속삭이다시피 하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로나는 다시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그대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럼 이만 쉬세요! 내일부터는 카엘 님이 걱정하시던 일은 없을 거에요. 여러모로 솔직히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아니야, 그……들어줘서 고마워. ……하하, 네 고민을 들으려고 했던 건데, 한심한 어른이라 미안하다.”

“또 그러신다! 그리고 어른이라봤자 저랑 몇 살 차이 안 나면서 툭하면 어른어른! 어휴, 그렇게 티내고 싶어요?”

“당연하지.”

사실 로나와는 다섯 살 밖에 차이 안 난다.

하지만 난 엄연히 성인식 치른 어른인걸.

공식적으로 어른이라고 인정받았는걸!

“카엘 님 덕분에 저도 희망이 생겼어요. 그러니 이건 카엘 님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제 자신을 위한 게 더 커요.”

“어…… 그래?”

“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거에요! 카엘 님은바보 같을 정도로 성실하고 다정하신 데다, 쓸데없이 고집도 엄청 세시니까요!”

“……”

……칭찬하는 건가?

저거 칭찬하는 척하면서 맥이고 있는 거 아니야?

설마…… 아니겠지?

“……만약 제가 신전이 아니라 당신 가족에게 맡겨졌다면…… 어쩌면 저도…….”

“로나……?”

“……히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뵐게요!”

“어, 응. 잘 자.”

환히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로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덜컹, 문이 닫히면서 방 안이 고요에 잠겼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물잔을 줍고, 로나가 마시다 남긴 우유를 쭉 들이켰다.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중에 느껴지는 꿀의 씁쓸한 향기.

왠지 모르게 그 씁쓸함이 오래오래 입 안을 감도는 듯했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내용은 눈을 뜨는 동시에 날아가버려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직 동은 트지 않았다.

그러니 도로 자야 하는데……

가슴이 죄는 듯한 느낌 때문에, 도저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바람 좀 쐴까.

그렇게 생각하고 방을 나서자마자,

그녀와 맞닥뜨렸다.

“오? 웬일이냐? 네가 이 시간에 다 일어……”

“……메린.”

머리가 생각을 띄우기도 전에,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리가 앞으로 나아갔다.

팔이 그녀를 향했다.

손이 그녀의 등을 감쌌다.

입술에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닿았다.

어깨로 그녀의 당황해하는 숨결을 받았다.

“어? 뭐야? 갑자기 왜 그래?”

“……”

“어어…… 나쁜 꿈 꿨어? 그래서 깼냐?”

나쁜 꿈……

그래, 악몽을 꿨던 것 같다.

전부 사라진 공간에, 이 녀석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듯한 그런 악몽.

전부 있는 공간에, 이 녀석 혼자만 빠져 있는 듯한 그런 악몽.

“……어. 악몽, 꾼 거 같아.”

“으음…… 도적들이랑 싸운 게 힘들었나? 너 진짜 체력 더 키워야겠다.”

아니야, 이 멍청아.

속으로 대꾸하며 팔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녀의 손이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떨지 마. 그냥 꿈이잖아.”

“……그래.”

불안해하는 나를 진정시키고, 안심시키려는 손길.

설령 그녀의 이 행동에 아무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고 해도, 그녀의 손은 확실한 온기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괜찮아.

너에게 이 따스함이 있는 한, 나는 끝까지 믿을 수 있어.

“……괜찮아.”

그게 환상이라 해도 괜찮아.

“……괜찮아, 메린. 다…… 다 잘될 거야.”

“그래그래…… 엥? 나?”

어리둥절해하는 그녀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품 안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이 알려주고 있다.

그녀의 체취가, 이 온기가 똑똑히 외치고 있다.

메린은 여기에 있어.

바로 여기, 내 품 안에 있어.

내 손이 닿는 곳, 내 눈이 보이는 곳에 있어.

“……괜찮아. 분명 괜찮을 거야.”

“으응???”

나 자신에게 들려주듯이, 그렇게 줄곧 되뇌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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