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난 당신의 수호신이잖아요
(194/199)
194화. 난 당신의 수호신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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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화. 난 당신의 수호신이잖아요
2022.11.11.
그날, 체자렛 백작가에서 쓰러진 아멜리아를 발견했을 때.
이클리트는 정말로 간절하고 절실하게 단 하나만을 바랐다.
부디, 그녀를 살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자신이 걸 수 있는 전부를 걸 테니, 그녀를 살려 달라고.
‘그때, 그 소원이 정말로 그녀에게 닿았다는 건가. 그래서 그 제비꽃을 피운 거라니…….’
이제야 로사가 남긴 편지가 완전히 이해됐다.
‘대공 전하, 아가씨의 심장의 꽃을 부탁해요. 오직 대공 전하만이 아가씨의 꽃을 지키실 수 있으십니다.’
자신이 피웠기에, 지킬 수 있는 것도 자신뿐이었다.
‘대공 전하께 아가씨는 소중한 사람일 테니. 부디, 아가씨를 도와주세요. 지켜주세요.’
사랑은 사람을 가장 속수무책으로 강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목숨보다 훨씬 소중해서.
설령 아프고, 괴롭고, 쓰러질지언정.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 하나를 보고자, 모든 걸 내 걸 수 있으니까.
단지, 그것이면 충분하니까.
그저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시간의 숲이 닫혀 있는 이상, 제비꽃을 유지할 수 있는 네 힘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 여인의 생이 시한부이고.”
“시간의 숲이 열려서, 나의 힘이 강해지면. 그 제비꽃이 영원할 거란 얘기군요.”
“그래. 세상에 마법이 돌아온다면 가능한 일이지. 하지만 이클리트, 아가. 시간의 숲을 연다는 건, 그 열쇠가 된다는 건 간단한 얘기가 아니다.”
클로에는 더없이 슬픈 표정으로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열쇠가 된다는 건, 몹시 두려운 일이지만 이클리트는 너무나 쉽게 택할 것이다.
“네가 저 숲과 하나가 되는 것. 열쇠로 문을 열게 되면, 더는 그 열쇠는 필요 없어지지. 정령들이 바라는 속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얘기군요.”
이클리트는 시간의 숲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진실 앞에 몹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클리트는 목숨을 대가로 숲을 여는 것을 택한 것이다.
오히려 클로에가 다시금 이클리트를 붙잡았다.
“나는 널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런 가혹한 운명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어. 내가 기억을 잃고, 널 봉인한 이유는 내가 빈 그릇이 되어서, 너의 열쇠의 힘을 받아들여, 내가 목숨을 걸고 숲을 열려고 했었던 거야.”
“그러면 그녀를 살릴 수 있습니까?”
클로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여인을 살리려면, 내가 아닌 네가 정령과 거래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더는 고민할 이유가 없군요. 숲을 열기만 하면, 아멜리아는 살 수 있을 테니까.”
이클리트가 안도하며 입꼬리를 올리자, 클로에는 그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숨이 떨렸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된다고 하는데도, 그저 그 여인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웃어버리고 마니까.
방법이 있다며, 저토록 환하게 웃어버리고 마니까.
클로에는 체념 끝에 읊조렸다.
“정말. 그게 너의 선택인 것이냐?”
이클리트는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할 문제가 아닌, 그게 제가 태어난 이유입니다. 그게 이유라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니 저를 여기서 꺼내주십시오. 저는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하루라도 오래. 그녀 곁에 있겠습니다.”
***
아멜리아는 몸 안에서 피가 뽑혀 나가는 듯했다.
자신이 지금 내뱉는 말이, 제대로 된 말이긴 한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대공 전하가 사라져야, 이 숲이 열린다고요? 당신 목숨이, 열쇠라고?”
“내가 그대를 살리겠다고 했잖아요. 방법을 찾겠다고.”
“그래서 이게 방법이라고요? 그걸 나보고 이해하라고? 그렇게 내가 살면. 당신은? 내 곁에 당신이 없잖아!”
그가 기적처럼 자신에게 돌아온 이유는 기적이 아니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한 거였다.
그가 돌아온 사실이 기쁘면서도, 끊임없이 불안하고 또 불안했었는데.
하지만 이런 이유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제 모든 것을 잃어야 하는 거라니.
‘방심했어. 내가, 내가 너무 행복해서 방심하고 있었어…….’
아멜리아는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단호하게 외쳤다.
“안 돼요. 절대로 그러지 말아요. 난 그렇게 해서 살고 싶지 않아요. 아니, 살지 않을 거야!”
그녀는 분노하면서도, 결국 애원하는 표정으로 두 팔 가득 이클리트를 꽉 끌어안았다.
“함께하자고. 같이 하자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예요. 그러니까, 그러지 마요. 그러지 마. 숲을 열지 말아요. 지금 한 말 못 들은 걸로 할게요. 그렇게 해줘, 제발…….”
그때, 이클리트가 아멜리아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속삭였다.
“아멜리아, 당신은 나와 당신의 아이를 지켜야만 해요.”
“그게, 무슨…….”
아멜리아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차마 이클리트의 얼굴을 보지 못하자, 이클리트가 천천히 손을 뻗어선, 그녀의 뺨을 감싸고서 눈을 마주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차마 숨겨지지 못한 눈물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일렁였다.
그 모습에 아멜리아의 눈시울이 찌르르 아려왔다.
“당신은 살아서, 이 아이 곁에 있어 줘야 합니다.”
한마디, 한마디.
가시처럼 깊이 찔러 드는 말에 아멜리아의 온몸이 눈에 띄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에서 또 다른 뭔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참 기쁘고도 잔인한 말을 하고 있었다.
같이 죽겠다는 말도 하지 못하게.
그녀가 끝까지 살 수밖에 없도록.
아멜리아는 잔뜩 짓이겨진 목소리로 서러운 원망을 내뱉었다.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나한테 숨겼던 거예요? 그때. 그럼 그 치료사가 왔을 때…….”
이클리트는 처음 치료사가 아멜리아를 살피면서 했던 말을 조심스럽게 떠올렸다.
***
“몸에 피로가 많이 쌓여 있습니다.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셔야지, 무리하셔선 안 됩니다. 혼자도 아니신데…….”
“혼자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모르고 계셨습니까? 부인께서는 지금 태아를 품고 계십니다. 징조가 있었을 텐데요. 제대로 먹지를 못하셨을 테고, 잠도 많아지셨을 테고. 갑자기 몸에 큰 변화가 와서, 그 변화를 받아들이시느라 그러셨던 겁니다.”
“임신…….”
“충분히 잠을 청하시고, 많이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아가 건강하지 못할 겁니다.”
아이.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니.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채, 그저 되뇌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래, 그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고, 설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멜리아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이 아이가 그녀를 살리게 될 테니까.’
“아가, 네가 이 아버지 대신, 네 어머니를 지켜다오.”
***
“어떻게. 어떻게 그걸 나한테 숨길 수 있어요?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요!”
아멜리아는 엉망으로 날뛰는 날 것의 감정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서, 어떤 일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어쩔 수가, 없어…….”
이클리트는 두려운 마음에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아멜리아를 달래고 또 달래면서, 어떻게든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자 했다.
“나는 이제 아이의 존재가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대됩니다. 분명 이 아이는 행복할 테니까. 그대가 그토록 만들고 싶었던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고 행복해질 테니까.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이클리트는 몇 번이고, 차갑게 떨리고 있는 아멜리아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아멜리아는 그 속삭임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뭉클해져서, 이 상황에서 입꼬리가 나직이 풀렸다.
지난날, 자신의 과거 때문에 아이가 무섭고 두렵다고 말했던 그가, 이젠 아이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했으니까.
“당신도, 나의 아이도. 내가 지켜야 할 세상을 지킬 수 있어서, 나는 너무 좋습니다.”
“그렇게 좋으면, 이 아이. 당신도 봐야 하잖아. 대공 전하도 만나야 하잖아요. 우리, 우리 아이를, 당신도 보고 싶잖아…….”
이클리트는 잘게 떨고 있는 아멜리아를 끊임없이 다독였다.
이 순간에도 이클리트의 손길은 다정하고 애틋해서.
그녀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기 바빠서.
아멜리아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파르르 떨렸다.
미치도록 좋은데.
이렇게 사랑하는데.
어떻게, 대체 어떻게 그와 헤어져야 한단 말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몸을 어쩌지 못하는 아멜리아를 보면서.
이클리트는 끝까지 그녀를 염려하며, 무거운 입술을 떼었다.
“기약은 없지만. 만약 돌아올 수 있다면,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노력할게요. 약속했으니까. 오래, 오래 함께하자고.”
이클리트가 속삭이는 약속에 아멜리아는 입 밖으로 미어져 나오는 울음을 삼킬 수가 없었다.
“내 다음 탄일도 계속 축하해주고, 매일 내가 그대에게 제비꽃도 선물하고. 같이 밥을 먹고, 기념일을 챙기고, 우리 아이 머리카락도 쓰다듬어줄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돌아올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싫어…… 안 될 수도 있잖아. 못 돌아올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잖아…….”
그를 믿지만.
너무, 너무 믿고 있지만.
이건 너무 위험하고 또 위험했다.
“난 당신의 수호신이잖아요. 꼭 돌아올 겁니다. 그러니 내가 없는 동안, 당신은 잘살아줘야 해요. 약속해줘.”
그 순간, 그의 몸이 점점 깜빡거리면서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아멜리아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동공이 부풀면서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한 채, 그를 양손으로 더 세게 붙잡았다.
조금이라도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면, 영영 없어질까 봐.
조금이라도 놓치면, 이대로 사라질까 봐.
온몸으로 힘껏 끌어안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준 채 붙들고 또 붙들어도, 그의 모습이 점점 허상이 되어 흐릿해지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 안 돼요! 하지 마. 하지 마요. 그러지 마. 이러지 말라고. 가지 마요, 제발!”
“사랑해.”
이 한마디에, 아멜리아는 숨을 멈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말이었기에.
“그저 당신을 사랑합니다.”
옅어지는 그의 호흡 끝에 이 한마디만은 또렷하게 그녀에게 닿았다.
이클리트는 조심스럽게 그녀와 입을 맞추며, 마지막까지 그녀의 눈물을 한껏 받아냈다.
아멜리아는 매달리듯 그의 숨을 깊이 들이켜며, 몇 번이고 그를 불렀다.
“이클리트, 제발. 이클리트…….”
호흡이 부족해서 눈앞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괴로워도, 애타게 입술을 깨물고 겹치며, 조금이라도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그때, 몹시도 뜨겁고 안온한 힘이 그녀의 심장을 쿵쿵 울리게 했다.
그녀는 느껴졌다.
그의 목숨을 대가로 자신의 심장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이 가혹한 울림을.
시들었던 제비꽃이 다시 피어나고 있음을.
이클리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모습만 기억해줘요. 나도 그대의 웃음만 기억할 테니까.”
“하아, 하아…….”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이클리트의 얼음 목걸이가 녹아내리기 시작하면서, 이클리트의 모습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로 아멜리아의 손에 그가 잡히지 않았다.
손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움켜쥐고 또 움켜쥐었지만,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안 돼…… 가지 마. 이러지 마요. 사라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가지 마!”
아멜리아는 허공을 향해 마구 손을 뻗으면서,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눈이 녹아 사라지듯, 그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멜리아는 텅 빈 손을 꼭 쥐고서 오열조차 하지 못했다.
다 내뱉지도 못할 슬픔이 그저 맺히고, 맺혀서.
그녀의 목소리를 짓눌러서.
꽉 막힌 호흡이 끅끅 긁히며, 그가 사라진 공허한 자리를 메웠다.
움직일 힘을 잃은 그녀에게로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예전처럼 어둠 속에 홀로 남아 떨지 않았다.
어느새 익숙한 제비꽃잎이 흩날리면서, 아멜리아를 지키듯, 감싸주었기에.
아멜리아는 손바닥 위로 쌓이기 시작하는 제비꽃잎을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