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늘은 친함이 없다 (3)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에 맞춰줌으로써 끝내 홀려버리는 것이 병해의 도술이라면, 꺽정이의 도술은 사람의 몸을 괴롭고 두렵게 하여 마침내 그 마음을 저에게 맞추는 것이다.
불(佛) 자만 보면 발끈하는 황언징도 그 도술의 영험함을 접하게 된바, 곧 차분하게 병해 앞에 앉아서 자신이 담장을 넘은 사연을 상세히 고하기에 이르렀다.
“소승에게 반드시 백성을 현혹시키려는 뜻이 있었을 것이라 여겼다, 이 말씀이시오?”
“그렇다. 아니, 그렇소이다.”
무심결에 하대하였다가 꺽정이 눈빛 한 번에 말본새를 고치며 황언징이 답했다.
“멍청한 놈. 백성들에게 술수에 현혹되지 말라 깨우친 것에 어떻게 현혹시키려는 뜻이 있겠냐?”
“꺽정아, 말을 삼가라.”
“구차하게나마 변명을 하자면, 나는 본디 중들이 헛된 말로써 백성을 속이고 이득을 취함을 크나큰 잘못이라 여겨 왔소. 그러나 학문에 밝지 못해 선현들처럼 논변으로써 그 삿됨을 깨치지 못했으니, 그저 손수 움직여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을 뿐이오.”
말은 길었지만, 지금까지 털어놓은 것과 합쳐서 헤아려보면 이 황언징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였는지 – 심지어 꺽정이에게도 – 훤히 보였다.
글공부에는 소질이 없고, 그저 저와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처지의 다른 유생들과 어울려 다니며 소일하는 그런 작자가 황언징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어렵고 백성이 곤궁한 것은 모두 중들 때문이라며 한창 욕하고, 때로는 절에 들어가 행패까지 부리다 보면 속도 풀리고 자신도 무언가 보람찬 일을 한 것 같다는 느낌에 취할 수 있었다.
“병해 그대는 재이의 설이 모두 그릇된 것이라 하지만, 이 또한 잘못이외다. 이미 성현들께서 천기의 운행이 때때로 비범한 조짐을 보임으로써 인군(人君)에게 경고하곤 함을 글로 드러내셨거늘, 이를 하루아침에 싸잡아 조잡한 술수와 같다 하니, 어찌 가당하다 하겠소?
그리하여 생각하기를, 이는 필히 뒤에 누군가 있음이렷다 단정하고서 몰래 숨어서 살피고자 하였소.”
“군자는 군자로되 양상군자(梁上君子, 도둑)의 소질이로다!”
혀를 차는 병해에게 꺽정이도 동감하였다.
다행히 이렇게 뻗대는 유생 하나쯤 있을 것에 대비하여 병해가 미리 준비해둔 바가 있었다.
“천문을 논하는 자들이 다섯 행성과 오상(五常), 오행(五行)을 말하는 것은 오로지 사람이 힘써야 할 바를 나누어 빗댄 것인데, 그것조차 분간하지 못하니 『주역』을 그저 장터에서 점을 치는 데 쓰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형혹(화성)이 별자리를 범하지 않아도 병화(兵禍)는 일어나고, 세성(목성)이 한 군데 머물지 않아도 풍년은 절로 드는 법!”
“아니, 그럴 리가 없소이다. 분명 천지의 운행은...”
“소승이 일전에 닭의 암수를 바꾸는 얄팍한 수를 부렸을 때도 그대는 알아보지 못했지 않소? 눈앞의 일도 제대로 살피지 못할진대 어찌 하늘을 말씀하시오?
그대는 불가가 허망한 인과(因果)의 설로 백성을 현혹한다고 하면서, 역시 허황된 말로써 세상을 어지럽히고 선현의 말씀 위에 먹칠을 하고 있소.”
눈동자 흔들리는 황언징은 반박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사이 꺽정이가 슬쩍 일어나더니 병해를 데리고 뒷마당으로 갔다.
여전히 깃털 날리고 닭똥 냄새 풀풀 나는 뒷마당에 닿자마자, 꺽정이가 말했다.
“사형, 내 좋은 생각이 났소. 지금 저 황가 유생을 보고서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다 했는데, 사형 말씀마따나 상놈으로 태어났으면 딱 놀고먹으면서 왈짜 노릇이나 했을 품성인 듯하오.”
“그래서?”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 왈짜패, 도적들 아니겠소?”
한때 무리 수백을 거느렸고, 지금도 거의 거기에 근접하고 있는 도적 두목의 안목이었다. 한양 뒷골목에서 선달 시늉하며 돌아다닐 때도, 상대가 정말 물정 모르는 한량인지, 저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또 다른 도적인지, 그것도 아니면 위장하고서 숨어 있는 군관인지 헤아리는 것만큼 중하고 또 쓸모 있는 재주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재주가, 꽤 쓸만한 끄나풀이 될 만한 자가 왔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네 녀석들이 도적이지, 왜 애먼 나까지 끌어들이느냐.”
“정 그리 생각하셨으면 애초에 칠장사 떠나지 말으셨어야지. 여하간 내 생각에, 이왕 이리 된 것 저런 유생들 여럿을 뭉쳐서 패거리 하나를 꾸리면 장차 도움이 많이 될 듯하오.”
“중이 유생들을 부린다고? 인석아, 내가 암만 도술에 능해도 그런 재주는 없다. 물론 한둘씩 나누어 찾아온다면야 어떻게 언변으로 얼버무려가며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지만...”
“그러니까 저놈을 그 우두머리로 세우자 그 말이오. 유생들 끌어들일 논변은 내가 청석골 있는 우리 모주 사형에게 청하여 한두 달마다 보내오라 하겠소. 그리고 저 황언징이를 시켜서 중들 나다니는 꼴을 눈꼴시게 보는 작자들을 꼭 한둘 씩만 추려내 사형 앞에 데려오면, 그때 그 언변으로 홀리면 되지 않겠소?”
청석골에 앉아, 어떻게 나라의 대권이 한두 권신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권한을 나눌 것인가를 두고 제자와 열심히 논쟁 벌이고 있던 이지함에게 저도 모르는 사이 일거리 벼락이 내리는 순간이었다.
“후... 좋다. 하기야, 이 또한 하다 보면 족히 재미 붙을 만한 일이기는 하구나.”
사람을 세 치 혀로 꼬여내어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 것이 도사 노릇하던 시절부터의 장기이기도 했다.
“때마침 이곳 도성에서 대비마마 욕을 하는 이들도 대개는 그런 이들 아니오? 뭔가 성과를 낸 다음 그쪽에 고하면 대비께서 다 사형의 공으로 알 것이오.”
“말이야 좋지. 그런데 네 말대로 하려면, 적어도 저 황언징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내 말을 듣도록 해야 장차 부릴 수 있지 않겠느냐?”
처음에는 무슨 말이냐며 정색하다가, 얘기 나누다 보면 어느새 그 터무니없는 짓에 함께 말려가게끔 하는 꺽정이 화법에 병해도 휩쓸리고 있었다. 물론 알면서도 당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 또한 대단한 일이었다.
“그렇지... 음... 뭔가 수가 있기는 할 텐데... 아, 사형, 혹시 ‘그것’ 가지고 계시오?”
“네가 ‘그것’이라고 하면 내가 어찌 아느냐.”
꺽정이가 다가와 수근수근 말하니, 병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칠장사에 두고 왔다가 혹여 멋모르는 잡인이 버리거나 할까봐 두려워 가지고 오기는 했다만...”
“옳지, 그럼 되었소.”
꺽정이가 슬쩍 가서 방에서 물건을 챙겨오는 동안, 병해도 천천히 뒷마당 나서서 여전히 멍하게 천장만 보고 있는 황언징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소승의 말을 깊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구려. 참으로 장한 일이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에 어찌하면 반박할 수 있을까, 그것을 고민하고 있소. 아무리 그대 말에 일리가 있다 한들, 유생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중보다도 도학에 밝지 못하다는 말은 차마 들을 수 없소이다.”
“그런 걱정은 접어두셔도 될 것이외다. 소승 또한 유학의 이치를 조금 궁구한 바가 있고, 산문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세속 선비들과도 종종 교유하곤 하였소. 그러니 부끄럽게 여길 바가 무엇이 있겠소?”
“세속 선비들이라 하셨소?”
황언징 귀가 쫑긋 세워지는 것이 옆에서 슬쩍 병해에게 물건 전해주는 꺽정이에게도 보였다.
“그렇소이다. 무엇으로 증좌를 삼을 수 있을까... 그렇지, 이것이라면 아마 될 것이오.”
병해가 싱긋 웃으며 책 한 권을 꺼냈다.
“아니, 설마?”
말로만 듣던 『화담자의』, 그것도 원본이 모습을 드러내자, 황언징이 절로 놀라 뒤로 자빠졌다.
그 내용은 알 턱이 없고, 읽는다 한들 그 심장한 뜻을 헤아릴 리도 없겠지만, 적어도 저것을 두고 권세가 이기와 정순붕 등이 크게 경계하여 한때 금서로 정하려고까지 했음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녕 이 병해 역시 백성을 현혹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깨우치기 위하여 그런 짓을 한 것 아니겠는가?
대저 생각이 한쪽 끝의 구석에 틀어박힌 이들은 겨우 고개를 꺼내면 그 즉시 반대쪽 구석에 머리 들이밀곤 하는데, 지금 또 다시 눈동자 흔들리는 황언징이 바로 그런 격이었다.
“비록 내 일개 중이라 하지만, 백성을 현혹하는 것이 옳지 않음은 아오. 이는 우리 불가에서도 멀리해야 할 길이니, 적어도 여기서 유불 양도(儒佛 兩道)는 한마음 한뜻이라 할 수 있지 않겠소?
이 책의 내용이 참 탁월하여 나 또한 많이 배웠소. 오늘 일도 이 책이 없었더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터.”
“이 어리석은 유생이 빼어나신 분을 미처 알아뵙지 못하고 경거망동을 하였습니다.”
심기일전하여 고개 숙이는 황언징을 바라보며 병해와 꺽정이가 모두 씩 웃었다.
뒤늦게 찾아온 보우조차, 그 원수 같은 황언징이 몸가짐도 공손하니 찾아와 선객으로 있는 것을 보고, 정말로 눈앞의 병해가 대덕고승인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 밤 인정 칠 무렵 빠져나오면서도 그런 생각은 그대로 남았다.
장차 나라의 기풍을 새롭게 하고, 유학은 학(學)으로, 불교는 교(敎)로 병립하며 서로 다투지 않는 세상이라.
병해가 그럴듯하게 부풀려 말하기만 했을 뿐 아직 내실은 없는 계획임은 보우도 족히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해가 이인(異人)이라는 생각만은 끝내 바뀌지 않았다.
그날 낮에 광통교에서 몰래 하늘 날아다니는 병해를 보면서, 자신도 껌뻑 속아넘어갔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조선국 불문(佛門)을 다시 일으킬 자신 같은 인재를 속여넘긴 사람이라면, 그 사람 또한 비범한 이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따라 원대한 업을 일으키는 사람이야말로 후대에 더 이름 남기는 법 아니던가? 어느새 보우의 마음 속에서 자신은 국초의 무학대사와 같은 이로 변해 있었다.
이는 다시 말해 땡중인 줄 알았던 병해는 무학대사의 스승 나옹화상(懶翁)과 같다는 뜻이겠지만, 이미 당찬 포부로 한껏 머릿속이 가득 찬 보우였기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는 않았다.
“휴우. 이것 참. 생각보다도 일이 커지는구나.”
그렇게 헛바람 잔뜩 들어간 보우를 돌려보낸 뒤, 그제야 긴장 풀린 병해가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면 일국 대비의 신임을 얻어 요승 노릇 하는 것이 그리 쉬울 줄 아셨소?”
“옛날에 한창 날뛸 때는 옥황상제가 내려보낸 선관(仙官) 시늉도 했는데 요승쯤이야 무어. 별반 도술도 익힌 적 없던 전조의 신돈도 한 일 아니냐.”
“그럼 무엇이 그리 어렵소?”
“사람 한둘의 환심 사고서 그들 머리 위에서 뛰노는 것은 쉽지만, 지금 이 일은 유불 양쪽을 새롭게 하는 일과도 엉겁결에 엮이지 않았더냐.”
“못할 것 뭐 있소? 이왕 이리 된 것, 정말로 한쪽으로는 선비들의 스승이 되고 다른 한쪽으로는 중들의 스승이 되어보시오. 사형쯤 되는 분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면 저 치들이야말로 부처님이든 공자님이든 그 은덕에 감사해야지.”
여전히 답변 없는 병해에게 꺽정이가 병 주고 약 주는 격으로 첨언하였다.
“내 사형보다야 당연히 견식은 짧지만, 대개 사람 일이라는 것이 먹고사는 일과 엮여 있음은 알고 있소. 저 황언징이 같은 이들도 말이 유생이지 실제로는 그냥 놀고먹는 한량 아니오? 그런 이들에게 뭔가 소임을 준다면 감지덕지하면서 사형 말씀을 따르겠지.
그쪽은 내가 저 서림이 불러다가 방도를 마련해볼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래, 그만큼이나마 거들어주니 고맙기는 하구나.”
“그냥 고맙다고 곧이곧대로 말해주면 어디 입이 비뚤어지나. 거 사람 성정 하고는.”
“네 녀석과 엮이다 보면 다들 멀쩡하던 성정이 비뚤어진다는 생각은 아니 해보았느냐?”
여전히 언변으로는 이길 수 없는 병해였다.
그날 밤 대오각성한 황언징은 이후 저들과 뜻 같이하는 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껏 불가의 허황된 잡변만을 공박하여, 우리 주변에 훨씬 폐단이 큰 허황됨 있음을 보지 못하였네. 우리가 자성하여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어찌 지난날 광통교에서와 같은 일을 또 당하지 않겠는가!”
당연한 얘기지만, 평소 품행으로 보나 학식으로 보나 좋은 소리는 못 듣던 황언징이었기에 의심하는 눈길이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내 새로이 무리를 꾸리려 하네. 이름은 각미사(覺迷社)! 자네들도 함께하세나!”
여전히 의심하는 자들은 하나둘씩 황언징을 따라 도성 어딘가에서 깊은 얘기를 나누더니, 곧장 그 대의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미사 유생들이 도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음사(淫祀)나 도참(圖讖) 등 헛소리하는 자들을 색출하여 벌주니, 그 명성이 저자에 뜨르르하게 퍼졌다.
이들이 미몽(迷夢)을 때려잡고 – 정말로 때리고 멱살 붙잡는 일도 적지 않았으나 관에서는 문제삼지 않았다 – 소위 술가(術家)들의 비방(祕方) 태반이 아무런 효험 없음을 들춰내고 다니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태백성이 어쩌고, 태양의 기운이 저쩌고 하면서 대비를 탓하던 자들도 덩달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물론 여전히 반대하는 목소리는 있었다.
“비록 대의(大義)는 틀리지 않았다 하나, 결국 변괴에 빗대어 근래 조정의 잘잘못을 논하는 것조차 막으니 이는 지금으로써는 옳지 못하다 하겠네.”
즉 그렇게 하늘의 징조니 땅의 재변이니 하는 말을 틀어막으면 대비에게만 이롭지 않으냐 하는 얘기였는데, 그럴 때면 황언징이 참으로 한심하다는듯 쳐다보며 반박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실정(失政)이 명명백백하거늘 하늘의 조짐을 끌어와 말할 것까지 있겠는가! 당장 도성만 벗어나도 도탄지경에 빠진 백성들 참상이 뻔히 보이거늘! 태백성이니 형혹성이니 말할 겨를이 있다면, 흉년으로 목숨 잃는 백성 수가 몇 구(口)이며 중간에 탐학한 무리의 손으로 넘어가는 곡식은 몇 섬인지를 먼저 따져야 할 것이야!”
평소 그들이 알던 황언징이 이처럼 언변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필히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을 곧이곧대로 옮기는 것 아니겠냐며, 그의 흉을 보는 몇몇 이들은 험담하곤 하였다.
허나 어쨌든 목소리 큰 쪽은 황언징의 각미사라, 곧 여주가 참람한 짓을 하여 재앙이 닥치느니 무어니 하는 소리는 잦아들고, 대신 다른 쪽에서 조정의 잘못을 꼬집는 소리가 늘어났다.
자연스레 화살도 여주(女主) 대비에게만 쏠리던 것이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까지 고루 퍼지게 되었으니, 본래 욕 많이 얻어먹던 이기 같은 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은근히 한발 물러나 수작 부리는 데 익숙하던 윤원형이나, 그저 조용히 눈 감고 저의 일만 하면 올바른 처신이겠거려니 여기던 상진(尙震)·홍섬(洪暹) 등의 부류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간 저들 신료들이 황당한 재이의 논변이 퍼지는 것을 일부러 가만히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좌 아니겠냐며, 병해가 조용히 대비의 귀에 말을 흘려넣으니 이미 마음이 홀린 대비는 참으로 옳다며 고개 끄덕일 뿐.
당장 그 동생 윤원형을 미워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한 번 심어진 의심의 씨앗은 쉽게 사라지기는커녕 싹 틔울 때를 기다리며 그 자리를 지킬 것이었다.
요승이 세론(世論)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어리석은 요즘 젊은이들은 오히려 거기에 현혹되어 무리지어 행패를 부리기만 한다는 데 한탄하는 늙은이들도 없지 않았다.
“하면 그 ‘요승’이라는 병해가 대체 어떤 요사한 술수를 부렸습니까? 오히려 허황된 속임수에 백성들이 속아넘어가지 않도록 널리 깨우쳤으니 비록 중이지만 공덕이 작지 않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들에게 황언징이 달려가 이렇게 꼬집으면 또 말문이 막히곤 하였다.
마침내 뜻있는 유생들이 한데 뭉쳤다며, 그들의 살림에 드러나지 않게 도움 주는 이들도 있었다. 종종 ‘소소하게’ - 실제로는 그리 소소하지 않았다 – 패물이나 비단 따위가 각미사 중진들 집에 슬쩍 들어가곤 하였다.
그 패물이 봉산 지나다니는 상인들 봇짐에서 의민당이 걷은 물건임은 그들에게 재물 찔러주는 서림 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편,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즉 대비)에서 공표하기를, 그해 가을 장마가 끝나면 곧장 적당한 날을 보아 정릉을 선릉 옆으로 옮길 것이라 하였다.
추수철에 큰 공사를 벌여 백성을 수고롭게 함은 옳지 않으므로 기근이 든 지방 군현에서 고공(雇工, 일꾼)을 널리 모아올 것이며, 그 비용은 내탕(內帑)으로 치를 것이라고도 하였다.
능침사가 두 군데였던 것을 봉은사 하나로 줄인 것이니 길게 보아도 국용(國用)을 아끼는 길이요, 흉년으로 일거리 잃은 불우한 백성들을 구제하니 짧게 보아도 애민(愛民)이며, 그들이 상경하여 저들이 품삯으로 받은 곡식과 베를 흩뿌릴 것이니 도성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물론 그런 관의 일거리로 먹고 사는 가난한 도성 백성들은 한탄하였지만, 그들에게 언제는 나라가 신경이나 썼던가?)
조정에서 밝히기로는 유난히 흉년이 심한 고을에서 우선 일꾼을 모으겠다 하였으나, 실제로는 황해도, 그것도 재령부터 평산에 이르는 고을들에서만 장정들이 올라올 것이었다. 따로 초모를 하지도, 공문이 오가지도 않았지만, 미리 그렇게 정해졌다.
또한 곧 설치될 천릉도감(遷陵都監)에서 실무를 맡아 떨어지는 재물을 얻어먹기 원한다면, 다른 곳이 아니라 저기 봉산 경저리(京邸吏) 집에 머무는 서림이라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이 경아전들 사이에 나돌았는데, 이 또한 그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소문이었다.
꺽정이는 청석골 돌아오자마자 산채에 올라가 이지함에게 그간 있던 일을 전하였다.
“왜 이럴 때 오십니까. 한창 재미있게 논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지함이 병해가 써서 보낸 글을 읽는 사이, 그사이 키가 꽤 컸지만 눈치는 그대로인 이이가 면박을 주었다.
“시끄럽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임 당수께서도 장가 안 간 것은 매한가지 아니십니까? 그 상투도 헛상투라던데.”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그리고 그건 또 어디서 주워들었대? 이게 정말, 사형 앞만 아니었으면 그냥 확...”
“강릉에서 소식이 왔는데, 누이동생이 당수님 소식 듣고는 궁금하게 여긴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조금 수소문을 하셨는데 저도 옆에서 들었지요.”
“자, 자. 그 얘기는 그만 하고. 마침 이 이야기 꺼낸 지도 꽤 오래 지났으니 금일은 여기서 파하자꾸나.”
다 읽은 이지함이 이이를 말렸다.
“예, 고맙습니다, 스승님. 내일은 꼭 스승님을 설복시키고야 말 겁니다.”
“하하, 너야말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내 말이 옳음을 깨닫게 될 게다. 국법을 장차 변할 수 있게 만든다 한들 홍범(洪範)으로 삼아야 하는 큰 법은 변함 없도록 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이가 그새를 못참고 또 한 소리 하려는 것을 밀어내고서 문을 탁 닿는 꺽정이였다.
“우리 사형이 고생이 많소.”
저에게 제자를 붙여주고, 거기에 까막눈이 당원들을 군졸로 조련하는 일까지 맡겨두고서, 이제 한양 유생들까지 판에 끌어들일 수 있도록 그럴듯한 논리 만들어 달라 청하는 꺽정이가 저런 소리를 하니, 이지함으로서는 기도 안 찰 일이었다.
“꺽정이 너는 대체 내가 몇 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병해 사형은 소싯적에 분신술도 썼다던데, 우리 모주님은 못하시오?”
이지함과 어울리며 조금 말솜씨 늘었다고 병해 앞에서 혓바닥 놀리다가 본전도 못 건진 꺽정이라, 이쯤에서 이지함을 더 놀리지 않고 곧장 타협하기로 했다.
아무리 그가 천하의 의민당 당수라지만, 일신의 무력과 군재에 이어 말주변까지 무리의 맨 앞을 차지할 수는 없던 것이다. (맨 앞은커녕 맨 뒤를 다투어야 할 것이었다.)
“사형, 어차피 이제 당분간은 내가 봉산 주변 벗어날 일은 없을 테니, 졸개들 조련하는 일은 내가 맡도록 하겠소. 내가 문리(文理) 트이기로는 사형 발끝도 못 닿지만, 얼마 전까지 까막눈이었으니 다른 무식쟁이들 가르치는 데는 오히려 더 속사정 잘 헤아리는 면도 있을 것이오.”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알아들을 때까지 두들겨 패든 단련을 시키든 할 것임을 꺽정이도 알고 이지함도 알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쪽이 더 효과 있을 지도 모르는 일.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 때는 그렇게 실험해서 알아보는 쪽이 최선이라는 것은 이지함과 이이 둘이서 고민하며 내린 결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산채나 아랫말 등지에서 소일하고 있는 졸개들로서는 청천벽력이겠지만.
“후, 그래. 알았다. 마침 요새 머릿수가 늘어서 어찌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터였다.”
“얼마나 늘었길래 그러시오?”
“네 기준으로 직접 부릴 만한 이들만 추려도 그사이 족히 서른은 늘었다. 이대로라면 몇 달 내로 쓸 만한 이들만 추려도 이삼백에 달할 테다. 이제는 경기도나 평안도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오곤 하더라.”
“그렇소? 평안도야 그렇다 쳐도 경기도는 의외인데.”
어딘가 석연찮은 예감이 들어 꺽정이가 제 턱을 만졌다.
“뭐, 저기 교하(交河, 현 파주시의 일부)나 장단 정도면 황해도 바로 남쪽이니까.”
“장단이면 몰라도 교하는 우리 당과는 연이 없던 곳 아니오?”
“그렇다 하여도 장사하는 사람들은 계속 오가고, 그러다 보면 소식도 전해지기 마련이지 않겠느냐.”
이상하게 교하라 하니, 분명 여기 청석골 들어온 이래 딱히 연이 없는 동네였지만 그럼에도 많이 들어본 듯하여 고개 갸우뚱거리는 꺽정이였다.
“어차피 다들 정식으로 당에 들이는 것은 너 돌아온 뒤로 미루어 두었다. 저기 아랫말에서 유숙하고들 있으니 정 궁금하면 네가 직접 불러다 물어보거라.”
“그러도록 하겠소. 교하, 교하라...”
윤원형의 본가가 교하에 있기 때문에 그 지명이 익숙한 것이었음은 뒤늦게 아랫말 다 내려가서야 떠올랐다.
한편 홀로 남은 이지함도 생각에 빠졌다.
“허, 하늘에 친함이 없으니 재이의 논변도 모두 허황된 것이라. 우리 사형께서 생각은 참 잘 하셨지만 내 계책 하나는 그대로 버려야 하게 생겼군그래.”
이원수의 군수 임기 오 년 사이에 나라 뒤엎을 준비를 마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를 위해 여차하면 다른 수로 도성 민심을 흉흉케 하려 했는데, 이미 병해가 나아가 그런 술수를 부렸다니 적어도 도참(圖讖)의 설은 쓰임이 없어진 셈이었다.
대신 대비의 신임을 얻었고, 그 황 모라는 유생이 부리는 패거리, 게다가 아직은 그 마음을 더 얻어야 하겠지만 봉은사의 중들까지. 수 하나를 잃고 두셋을 얻었으니 족히 남는 장사였다.
이이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 싼값에 들여온 『한서』에서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어 미리 다른 곳에 적어두었는데, 이제 그것이 쓸모가 없기에 적당히 구겨서 옆으로 치워두었다.
그 종이에 적힌 글은 이러하였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니, 천하는 뒤엎어지고 백성은 왕을 바꾼다 (太白經天 天下革 民更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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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언징은 실존인물로, 1549년 가을 유생들을 이끌고 정인사와 회암사에 쳐들어가 행패를 부려 구설수에 오른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설수란, 황언징이 유생의 사찰 출입을 금하는 법 (이미 유명무실화된지 오래인 법이기는 했습니다)을 어긴 것이나 기물을 파손한 것 때문에 생긴 게 아니라, 반대로 황언징에게 한 차례 정거(과거 응시 금지)라는 징계를 내린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일례로 사건 당시 성균관 생원 안사준이 올렸던 상소를 보면, 아무리 황언징이 ‘망령되고 무식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마땅히 선비로 대해야 하며, 오히려 선비를 고변한 승려에게 같은 죄를 적용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있습니다. 즉 황언징이 ‘설령’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고작 불교계의 위세를 살려주기 위해 그에게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비단 황언징·안사준뿐 아니라 당대 많은 선비들에게 공유되었던 인식이기도 합니다. 숭유억불 기조 하에서 유생들이 절에 들어가 행패를 부리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고, 개중에는 방화처럼 그 정도가 심각한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황언징의 혐의는 처음 실록에 등장할 때는 사찰 내에서 소란을 피우고 기물을 파손한 것이었는데, 그로부터 한 달 뒤 문정왕후가 언급할 때는 기물을 훔쳐간 것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정말로 황언징이 기물을 훔쳐간 것인지, 아니면 가운데서 보우나 다른 승려들이 한 번 당해보라는 식으로 새로운 혐의를 씌운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