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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님이 만드는 파멸엔딩 (110)화 (111/149)

110화

세키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이랑 똑같아.’

처음 이곳에 빙의했을 때, 그리고 처음 드한을 만났을 때. 그때 드한이 나에게 보여 주었던…… 그 표정.

백 년 가까이 전의 일이지만 그 표정만큼은 잊을 수 없다.

드한이 내게 비춰 주었던 사랑의 첫 시작, 그리고 내가 그에게 보여 주었던 사랑의 첫 시작이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돌겠네, 진짜.’

그래서 더 미칠 지경이었다.

드한과 자신은 다른 시나리오를 진행하고 있다.

드한은 루치페르가 만들어 놓은 마족 섬멸 및 세계 멸망 시나리오에 속해 있고, 세키나는 그런 드한을 막고 루치페르를 쓰러뜨리는 시나리오에 속해 있다.

그래서 세키나는 ‘용사의 연인’이었던 타이틀을 떼어 낼 수 있었던 거다.

한데, 여기서 또다시 드한이 날 좋아하게 되면?

그럼 시나리오가 겹치게 될 테고, 또 ‘용사의 연인’이 되어 절명하게 되지 않겠는가?

세키나는 허허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인생 뭣 같네.’

죽어도 상관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의적으로 죽음을 선택했을 때다. 지난 90년처럼 시나리오대로 시켜서 죽게 되는 건 사양이다. 절대.

“나눈 너랑 할 얘기 업는데.”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선 세키나는 부러 냉정하게 대꾸했다.

“나 바뽀. 구니까 나가 줘쓰면 조케써.”

하지만 드한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빙그레 웃은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마족이라는 걸 알고, 이걸 누군가에게 알리면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후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십니까?”

협박한 거, 누가 봐도 아서다. 아서가 아닐 수 없다.

세키나는 드한의 시선을 피했다.

“머…… 먼 생각 했는데.”

“마족과 인간은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내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인간 같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사실은 마족이었고, 마족 같다 생각했던 이들이 사실은 인간이었으니까요.”

그는 자신의 마을을 습격한 이들을 마족이라 생각했다. 신전에서 그렇게 말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사람으로서 이런 짓을 할 수 없다고. 이건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그러니 이 모든 건 마족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제 현실도피는 끝났다. 인간이지만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이 있는 만큼, 마족이지만 마족 같지 않은 이들도 있는 것이다. 마음이 한층 편해진다.

“그래서 더더욱 궁금해졌습니다.”

그는 세키나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서 앞으로 제가 배우게 될 것들이 무엇일지.”

“…….”

아, 어쩐지 이상한데.

세키나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바로 뒤에 협탁이 있어 걸음이 막히고 말았다.

드한은 그런 세키나와 한 뼘 거리에 서서 눈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에 과거의 기억이 덧대진다.

드한을 처음 사랑했던 순간과, 드한에 의해 죽었던 순간, 그에게 구원을 받았던 순간, 또한 그렇기에 절명했던 순간…… 모든 기억들이.

“세키나 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

“부디 허락해 주세요.”

***

“흐음.”

문밖에 서서 방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서는 비음을 내며 팔짱을 꼈다.

“참 재미있는 놈이란 말이지.”

신전의 종자 주제에, 우리가 마족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당당히 말을 하는 꼴이라니.

‘곧바로 유리엘에게 달려가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줄 알았는데.’

드한이 세키나와 르카이츠의 대화를 엿들은 이후, 아서는 계속 드한을 감시했었다. 혹시라도 유리엘에게 사실을 털어놓을까 봐. 그러면 바로 죽여 버리기 위해서.

하지만…….

‘생각보다 꽤 똑똑해.’

유리엘에게 털어놓기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선택했고, 생각한 결과를 세키나에게 공유하며 수족이 되기를 청한다.

이번 일행에서 세키나의 역할과 무게가 얼마나 중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세키나가 조른다면 어쩔 수 없이 저놈을 받아들이게 되겠지.’

우리 중에 세키나를 이길 수 있는 이는 없으니 말이다.

참 영악하고, 또 재수 없는 놈이라고 아서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서서히 변해 가는 상황에 대한 짜릿함 때문이리라.

“뭐, 이건 나 혼자 결정할 사항이 아니니까.”

중얼거리던 아서는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마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주변 환경이 변했다.

그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한껏 느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르카이츠를 바라봤다.

“여기까지 오셔 놓고 또 마물 사냥이십니까?”

“…….”

르카이츠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들고 있던 대검을 쿵, 내려놓았다. 아서는 빙그레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오셨으면 함께 다니시지요. 수도에서부터는 같이 움직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대로, 일행은 수도에서부터 르카이츠와 함께 다니기로 했었다. 하지만 르카이츠는 세키나의 앞에만 종종 나타날 뿐 합류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가 인간을 싫어해 수도에서도 떨어지려는 것인가, 싶었지만 계속 보다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아서의 입꼬리가 둥그렇게 올라갔다.

“아니면, 그러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르카이츠의 얼굴이 반쯤 돌아갔다. 비스듬하게 아서를 내려다본 그는 쯧 짧게 혀를 찬 후 아서를 지나쳐 걸어갔다.

“돌아가지.”

“네, 분부대로.”

아서는 르카이츠의 뒤를 따라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마법을 쓴 덕분에 마기가 살짝 일렁거리기는 했으나 이 정도는 충분히 감출 수 있다. 상황을 정리한 아서는 다시금 르카이츠에게 다가갔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만.”

르카이츠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서는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

“설마 제가 숨기고 있는 걸 알아채셔서?”

아서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 뭐. 드한이라는 신전 종자에게 우리의 정체를 들키게 되었습니다. 아! 이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마왕님과 세키나 님이 대화하는 걸 그놈이 엿들은 것뿐이니까.”

르카이츠의 보랏빛 눈동자가 아서에게 닿는다. 끔찍하리만큼 사나운 빛을 머금고 있는 그의 눈은 오금이 떨릴 정도로 매서웠다.

아서는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래서, 그놈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까 하고 있는데요. 세키나 님께 감시를 맡기고요.”

“안 된다.”

단호한 그 대답에 아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가 안 된다는 건가요? 그놈을 끌어들이는 거? 아니면 세키나 님께 맡기는 거?”

“…….”

잠시 동안 침묵하던 르카이츠는, 이내 한숨을 토해내듯 뱉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 호문쿨루스를 믿지 못한다.”

그러고는 쌓아 두었던 말을 터뜨렸다.

“그것이 만들어진 존재라고? 만들어진 지 고작 3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아니, 아니…… 그럴 리 없다. 분명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일 터.”

중얼거리듯 말을 짓씹은 그는 이를 부득 깨물었다.

-저눈 보쓰의 부하인데, 보쓰한테 숨기는 게 이쓰면 안 대져.

아니.

그건 틀림없는 거짓이다.

그 아이는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 어쩌면 내가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을.

르카이츠의 머리가 팽팽 굴러갔다.

살려 두었다가 우리에게 해가 된다면?

지금 죽이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나?

지금이라도 그 호문쿨루스를 없애면……!

“확실히 세키나 님은 뭘 감추고 있긴 하시죠.”

그런 르카이츠의 상념을 끊어낸 건 아서의 여상한 대꾸였다.

“그런데, 그래서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우리에게 중요한 걸까요?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걸까요? 그건 아닐 것 같은데요. 이제껏 세키나 님은 우리를 위해 행동하셨잖아요.”

“…….”

르카이츠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모두 다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아서는 으쓱 어깨를 올렸다.

“뭐, 정말 세키나 님이 우리를 배신하려 하는 거면…….”

“…….”

“배신을 당해 주어야지요. 어쨌거나 저는 그분을 신뢰했고, 신뢰에 대한 대가를 함부로 요구할 수는 없는 거니까요.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요.”

“부단장.”

르카이츠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아서의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다. 언제는 그 어떤 마족보다도 더 마족처럼 행동하면서, 또 언제는 이렇게 마족으로서 이해가 안 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과거 그가 사랑하는 이를 선택했던 때처럼 말이다.

르카이츠는 아서의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신뢰라는 건 뒤를 맡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으니까.

지금의 그는 세키나에게 자신의 뒤를 맡길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세키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선택은 단 하나였다.

“그 호문쿨루스를 당장…….”

죽이는 것.

그리 생각한 르카이츠의 입이 열리는 그때였다.

“아닌데!”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쌍둥이, 메르데스가 크게 소리쳤다.

“세, 세키나는 거짓말 안 하는데!”

“세키나가 우리 엄청 챙겨 주는데!”

“덕분에 우리 잘 살고 있는데!”

저 멀리 있는 쌍둥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세키나 우리 배신 안 하는데! 내가 믿는 만큼 세키나도 우리 믿어 주는데!”

“세, 세키나 죽으면 나도 죽을 건데!”

르카이츠의 얼굴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쌍둥이의 말은, 흡사 인간들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내뱉는 신의니 뭐니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반쪽은 마족인 놈들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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