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폭풍의 눈은 아직 고요하다 2022.05.09.
아멜리아는 자꾸 이쪽을 힐끔거리는 귀족들의 시선을 뒤로한 채, 계속 아이냑과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이따금, 속이 답답해지면서 호흡이 헝클어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두드렸다. 아이냑은 그 모습에 멈칫했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아. 더워서 그런지 드레스가 좀 답답하네.”
아멜리아는 애써 아이냑을 안심시켰지만, 심장이 헐떡이며 뛰고 있었다.
‘뭐지? 또 꽃잎이 떨어진 건가?’
그 느낌과는 달랐다. 꽃잎이 떨어지는 건 이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둔탁한 통증이었으니까. 지금은 계속 드레스가 자신을 사정없는 죄면서 숨을 틀어막는 기분이었다. 그 때문에 묘하게 움직임이 둔해진 것 같았다.
‘코르셋을 너무 조였나? 설마 호흡 곤란으로 쓰러지진 않겠지?’
농담처럼 떠올렸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멜리아는 몇 번이고 가슴을 두드렸다.
‘안 되겠어. 좀 참아보고, 안 되면 코르셋을 풀어야겠어. 평화 회담에서 쓰러지는 망신을 보일 수는 없잖아!’
게다가 자신이 주인공도 아닌데. 그런 쓸데없는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도 없었다. 그때, 이쪽을 힐끔거리던 귀족들의 시선이 다른 쪽을 향했다. 그 시선 끝에 세스가 황자가 보였다. 그는 곧장 아멜리아에게 다가와서는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런, 오늘 피오레 공이 너무 아름다워서 멀리서도 이쪽밖에 보이지 않았네? 아, 잠깐. 클리오 대공은 지금 여기 없지?”
세스가가 짐짓 무서운 척, 몸을 떨면서 농담을 던졌다. 아멜리아는 그 모습에 싱긋 웃었다.
“어쩐 일이세요? 폐하와 함께 입장하는 거 아니셨어요?”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자, 세스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폐하께서 입장 방식을 바꾸자고 하시더군. 이 자리에선 너무 위엄을 보이지 말자고 하시던데? 제국민들에게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이자고 말이야.”
아멜리아는 세스가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폐하께서, 먼저 그렇게 권하셨다고요?”
“그렇다니까. 뭐지. 그새 마음이 바뀌셨나? 폐하께서도 이번 평화 회담이 썩 달갑지 않으실 텐데 말이야.”
아멜리아는 어색한 표정으로 묘한 눈빛을 띠었다.
‘대체 폐하께서 무슨 속내를 감추고 계시는 거지?’
“그나저나 클리오 대공은 어디 있어? 진짜 안 보이네?”
세스가는 이클리트를 찾으면서 두리번거렸다.
“무사한 거지? 하긴. 무사하니 그대의 얼굴에 그늘 한 점 없는 거겠지만.”
“무사하세요. 작전은 대성공이고요. 지금은 잠시 일이 생겨서 자리를 비우셨어요. 그래도 회담 시작 전엔 돌아오실 거예요.”
“그래. 나도 몹시 재미있었어. 내가 등장했을 때, 대신관 표정이 아주 볼만했는데 말이야.”
세스가는 대신관도 찾아보았지만, 신관들만 뚱한 표정으로 모여 있을 뿐, 대신관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여기 없군. 왔으면 계속 얼굴 마주 보고 놀려주는 건데. 아이냑, 그대의 공도 몹시 컸어.”
세스가의 시선이 아이냑을 향하자, 아이냑은 정중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아니야. 그렇게 겸손할 필요 없어.”
세스가는 아이냑의 손을 냉큼 붙잡고서 눈을 반짝였다. 그의 속내는 따로 있는 듯했다.
“이로써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활발하게 교류했으면 해. 후야제까지 끝나고, 나도 바로 프리메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나한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알려줄 것도 많지. 그렇지?”
“예? 아, 무, 물론입니다.”
그런 세스가의 호기심이 아이냑은 여전히 어렵고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런데 슬슬 시작할 때 아닌가요?”
아멜리아가 그런 아이냑을 구해주기 위해 살짝 끼어들었다. 세스가는 이미 해가 많이 기운 하늘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곧 폐하께서 입장하시겠어.”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니, 제국민들의 자리에 장식된 카렌듈라 조화 너머로 은빛 실이 더 반짝거리고 있었다.
“얼른 저 폭죽도 보고 싶은데 말이야.”
그런데 위층으로 시선을 돌린 아이냑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저게, 왜 벌써…….”
불길하게 읊조린 한마디. 그 한마디를 들은 아멜리아가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쾅- 쾅- 콰쾅! 일순,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폭발음과 함께 온몸을 강타하는 파동이 휩쓸었다. 아이냑과 세스가는 동시에 아멜리아를 감쌌다. 하지만 묵직한 통증과 날카로운 공기가 사정없이 그들을 뒤흔들었다. 아멜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시뻘건 연기가 사방을 할퀴면서, 이명처럼 비명이 난무하고 있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현실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머릿속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평화롭게 회담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아, 하아…….”
아멜리아는 잇새로 겨우겨우 호흡을 토해내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이 나오질 않았다. 세스가와 아이냑도 온몸이 얼어붙은 채, 멈춰 있었다. 그들의 시선 앞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으으으윽!”
“살려줘…… 살려줘요…….”
제국민들이 차지하고 있던 위층이 완전히 폭파되어선, 쏟아진 대리석과 돌무더기에 제국민 절반이 파묻혀 절규하고 있었다. 위층과 다소 떨어져 있는 아래층은 피해가 덜했으나, 귀족들도 경악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제단에 아무나 들이니까 태양신이 노하신 거잖아! 이봐! 거기 아무도 없어? 날 구하라고!”
“악! 내 드레스! 내 드레스 망가졌다고!”
루시아의 곁에 있던 헤이츨은 그녀를 감싸곤 떨림을 누르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하지만 루시아는 그런 헤이츨을 밀어내며 치를 떨었다.
“우린 괜찮지. 제국민들이 안 괜찮잖아. 대체 이 귀족 놈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저게 눈으로 안 보여? 드레스 따위가 문제야?”
제국민들은 부상을 가늠조차 하지 못할 만큼 피해가 어마어마한데, 귀족들은 그런 제국민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우왕좌왕이었다. 루시아는 그들을 경멸하며, 헤이츨에게 외쳤다.
“카르티아 공은 밖으로 구조 요청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해 봐요. 지금 당장!”
그녀는 곧장 움직였고, 헤이츨도 제단의 입구를 향해 달렸다. 잠시 넋을 놓았던 아멜리아는 냉정한 눈빛으로 제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아수라장을 향해 달려갔다.
“피오레 공! 조심해, 피오레 공!”
아이냑과 세스가도 곧장 정신을 차리고서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시야를 방해했다.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곤 허전한 손을 쥐었다가, 폈다. 총이 있었다면, 물의 마탄이나 바람의 마탄으로 날렸을 텐데……. 제단에는 무기를 가져올 수 없었기에, 가슴이 답답했다.
‘주변 티어들에게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그들에게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순간, 달리던 아멜리아의 다리로 둔탁한 통증이 들면서 걸음이 주춤거렸다. 뭔가 점점 몸이 둔해지는 느낌이었으나, 아멜리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선, 위층과 연결된 계단이 겨우 버티고 있는 걸 발견하곤 그쪽으로 달렸다. 그렇게 가까스로 위층으로 올라간 아멜리아의 눈동자가 더욱 잘게 흔들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돌무더기에 파묻힌 사람들과 아예 매몰된 사람도 보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상하리만큼, 의식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멜리아는 그중 한 남자에게 달려가서는 몸을 흔들어보았다.
“이봐! 내 목소리 안 들려? 이봐! 정신 차려!”
하지만 남자는 의식이 없었다. 게다가 얼굴에 상처와 더불어 열꽃까지 피어 있었다. 이건 폭발에 의한 상처가 아닌 것 같았다.
“이게 대체…… 이봐. 정신 차려.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이 남자만 그런 게 아닌 듯, 그녀의 뒤를 쫓아온 세스가와 아이냑도 구조에 진을 빼고 있었다. 그때, 아멜리아의 곁으로 다가온 루시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닿았다.
“이거, 독이야.”
아멜리아는 선득해진 눈빛으로 되물었다.
“독이라니?”
루시아는 의식을 잃은 남자의 안색을 살피더니 입술을 짓이겼다.
“여기 있는 제국민들, 대부분에 독에 당한 것 같아. 몸속으로 열을 일으켜서 의식을 사로잡는 거라고. 아무리 순식간에 폭발이 일어났다지만, 이것 때문에 도망을 못 쳐서 피해가 더 큰 것 같아.”
“……누가, 일부러 이랬다고요?”
“그렇겠지. 그런데 이거, 이런 뱀의 독이 있었는데…….”
루시아의 중얼거림에 아멜리아의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뱀이라고?”
설마, 에드조프의 짓이라고? 한 제국의 대공이. 지켜야 할 제국민을 설마 이런 식으로 위험에 빠뜨렸다고!
*** 폭발이 일어나자마자, 알렉드라는 에드조프를 보호하며 외쳤다.
“바스티얀 대공 전하, 일단 여기서 피하십시오! 이건 누군가 우리 솔라를 공격한 것입니다. 황실을 노리는 걸 수도 있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알렉드라로서는 일단 에드조프를 대피시키는 것이 더 급했다. 에드조프는 끔찍한 참상 앞에 일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그런 그의 시야로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는 아멜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아멜리아…….”
알렉드라는 에드조프의 주변으로 빠르게 기사들을 배치하며 외쳤다.
“대공 전하를 지켜라. 놈들이 또 공격할 수도 있다. 입구가 봉쇄되었는지 그 또한 확인해야 해!”
“예, 공작 각하!”
알렉드라는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태양의 제단을 건드린 놈이라니. 이는 솔라를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떤 놈이!’
“대공 전하, 잠시 여기 계십시오. 저는 신성회 신관들의 안위를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에드조프는 불안하게 날뛰는 감정을 다독이며, 다시금 아멜리아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그의 곁으로 키르케가 스르르 다가왔다.
“폭풍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답니다.”
키르케의 싸늘한 한마디에 에드조프의 눈빛이 그대로 굳어졌다.
“설마. 저 폭발, 네가 한 짓이란 말이냐?”
에드조프의 바스러지는 목소리 끝에 키르케는 그저 미소를 띠며, 아멜리아를 응시했다.
‘나도 나지만, 아스란 황제까지 움직였을 줄이야.’
그렇다면 더더욱, 일이 수월하게 흘러가겠네. *** 폭발음이 들리자마자, 잠시 멈칫했던 이사나와 카마리 그리고 칼렌이 제단을 향해 달려갔다. 칼렌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티어들에게 신호를 보냈으나, 제단 주변에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입구에 다다른 그들은 걸음을 멈췄다. 이미 입구도 무너져 내려서는 황실 근위대가 입구를 열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사나는 이를 악물고서 근위대 기사를 붙들었다.
“나는 피오레 공작가의 블러드 아이리스의 단장이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사람들은 무사한 것인가?”
이사나를 알아본 근위대 기사가 혼란스러운 듯 답했다.
“저희도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일단 여길 어떻게든 열어야…….”
쿵-! 순간, 또다시 폭발음이 울리자 기사들이 사색이 되어 멈췄다.
“뭐, 뭐야. 또 폭발이야?”
하지만 폭발된 곳은 바로 막혀 있던 입구였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이클리트가 입구를 뚫고서 제단을 향해 전속력으로 사라졌다. 이클리트를 발견한 기사들은 눈을 크게 뜨며 수군거렸다.
“지, 지금 지나간 사람, 클리오 대공 전하 맞으시지?”
“설마 방금 그 폭발, 대공 전하께서 하신 거야?”
“하지만 저분이 어떻게…….”
누가 보면 제단을 폭발시킨 것도 이클리트가 했을 거라 착각할 만큼의 위력이었다. 이사나는 날카로운 숨을 삼켰다.
‘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가주님 곁에 있는 거 아니었나? 게다가 저런 위험한 상태라니. 여기서 정체를 들키기로 작정한 거야?’
카힐로가 재빨리 그 뒤를 따르면서 불안한 숨을 삼켰다.
‘지금, 겨우 참고 있으시다.’
당장 수인으로 변하지 않는 것만 해도 안도해야 할 지경이었다. 제단의 안쪽으로 달려가는 이클리트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시뻘겋게 변할 듯, 위태로웠다. 악다문 턱 끝이 하얗게 떨렸고, 그에게서 나오는 살기가 폭발했던 순간보다 더 무겁게 공기를 뒤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