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늘은 친함이 없다 (2)
“... 해서 어찌 되었소?”
닭의 암수 바꾸는 재주를 부리다 소문 자자한 보우를 대면케 된 일까지 꺽정이가 그대로 털어놓자, 가만 듣던 서림이 마저 말해달라 채근하였다.
“어찌 되긴 뭐가 어찌 돼. 우리 사형께서 그런 말 한두 번 듣는다고 주눅 드실 분인가. 도리어 면박 주시기를 이게 요망한 짓이라 관두어야 한다면 그간 한양 도처에 변고 일어났을 때는 왜 가만 있었느냐 꾸짖으시니 얼굴만 붉히다 돌아갔지.”
병해와 함께 상경할 때 꺽정이는 이지함에게 말 전해두기를, 이참에 서림이 부려서 서울에 집 한 채 마련해두면 좋지 않겠느냐 하였다.
마침 서림도 방납 장사를 올해는 더 크게 벌여볼 생각을 품고 있었고, 또 훗날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경아전(京衙前, 중앙 관아에 속한 이속의 통칭)들과도 연줄 만들어놀 필요도 있었다.
아전들 다루는 일은 이미 사임당 신씨에게 열심히 전해주었고 – 그간 떨어지는 수익 많다고 봉산 아전들 부러워하던 재령 아전들은 곧장 마음을 고쳐먹었다 - 저는 의민당 살림과 각종 장사일에만 전념하겠노라 공언도 하였기에 직접 상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엄개(嚴加伊)라는 근처 양민 이름을 빌려 봉산 경주인(京主人)네 옆에 집 한 채 마련해두었는데, 올라와 보니 꺽정이가 먼저 와서 턱하니 앉아있던 것이다.
“듣기로 그 보우라는 중도 성미가 보통은 아니라던데...”
“뭐, 백성들에게 공덕 베푼 고승을 핍박하는 모양새가 되었으니 절로 몸을 뺀 것이겠지. 그 정도 눈치도 없으면 중 노릇도 못하지 않겠소. 아마 지금쯤 봉은사 돌아가서 씩씩대며 우리 사형 괴롭힐 방도나 고민하고 있을 테요.
말로 해결하기에는 아직 우리 병해 스님 쪽에 변변한 뒷배가 없지 않소. 그때까지는 어디 차분히 앉아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손해만 날 일이지.”
“변변한 뒷배라 하면?”
“모주님에게 얘기 못 들었소? 바로 그 악명 자자하신 우리 대비마마를 뒷배로 삼을 생각이오.”
어마어마한 이야기였지만, 이미 의민당과 지내며 평양 아전 하던 시절보다 배포가 꽤 커진 서림이었기에 그러려니 하였다.
“아, 그래서 지금 안채에 그 내시가 들어와 있던 거였구려.”
“그렇지. 아마 지금 우리 사형께 대비께서 언제 어디어디 절에 불공 드리러 가시는데 한 번 찾아와봄이 어떻겠느냐 하고 있을 게요.”
“이것 참. 처음 봉산 올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싫소? 아니잖소.”
그 뒤로는 다시 의민당 운영하는 이야기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지금 큰 사업은, 머릿수를 불리는 데 있었다. 한철 팔리고 말 줄 알았던 검무 추는 칼이, 의외로 봉산 여염집 아낙네들에게까지 퍼지고 있어서 – 봉산 남정네들에게는 두려운 일이었다 – 대장간 벌이도 나쁘지 않았다.
병장기 문제도 해결된 셈이요, 일거리로 따지면 황해도 남쪽에서는 이제 감영 있는 해주 한 군데 빼면 모두 의민당에게 도적 잡는 일을 맡기는 중이라 역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사람, 특히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이들이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지금 세상에 무슨 도사니 떠돌이 중이니 하는 그런 인사들도 꽤 있지 않소?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 소식 통하는 길이 있을 테고. 그들을 끌어들여 소패두(小牌頭, 소두령)로 삼음이 어떻겠소?”
“아니, 그치들은 미덥지 못하오. 지금 하는 대로 무지렁이 장정들 중에 쓸만한 놈들 키우는 쪽이 훨씬 낫지.”
“뭐, 당수님께서 이쪽은 훨씬 잘 아시니... 아, 그리고 모주님께서 슬슬 산채가 좁아지고 있는데 더 넓힐지 말지도 여쭙고 오라 하셨소이다.”
“여기서 더 넓어지면 반드시 중간에 새는 일이 발생할 게요. 가뜩이나 윤원형이가 슬슬 우리네 의심하고 있을 듯한데, 차라리 일전에 말했던 대로 여기저기 산성에 나누어 두고, 우리가 도적 잡으러 다닐 때 거점으로 쓸 수 있게 채비하는 쪽이 좋겠소.”
“어디 보자... 음, 그렇지. 흐흐... 좋습니다, 당수.”
“또 뭔가 음험한 구상을 하는 게로구려.”
꺽정이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영 민망하였는지, 서림이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긁었다.
“음험하다 할 것까지는 없고... 당장 봉산 정방산성이나 재령 장수산성 같은 데들이 죄다 퇴락해 있지 않소? 그런 곳 보수하는 일이라 하면 마땅히 관의 곳간을 헐어야 할 테요. 하여 또 세금 날로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소.”
“음험한 것 맞네, 뭐.”
그 이후로는 그냥 시덥잖은 이야기나 나누고 있는데, 비로소 안채 문이 열리고 관복 입은 내시 하나가 총총 걸어나갔다.
“일이 잘 풀리신 모양이오?”
뒤이어 나온 병해에게 꺽정이가 물었다.
“뭐, 잘 풀렸다면 잘 풀린 셈이다. 돌아오는 보름날에 자전께서 봉은사에 행차하신다니, 그때 찾아오라 하였다.”
“잠깐, 봉은사라면, 그 보우가 주지로 있는 곳 아니오?”
“그래, 일전에 못 다한 이야기를 거기서 결착을 내야겠지.”
“보름이면 얼마 남지 않았구려. 보우도 보우지만, 대비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으려면 사형께서 고생이 많으시겠소.”
“대저 내가 부리는 도술이라는 것은 실은 사람 눈과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그저 공력을 더 들이면 될 뿐.”
“뭔가 수가 떠오르신 모양이오?”
“그렇다. 사실 한창때 부려보고 싶었던 ‘도술’이 있었다. 비용도 만만치 않거니와 반드시 힘센 사람 여럿이 거들어야 하기에 차마 실행은 못 하였건만, 지금에 이르러 기회를 얻었으니 절묘한 일이다.”
무엇인지 궁금하여 꺽정이도, 서림도 곧장 물었는데, 병해는 빙긋 웃으며 아직은 말해줄 수 없다 하였다.
“생각만 하고 실제로 되는지 증험해보지는 못하였으니, 다소 시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철사와 철쇄(쇠사슬)가 필요하다. 많이는 필요 없지만, 반드시 철사장(鐵絲匠) 손을 타야 할 것이다.”
“... 라고 하시오.”
꺽정이가 그대로 말 받으며 서림을 쳐다보았다.
두리번거리던 서림이가 한숨 푹 내쉬었다. 하기야, 저 당수님께서 직접 시전 바닥을 헤집어놓으며 철사장 찾게끔 하는 것보다 자신이 손수 나서는 쪽이 여러모로 마음 편할 테다.
“명 받들겠습니다, 스님. 아이고, 내 팔자야.”
“대신 이 일이 잘 되면 천하에 없던 구경을 하게 될 테니 너무 원망만은 말게.”
봉은사 경내 밝힌 등불이 훤하여, 마치 휘영청 뜬 보름달과 겨루는 듯하였다.
초파일은 한참 남았건만 벌써 이리 성대하게 등불을 켜는 까닭은 바로 궁궐의 귀한 분께서 왕림하셨기 때문이라.
“이야, 저것 보시오, 사형.”
“뭐, 등불 말이냐? 너도 어디 북변 산골 살다 온 사람은 아닐 텐데 뭐 저런 것을 신기하다 하느냐.”
“아니, 그것 말고. 저 등불 사이사이에서 우리 감시한답시고 서 있는 중들 말이오. 제법 건장들 한데, 아마 보우가 부리는 치들인 모양이오.”
“그이도 네 무위(武威) 보았으니 어찌 대비를 안 하겠느냐. 더구나 이렇게 도성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저 잘난 줄 아는 유생들이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일도 적지 않고, 또 이런저런 노역도 있는 법이다.”
중인 척 하는 잡인 하나와 양민인 척 하는 도적 하나가 그렇게 떠들며 다가오니, 멀찍이 서서 기다리고 있던 내시가 곧 손짓을 하였다.
“그럼 다녀오마.”
“여차하면 부르시오.”
“어지간하면 안 부르마. 뒷감당하기가 무섭다.”
내시를 따라 발걸음 옮기며 병해가 말했다.
절 안쪽으로 계속 걸어들어가니, 불사로 북적이던 것은 딴세상인 양 조용한 가운데 홀로 불 켜져 있는 전각이 보였다.
그 앞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으니, 바로 보우였다.
“내 그대와는 더불어 할 이야기가 많이 있을 것이오. 바라건대 망령된 말은 내어놓지 마시오.”
‘소승’이니 ‘도우(道友)’니 하지 않고 저리 말하니, 병해를 보는 감정 좋지 않음을 쉬이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걱정 마시지요. 떠돌이 땡중이 과분한 은덕을 입었거늘 그것만으로도 마땅히 감사히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 좋은 고승처럼 존대하며 병해가 고개를 숙이니, 일전의 일이 떠오른 보우는 다시 올라오는 분기를 겨우 다스렸다.
곧 섬돌 밟고 당(堂) 안에 드니, 여인 하나가 여러 상궁에게 둘러싸인 채 앉아있었다. 자비심과는 그리 큰 연이 없음에도 자전(慈殿)이라 불리는 대비였다.
“그대가 병해인가?”
대비가 곧장 물었다. 하늘 아래 무서운 것 없이, 네깟 것이 대답하지 아니하고 어찌하겠느냐는 기세였으니, 세간 사람들의 눈과 귀가 모두 멀지 않고서야 어찌 여인이 임금으로 들어앉았다는 말을 하지 않겠는가.
“예, 하해와 같은 은덕으로 귀한 자리를 마련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옵나이다.”
“그대가 법력을 베풀어 여러 백성을 도왔다 들었다. 그것이 사실인가?”
“그렇사옵나이다. 소위 변고와 재이의 설을 내세우며 민심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있기에 이를 안타깝게 여겨 보잘것없는 솜씨를 조금 보였나이다.”
“보잘것없는 솜씨라? 닭이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자웅(雌雄)을 그리 쉽게 바꾸는 것을 어찌 보잘것없다 하겠느냐.”
“소승의 법력은 허공섭물(虛空攝物, 염동력)에 그칠 뿐 호풍환우(呼風喚雨, 비바람을 멋대로 부름)에는 미치지 못하며, 천리를 내다보지 못하고 그저 한 길 앞 사람의 마음만을 살필 수 있을 뿐이니 어찌 보잘것없다 아니하겠나이까.”
그 말에 대비의 마음이 절로 동했다.
“마음을 살핀다?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나의 마음속 근심을 헤아려 살필 수 있는가?”
“이는 그리 고매한 법력이 있지 않아도 쉬이 알 수 있을 것이옵나이다.”
옆에 앉은 보우는 걱정 반 노여움 반으로 좌불안석이었는데, 병해는 태연자약하게 읊어나가듯 답했다.
대비의 근심이라 하면 멀리는 금상 보위에 오르신 이래 온갖 사특한 낭설이 퍼져 아직도 주워담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토록 불공을 올렸건만 하늘도, 부처님도 무심하시어 나라에 재앙이 연달아 일어나고, 여전히 금상을 마뜩잖게 여기는 선비들은 이 모든 것이 대비전 때문이라 떠들곤 하였다.
대비가 전횡하니 척신들이 덩달아 날뛰고, 윤원형과 그 일파가 바른 선비를 모두 죽이거나 내쫓으니 나라는 절로 무너져가며, 하늘 또한 노여워하여 연달아 재변으로써 이를 경고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다.
이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대비의 숙원인 정릉(靖陵, 중종의 묘) 옮기는 일을 추진하고자, 그간의 재이는 모두 선왕의 능묘를 잘못 정했기 때문이라는 설을 풀었지만 그닥 효험이 없는 것이었다.
나라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쥔 것 같지만, 어찌하여 풀리는 일 하나 없는가. 어찌하여 임금 위에서 임금 노릇한다 손가락질 받는 자신이, 사랑하던 지아비 곁에 옛 부인 대신 묻히고자 하는 그 마음조차 이룰 수 없는가.
그 답답한 심정을 눈앞의 중이 마치 훤히 꿰뚫어 본 것처럼 늘어놓고, 대비의 낯빛 따라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꾸짖으니,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아 대비는 병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대저 천지 간의 재앙은 안타깝게도 항상 일어나는 것입니다. 천기가 스스로 지나고 또 오니, 이에 따라 작게는 비와 눈이 내리고 크게는 일식이나 지진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흔하고 드문 것이 다를 뿐 어찌 이를 괴이하다 부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흉험한 말을 늘어놓으며 대비전께서 계시기에 나라에 흉년 닥친다 하는 자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거짓 선비들이라 하겠습니다.”
“대사의 말이 참으로 옳다.”
어느새 ‘그대’가 ‘대사’로 변하였는데, 정작 대비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에 대응하시고자 천릉(遷陵, 능묘를 옮김)의 명분으로 재이의 논변을 꺼내시니, 이 또한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요설(妖說) 늘어놓느냐!’ 하는 호통은 마음 속에 맺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곧장 간곡한 물음이 나왔다.
“잘못이라니?”
“지금 어리석은 유생들이 떠들기를,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니 음양의 도가 무너졌다며 민심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저들의 어리석음만을 뽐낼 뿐입니다. 태백성이 낮에 뜨는 것이 진실로 무슨 의미인지, 어찌 그들이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대는 아는가?”
“이르기를, 태백이 낮에 나타나 태양과 밝기를 다투면, 큰 나라는 약해지고 작은 나라는 강해지며, 여주는 번창한다(晝見與日爭明 彊國弱 小國彊 女主昌) 하였습니다.”
“작은 나라가 강해지며, 여주는 번창한다...”
앞에 세 글자가 붙었을 뿐인데 그 뜻이 크게 달라졌다.
어차피 나라의 여주(女主)라 매도당할 것이라면, 정말로 주인 노릇을 잠시라도 하면서 치적을 남김이 가할 것이다.
어느새 그렇게 치적으로써 칭송받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저에게 못할 말을 몰래 하던 대신들이 진심으로 탄복하며 고개 조아리는 것이 그려진다.
“그렇습니다. 우리 동방은 소국입니다. 길흉을 따짐이 어찌 대국과 같겠습니까? 어리석은 자들은 대국과 소국이 천기 운행의 영향을 다르게 받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라가 문헌을 갖추고 선비를 높인 지 일백 하고도 오십 년이 넘었습니다. 어찌 그런 용렬한 자들만 있겠습니까. 감히 소승이 생각건대, 알면서도 오히려 뒤집어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재이의 논변으로써 이에 대항하려 하시니, 올바름으로 잘못을 막아도 부족할 지경이거늘 잘못으로 잘못을 막는 격이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근심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면 내가 어찌하면 되겠는가? 당장 이 능침의 일만 하여도, 초야의 서생들뿐 아니라 조정 중신들조차 내 뜻을 알아주지 않는 자들이 많다. 그들을 어찌 움직여야 하겠는가?”
“소승이 일개 중으로서 어찌 나라의 중대한 일을 거론하겠습니까?”
이쯤에서 병해가 은근히 주저하는 시늉을 하니, 이미 홀린 대비는 알지 못하고 곁을 지키는 보우만 답답해 할 뿐.
“아니다. 지금의 문답만으로도 그대의 식견이 깊음을 알겠다. 그대와 같은 자가 출사하지 않고 법문에 들어, 마침내 이렇게 나와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인연이 아니랴?”
“하면 말씀 올리겠나이다.
소승이 감히 아뢰옵건대 대비께옵서는 한없이 귀하고 또 권세 있는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 자리에 앉으시어 백성의 마음을 능히 끌어올 수 있으시거늘, 가만히 계시면서 어리석은 무리가 난언(亂言)으로 민심 어지럽힘을 방관하고 계시니 근심이 끊어지는 날이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능침(陵寢)의 일만 하여도, 훨씬 빠르고 쉬운 정도(正道)가 있는데 이를 택하지 않으실 뿐입니다. 정릉을 선릉 옆으로 옮겨, 이곳 봉은사가 두 능묘를 함께 돌보도록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국용(國用)을 아끼고 백성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허여하여 주신다면 소승이 법력을 크게 펼쳐, 의심하는 자들의 입을 막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들의 눈을 트이게 하겠나이다. 그리하여 반드시 재변을 입에 담으며 자전을 두고 흉험한 말을 하는 자들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겠나이다.
그때 대비께옵서는 내수사의 재물을 풀어, 그 공사를 맡는 여러 백성을 위무하고 진휼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그 은덕을 찬양할 것이요, 백성과는 한없이 멀면서 저들 편할 때만 백성을 거론하는 무리들은 그 입이 막힐 것입니다.”
“내 오늘 대사를 만나 참으로 눈과 귀가 트이는 듯하구나. 그러나 그리하면 내수사의 재물도 적지 않게 들어갈 터인데...”
병해의 말에 홀리면서도 내수사의 재물 걱정은 하는 대비였다. 허나 안성과 죽산 일대의 인색한 시주들 주머니를 털면서 칠장사 재정을 거의 두 배로 늘린 병해였기에, 그 주저하는 마음 또한 그리 어렵지 않게 파훼되었다.
“그렇습니다. 물력이 적지 않게 들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흔한 장사치도 오늘 백금(百金)을 내어 내일 천금(千金)을 얻는다면 주저없이 저의 재물을 처분할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재보인 민심은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천금을 흩뿌리면 반드시 배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내 비로소 근심이 없어졌다. 그간 불사 올렸던 덕을 금일에 이르러서야 보는구나.”
절로 흐뭇해진 대비는 이런저런 포상을 꺼냈는데, 병해가 공손히 모두 사양하니 대비의 마음이 또 한 차례 기울었다.
일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다시 부르겠노라 약조를 받고서 대비는 떠나고, 병해와 보우만 남았다.
행차가 봉은사 떠나는 것을 보자마자, 보우가 병해를 홀로 불러내었다. 주변에는 예의 건장한 중들 여럿이 대열 갖추어 서 있었다.
“땡중 하나 맞이함에 이렇게 많은 비구께서 나와주시니 겸연쩍은 일이구려.”
그러나 보우는 거리낌 없이 말을 꺼냈다.
“이 말법(末法) 시대에 비로소 불교 양종(兩宗, 교종과 선종)이 다시 일어설 단초를 얻었소. 그대가 사사로운 욕심으로 그것을 끊는 것을 나는 차마 참고 볼 수 없소.”
“하면 그대는 능히 법문을 일으킬 수 있다 여기오?”
이제 대비의 마음을 얻었으니 굳이 보우를 공대할 필요도 없던 병해도 당당하게 반문했다. 보우가 노기 삼키며 답했다.
“그렇소. 이렇게 얻은 위세는 오직 우리 불가를 위하여 쓸 것이오. 반드시 승과를 부활시키고, 도첩(度牒)의 제도를 다시 일으켜 떳떳하게 법통(法統)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할 것이오. 그러니 당장 도성을 떠나시오. 자전께는 내가 대신 변명을 해 드리겠소.”
“하하! 고작 그것으로 흥법(興法)을 논한다? 선비들 가운데만 어리석은 자들이 있는 줄 알았더니 우리 중들 사이에도 참 그런 자들이 많구려.
숭유억불이 국초 이래의 기조이거늘, 어찌 대비 한 분 위세로 이를 되돌릴 수 있겠소? 오히려 그 위세를 빌려 전횡한다고 선비들의 미움만 더 사고, 곧장 한없는 법난(法難)만 겪게 될 것이오.”
“뭐라? 그렇다면 그토록 잘난 그대가 한 번 답해보시오. 억눌리고 억눌려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온 우리요. 그대는 무슨 술책이 있어 그리 광오한 말을 하는가?”
“술책이라! 있지. 있고말고. 허나 어찌 맨입으로 말해줄 수 있을까. 그대도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곧 알게 되리니.”
병해는 그리 말 마치고서는 제멋대로 등 돌려 나가려 하였다.
보우가 무어라 하기도 전, 봉은사 중들이 우르르 나서서 그 앞을 막았다.
그리고 막힌 것은 뚫릴 수 있는 법.
“이 중놈들이 어디 감히 귀하신 분을 해하려 하느냐?”
그림자 가운데서 거한 하나가 뛰쳐나오더니, 족히 스물은 될 중들을 뚫고 병해를 모시면서 밤의 한가운데로 사라졌다.
오밤중에 전광석화같이 치고 빠지니, 그 모양이 마치 금강역사(金剛力士) 부리는 것과 같아, 그 덩치에 맞아 튕겨나가고 던져진 중들조차 저들이 정녕 고승을 잘못 알아본 것은 아닌가 의문을 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성에 또 한 번 기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곧 성내에 왁자하게 퍼졌다.
얼마 전 수탉이 된 암탉을 원래대로 돌려주는 신묘한 법력을 보였던 병해 대사가 저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해, 모월 모일 모시에 광통교(廣通橋)를 밟지 않고 건너보이겠노라 공언하였다는 것이었다.
다리를 밟지 않고 건넌다면 단번에 뛰어서 넘어가겠다는 뜻인가? 세인(世人) 사이에 묻고 답하기를, 그런 범속한 술수가 아니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날아서 넘어갈 것이라 하였다.
어디 뒷골목도 아니요, 육조거리가 지척인 광통교에서 그런 일을 벌이는 까닭은, 저의 법력을 사람 돕는 데 쓰는 것을 질시하는 무리가 있어 그들을 깨우치고자 함이라고도 하였다.
베도, 쌀도 받지 않고 법력 보이시던 분이 이렇게 사람들을 깨우치고, 더불어 진기한 구경도 보여주니 참으로 금세에 강림하신 대덕고승(大德高僧)이시라. 사람들은 그렇게 떠들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날이 당도하니, 가뜩이나 사람 많은 운종가(雲從街)가 꽉 들어찼다.
요승이 도성 한복판에서 백성을 현혹한다며 혀를 차는 유생들도 솔직히 궁금하여 구경을 오는 판이었으므로, 일반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암탉을 돌려받은 백성들도 찾아오고, 구경하는 궁인과 내시들 역시 적지 않았다. 필시 저 중 대부분은 대비전에서 나온 이들일 테다. 그리고 아마 봉은사에서 나온 이들 섞여있을, 간간히 보이는 비구들까지.
“저기다! 저기 나오셨다!”
누군가 외치니 모두의 눈길이 다리 한쪽에 나무로 쌓아둔 대(臺) 쪽으로 향했다.
“도성 백성들이여! 내 이제 날아서 반대편까지 가 보이겠소!”
병해대사가 외치고서는 곧 눈 감고 염불 외기 시작하니, 모두가 숨 죽이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어? 어!”
“떴다!”
“날았다! 사람이 난다!”
병해의 몸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천천히 광통교 반대편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중 모두가 놀라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병해는 하등 놀람 없이, 그저 합장한 채 염불 외고 있을 뿐.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반대편에 같은 높이로 쌓아둔 대 위에 병해가 도착했다.
그리고 떠오를 때처럼 천천히 구름 밟듯 내려와 섰다.
“자, 보시오! 내 날아서 이렇게 광통교를 밟지 않고 건너왔소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이쯤에서 야유를 한껏 퍼부으려 모여들었던 유생들도 그저 말을 잊었고, 이 경이로운 모습을 보고서 합장하며 나무아미타불 외치는 백성도 적지 않았다.
그때였다.
병해가 갑자기 노호성을 내질렀다.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정녕 법력으로 날아서 이 다리를 건넜다 여기는가? 올라와서 보라!”
시끌시끌하던 것이 다시 한 번에 싹 잦아들었다.
그나마 먼저 정신 차린 유생 몇몇이 앞장서서 올라갔다. 그들 눈앞에서 병해가 무언가를 보이며 외쳤다.
“철사 여러 가닥으로 몸을 엮어 잠시 띄우고, 도르래로 몸을 천천히 옮겨 반대쪽으로 날랐을 뿐이다! 무슨 도력이 있고 법력이 있단 말이더냐!”
그제야 여러 사람들은 나무로 세운 대 옆에 웬 기둥이 하나씩 서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개중 눈 밝은 이들에게는, 하늘처럼 파랗게 칠한 철사 여러 가닥이 두어 길 높이에 대롱대롱 내걸려, 다리 양쪽을 잇고 있는 것이 그제야 보였다.
“백성들이여! 바라건대 그대들은 이런 허황된 술수에 속지 말라! 그대들 눈앞에서 이렇게 얕은 술수를 부렸건만 그대들은 눈치채지 못하였다. 하물며 풍수(風水)와 재이(災異)의 설은 어떻겠는가? 그대들이 스스로 배우고 생각하여, 오로지 사리에 맞는 것만 헤아릴지어다!”
“그, 그렇지만 스님! 분명 그때 수탉을 암탉으로 바꾸시지 않았습니까?”
방금 전 합장하던 사람 하나가 당황한 가운데 용기 내어 물었다.
“닭의 자웅이 바뀐 것은 무슨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아니라, 그저 좀도둑의 술수였다! 너희가 경황이 없어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바로 그것을 노리고 수탉을 대신 집어넣었던 것일 테다!
내 그것을 안타깝게 여겨 사비를 털어 암탉을 새로 사고, 그것을 직접 나누어주면 중놈이 사사롭게 환심을 사려 한다 트집 잡는 무리가 있을 것이므로 얄팍한 수로 도술 시늉을 한 것이다.”
애초에 병해의 말에 따라 밤마다 주변을 돌면서 암탉을 훔치고 수탉을 밀어넣은 것이 꺽정이였으므로 도적의 술수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간혹 너무 늙었다 싶은 닭은 꺽정이 저의 입에 넣고, 새로 어린 닭을 사서 채워 넣었으니, 사재를 털었다는 말도 완전한 거짓은 아니었다.
“잊지 말라! 하늘은 사사로이 친함이 없다 (皇天無親)! 옛사람들이 항상 경계하고 대비하는 뜻으로 하늘에 빗댄 것을, 어찌하여 곧이곧대로 믿어 어리석은 생각을 품는가? 가뭄이 두렵다면 보(洑)를 쌓고, 큰비가 두렵다면 강바닥을 깊게 파면 될 일이다!”
그렇게 모두가 얼떨떨해 있는 동안, 할 말 모두 쏟아내며 비꼰 병해는 대에서 내려가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밤.
“밖에 나가보니 여전히 다들 그 얘기만 하더이다, 사형.”
잠시 나갔다 처소에 돌아온 꺽정이가 곧장 병해에게 그 얘기를 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라지만 정말 어리석지만은 않다. 특히나 조정 돌아가는 사정에 귀가 밝은 도성 백성들이라면, 병해가 외친 바가 무슨 뜻인지, 조금씩은 알아차리고 있을 테다.
“그래, 내가 노렸던 바다. 휴, 네 녀석 때문에 세상을 놀리고 비웃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구나.”
“즐거우셨다니 참 다행이오. 이 사제는 팔 빠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 산속에서 푸성귀만 드시고 사는 분이 왜 몸은 그리 무거우시오?”
병해의 몸뚱이 드는 도르래 하나, 청계천 반대편으로 옮기는 도르래 하나. 두 가락 쇠줄을 동시에 당기느라 힘이 적잖이 들었던 꺽정이가 불평을 했다.
“그나저나 사형께서 이렇게 기계 만드는 일에 재능 있으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우리 당으로 모셔올 걸 그랬소.”
“시끄럽다. 다 했던 가락이 있으니까 하는 일이지. 옛날에도 종종 비슷한 수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라는 둥 헛소리를 했었는데, 이번처럼 거하게 일을 벌인 건 처음이라 은근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되었구나.”
“그게 다 나와 서림이 공 아니겠소. 나는 힘을 써드렸고, 서림이는 정말로 철사장을 잘 알아왔으니.”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다. 네 녀석 아니었더라면 오늘 묘기도 꿈 속의 일이었겠지.”
그 말에 꺽정이 입에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꿈에 나올까 무섭다. 입꼬리 돌려놓아라.
여하간 이리 되었으니 당분간 대비전을 두고 여주가 횡행하니 재앙이 일어났다는 소리는 잦아들 것이다. 이제는 찾아올 사람들만 기다리면 되겠지.”
보우가 사람을 보내오는 것과, 대비전에서 찾아오는 것 중 무엇이 더 빠를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꺽정이가 걸터앉아있던 마루에서 확 일어났다. 그러고서는 목소리 확 낮추며 물었다.
“사형, 들리시오?”
“왜, 무슨 일이냐?”
“누가 우리 뒷담을 넘고 있는 듯하오. 내 잠시 다녀오겠소.”
바람처럼 사라진 녀석이 바람처럼 곧 돌아왔다.
그런데 엉뚱한 사람 하나가 꺽정이 손에 붙들려 있는 것 아닌가.
“이놈아, 이거 놓아라! 놓지 못하겠느냐?”
“사형, 기다리던 중놈도, 내시도 아니 오고 웬 유생만 걸렸소. 어찌하면 좋겠소?”
일전에 닭의 암수 바꾸는 장난을 쳤을 때 와서 시비를 걸었던 유생 황언징이 꺽정이에게 붙잡혀 버둥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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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야금술로 와이어 액션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고증이 불가능하나, 적어도 철사에 대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궁궐의 경우 철망을 설치하여 날짐승이 둥지를 트는 것을 막는 경우가 있었고, 조선 전기까지도 사슬갑옷(쇄자갑)이 사용된 바 있지요.
그러나 관영수공업 체계가 붕괴하고 양란의 사회적 혼란까지 발생하면서, 이러한 야금술은 상당 부분 기반을 잃고 또 일시적으로 후퇴하기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례로 1615년 광해군이 인정전(仁政殿) 처마 아래에 철망을 다시 설치하고자 철사장을 구했는데, 나라 안에서 구할 수 없어 결국 중국에서 수입해와야 했던 사례가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