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안심살 한 근 (2)
오랜 세월 동안 전쟁을 겪으면서, 에우로파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정당한 전쟁과 그렇지 못한 전쟁을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개전(開戰)에 대한 법(Jus ad bellum)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빚을 갚지 않기 위한 전쟁이 그리 정당하지 않다는 데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황제는 전쟁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는 그저, 최근 반포된 교황칙서에 대하여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로마 앞에 왔을 뿐이었다.
그를 경호하는 인원이 평소보다 조금, 그러니까 약 일만 하고도 이천 명 가량 많고, 그 경호인력 대부분이 도시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명분은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교황 측에서도 ‘건설적인 대화’를 위해 계속 사람을 보내오곤 하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교황 본인이 이단 혐의로 투옥하거나 추방하였던 이들이 복권되어, 한때 그들을 의심하고 적대하였던 교황을 대변하여 황제의 군영으로 찾아오곤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황제를 위한 첩자 노릇을 하고 있던 카라파 추기경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소장이 함부로 거론할 사안은 아니지만··· 폐하께서 동방인들과 나누신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간 것은 아닐까 의심됩니다.”
어디까지나 오랜 벗이자 군신 사이의 진솔한 대화를 위하여 - 다들 갑주 차림에, 상 위에는 다과나 포도주 대신 이탈리아 지도가 놓여 있었지만 어쨌든 작전(作戰) 회의는 아니었다 - 황제 앞에 앉은 알바 공작이 말했다.
“자네의 생각이 아마 옳을 것일세. 이 군영 안에 첩자 하나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테지.”
“외람된 말씀이오나, 소장은 동방인들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레가스피의 증언에 따르면, 돈 림의 일행 중 경계해야 할 대상은 크게 셋이었다.
동양인들 사이에서도 ‘재앙의 뿌리(禍根)’라 불린다는 코우지오니스 본인. 황당한 계책과 언변을 언제든 내어놓는, 그리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준비가 늘 되어 있는 타고스 박사. 그리고 보잘것없는 외모로 인해 무시하고 업신여기기 좋지만, 바로 그 점을 저의 무기로 삼는 야폰(일본) 사람 도키치로.
그런데 지금 술탄의 아들 셀림과 함께 군영에 머물고 있는 것은 셋 중 코우지오니스와 타고스 둘뿐이었다.
“그 또한 온당한 의심일세. 내가 직접 두 사람과 이야기 나누어본 바로, 언제 어떤 흉계를 꾸며도 이상하지 않겠더군그래. 코우지오니스 그자가 본디 도적단의 우두머리로 시작하여, 반란을 일으켜 그 자리에 올랐다는 이야기 들어보았는가?”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이 로마로 직행하여 집정관 선거에 입후보하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더욱 관심을 가지고 그와 타고스 등을 가깝게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알바 공작은 그러한 관심을 공유하지 않았다.
“폐하, 소장은 군인으로서, 외부인들이 우리의 기밀에 접근할 가능성을 우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 동방인이 본디 도적이었다면, 특히 어떤 암수를 써서 우리의 앞길을 막을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도 있지. 특히 베네치아와 교황령의 계획이 무산된 뒤를 염두에 두면 더욱 대화가 절실하다네.”
세계의 반대편에서 온 코우지오니스는, 또한 사회의 밑바닥에서 올라온 이이기도 했다. 동서로 보나 상하로 보나, 그는 카를로스가 지금껏 마주앉아 이야기 나눈 이들 중 가장 이질적인 상대였다.
그러나 단순히 그를 이야기 동무로만 삼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카롤리나 섬(류큐)에서 에스파냐가 코우지오니스 측과 한 번 충돌한 이상 그들의 허실을 파악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카를로스가 지닌 통치자로서의 재능이었다.
레가스피의 보고에 따르면, 대서양에서와 마찬가지로 태평양에서도 두 방향의 무역풍이 모두 존재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하였다. 그러니 지금쯤이면, 레가스피가 세부에 남겨놓고 온 함대가 태평양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는 항로를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완전히 멀어져만 가는 줄 알았던 세계제국의 꿈이 다시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두 대양을 가로지르며, 부르고뉴의 십자가를 내건 채 신앙을 전하고 황금을 득하는 그의 백성들 - 이제는 곧 아들 펠리페의 백성이 되겠지만 - 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자네의 말대로, 그자 본인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여러 정황 중 의심스러운 바가 적지 않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의심할 수 없는 사실 하나를 알고 있지 않은가?”
알바 공작을 비롯하여, 막사 안의 여러 참모들이 모두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탈리아에는 군주가 없네.”
카를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 위에 꽂힌, 작은 깃발 여럿을 응시했다. 오랜 벗과 대화 나누는 초로의 사내에서, 수많은 군주의 칭호를 독점하는 황제로 돌아오는 데는 눈 한 번 깜짝일 시간이면 충분했다.
“프란치아 국왕 엔리케는 휴전협정을 깨뜨릴 의사가 없을 것이야. 아직 우리 군대가 남쪽에 머물고 있을 때라면, 교황령이나 베네치아의 충동질 여러 번에 겨우 혹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로마 앞까지 이렇게 우리가 접근했으니, 협정을 깨뜨리며 다시 한 번 무력에 호소하려 하지는 않겠지.
이미 나를 군주로 모시고 있는 밀라노와 플로렌치아(피렌체)는 어떤가. 스포르차(Sforza) 가문이 밀라노를 떠난 이후로 그 자리를 채울 만큼 담대한 자는 밀라노에 없고, 플로렌치아의 메디치 가문은 자신의 권좌를 지탱하는 것이 이제 우리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 뿐임을 잘 알고 있네.
그뿐인가? 아직 알량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크고 작은 다른 도시들도 소위 이탈리아 도시들의 연합이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고 있네. 그리고 그 연합을 배신했을 때 그들을 처벌할 수 있는, 더 높은 권위는 결코 이탈리아 땅에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그러므로 그들 사이의 신뢰는 없네. 신뢰가 싹트기도 전 배신이 먼저 고개를 내밀곤 했는데, 그나마 그들이 기댈 수 있던 프란치아의 군대도 없이, 오로지 그들의 은행만을 믿고 버텨야 하는 지금은 어떻겠는가.”
황제가 말을 마치자, 정적이 감돌았다.
그 누구도 황제의 안목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그 정적 아래에는 오로지 그들의 주군을 향한 신뢰만이 깔려 있었다.
“알바 공작. 추가로 군비를 조달하지 않는 한 두 달 안으로 이번 ‘순례’를 끝낼 수밖에 없다고 보고를 받았네. 내 기억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폐하.”
‘조달’이란 당연히 빌리는 것을 뜻했다. 여간한 강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은행가들에게 손을 버리지 않더라도 합스부르크 가와 연을 맺은 다른 왕족 또는 귀족들로부터 빌리는 것도 불가하지는 않은 일.
그러나 황제의 판단으로는 그마저도 불필요하였다.
“내 예상컨대 보름 안으로 내 관대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도시가 나올 것일세.”
지금으로부터 일백여 년 전, 이탈리아는 이른바 ‘가장 신성한 동맹’으로 묶여 있었다. (이는 그 전으로도, 또 그 후로도 아주 많이 존재할 수많은 ‘신성한 동맹’과 구분하기 위한 이름이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이 끝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흑해 무역은커녕 지중해 무역조차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시대가 닥쳤다. 이때 피렌체의 국부(Pater Patriae) 코시모 데 메디치를 필두로, 밀라노, 베네치아, 교황령, 그리고 나폴리까지 다섯 정부의 수반들은 상호불가침을 선언하였고, 그 결과 한동안 이탈리아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그로부터 사십 년 뒤 동맹은 파기되었다. (일반적인 ‘신성동맹’보다는 훨씬 오래 유지되었으므로, 과연 ‘가장 신성한’ 동맹이라는 이름값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이탈리아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하나로 뭉치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프란치아의 강력한 군대에 기댈 수 있던 때에도, 이탈리아 국가들은 분열을 거듭하던 끝에 황제에게 무너졌고, 로마는 용병들에게 약탈당하고야 말았다.
그러니 섣부른 제안과 어설픈 선언만 있을 뿐, 그 이상의 약속도, 보장도 없는 지금. 이미 공식적으로 합스부르크의 봉신이 되어 있던 밀라노와 피렌체 외 수많은 공국과 공화국들이, 빠져나갈 궁리부터 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너무 성급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가 비록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교도 아닙니까. 그런 투르크를 대상으로 하는 운하의 제안을 교황 성하께서 바로 받아들이셨으니, 황제 측의 입장도 이해는 할 수 있지요.”
교황 바오로 4세가 문제의 칙서를 공표한 것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주도한 ‘자유로운 석공들’의 파업, 그리고 이방인들의 협박과 설득 등등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믿지 않는 여러 도시의 유력자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무리한 계획이었으니, 반드시 이탈하려는 자가 생기겠지요.”
어차피 누군가 배신을 할 수밖에 없다면, 먼저 배신하는 쪽이 배신당하고 큰 대가를 치르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다들 대놓고 중인환시 하에 말은 못하여도 그렇게들 생각하였다.
“다만 황제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았지요. 그저 무력시위일 뿐이니, 타협의 여지가 있는 셈입니다.”
“그렇지요. 부채 문제 때문에라도 이탈리아 도시들 중 어딘가와는 손을 잡아야 할 테니까요.”
오랜 세월에 걸쳐, 결혼을 통해서든, 성직자들을 통해서든 이탈리아의 유력한 가문들은 반도와 그 너머 곳곳에 이런저런 연줄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러한 연줄은 그 자체로 세력이자, 정보망이자, 때로는 피난처가 되곤 했다.
그러니 이제 로마나 나폴리에 있는 이들로부터, 또는 에스파냐나 황제의 군영으로부터 배신, 아니, ‘타협’을 종용하는 연락이 올 법도 했다.
분명 황제가 무언가 타협안을 제시하여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 ‘합스부르크 채권 인수 및 운하 공동투자 모임’은 동맹의 이름으로는 영 격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 연합으로부터 빠져나올 유인을 제공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도둑놈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평범한 양민들이라면 모를까, 도둑놈들에게 있어서는 사해가 모두 형제(四海同胞)라는 말이 딱히 틀리지는 않았다.
“하, 정말 대단하시오. 이런 성을 하루만에 쌓을 줄은 몰랐소.”
영 개구리 내지는 두꺼비를 닮은 험상궂은 인상의 산적 두목이 손짓발짓 곁들여 칭찬을 하니, 도키치로도 제법 기분이 으쓱해졌다.
“하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성이라는 것은 정말로 과찬이고, 실제로는 그저 목책을 얼기설기 세운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만드는 사람이 사람이다 보니,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는 정말로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눈속임을 해두었다.
실제로는 어설프기 그지없어, 이 땅을 한때 누볐던 로마군 군단병들이 본다면 곧장 ‘네놈 선임 나오라고 해라’ 소리를 하였을 테지만, 어차피 군대를 막기 위한 목책이 아니요 그저 길손들 발목 붙잡는 데 뜻이 있었으므로 별 상관 없었다.
“동쪽 나라들이 정말 잘 살기는 하는 모양이오. 털어먹을 게 많으니 도적질 수법도 이렇게 발달하는 것이겠지.”
이름을 주세페라 하는 산적 두목이 진심으로 감탄하였다. 물론 제대로 그 말이 전해지지는 않았으므로, 도키치로는 그저 칭찬인 줄만 알고 받을 뿐이었다.
황제의 로마 진군이라는 사태를 맞이하여, 교황을 부추긴 죄 있는 꺽정이와 그 일당은 나름대로 책임을 지고서 계책을 내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 계책의 일환으로 지금 도키치로와 밤이가 이끄는 흑의군은, 로마에서 더 북쪽으로 향하는 길이란 길은 모두 막고 있었다.
물론 말이 ‘모두 막는’ 것이지, 고작 한줌에 불과한 흑의군으로는 오솔길 하나나 제대로 막으면 다행일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없다면, 모으면 그만이었다. 그리하여 교황령 관리들이 으슥한 곳을 돌며 산적과 여타 도둑들을 모아, 사면을 조건으로 그들을 두 달간 부리기로 하였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꺽정이가 그렇게 모인 산적들을 휘어잡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산적 두목 서너 명을 가지고 꺽정이의 장기인 공기놀이를 함으로써 인의와 예절을 가르치니, 불립문자(不立文字)가 어찌 불문(佛門)에서만 통하는 이치랴.
그 뒤 이탁오가 사흘 간 조선말의 기본을 겨우 가르친 관리 몇몇이 도적들 사이에 끼어들었으니, 동서(東西)가 화합하고 녹림(綠林)과 관이 함께하는 인화(人和)가 절로 이루어졌다.
“저기 보시오. 누가 오는 듯하오.”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손짓발짓 이야기 나누던 - 생긴 건 달라도 동업자로서의 친분이 있던 것이다 - 중, 말발굽 소리와 마차 수레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페페(주세페의 애칭) 형님! 무슨 귀부인 행차 같습니다요!”
로마 반대편, 토스카나 쪽으로부터의 길을 감시하던 조르지오라는 산적 하나가 외쳤다.
“곁에 병사는 얼마나 되느냐?”
“한 열 명 남짓입니다!”
“좋다! 자, 다들 위치로!”
“우리 흑의군도 위치로!”
꺽정이는 모인 산적들을 여러 패로 쪼개어, 이곳저곳을 가로막고 아무도 못 오가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중 가장 사람 많이 다니는 길목에는, 몇 안 되는 흑의군을 두 패로 나눈 뒤 현지 산적패들과 섞어 배치해두었다. 그리하여 도키치로가 이쪽을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도 영 사람이 부족한 쪽에는, 그 근방이 고향인 교황령 군사들까지 차출하여 붙여주었는데, 산적과 군인이 함께 산길을 지키며 여행자들을 괴롭히니 당하는 이들에게는 이만한 봉변이 없었다.
이쪽은 흑의군이 있었으므로, 다행히 딱히 교황령 군사들이 있지는 않았다. 다들 고갯길 곳곳으로 퍼지자마자, 곧 딱 보아도 귀족 행차인 듯한 일행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폭력에 호소할 생각입니까?”
목책 뒤에 함께 있던 교황령의 하급 관리 하나가 뒤늦게 볼멘소리를 했다. 이탁오의 속성 강의를 들었던 사람인 고로, 이탈리아 말과 조선 말을 반반 섞어 말하고 있었다.
“아이고, 나리도 벌써 몇 번 보셨다시피, 다들 고개가 빳빳해서, 높으신 분들 명이니 얼른 멈추라고 해도 저들이 더 높다며 콧대 세우곤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그 콧대 뭉개주어야 좀 순순해지기 마련이지요.”
“걱정 마십쇼, 나리. 저기 앞에 나가고 있는 조르지오 저 친구가 제법 언변이 좋습니다.”
그 말대로, 다들 위치로 향하는 와중 산적 한 놈이 앞으로 당당히 나와 길 한가운데 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앞에, 딱 보아도 귀한 사람 행차인 듯한 행렬이 멈추어 섰다.
“너는 누구냐? 이 무슨 무례인가?”
“하하, 여기서 더 앞으로는 못 가십니다.”
저게 언변이라면, 흑의군 하나하나도 청산유수를 자처할 수 있을 터였다.
“저래봬도 소싯적에 교회에서 글자까지 배웠다는 놈이오. 보시오, 저렇게 당당하게 귀한 사람 앞에서 할 말 다 하지 않소.”
그러나 산적 두목 놈은 정말로 저것을 대단하다 여기는 듯하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산적 중에서는 귀족 앞에서 이렇게 할 말 다하는 것만 해도 훌륭한 축에 드는 것이었다. 비교 대상이 임꺽정만 아니라면야.)
“미리 경고컨대, 우리가 모시는 분은 콜론나(Colonna) 집안의 방계이자 루카 공국의 유력한···”
“그건 우리 알 바 아니오. 그 누구도 이번 한 달은 이 고갯길을 지날 수 없소이다. 그리고 이런 시국에 굳이 고개를 넘어가려는 것도 의심스러우니, 모두 체포해야겠소.”
“무어라? 이놈이 감히···”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읽은 도키치로가 외쳤다!
“쳐라!”
갑자기 주변에서 말 그대로 시커먼 도적들이 몽둥이 들고 나타나, 나름 갑주 차려입은 사병들을 들이받았다. 류큐에서 보았던 에스파냐 군인들에 비하면 허수아비와 다름없는 고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절반 넘게 자빠졌다.
그리하여 곧 병장기 든 자들은 모두 제압되고, 두려워하는 자들만 남았다.
“흠흠, 여기 이 사람이 말한 대로, 앞으로 한 달간 이 길은 통행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순순히 체포에 응해주시기 바랍니다. 기한이 끝나면 딱히 몸값을 요구하는 일 없이 모두 풀어드리겠습니다.”
그제야 목책 뒤에 숨어 있던 관리가 나서서 사정을 설명하니, 이미 넋이 절반쯤 나간 이들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갈수록, 황제는 황제대로, 어디서부터든 그들의 배신을 정당화하는 핑계 되어줄 소식 오기를 기다리는 도시의 유력자들은 유력자들대로 마음이 답답해져 갔다.
“어찌하여 아무런 연락이 없는 것일까요?”
“··· 말 그대로 연락이 없으니, 알 방도가 없구려. 로마로 보낸 이들도 아직껏 답장을 보내오지 않고 있소.”
이미 몇몇 집안에서는, 황제의 편에 서겠노라고 연락을 취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제의에 대한 응답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가운데에서 산적과 관리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손을 잡고 양측을 오가는 사절과 밀정들을 모조리 붙잡고 있음을 알 리 없는 입장에서는 곤혹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미 우리 대신 누군가 먼저 황제의 손을 잡은 것은 아닐까요? 우리보다도 더 좋은 상대가 선뜻 먼저 나섰다면, 굳이 우리를 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겠지요.”
“그럴지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있겠구려.”
허나 교황령의 고갯길만 막혔을 뿐, 그 이북은 제노바부터 베네치아까지 모두 훤히 뚫려 있었으므로, 그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얻을 수 있었다.
“무어라? 그들 또한 아직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니?”
당연히 베네치아 정도를 제외하면, 아니, 베네치아 내에서도 몇몇 가문을 제외하면 다들 기꺼이 황제의 손을 잡으려 할 줄 알았건만, 도시들이 각각 다른 도시에 보낸 첩자들은 결코 그런 움직임이 없다고들 답해왔다.
아직까지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합스부르크의 봉신인 밀라노와 피렌체조차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에 놀랐다.
합스부르크의 봉신인 밀라노와 피렌체는, 당연히 그들이 배신할 것이라 여기고 있을 제노바와 베네치아조차 이 허술하고 어설픈 모임에서 믿음을 거두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실제로는 다들 똑같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사세를 부득불 관망할 뿐이었지만, 속마음까지 알지 못하는 이들 눈에는 서로 그렇게 보였다.
“허, 다들 신의를 지키고 있는 것인가.”
이미 황제는 다른 도시에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편에 설 것을 종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그 어떤 도시도, 또 어떤 집안도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있는 듯하였다.
“하,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군요.”
“이토록 쉽게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을 줄이야. 평화고 무엇이고 상관없이, 그저 막대한 이익만 약속하면 되는 일이었군.”
모두들 냉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의 손을 남들보다 먼저 잡는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 누구도 다른 도시와 가문들이 이탈리아의 평화니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공영이니 하는 빛깔 좋은 대의를 위하여 신의를 지킨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은, 다른 도시들이 지닌 이기심과 탐욕을 믿었다. 이탈리아 북부의 모든 도시들이 하나로 뭉쳐, 그들이 장악한 금융이라는 힘을 휘두르게 된다면, 그것은 그 어느 군주도 함부로 여길 수 없게 될 터였다. 다들 그것을 위해 모험을 하기로 결정한 것 아니겠는가.
모두가 그러한 목표 - 신앙도, 평화도 아닌, 그저 엄청난 이익과 권력이라는 목표 - 를 위하여 유혹을 견뎌내는데, 이제 와서 그들이 나머지 모두의 뒤통수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당장은 황제의 군대가 로마 지척에 와 있고, 원한다면 밀라노와 피렌체에서도 군대를 일으킬 수 있겠지만, 몇 달만 지나도 이 사태를 접한 프랑스 측에서도 뭔가 움직임을 취하게 될 터였다. 다른 도시들의 공적이 된 자신의 도시가 싸움터로 전락하는 것은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며칠이 지났다.
“저의 주군이신 황제, 카를로스 폐하의 뜻을 귀한 분들께 전해드립니다···”
많은 고초를 겪은 듯한, 다소 추레한 행색의 첩자와 사절들이 하나둘씩 북쪽의 도시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넓은 교황령의 모든 길을, 그토록 짧은 시간 동안의 준비만으로 다 틀어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처음 보낸 밀사들이 돌아오지 않자, 며칠 뒤에는 한 번 더, 그리고 다시 며칠 뒤에는 아예 다른 산길로 밀사를 보내기 시작했고, 결국 몇몇 고갯길은 뚫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애초에 모든 길을 막으려는 작정을 하고 산적들을 끌어모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새로운 형태의 의심이 싹틀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일 뿐이었다.
“이 전갈은 받지 못한 것으로 하겠네.”
“예? 하지만···”
“거짓 변명은 말게. 이미 다른 도시들에도 다 연락을 취했는데, 그들이 모두 한사코 거절하니 이제야 우리에게 찾아온 것 아닌가? 그렇게 고생한 흔적을 가장한다 하여 우리가 속아넘어갈 줄 알았다면 오산일세!
그대의 주군께 전해주게나. 우리는 폐하께서 어떤 제의를 하시든 정중히, 그러나 최대한 단호하게 거절할 것이라고.”
그리하여 끝내 압박 앞에서 단일한 대오를 유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도시가 하나쯤 나오리라 기대하던 카를로스는 - 그의 판단으로는, 아마 제노바가 될 듯하였다 - 단호한 침묵만이 돌아오는 데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배 째라고 하셨더니 배 째겠노라 답하는구려. 북쪽 도시들이 똘똘 뭉쳐서 누구에게도 저들의 돈 아니 빌려주겠다 하면 당장 어르신께서도 곤란해지시지 않소?”
오늘은 이탁오와 함께 황제 앞에 찾아와, 나라라는 것이 때로는 그저 욕심 많은 백성들 여럿 사이의 약속만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는 동방 땅의 새로운 논변에 대해 이야기 늘어놓던 꺽정이가, 대충 눈치껏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고는 카를로스를 놀려대었다.
--- *** ---
작중 언급된 것처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백년전쟁이 끝나면서 강대국 사이에 짓눌릴 위기에 처한 원 역사의 이탈리아 국가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흔히 이탈리아 동맹으로 더 잘 알려진 신성동맹, 또는 로디(Lodi) 화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북이탈리아를 삼분하고 있던 베네치아와 밀라노, 피렌체,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 그리고 남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까지, 당시 이탈리아의 5강이 모두 평화에 합의한 것이지요. 그러나 시작부터 코시모 데 메디치 등 몇몇 뛰어난 인물의 외교력에 의지하던 이 체제는, 그 뒤를 이어 체제유지에 힘쓰던 로렌초 데 메디치 사후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사이에서 이탈리아 세력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되었고, 약 60여 년에 걸쳐 산발적으로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으로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원 역사에서 1556년 바오로 4세가 펠리페 2세의 나폴리 국왕 승계를 불인정하며 재개된 이탈리아 전쟁은, 결국 1년 만에 프랑스의 완패로 끝났고, 휴전 협상 끝에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총 여덟 차례에 걸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은 완전히 종식되었습니다. 그 결과 베네치아를 제외한 모든 이탈리아 국가들이 에스파냐 또는 합스부르크 - 카를 5세 이후 에스파냐의 압스부르고 가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시 나뉘게 됩니다 - 의 직접 지배를 받거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지요.
이미 국제무역에서는 이베리아 국가들에, 상공업에 있어서는 독일의 자유도시들에 밀리고 있던 이탈리아 국가들은 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막대한 부와 해외 식민지를 바탕으로 버티던 베네치아도,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손을 잡고 그 하위 파트너로서 번영을 누린 제노바도, 결국 하나둘씩 쇠락하게 됩니다.
한편, 1556년 당시 이미 심각한 채무 문제에 시달리던 에스파냐는, 어쩔 수 없이 전비를 다른 곳, 요즘 표현으로는 제2금융권에서 빌려야 했습니다. 당시 나폴리 총독을 겸하고 있던 사령관 알바 공작은, 밀라노 스포르차 가문의 일원이자 폴란드 왕비였던 바리 공작 보나 스포르차로부터 43만 두카트를 연 10% 이율 -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한 고리였습니다 - 로 빌렸는데, 결국 에스파냐는 이 대출을 완전히 상환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나폴리의 빚(Sumy neapolitanskie)’은 떼어먹힐 것이 명백한 빚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폴란드어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작중 카를(카를로스)이 언급하는 ‘자금 조달’은 이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산악 지형과 상대적으로 미비한 공권력은, 통일 직전에 이르기까지 산적들이 곳곳에서 날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열악한 치안환경 속에서, 중심지인 도시에서 멀어진 곳의 촌락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경단을 조직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자경단은 종종 반대로 범죄조직이 되곤 했습니다. 마피아의 조상격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조직들은, 이미 16세기 중반 이탈리아 국가들의 골칫거리로 부상하여 지방정부 차원에서 조직들 간의 화해를 추진하였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지요. 이후 낭만주의 시기에 들어오면서, ‘로마의 옛 유적 사이를 누비는 의적’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면서 이탈리아 중부 산악지대의 산적들은 나머지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낭만적 아이콘 내지는 밈으로 묘사되게 됩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등장하는 백작의 수하 루이지 밤파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탈리아 중부의 산악지대는 근대와 그 이후까지도 많은 이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습니다. 한쪽에서는 무솔리니에게 저항하는 좌파 게릴라들이, 다른 한쪽에서는 이탈리아 항복 이후에도 산악지형을 이용해 끝까지 연합군의 발목을 잡는 독일군이 각각 험준한 지형을 이용했지요. 특히 지난화에 언급된 것처럼 나폴리와 로마 사이의 제대로 된 교통로는 단 둘뿐이었고, 작중 시점에서 한참 뒤인 2차대전 시기에도 이 일대에 구축된 방어선을 뚫기 위해 연합군은 몬테카시노 전투와 안치오 상륙 작전 등 숱한 혈전을 치루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