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 272화 : 오후는 평화롭게 보내야 제맛 (3)
* * *
간절함을 한껏 담아 빌고 또 빌며 기다렸는데도, 터크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내가 부탁한 책이 그렇게 찾기 힘든 물건이었을 줄이야……!
본의 아니게 메린에게 즐거운 시간을 바친 꼴이 되고 말았다.
“아, 냄새, 맡지 마……!”
“후후후……”
이 자식,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아으, 뒷목에 숨결이 닿고 있어.
녀석의 코가 목을 간지럽히고, 스읍 하고 크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쓸데없이 크게 들린다!
망할, 이걸 도망갈 수도 없고……!
지금의 나는 이 녀석의 팔을 뿌리칠 수 없다.
아니, 평소에도 못했는데 여자가 되면서 더 약해졌고, 오늘 일 때문에 더 약해진 상태이다.
물리적인 탈출은 꿈도 못 꿔!
메린 녀석도 그게 신경이 쓰였는지, 선 채로 나를 껴안은 건 처음 잠깐뿐이었다.
별안간 “다리 아프겠다”고 중얼거리더니, 나를 번쩍 안아들고는 침대에 앉혀버렸다.
그리고 지금, 나는메린의 품에 꽉 안긴 채, 그녀의 숨결에 목덜미가 간지럽혀지고, 귓가에 그녀의 웃음소리가 맴돌고 있는 중이다.
기쁘고 편안하고 행복한데, 그 뭉클한 감정들을 죄다 덮어버릴 만큼 부끄럽다.
아니, 그보다도 위화감 때문에 죽을 것 같아.
메린이 날 간지럽힐 때마다, 머릿속에서 이건 아니라고 마구마구 떠들고 있다.
아잇, 씨발, 나보고 어쩌라고, 그냥 닥쳐주면 안 되나?!
나 자신에게 일갈하는 순간,
“히익……?!”
찌릿한 느낌이 등을 타고 온 몸을 휘감았다!
아, 메린이, 등을 쓰다듬고 있어……!
“오, 움찔움찔거리네. 그러고보니 남자일 때도 이랬었지? 성별이 바뀌어도 똑같나?”
“……!!”
씨발, 안 돼, 메린이 호기심을 품었어, 빨리 벗어나야 돼, 근데 어떻게……?!
아냐아냐아냐, 분명 뭔가 방법이……!
아, 그래!!
“메, 메린, 공부, 공부해야지! 아, 아까 클라이드 씨가 무슨 설명서 같은 거 방에 있을 거라 하지 않았냐? 그거 읽어보자!”
“………지금?”
“그래, 지금 당장!”
“……그래, 공부하겠다고 했으니까, 뭐.”
메린은 살짝 입을 비죽거리면서 나를 풀어주었다.
오오오, 주님, 감사합니다!!
근데 녀석이 이렇게 순순히 수긍할 줄이야.
제길, 처음부터 말을 꺼내 볼 걸 그랬네.
아무튼 이제 살았어.
안내책자가 얼마나 두꺼운지 몰라도, 터크가 책을 가져와줄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지.
“어디 보자…….”
방에 둔다고 했으니……
역시 책상이겠지?
화끈거리는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방 한 켠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의자 등받이 때문에 보이지 않던 책상 윗면에, 작은 책자와 함께 <별이 머무르던="" 성,="" 아이레="">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이 살포시 놓여 있었다.
고이 접힌 쪽지와 함께.
“………”
머릿속을 스치는 예감을 애써 무시하며 쪽지를 펼쳐보았다.
– 사서 터크.
추신: 현재 시각 오후 2시 15분>
“………”
자연히 내 눈길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로 향했다.
커다란 두 바늘이 각각 2와 9를 가리키고 있다.
음, 2시 45분이로군.
즉, 이 망할 아저씨는 삼십 분 전에 몰래 책을 보내 놓았다는 거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메린에게 붙잡혀선 이것저것 당하고 있었고 말야.
……씨발.
씨바아아아알!!
“새끼발가락 찧어버려라아아아!!”
전심을 다해 외쳤다.
지독한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어쨌든 드디어 평화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이레에 대한 책을 읽는 한편, 메린에게 안내책자를 소리 내어 읽으라고 시켰다.
물론 글공부를 위해서.
그래도 그간 공부한 게 헛되진 않았는지, 녀석은 약간 더듬거리긴 해도 막히는 구간없이 술술 읽어 나갔다.
안내를 위한 글인 만큼, 비교적 쉬운 단어로 적혀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
“……라고 적혀 있어.”
한차례 읽기를 마친 그녀가 짧게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뭔 내용이었는지 설명해봐.”
“어어……”
그녀는 다시 책자를 노려보면서, 나에게 더듬더듬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엔 내가 질문 한두 개를 던지고, 그녀의 답을 듣는다.
그 일련의 과정……
그녀가 안내 내용을 읽고, 나에게 설명하고, 짧은 질의응답 시간을 갖는 것을, 책자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계속 되풀이했다.
즉, 그녀에게 독해 공부를 시켰다.
안내책자의 내용이 부실했다면 일찍 끝났겠지만, 굉장히 고맙게도 꽤 알차게 되어 있었다.
세숫물을 얻는 방법, 욕조 사용법, 조명을 켜고 끄는 법, 옷 세탁방법 등등, 이 방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별관의 지도와 식당 사용안내까지 적혀 있었으니까.
“저녁에도 그 파이 먹을 거냐?”
“……아니, 한 번 먹은 걸로 충분해. 괜히 또 울기도 싫고.”
게다가 그 늦은 점심을 제법 푸짐하게 먹었다.
아직도 배가 부른 걸 보면, 저녁이 되어도 배가 안 꺼질 거 같아.
“그냥 건너뛸까봐.”
“안 돼, 간단하게라도 먹어. 그래야 기운 빨리 차리지.”
“하하…….”
단호한 말투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책자를 이용한 독해 공부를 마친 후, 메린은 내가 내주었던 숙제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동화책의 장면 하나를 옮겨 쓰고, 그 내용을 짧게 요약한 다음, 어째서 그렇게 요약했는지 내게 설명하는 작문 숙제이다.
물론 이 숙제엔 정답이 없다.
어떤 부분을 쳐내고 남길지는 그 사람의 주관에 달려 있으니까.
뭐, 아무리 봐도 중요한 내용인데 그걸 쳐냈다면 지적해줘야 하지만 말야.
“근데 넌 그거 뭐 읽는 거냐?”
집중력이 떨어진 건지, 책과 종이를 번갈아 노려보던 메린이 불쑥 물었다.
“이거? 우리 집안의 옛 터전이었던 곳의 역사.”
“아, 그 아이레인가 하는 곳? 아저씨가 진짜 거기 출신인 거냐?”
“글쎄? 연도는 아슬아슬하게 맞는데, 아버지가 진짜 거기서 나오셨던 건지는 모르지. 뭐, 그래도 내 조상들이 여기 천문학자였던 건 분명해.”
나는 터크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가르쳐줬다.
철자까지 확실히.
아마 그는 에스트렐 가문의 족보에서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찾았을 거고, 그 가문과 연관된 정보로서 아이레의 역사책을 준 거겠지.
세상의 모든 지식이 모인다 했으니, 철자만 같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에스트렐 가문의 정보도 있을 터.
그런데도 터크는 이 역사책 딱 한 권만 주었다.
그러니 우리 집안은 아이레에 살던 가문이 맞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천문학자가 뭔데?”
“별을 연구하는 사람. 별을 찾고, 별자리를 그리고, 별의 움직임을 보는 게 일이야. 가끔 점도 치고.”
“점? 아저씨가 점을 치는 건 못 봤는데. 아, 그래도 가끔 나한테 날씨가 어떨 거 같다고 슬쩍 말해주신 적은 있어. 왜 다른 사람한텐 안 하신 거지?”
“일부러 안 하신 거겠지. 다들 맨날 몰려와서 물어보면 귀찮잖아.”
게다가 빗나가기라도 해봐라. 엄청나게 귀찮아지지.
거짓말 했다느니 괜히 믿었다느니, 제멋대로 마구 불평해댈 게 뻔해.
아무리 미리 ‘빗나갈 수 있다’고 신신당부를 해도 소용없다.
심지어는 그들 스스로도 내심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빗나간 예상을 입에 올린 사람에게 책임을 지운다.
“특히 불길한 소식을 전하면 굉장히 싫어하기 마련이야. 아이레가 멸망한 것도, 그 불길한 징조를 발견한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래.”
예부터 붉은 별은 흉조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아이레 성주의 별이 붉어진 걸 발견한 에스트렐 가문이 주의할 것을 청하자, 성주는 코웃음을 치며 그 징조를 발견한 사람을 감옥에 가둬버렸다.
전쟁 중에 감히 불길한 일을 입에 올렸다며.
그리고 정확히 사흘 후, 아이레의 성주는 싸움터에서 화살을 맞고 죽었다.
후계자가 성에 남아있긴 했지만, 그래도 성이 무너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저주한 거 아니냐?”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책은 성이 무너진 부분에서 끝나 있었다.
아이레의 역사를 다룬 책인 만큼, 가신일 뿐인 에스트렐 가문의 행방까지는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뭐, 천문학자 집안인 만큼 글을 읽고 쓸 수 있으니, 다른 영주를 섬기거나 교단 성직자가 되었겠지.
그리고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는 놋지빌로 흘러온 거고.
아무튼 조상의 역사 일부를 알게 되어, 꽤나 유익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 대해 말을 안 해줬으니까.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며, 메린을 슬쩍 돌아보았다.
턱을 괸 채 공연히 깃펜을 돌리고 있는 게, 별로 진척이 되지 않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숙제 어렵냐?”
“……별로.”
그냥 하기 싫은 거구만.
그 심정은 알지만 봐줄 순 없다.
숙제가 짜증나긴 하지만, 나에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기한은 안 뒀지만 후딱후딱 해라.”
“으.”
……앓는 소리 내긴.
이따가 저녁엔 단 거라도 먹어야겠네.
얼굴을 찌푸린 그녀를 보며, 홀로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이윽고 맞이한 밤.
하루의 마지막 일과인 기록을 마친 후, 나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하…… 편하다……”
하루종일 가슴을 싸매고 있던 속옷을 벗어버리니,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원래 입고 자던 튜닉도 펑퍼짐해서, 굳이 바지까지 챙겨입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남자용 브리프 자체가 거의 반바지나 다름없었으니까.
하…… 그래도 어떻게 하루가 끝나긴 했구나.
내일 잠에서 깨어나도, 원래 몸으로 돌아가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한다.
그래도 이제 고생은 끝이야!!
나도 모르게 베개를 껴안고 뒹굴뒹굴거렸다.
“후히히히……”
“뭐가 그렇게 좋냐?”
“하루가 끝났잖아. 이제 몇 시간 뒤면 이 엿 같은 상태도 끝이라고. 아, 진짜 좋다.”
“아, 그렇네……. 이제 끝이구나…….”
신나 죽겠는 나와 달리, 메린은 한숨까지 폭 쉬면서 노골적으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야, 너 그렇게 아쉽냐? 내가 쭉 이랬으면 좋겠어?”
“음…………”
“그걸 고민하고 있냐, 이 나쁜 자식아!!”
빽 소리지르고 등을 돌려서 누워버렸다.
나쁜 년, 이번엔 진짜 화났어.
원래 남의 마음은 잘 모르는 녀석이지만 그래도 너무하잖아.
내가 힘들어하는 거 옆에서 다 봤으면서!
“화났어?”
“어. 화났어. 어떻게 그걸 고민할 수가 있냐? 내가 힘들든 말든 너만 좋으면 된다, 이거야? 그래, 그러겠지. 넌 오늘 아주 재미있었을 테니까.”
“와, 단단히 삐쳤네. 그거 때문에 고민한 거 아닌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메린은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화가 났는데도 그 팔을 뿌리칠 생각을 안 하는 나 자신이 참 기가 막힌다.
“네가 힘들어하는 거 싫어. 네가 원래 몸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거 말릴 생각없어.”
“그래도 이 모습으로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잖아. 넌……… 남자인 나보다 여자가 더 좋다는 거 아냐.”
정말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내가 여자의 몸이 된 것도 그렇지만, 이 녀석이 말 그대로 하루종일 질리지도 않고 나에게 들러붙다니.
게다가 실실 웃기까지 하고.
……평소에는 거의 늘 뚱한 표정이면서.
역시 메린은 여자를 더 좋아하는 걸까?
남자인 나로는 부족해서, 이후에도 쭉 내심 여자인 게 더 좋았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거 아냐?
………나보다 훨씬 더 예쁘고 멋진 여자가 나타나서 잘해주면, 그대로 홀딱 넘어가는 거 아니냐고.
“아니? 난 네가 남자인 편이 더 좋은데? 네 품, 따뜻하니까.”
“………근데 왜 고민한 거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서 촉감이 좋으니까.”
“내가 무슨 인형이냐?!”
“좋은 걸 어쩌라고. 그리고 이렇게 붙어도 네가 발정나지 않으니까 맘껏 만지거나 할 수도 있고.”
바, 발정?!
이 자식이 지금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얌마, 내가 언제 바, 발정났었냐?! 나처럼 신사적인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너 지금 여자니까 그거 없잖아. 팔짱을 끼든 뒤에서 껴안든, 고간에 천막 세울 일이 없다는 거지.”
“………아, 그거.”
제길, 할 말이 없군.
그래도 팔짱 끼는 정도로는 천막 세우진 않을 거 같은데 말이지?
그 돈독 오른 도시에서 팔짱 신나게 꼈을 때, 허리 아래엔 아무 일도 없었는걸!
……아무튼 이 녀석이 오늘 신나게 들러붙은 건, 내가 얼굴 빨개지는 것 말고는 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평소엔 내가 다른 녀석들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이지 않도록 자제했다는 게 된다.
그렇다는 건……,
“……너, 내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다는 거냐?”
“그렇게 되나?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스으으—
“?!”
별안간 녀석이 내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이 자식, 난 아직 화 안 풀렸구만, 또……!
“……똑같은 냄새.”
화를 내려 했는데, 메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리기 시작해서 때를 놓쳐버렸다.
그에 더해, 녀석이 멋대로 내 몸을 돌려서 자신과 마주보게 하는 바람에, 바로 코앞에서 반짝이는 주홍빛 눈동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그대로 내 가슴에 귀를 바짝 댄 후,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심장소리도 같아.”
“……”
“눈동자 색도 여전히 푸른빛이잖아. 조금도 바뀌지 않았어. 너는 여전히 카엘, 내가 아는 카엘 에스트렐이야.”
“…………”
“근데 평소보다도 더 말랑말랑해졌고, 나보다 조금 작아지기까지 했잖아. 근데 여전히 내가 건드리면 얼굴 새빨개지고! 다르면서 똑같아. 완전 처음 보는 모습이라고. 히힛, 그래서 재미있었어.”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성별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내가 여전히 메린을 사랑하듯, 그녀 역시 나에 대한 마음은 변함없다.
내가 여자가 되었다고 해서 더 커지거나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재미는 별개이지만.
……내가 느꼈던 소소한 섭섭함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깊고 커다란 사랑의 속삭임이었다.
“……그래도 성별은 중요해. 난 네가 남자였으면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진 않았을걸.”
웅얼거리듯이 대꾸하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게 보통 아니냐? 뭐, 난 남자이든 여자이든, 누구랑 자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그랬지.”
……그러면서 그녀는 나에게 안아달라고 했다.
마음이 춥다는 이유로.
살을 맞댄 후엔, 따뜻해졌다고 웃었고 말야.
꼭 몸을 섞는 것으로만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하지만, 만약 그 행위가 그녀를 가장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거라면……
……역시 난 남자이고 싶다.
자신보다 키가 더 큰 내 품에 꼭 안기는 게 더 좋다고, 부끄러움도 없이 말하는 그녀를 위해.
“……내일부턴, 전처럼 꼭 껴안아줄게.”
“화 풀렸어?”
“………응.”
저 말을 듣고서도 삐치고 있기엔, 난 이 녀석에게 너무 홀딱 빠져 있었다.
화가 풀렸다는 내 대답에, 메린은 키득 웃으며 나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포근한 온기가 온 몸을 감싸는 느낌에 녹아들려는 순간,
“그럼 있지, 나 뭐 좀 시험해보면 안 되냐?”
“뭐?”
“너 지금 여자잖아. ‘기분 좋다’는 느낌이 뭔지 알려주라.”
녀석이 말 같잖은 소리를 지껄였다!
“무, 무뭐뭐, 뭔 소리야, 그게?!”
“너 나 안을 때, 가끔 기분 좋냐고 묻잖아. 근데 난 잘 모르겠단 말야. 넌 나보다 그런 거 잘 아니까, 네가 직접 겪어보고 알려줘.”
“싫어!!”
이 녀석이 진짜 미쳤나!
안 그래도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위화감에 기분이 안 좋은데, 여기서 나보고 성감을 느끼고 감상 읊어달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아, 그러지 말고 해줘. 네가 언제 또 여자가 되겠냐? 지금밖에 기회 없잖아.”
“그딴 기회 그냥 날려버려! 아, 그래, 이제 안 물어볼게, 그러면 되잖아?!”
“그럼 내가 좋은지 어떤지 넌 평생 모를 거 아냐.”
“네 몸 반응하는 거 보면 다 알아! 그거 그냥 물어본 거야!”
“그래……?”
녀석은 잠시간 시선을 돌린 채 묵묵히 있다가, 돌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궁금해.”
“힉?! 야, 야야, 손치워치워치워, 치우라고! 아, 진짜, 싫다니까……! 우으읍?!”
녀석이 바둥거리는 내 뒤통수를 콱 잡더니 그대로 입술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앗…후으…메…리인…!”
“후읍……”
그녀의 혀가 입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그대로 내 혀를 얽었다.
덕분에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물소리가 들려.
타액이, 입 안으로 흘러넘어온다.
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거 같아……!
“……푸흐, 역시 키스 좋아하는 것도 똑같네.”
“하아, 하……!”
“다른 것도 똑같으려나~”
“읏, 아, 시, 시러어……!”
내 몸이 아닌데, 감각 자체는 내 것이 맞다는 혼란스러움.
평소와 달리, 그녀가 적극적으로 달려들고 있다는 당황스러움.
정신머리는 어쨌든 몸은 동성이니까 안 되는 거 아니냐는 진지한 속삭임에 대한 아연함.
……그리고 아주아주 작긴 하지만, 이런 몸으로도 변함없이 그녀의 온기를 온 몸으로 받을 수 있다는 기쁨이 있다.
그 감정들이 한데 뭉쳐, 그녀의 손길을 타고,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타올라왔다.
“하아, 으, 뜨거워어……! 우으, 메린…메리인……!”
“후후후후…… 하아…… 야, 카엘, 나 있지, 귀엽다는 게 뭔지 조금 알 거 같아. 히히, 카엘, 귀여워……!”
완전히 맛이 가버린 그녀의 눈을 보며, 나는 완전히 글렀다는 걸 깨달았다.
잘 가, 내 정조…….
아니, 이미 없나……?
……그러고보니 그 관장 놈이 그랬던가?
메린이 남자가 된다면 엄청난 야수가 될 거라고.
지금도 똑같잖아, 대머리 새꺄!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머릿속이 완전히 뿌옇게 흐려져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꺄아아아악?!”
나는 또 다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