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안심살 한 근 (1)
총명하고도 근면한 카를로스는 자신이 다스리는 수많은 영토의 언어를 배워 익혔다. 가장 품위 있는 라틴어. 장엄한 에스파냐어. 신사적인 프란시아(프랑스)어. 아름다운 이탈리아어.
(천박한 알레망(독일) 말은 그저 배웠다고 주장만 하는 정도였지만, 어차피 루터를 추종하는 이단 몇몇을 제외하면 알레망 말에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자들은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그에게 아첨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세인의 흥미를 끌기 위함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턴가 카를로스 본인은 한 적도 없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며 세간에 회자되곤 하였다.
‘나는 신께는 에스파냐어로, 여인에게는 이탈리아어로, 사내에게는 프란시아어로, 그리고 내 말에게는 알레망어로 말한다.’
카를로스가 듣기에도 나쁘지 않은 소문이었다. 비록 통속적인 문장이지만, 그가 원하는 것을 한 줄로 축약하고 있는 듯하였던 것이다.
카를로스가 평생 원하였던 것. 모든 것을 아우르는 에우로파(Europa Universalis)의 군주. 이질적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합일에 이르는 것.
그러나 이제 그의 눈앞에서 그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늙고 지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의 후대를 위해 미래를 준비하는 것.
그러므로 이미 퇴위의 마음을 굳혔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이름만은 버리지 않은 채 이탈리아 땅을 밟았다. 아직 카롤루스의 제관에는 나름의 값어치가 있었던 것이다.
“폐하, 교황령의 경계를 지났습니다.”
그의 곁에서 군대를 이끄는 알바 공작이 다가와 보고하였다.
“알겠네.”
비엔나 공방전부터 슈말칼덴 동맹군과의 전쟁까지, 이미 숱한 전장에서 총사령관과 야전사령관으로서 보조를 맞추었던 두 사람이었다. ‘전투는 없을 가능성이 높지만, 경계는 허술히 하지 말 것’ 같은 이야기는 눈빛만으로도 능히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에 맞추어 알바 공작이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고 다시 그의 주군 곁으로 돌아왔다.
로마인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이래 수많은 군대가 그래왔듯, 황제의 군대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북상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속에서도 그대로 남은 포석을 두드리는 말발굽 소리와 바퀴 소리만이, 늙고 지친 황제와 비슷하게 늙었지만 아직 정열 넘치는 장군 사이를 메웠다.
그 침묵 아닌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번 원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번에도 역시, ‘신이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나 ‘신은 오로지 폐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같은 겉치레는 나오지 않았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찌 하찮은 자들이 폐하의 앞길과 원대한 구상을 가로막는 것을 방관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하는 일. 그렇지···”
교황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의 이번 결정이 악수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른바 ‘신앙의 자유’는,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게는 하나로 뭉쳐 에스파냐의 국채를 추심하고 받아낸 것을 그대로 운하에 투입하게끔 하는 명분이 될 수 있겠지만, 알프스 이북에 대해서는 그 의미가 달랐다.
그러므로 교황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아예 지금보다도 더 목소리를 높여, 앞장서서 이탈리아 도시들을 하나로 묶거나, 아니면 반대로 운하의 제안을 완전히 묵살하고 지금의 불안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만 주력하거나.
허나 그는 자신의 앞길을 결정하면서도 끝내 마지막 한 발짝을 내딛지 못하였다. 마치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손이 이끌린 것처럼, 문턱을 넘기 전 끝내 주저하고야 말았다.
물론 교황이 감히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의 부채를 이용하여 카를로스 자신을 옭아매려는 시도에 동조하였다는 것만으로도, 무력에 호소할 이유는 충분하였다.
그런 판에 교황이 악수까지 두었으니, 카를로스 본인이 아우 페르디난도(페르디난트)와 아들 펠리페에게 각각 돌아가야 할 자리를 물려주기 전 지긋지긋한 부채 문제를 매듭짓게 해주는 기회가 되리라.
“그 밖에는 더 없는가?”
“과문한 저는 폐하의 뜻을 미처 알지 못하겠습니다.”
“알겠네. 더 묻지 않겠네.”
교황과 베네치아가 손을 잡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평화니, 번영을 위한 운하니 운운하며 이탈리아의 황금을 군주들의 목줄로 만들고자 하는 상황.
하지만 그러한 상황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교황의 칙서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카를로스는 손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유란 곧 묶여있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고 묶기를 바랐던, 그 이상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카를로스 본인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세인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지금이 아니라면, 압스부르고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이 에우로파를 하나로 모을 수 없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가. 말로는 옛 로마의 영광과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말하면서, 왜 이토록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것을 거부하는가.
허나 이제 와서 물은들 무엇하랴. 그저, 우직한 알바 공작 말마따나 제국의 황제이자 에스파냐와 저지대의 주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수밖에.
그때, 멀리서 무슨 함성이 들려왔다. 군대나 군중의 소리라기보다는, 그저 사내 하나가 꽥꽥 악을 쓰는 것이 메아리쳐 울리는 듯하였다.
“빚쟁이 카를로스! 빌린 돈 갚아라!”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그것은 라틴어도, 에스파냐어도, 프란시아어도, 이탈리아어도 아니요, 그저 라틴어의 후예 언어들을 대충 배워서 섞어놓은 것을 아주 해괴하고 조악한 억양으로 외치는 것이었다.
“허, 이 무슨···”
말의 무엄함과, 언어의 아름다움을 짓밟는 억양과 발음에 동시에 충격을 받은 황제가 한탄하자, 알바 공작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당장 잡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알바 공작의 노련한 눈이 주변 지형을 훑었다. 주변 어디를 보아도 산적 몇몇이라면 모를까, 대군이 숨을 만한 곳은 없었다.
그러므로 대열을 흩뜨리는 대신, 가볍게 무장한 기병 몇몇을 보내어 소란의 근원을 알아보도록 명했다.
하지만 흙먼지 일으키며 달려나간 경기병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대열로 돌아오지 않았다.
“주걱턱 퇴물 놈아! 팔아먹을 게 없어서 양심까지 팔아먹었느냐? 왜 빚을 안 갚느냐!”
그 어설픈 억양의 욕설만 들려올 뿐.
마침내 알바 공작이 직접 장교 몇몇에게 지시를 내려, 경기병 일백 기를 동원한 뒤에야 소란의 주범을 붙잡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밝혀진 진상은 참으로 놀라웠다.
그들이 닿은 곳에는 주인 잃은 말과, 정신 잃고 쓰러진 기병들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말로만 들었던 극동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거 사람이 부르면 좀 빨리 모시러 오지 그랬소. 깔짝깔짝 잡놈들 몇몇만 보내니까 영 의심스러워서 끝내 때려눕힐 수밖에 없었소이다.”
여느 배의 돛대만한 ‘몽둥이’를 들고 기병들을 때려눕혔다는 동양인 사내의 후안무치한 말이었다.
“술탄 나리의 자제분께서 납시는데, 위엄을 챙겨야 하지 않겠소? 그래서 생각했지. 이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보면 알아서 호위할 군사들을 보내올 것이다. 이렇게 말이오.”
그 말대로, 동양인들 뒤에는 셰자데 셀림과 그를 따라온 오스만 투르크 측 수행원들이 진을 치고 있더랬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모두 귀빈으로서 - 오스만의 셰자데를 포로로 잡았다가는,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후과가 닥칠 터였다 - 진중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대는 누구인가?”
주군을 대신하여 이방인 거한을 손수 상대하러 나온 알바 공작이 물으니, 이방인은 그저 종이 한 장을 내밀 뿐. 거기 적힌 라틴어를 읽은 공작의 눈이 곧 휘둥그래졌다.
“나 셀림이 보증하고, 파디샤이자 칼리파이신 나의 아버지, 술탄 쉴레이만께서 보증하는 바요. 거기 적힌 말은 모두 사실이오.”
“그러니 내가 먼저 물어야 하겠소, 흐흐. 나더러 누구냐 묻는 그대는 어느 문중의 누구이며 품계는 어찌 되시오? 나를 이렇게 대하기에는 급이 안 맞는 듯한데, 질질 끌지 말고 그대의 주군께 데려다 주시오.”
결국 알바 공작은 예법을 따지는 것을 포기하고, 이방인의 요구대로 그가 황제를 접견키를 원한다는 말을 주군의 장막에 전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여기 이 사람 보시오.”
벌써부터 말 섞기가 두려워지는 것을 꾹 참고 알바 공작이 전갈을 보내자마자, 돈 림 또는 코우지오니스라는 이 이방인이 또 말을 꺼냈다. 그 말 나오기 무섭게 그 뒤에서 사람 하나가 나왔는데, 놀랍게도 같은 에우로파 사람이었다.
“카를로스 폐하의 명을 받들어 태평양 탐험을 이끌었던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공작께 인사를 올립니다.”
“이 사람 몸값도 좀 내놓으시오. 거기에 더불어 이 사람네 함대가 감히 우리 당 장사하는 곳까지 와서 민폐 끼쳤으니 그 배상도 해주시고. 귀국 군상(君上)께서 친정을 하셨으니 그만한 일 맡을 벼슬아치도 하나쯤 따라오지 않았겠소?”
앞서 황제께, 아무래도 이 이방인들을 직접 맞이하여야 할 듯하다고 전하였던 것을 천만다행이라 여기게 되는 알바 공작이었다.
아직 그들이 목표로 삼고 있는 로마까지는 약간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그런 곳에 황제를 떼어놓고 군대만 먼저 로마로 진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요, 그렇다고 술탄의 특사이자 그의 아들인 셀림과, (하는 짓은 도저히 그 직함에 맞지 않으나) 어쨌든 시나 황제의 대리인이자 카를로스와 대략 비견할 만한 기나긴 호칭을 지닌 돈 림을 말 위에서 함께 움직이며 접견할 수도 없는 노릇.
그리하여 황제의 군대는 오늘 이곳에서 다소 이르게 행군을 멈추고 숙영하게 되었다. 교황령의 허울 뿐인 군대가 나섰더라도 이만큼 오래 카를로스의 발목을 잡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화려하게, 그러나 사치스럽지는 않게 꾸며진 황제의 막사 안에 들자마자 꺽정이는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의자는 영 불편하였다.
“주걱턱 소리는 그냥 놀리려고 해본 말이라고 하려 했는데, 막상 뵈니 정말로 턱이 크시구려. 내가 관상은 잘 모르지만, 주걱턱이면 재물복 있다고 들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오. 빚을 그리 많이 지셨다니.”
초장부터 한다는 소리가 이러하였으니, 만약 눈앞에 속 좁은 바오로 4세가 앉아 있었더라면 바로 역정을 내었을 터였다. 그러나 꺽정이도 딴에는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 셈이었으니, 그가 들어오자마자 노쇠한 황제의 눈빛이 호기심과 흥미로 다시금 광채 찾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얘기는 많이 들었네. 자네는 과연 흥미로운 사람이로군.”
카를로스가 턱을 만지며 - 대대로 내려오는 습관이었다 - 말했다.
“우리의 발목을 잡기 위해 이렇게 찾아온 것은, 아무리 술탄의 아들과 함께라지만 대담하다 아니할 수 없는 일이지.”
“칭찬으로 받겠소.”
마치 날씨 이야기하듯 범상하고도 평이한 말투로 황제가 말을 이었다. 교양 있는 이에게는 교양인의 언어로, 전장에 나가서는 사령관의 언어로 말하듯, 이 비범하면서도 범상한 자에게는 그저 범상한 언어를 쓸 뿐이었다.
“나는 자네를 적대할 생각은 딱히 없네. 자네 뒤에 있는 베네치아나 교황령이라면 모를까. 물론 자네의 부추김이 적잖이 내게 곤란함을 주기는 하였지만, 자네를 적대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지는 않으니 말일세.”
꺽정이는 그 말을 믿었다. 눈앞의 황제는 이미 제위에 대한 미련을 하나씩 떨쳐내어, 이제는 정말로 한두 가지 남은 일에만 눈을 두고 있는 듯하였다. 그러니 꺽정이 그가, 그 남은 일 한둘을 가로막다가 걸리는 일이 있지 않고서야 굳이 황제가 그를 적으로 대할 이유는 없는 셈이었다.
“자네도 어차피 나를, 그리고 제국을 적대하려는 뜻은 없지 않은가? 그저 자네에게 가장 이득되는 길을 찾아서 이곳저곳 들쑤실 뿐.”
“허, 대단하시오.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모르겠구려. 간자(첩자)라도 심어두신 것이오?”
“그렇다네. 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찾아왔는지, 그리고 지난 몇 주 사이에 로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잘 알고 있지. 아마 자네도 첩자를 직접 두 눈으로 보았을 것이야.”
“오, 그렇소?”
눈앞의 돈 림이 첩자의 정체를 돌아가 밝힌다 하더라도, 카를로스 본인보다는 교황 바오로 4세에게 더욱 큰 충격이 갈 것이다. 그 계산을 단숨에 마친 황제가, 역시 평범한 말투를 고집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도 교황 성하 곁을 지키고 있을 카를로 카라파 추기경이 바로 나의 첩자라네. 본인은 자신이 교황령의 동맹인 프란치아를 위해 일한다고 여기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가 몰래 쓰는 서한은 파리가 아니라 내 손으로 들어오고 있지.
보통 그이가 보내는 정보는 그렇게 쓸모는 없는 내용이었지만, 지난 한두 달은 아주 흥미진진하더군. 특히나,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베네치아와 교황령 쪽에서 그대를 내세워 우리 군세의 발목을 잡아보려 할 것이라는 대목이 재미있었네.”
황제가 이끄는 군대는, 공식적으로 교황령에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은 채 북상하는 중이었다. 엄연히 따지면 그저 무력시위일 뿐.
여러 차례 패배한 끝에 겨우 올해 초에 휴전협정을 맺은 프랑치아의 엔리케(앙리 2세)가 설령 교황령으로부터의 급보를 받고 군대를 조직한다 한들, 실제로 로마까지 닿는 데는 제법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었다.
카를로스 본인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그만한 시간이면 충분하였다.
“그러니 함께 레가스피 그이의 잘잘못과, 시나 동쪽 바다의 소유권 등등에 대하여 즐거운 대화를 나눠보세나. 나의 목적 또한 그대와 마찬가지로,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시간을 끄는 데 있을 뿐이니.”
교황이 이슬람과의 공존을 허락하는 칙서를 반포하여, 간접적으로 클리스마(수에즈) 운하 공사에 기독교인들이 자금을 대는 것을 허용하기 전부터 이미 베네치아는 빠르게 주변 도시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이미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사이의 오랜 전쟁으로 쇠락일로를 걷던 이탈리아 도시들은 곧 그에 호응하였다. 허나 아직은 호응으로 그쳤을 뿐이었다.
언제 로마를 넘어 황제의 군대가 북쪽으로 밀고 들어올지 불분명한 상황이었다. 이미 알프스 이북, 신성로마제국 영지의 실권은 카를이 아닌 그의 아우 페르디난트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지만, 형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를 석권할 기회라면 페르디난트 또한 팔짱만 끼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자네와 일행들, 그리고 나의 적이자 벗인 쉴레이만의 아들 셀림까지. 황제이자 사령관으로서 모두 손님으로 맞이하는 바일세. 군영에 머무는 동안 감시하는 이만 대동한다면 그대들을 딱히 가로막거나 하지는 않겠네.
다만 접대의 예의에 화답하는 의미로, 이번··· ‘로마 순례’가 끝날 때까지 우리 군영을 떠나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어찌 생각하는가?”
“하하하! 좋소. 아니, 이렇게 대단하신 분께서 왜 빚은 그렇게 많이 지신 것이오? 우리네 조선에서는 보통 총명한 사람들이 돈도 야무지게 잘 벌던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니, 간혹 한두 가지 결점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렇게 부채 문제를 해결하려 직접 찾아왔다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비록 쇠락했지만, 과거의 영광을 아예 잃지는 않았다. 심지어 한 차례 약탈당하고 합스부르크의 봉신이 된 피렌체조차 열심히 주변의 군소 공국과 영지들을 병합하고 있지 않던가.
그들이 하나로 뭉쳐, 계획대로 합스부르크의 국채를 모두 인수하고 채권자의 권리를 행사하려 한다면 이는 가히 재앙이라 할 만할 것이다. 제국 본토의 영세한 금융가들을 통해 겨우 긁어모은 전비로는, 이탈리아의 부를 지원받는 프란치아나 다른 제후들 -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 오스만 투르크까지 - 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국가들이 하나로 묶일 수 있다면 진작에 그리하였을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이탈리아가 전장이 되는 동안, 도시국가들과 교황령의 동맹은 여러 차례 이루어졌고, 이루어지는 족족 깨져왔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은 더욱 유혹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와 교황령이 시도하고 있는 이 엉성한 연합에 계속 몸을 담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로마 지척까지 다가온 황제의 손을 잡고, 세계제국의 은행이자 재무관으로서 부와 영광을 누릴 것인가.
카를로스는 그에게 충성과 앞으로의 협력을 맹세하는 측에게, 막대한 특권을 약속할 심산이었다. 물론 푸거 가문에게 진 빚에 비하면 새로 이관된 국채는, 이자는 더 낮아지고 상환기간은 더욱 길어지겠지만, 그 대신 신대륙으로부터 넘어오는 무한한 금과 은, 그리고 에스파냐로부터의 보호를 보장받을 터였다.
“어디, 그러면 말씀하신 대로 실컷 이야기나 나눠보십시다. 나도 말로만 듣던 황제라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 퍽 궁금했소이다.”
그렇게 다시 이틀이 지나, 꺽정이 일행과 황제의 군대는 영원의 도시 근교에 이르렀다. 아직 삼십 년도 채 지나지 않은 과거의 악몽, 사코 디 로마를 기억하는 농부들은 모두 집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도시의 시민들은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성벽이 그들을 지켜줄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그 시커먼 도둑놈’의 수완을 얼추 믿는 미켈란젤로는, 조수들에게 허튼 걱정 할 시간 있으면 저의 작업이나 더 도우라 잔소리를 하였다. 이 싱숭생숭한 시기를 틈타 대성당 공사는 내려놓고 <성전 정화> 상의 초벌 작업을 마칠 생각이었다.)
“··· 해서, 내가 왕직 그놈을 붙잡았소이다. 그리하여 남쪽 바다를 나와 우리 당 사람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오. 이만하면 무슨 약조니 뭐니 내세워서 바다의 주인이라고 우기는 것보다는 조금 더 믿음직한 근거라 할 수 있지 않겠소?”
그사이 꺽정이는 황제와 약조한 대로, 소위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그 뒤이은 여러 조약들의 유효성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하고 있었다. 물론 말하는 사람이 사람이다 보니, 그리 심도 있다고 느껴지진 않았지만, 세상에 힘만큼 솔직하고도 확실한 근거가 어디 있으랴.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의외로 순순히 받아들이시는구려.”
“동방의 일은 이미 나의 손을 떠났네. 이번 원정이 끝나면 나는 더 이상 황제도, 국왕도 아닐 것일세. 그러니 나의 아들 펠리페가 알아서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한 번 빼앗긴 것은 다시 빼앗을 수 있고, 한 번 약조된 것은 다시 고쳐서 약조할 수 있는 법.”
“하하! 과연 그릇이 넓으신 분 답소.”
“레가스피 그이의 몸값은 이번 원정이 끝나는 대로 정리하여 지급하겠네. 그러니 이왕 시작한 김에 자네 이야기나 더 들려주게나.”
레가스피의 신병은 이미 황제 측으로 넘겨져 있었다. 지금쯤이면 이날을 위해 그간 온갖 해괴망측한 수모를 견뎠다며, 자신이 듣고 보았던 사정을 모두 구술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하게, 헛소리 말라는 반응 보이는 관리들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을 것이었다.)
“맨입으론 아니 되오. 황제 어르신이야말로 내가 듣기로 수십 년 동안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면서 싸움도 많이 하고 하셨다는데, 이야기 보따리 좀 풀어주시면 안 되겠소?”
잠시의 고민 뒤에 황제가 말했다.
“내 아들 펠리페 이후로 나로부터 옛이야기 듣기를 청하는 사람은 처음이로군그래.”
“다른 사람들이야, 어르신께 뭐 다른 거창한 것을 청하든, 아첨을 하든, 욕을 하든, 어르신을 속이려 들든 했겠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않소.”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러면 내가 옛날, 베네치아 근교를 지날 때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다만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묻겠네.”
“말씀하시오.”
별 생각 없이 말 던진 꺽정이는, 어느새 진지한 눈빛을 한 황제를 보고 약간이나마 놀랐다.
“자네는 아직도, 자네가 이길 수 있으리라 믿는가?”
“거 무슨 말씀이시오? 지금껏 늘 이겨왔으니 내가 여기 있지.”
“세상에는 끝내 되돌려 받을 수 없는 빚도 있는 법일세. 내 들려줄 이야기를, 말하자면 한 편의 우화처럼 들어보게나.”
그러고서는, 지금껏 별 중요치 않은 얘기 떠들 때 했던 것처럼 가벼운 말투로 말문을 다시 열었다.
“베네치아의 어느 상인에게 철부지 아들이 있었네. 그자는 늘 스스로 상행에 나서 큰돈을 벌고자 하였는데, 아비는 아들을 마뜩잖게 여겨 자금을 융통해주지 않았네. 그리하여 치기어린 생각에, 아들은 고약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빌리게 되었지.”
“변변치 못한 녀석이 어떻게 돈을 빌렸단 말이오?”
“아주 거창한 담보를 내걸었지. 바로 자신의 가슴살 일 리브라(Libbra, 파운드)였다네.”
“아하. 목숨을 저당잡힌 것이었구려.”
“그렇지. 가슴살이라는 것은 핑계일 뿐, 그의 목숨을 노린 것이었지.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유대인들의 품성이 원래 그러하다네.”
“그래서 어찌 되었소?”
“그가 빌린 돈을 전부 걸고 띄운 배는 기한이 한참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네. 다들 풍랑에 배가 가라앉았다고들 떠들었지.”
“그래서 마치 누구처럼 빚을 못 갚게 되었구려.”
꺽정이 말 속의 뼈를 마치 생선 가시 던지듯 귀에 담지 않고 휙 내던진 카를로스가 말을 이었다.
“그 젊은이에게는 연인이 있었는데, 그이가 변호사로 변장하고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 항변하였다네. 오직 가슴살 일 리브라만을 가져갈 수 있으며, 피 한 방울 흘려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지.
허나 히포크라테스도, 갈레노스도 하지 못할 일을 어찌 유대인이 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빚은 없던 것이 되고, 젊은이는 연인의 기지 덕분에 무사히 풀려났다는 것이야. 이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인지, 돈 림 자네는 알겠는가?”
지금쯤이면 제노아에서도, 베네치아에서도, 피렌체에서도 도시의 저명한 사람들과 권력 있는 이들이 모여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과연 이 위태롭기 그지없는 모임. 로마의 문턱까지 온 일만 이천 군대를 물리칠 힘조차 없는 연합을 믿고 따르는 것이 옳은가? 그렇지 않으면 남들보다 먼저 배신하고, 황제의 편에 붙는 것이 옳은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가 무엇을 담보로 요구하였든, 그는 유대인이었으므로 자신의 담보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이 이야기의 참된 교훈은 거기에 있었다. 힘이 없는 자는 자신의 몫을 얻을 수 없고, 힘이 있는 자는 비로소 자신의 정의를 내세울 수 있는 법.
그러나, 한참 그 교훈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꺽정이 입에서 엉뚱한 답이 나왔다.
“서방 사람들도 참 허황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겠소. 가슴살 한 근 베어내면서 피 안 흘리는 게 무에 그리 어렵다고.”
“그래··· 바로 그··· 아니, 잠깐. 무어라 했는가?”
“내가 종종 해보아서 안다오. 여기, 갈빗살 위쪽을 찌른 다음 살살, 너무 깊게 자르지는 말고 도려내면 되오. 찌를 때 살짝 안쪽으로 휘게 요령껏 찌르면, 피가 밖으로 새지 않게 할 수 있소. 그리고 다 베어낸 다음에는 곧장 인두로 지져서 피를 멎게 하고. 혹시 모르니까 아래에 대야 하나쯤 받쳐두고.”
이번 생에서는 다행히 그럴 일이 없었지만, 전생에는 종종 해보았던 일이었다. 고리백정보다는 쇠백정에 가까운 짓이었지만, 떳떳지 못한 도적질 하다보면 별별 지저분하고 잔인한 짓에도 손을 대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사내라면 어지간히 살집 있지 않고서야 그렇게 해도 한 근은 안 되니, 반대쪽 가슴팍도 베어내어야 한다오. ”
그 잔인한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린 황제가 말을 막았다.
“그만! 그만하게.”
“거 싸움판 오래 전전하신 분이 왜 그러시오. 좌우지간 내 하려는 말은 이것이오. 배째라고 했을 때 정말로 째버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
오늘의 모임은 이것으로 마치자며, 축객령 내리는 황제에게 끝끝내 한 마디 덧붙이고 나가는 코우지오니스였다.
꺽정이가 들추고 나간 장막 사이로, 저 멀리 가도들이 보였다. 황제의 지시에 따라, 북쪽의 여러 도시에 각각 보낼 서신을 가지고 여러 밀정과 전령들이 달려나가며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과연 저 이방인의 잔인한 말 뒤에 있는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끝내 황제는 알 수 없었다. 단순한 허언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시간이 알려주리라.
그러나 곧 밝혀진바, 시간은 황제의 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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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언급되는 카를 5세의 다국어 구사에 대한 야담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진위 여부는 불분명합니다. 당시 유럽 내에 퍼져 있던 각국 언어에 대한 인식을 카를 5세의 입을 빌어 서술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쪽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유럽 전체의 군주로서 카를 5세가 지녔던 위상을 보여주는 예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실제 카를 5세는 에스파냐어와 프랑스어는 당연히 구사했을 것이고, 교양인으로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역시 충분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카를 5세의 종교적 관용은, 점차 극단화되어가던 당시 신교와 구교의 갈등과 대비되어 오늘날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은 근대적인 종교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무력과 강요보다는 합의와 통합을 선호하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보편군주로서의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통합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구교도 제후들이, 카를 본인이 슈말칼덴 동맹군을 격파하고 제시한 중재안에 저항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지요. 카를은 당대의 여느 군주 이상으로 관대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들어줄 준비가 된 군주였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이 주도하는 통합에 거부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항상 자신이 거느린 세계제국의 힘으로 짓밟을 준비가 된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즉위 직후부터 이러한 뜻을 공개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그가 그린 유럽은, 한 명의 황제가 기독교 세계 전체를 아우름으로써 평화와 신앙을 지키는 것이었고, 그 최고통치자는 바로 1521년 보름스(Worms) 칙령에서 카를 본인이 자신의 권위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부르고뉴, 에스파냐, 시칠리아 등 유럽의 거의 모든 혈통을 물려받은 자신이어야만 했습니다. 그가 이탈리아 전쟁 중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을 교황에 의해 제위를 받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아닌, 보편제국 로마의 계승자 임페라토르(Imperator)를 자임하였던 것은 이를 보여줍니다 (윤선자, 2021. “카를 5세의 제국 이념과 공적 의례.” <사총> 102).
그러나 ‘세계제국 유럽’이라는 카를의 꿈은 이미 그의 즉위 초부터 실패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카를은 중화제국의 천자가 아닌, 너무나 다양한 성격과 역사를 지닌 유럽 국가들의 군주였고, 루터가 불을 붙인 종교개혁은 로마 이후 한 번도 뭉쳐진 적 없던 유럽의 분열에 쐐기를 박았지요. 결국 신교와 구교의 통합이라는 꿈을 무산시킨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직후인 1555년 10월, 카를은 브뤼셀에서 하야 의사를 밝혔습니다. 카를은 자신이 평생에 걸쳐 추구한 보편제국 건설 과정에서 희생된 모두에게 용서를 구하는 말과 더불어, 눈물로써 자신의 연설을 마쳤습니다.
작중에 언급된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은 이미 최소 한 세기 이전부터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14세기 피렌체 문필가 지오반니 피오렌티노가 <데카메론> 풍으로 쓴 단편소설집 <일 페코로네(Il Pecorone, 얼간이)>에 수록된 여러 단편 중 하나로, 가슴살을 담보로 한 대출과 피 한 방울도 흘리면 안 된다는 ‘판결’ 등 <베니스의 상인> 플롯의 주요 내용이 거의 모두 담겨 있지요. (다만 현명하고 아름다운 포샤 대신, 연인들을 독살하고 재산을 가로채는 ‘벨몬테 부인’이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디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건설된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4세기에 완성된 뒤에도 지속적으로 보수와 연장을 거쳤습니다. 특히 서로마 멸망 이후에도 로마가 위치한 라치오(라티움)와 나폴리가 위치한 캄파니아 사이 구간은 계속 쓰였는데, 이는 로마의 우수한 공학기술 덕분이기도 했지만, 산악이 많은 지형 특성상 로마인들이 선점한 구간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