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역시, ‘그놈’일까요?”
캘빈의 말에 르카이츠는 지그시 눈을 감아 내렸다.
이백 년 전, 인간들의 언어로 ‘천마 전쟁’이라는 것이 발발했다.
천계의 천사들이 먼저 검을 겨누었고, 마족은 그에 맞섰다. 오랜 전쟁 끝에 마족은 승리를 거뒀으나 온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들 역시도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마족의 수가 줄었고, 마계에 혼돈이 자리했기 때문인지 마물의 수가 늘었다.
하여 그 뒤로 마족은 마계에 칩거한 채 전쟁의 뒷수습을 하기 바빴다. 그러다 마왕의 힘이 봉인된 것이고.
캘빈이 말한 ‘그놈’은 천마 전쟁을 처음 촉발시킨 천족이다.
“루치페르.”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두통이 밀려왔다.
그 미친 또라이 새끼가 해왔던 행동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르카이츠는 콧대를 부여잡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놈은 다신 만나고 싶지 않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정말. 정말 싫습니다.”
캘빈도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놈이 확실한 것은 아니니 일단 지켜보는 것이 좋겠다.”
“네, 알겠습니다.”
“제발 그놈이 아니길 바란다.”
“저도요…….”
그들은 똑같이 어깨를 파르르 떨며 시선을 피했다.
루치페르가 강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이 나온 게 아니다. 그는 천족의 우두머리라는 직책과는 달리 실력은 크게 뛰어나지 않았으니까. 그저 루치페르는…… 아, 생각하지 말아야지. 캘빈은 어깨를 말며 생각을 흩뜨렸다.
“아, 그리고.”
르카이츠가 캘빈을 향해 물었다.
“가장 작은 호문쿨루스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네. 유물의 귀속과 소환술에 대해 전해 들었습니다.”
“그뿐인가?”
캘빈은 ‘세키나’라는 호문쿨루스의 존재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그 아이의 정보를 열거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트와 마르틴과 유독 가까이 지내는 것, 영지에 나가 1장로를 만난 것, 다른 호문쿨루스들과의 독자적인 친분 관계를 만든 것 정도를 알고 있습니다. 이 이상으로 알아볼까요?”
르카이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더 알아보아라.”
지고한 마왕께서 왜 그런 하찮은 호문쿨루스를 조사하라 하시는 걸까. 여러 가능성을 머리에 띄운 캘빈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첩자인지 살펴보라는 말씀이십니까?”
르카이츠의 눈이 조금 커졌다.
첩자?
첩자라고?
-근데 이거는 진짜 진짜 마법 안 통하거든여. 구니까 가만히 계세여.
-이런 상처에 울면 상여자가 아니져.
첩자가…… 그런 말을 하나? 르카이츠는 살짝 머뭇거렸다.
“첩자는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중얼거리자 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왜 지켜보라고 하시는 건지……?”
뭐라 말해야 할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고, 하지만 그 숨기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 옆에 붙어서 지켜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진 않았다. 르카이츠는 그저 그 호문쿨루스가 궁금한 것이었고, 궁금증만 해결되면 끝이었으니까.
“지켜보면 알 것이다.”
그래서 르카이츠는 간단히 명령했다. 캘빈은 의아했지만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툭툭 치며 대답하는 캘빈을 보며 르카이츠는 흐음 비음을 내뱉었다.
“너도 리아트 놈처럼 그것에게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농담도 심하십니다.”
캘빈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는 마왕님 외 다른 존재를 혐오합니다. 말을 섞는 것도 싫습니다. 쳐다보는 것도 짜증 나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호문쿨루스에게 넘어갈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캘빈은 상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싫습니다. 절대.”
확언하는 캘빈을 보며 르카이츠는 끌어올렸던 입꼬리를 내렸다.
“제게는 마왕님만 있으면 됩니다. 그 외는 죽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고요.”
그의 올곧은 충성심은 나쁘지 않았다. 다 좋았다. 다 좋은데…… 가끔 무서울 때가 있다. 르카이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서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
세키나는 니샤의 방문 앞, 복도를 배회하고 있었다.
환수의 처리를 부탁하기 위해 온 것까지는 좋은데, 니샤가 자신을 끔찍하게 싫어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돌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왜냐고?
‘자꾸 커져.’
제 어깨에 붙어있는 환수 덩어리가 조금씩 몸집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세키나의 마력을 뽑아먹고 있는 것 같은데, 이대로 둔다면 마력을 쪽쪽 빨아 먹히거나 아니면 세키나가 어쩔 수 없이 소멸시켜야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 환수를 키워 자신의 사역마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에, 세키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니샤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문 두드리면 쌍욕 할 거 같은데.’
세키나는 손톱을 자근자근 깨물며 다시 복도를 뱅뱅 돌았다.
그때였다.
“아오!”
니샤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야.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 거슬리니까.”
“앗. 문 열어줬넹. 고마어!”
짜증을 듬뿍 담아 소리친 니샤였지만 세키나는 그런 짜증에 굴하지 않았다. 냉큼 방 안으로 들어간 세키나는 잽싸게 소파에 몸을 앉혔다.
“하…….”
니샤는 이마를 짚으며 세키나를 노려보았다.
“뭐. 왜 왔는데. 셋 셀 동안 용건 안 말하면 쫓아낸다. 하나, 둘…….”
“와. 지짜 승질 급하다, 너.”
“너가 아니라 언니.”
“야야. 너 이거 보이지?”
니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세키나는 제 어깨에 매달려 있는 환수 덩어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니샤는 왈칵 짜증이 났지만 그보다 호기심이 먼저였다. 니샤의 두 눈에 환수 덩어리가 담긴다.
“그거…… 환수냐?”
“웅. 어제 보쓰가 힘을 쫌 넣어 줘꺼든. 그러니까 이케 대써.”
“보스?”
“웅. 마왕님.”
니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마왕이 세키나에게 뭔가를 해 줬다고? 왜?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니샤는 의뭉스러움을 담은 시선으로 세키나를 바라보았지만, 세키나는 개의치 않았다.
“요거 이대로 데리고 다니면 안 대잔아. 그래서 좀 모양을 바꾸고 시픈데. 아써가 말하기를 얘네한테 자아를 주면 변형시킬 쑤 이때. 넌 할 쑤 있지 안아?”
니샤는 헛웃음을 뱉었다.
“어. 할 수 있긴 하지.”
상급 정령과의 계약까지는 무리지만 불러내는 것까지 가능할 만큼 실력 있는 정령술사인 니샤는 당연히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 내가 왜 해 줘야 돼?”
굳이? 내가? 왜? 이 얄미운 애를 도와줘야 하나?
니샤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딱였다.
“난 너 도와주기 싫은데.”
“너무해.”
세키나는 눈에 띄게 실망했다.
솔직히 니샤는 자신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니샤가 변절하고 나서 마왕의 힘을 흘려보내지 않았던가. 그걸 다른 마족들에게 들켰으면 그대로 사형이었을 텐데, 세키나가 힘을 흡수해줘서 니샤는 들키지 않은 거였다.
그런고로 세키나는 니샤의 목숨을 구해 준 건데, 이런 작은 부탁도 들어주지 않는 니샤가 너무했다.
“가튼 호문쿨루스끼리 친목을 다지고자 돕는다고 생각하눈 건 어때?”
“지랄하네. 꺼져.”
세키나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 이거 델고 다니면 신관들한테 들킨다구! 그럼 큰일 나는 거자나!”
“너만 큰일 나는 거겠지. 난 상관 없는데?”
“들키면 너가 준 거라고 말하 꺼야!”
“미친놈.”
니샤는 세키나의 널브러져 있는 다리를 쭉 잡아당겼다.
“꺼지라니까.”
“아아! 도와줘!”
“싫어.”
“왜?”
“귀찮아.”
“아아아! 진짜 너무해! 너무해!”
질질 끌려가던 세키나는 가구를 붙잡으며 버텼다.
“너, 애냐?”
니샤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세키나의 다리를 팍 놓았다.
“진짜 내가 도와주길 원하면 내가 혹할만한 뭔가를 가져 와.”
세키나는 그제야 생떼 부리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넌 머 조아하는데?”
“꼬박꼬박 언니라고 부르는 착하고 순진한 동생.”
하…… 내 나이가 몇인데 너한테 언니라고 부르냐. 나는 그런 거,
“알아써, 언니. 언니는 그리구 또 멀 조아해?”
잘한다.
세키나는 니샤에게 굽실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그건 착한 동생이 알아 와야지. 언니가 굳이 설명해 줄 필요가 있을까?”
“……또라이 새끼.”
“동생. 다 들려. 착한 동생은 욕 같은 거 하는 거 아니야.”
니샤는 꿍얼거리는 세키나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머리 잘 굴려서 생각해 봐.”
“야! 이케 던지는 게 어디써!”
그리고 열린 문 너머로 세키나를 내던졌다.
“내일까지야. 내일까지 내 마음에 드는 거 안 가져오면 난 평생 안 도와줄 거야.”
사악하게 웃은 뒤 문을 닫는 꼴을 보며, 세키나는 주먹 쥔 손을 파르르 떨었다.
“지짜 짱나네…….”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보여줘야겠다.
세키나는 곧바로 세바스찬을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