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꺽정은 살아있다-145화 (145/259)

43. 안심살 한 근 (3)

황제 카를로스의 마음 속에는 희망과 그 형제인 야심을 위한 자리가 늘 마련되어 있었다. 그 자리는 항상 가득 차 있어, 가장 험난할 때에도 그가 능히 의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때, 현실의 벽이 눈앞에 닥쳐올 때에는 그 희망과 야심이 공히 가시가 되어 그의 나머지 마음을 아프게 찌르곤 하였다.

신은 그에게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밝은 눈을 주셨다. 저의 팔다리 닿지 않는 곳까지 능히 볼 수 있게 되어, 한평생 욕심을 내어 절벽을 기어오르려 애썼다.

더 낮은 곳, 더 가까운 곳에 만족하였더라면 지금과 같은 좌절까지는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끝내 오늘따라 씁쓸한 자조가 입안에 감돌았다.

그제부터 밀사와 전령들이 하나둘씩 북쪽으로부터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의 어두운 표정과 빈 손은, 고생하여 먼 길로 돌아간 여정이 헛수고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북쪽으로 향하는 어지간한 길은 모두 막혀 있었고, 그로 인하여 발생한 연락의 지연은 오해를 낳았다. 그리고 그 오해는 카를로스에 대한 불신으로, 그리고 도시들 사이의 신뢰로 이어졌다.

오늘따라 통풍으로 고통받는 무릎이 더욱 아려왔다.

“몸이 영 불편하신 모양이오? 나중에 우리 동방이랑 통하는 길이 뚫리면, 그때는 침 잘 놓는 용한 의원이라도 하나 보내드리겠소.”

코우지오니스가 알현을 청한다는 소식에 한층 더 아파진 무릎이었는데, 막상 그자가 얼굴을 들이미니 의외로 멀쩡해졌다. 아마 그 뻔뻔함에 대한 은근한 분노로 인하여 잠시 마음을 돌리게 된 덕분이리라.

“하, 상처에 소금을 뿌리러 왔는가.”

“이 군영에서 같이 지낸 것도 이제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내 품성을 잘 모르시나 보오. 내가 어디 봐서 상처에 소금만 뿌릴 사람이오.”

“그래, 무슨 일인가.”

“큰스··· 아차, 교종(교황) 쪽에서 오늘 보내온 사절은 만나보셨으리라 믿소.”

전쟁도 아니요, 그저 무장한 채로 순례를 온 일만이천 대군이 로마 근교에 진을 치고 있으니, 교황청으로서는 딱히 경건한 마음이 없더라도 절로 새벽에 기도 올릴 무렵 눈이 떠지고, 또 밤이 되어도 편안히 눕지를 못하는 판국이었다.

그리하여 회군을 청하는 사절이 매일같이 이곳 군영에 드나들곤 했는데, 종종 그들이 군영을 나가는 길에 함께 머물고 있는 셀림이나 코우지오니스를 만나 안부 묻는 일도 있었다.

“그쪽으로부터 몰래 받은 제의가 있는 것이겠군.”

“오, 어찌 아셨소?”

“자네만 내 군영을 염탐하는 것이 아닐세. 자네와 동행하는 이들, 그리고 자네 모르게 뒤를 밟는 이들이 제법 있지.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짓을 자네가 먼저 하지 않았는가.”

그사이 저도 모르는 사이 황제의 첩자 노릇을 하던 카라파 추기경이 실각하고, 한때 바오로 4세의 미움을 받아 투옥되었던 조반니 모로네 추기경이 복권되어 빈자리를 채우는 일이 있었다.

보나마나 코우지오니스 입에서 발설된 것이 뻔하였다. 물론 교황이 스스로 적으로 삼은 모로네 추기경이 돌아온 것에서 볼 수 있듯, 압스부르고(합스부르크)의 적을 자처하는 교황이 그 폭로로 인해 입지가 좁아진 것은 황제에게도 이득이었지만.

“그런데 뒤에 붙인 작자들이 영 시원찮은 모양이오. 내가 몰래 제의를 받은 게 아니라, 우리 쪽에서 먼저 교종 측으로 말 꺼낸 것에 대해 이제야 답변을 받은 것이라오.”

돌아가는 모양새 보고 이탁오가 끄적거린 종이조각을, 그 덩치에 걸맞지 않는 잽싼 솜씨로 사절로 찾아온 모로네 추기경 소맷자락에 넣은 꺽정이었다. 그 종이에 쓰인 것은 바로 지금 이탈리아에서 꺽정이 패거리만 읽을 수 있는 한문이었으니, 설령 중간에 누군가 낚아챈다 한들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 카라파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어르신네 간자 노릇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전해주니, 그 꼬장꼬장한 교종님네도 제법 기가 죽었소. 그 이후로는 사람 여럿이 물갈이되더니, 제법 우리네 말에 귀를 기울여줍디다.”

“역시 자네들이 발설한 것이었군. 그래, 들어나 보세나.”

“폐하께서 궁지에 몰리시는 것이 서로 좋지 않으니, 이쯤에서 물러날 수 있도록 가운데서 중재해주고자 함을 밝혔습니다.”

헛기침 한 번 하고 타고스가 앞으로 나와 말을 꺼냈다.

“중재라?”

“지금 로마에 북쪽 여러 성(城, 도시국가)의 사절들이 모여 있습니다. 며칠 내로 이 군영에 찾아오겠지요. 그때 그들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폐하께서 먼저 하신다면, 적어도 명예는 지킨 채로 이곳에서 물러나실 수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 즉 저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준다는 뜻이겠지.”

사실상 그들에게 투항하는 것과 같은 조건이 될 터였다. 카를로스 그가 발행한 국채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인수하는 것을 인정하고, 부채의 상환을 보장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상환된 금액이 운하 건설에 투자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 것.

굳이 불가침이니, 각국의 독립 또는 자치 보장이니 하는 조항을 넣지 않더라도, 이것만으로 이탈리아 은행가들은 에스파냐를 막는 가장 강력한 방패를 얻는 셈이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 저지대나 신대륙에서 어떻게든 더 많은 부를 얻어내어 그것을 바탕으로 군대를 일으킨다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이었다.)

다만 황제가 누구보다 앞서 이러한 제안을 한다면, 적어도 겉으로는 교황이나 다른 도시들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화해를 청하였다는 식으로 구색은 맞출 수 있을 것이었다.

저들도 대놓고 반대하기 어려운, 몇 가지 자질구레한 조항을 내세워 체면치레쯤은 할 수 있을 테다.

“여기 탁오 선생 말대로요. 듣자하니 어차피 그 외에 어르신께서 하실 수 있는 일도 딱히 없는 듯하던데.”

“이대로 로마를 공격할 수도 있겠지.”

“이곳 서방에서는 땅만 파면 황금이 나오나 보구려.”

한 치 물러남 없이 나오는 사정없는 비아냥이 황제의 실소를 자아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황제의 머릿속에서는 벌써 빠르게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먼 옛날, 샤를마뉴의 시대라면 모를까, 오늘날의 사절이란 곧 당당하게 파견되는 첩자로서도 기능하곤 했다. (이는 눈앞의 두 동방인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황제가 이끄는 군대의 자금 사정도 언젠가는 저쪽에 알려진다고 보아야 했다.

저들이 시간을 더 끌면서, 더욱 불리한 조건을 강요하는 것을 감수하느니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것이 그나마 명예를 지키는 방도일 터.

“솔직하게 인정하겠네. 도시들 중 어딘가가 다른 이들을 배신하고 나의 손을 잡으리라는 기대는, 코우지오니스 자네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깔끔하게 빗나갔지. 그러니 여기에 대해서는 미련을 가지지 않겠네.”

“현명한 선택이시오. 보나마나 로마에 찾아온 사절 놈들 중에는 어르신이 곤경 처했다 믿고서 더 기어오르는 놈도 있을 텐데, 오늘 못 부리신 허세와 겁박은 아껴두었다가 그놈들에게 퍼부어주시오.”

옛날, 그러니까 한 이삼십 년 전이었다면, 자존심을 내세우며 어떻게든 승리할 길을 찾아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카를로스는 늙었고, 패기 대신 지혜를 얻었다. 물론 늙은이의 지혜라는 것은, 젊은이의 패기가 좌절되면서 하나씩 체념하게 되는 것을 돌려서 이르는 말이겠지만.

그러므로 카를로스는 다른 대책이 없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더욱 욕심을 부렸다가 자칫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게 된다면, 수없이 많은 그의 적들이 그를,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 펠리페를 노리고 달려들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깨닫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미묘하면서도 한없이 깊은 간극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아파오는 무릎을 향해 손이 움직였다.

그것을 본 주변의 시종들이, 말없이 서로 손짓발짓을 하였다. 카를로스가 한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였다.

“어르신, 괜찮으시오? 어디가 아프신지는 몰라도 요새 부쩍 심해지신 듯한데.”

통증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거한이, 마치 저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걱정해주었다.

“잠시 답답한 마음이 들었을 뿐이라네.”

“바람이라도 좀 쐬는 게 어떻겠소? 아직 한여름 더운 바람이 다 식지는 않았지만 여차하면 내 부채라도 부쳐드리리다. 이래봬도 내가 임금님네 첫째아들 목숨을 부채질이랑 풀무질로 살려본 사람이라오.”

그새를 못 참고 또 나오는 황당한 이야기. 끝내 아픈 가운데서도 황제는 웃고야 말았다.

“하, 대체 자네는 안 해본 일이 있는가? 술탄과 그 아들이 보증하지만 않았더라도 진작에 허풍선이로 알고 내쫓았을 텐데.”

그러면서도, 시종들로 하여금 장막 밖에 의자를 놓고 그곳까지 저를 부축해달라 지시하는 카를로스였다.

잠깐의 부산스러움이 지나고, 곧 황제와 백정은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마주앉았다.

태양은 멀리 로마 너머, 티레니아 해를 향해 떨어지고, 이제 그 남은 열기를 머금은 밤바람만 불고 있었다.

“내 지금껏 수많은 전장을 누볐지만, 이런 싸움은 처음이로군그래. 보이지도 않는 상대와 맞서,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왜 졌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지게 되다니. 정말로 물러날 때가 된 것이겠지.”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기는 한데, 내 앞에서 그런 종사의 중대한 일을 거론하셔도 괜찮으시겠소?”

“괜찮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자네는 이곳 에우로파에서 무슨 난리가 벌어지든, 어느 가문의 혈맥이 끊어지든 아예 관심이 없지 않은가. 그저 자네가 원하는 것. 그것 하나만을 바라보며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나갈 뿐.

그런 사람을 내 언제 이곳 에우로파에서 또 만날 수 있을까.”

황제의 눈은 꺽정이에게도, 이탁오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저 머나먼 서쪽 바다를 향할 뿐. 그의 아들 펠리페가 있는 에스파냐를 향하는 것인지, 그 너머 황금의 땅 누에바 에스파냐를 향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도 더 멀리 있는 태평양과 그 너머 동방을 향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기야, 우리나라에도 그렇고 다른 나라에도 그렇고, 임금이 자리 내려놓고 상왕이니 태상왕이니 하는 일이 없지는 않습디다.

하면, 어르신께서는 그 자리 내려놓으시면 이제 무얼 하실 생각이시오?“

“원래는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신께 바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네.

물러난 뒤에는, 책이라도 한 편 써볼 생각이라네. 은퇴한 황제가 꼭 양배추 농사만 지으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카를로스는 옛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고사를 언급하며 홀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듣는 꺽정이는, ‘또 저 혼자 아는 얘기 한다’ 여길 뿐 별 감흥 없었지만, 이탁오는 저의 이름과 서책 운운하는 소리 나오는 데 귀가 쫑긋하였다.

“타고스 박사의 표정을 보니, 말로 듣지 않아도 그 질문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군. 무슨 책을 쓸 것인가 물으려 하였겠지.”

“맞습니다.”

황제는 다시 서쪽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마치 두 사람뿐 아니라 온 세상에게 이야기하는 듯하였다.

“책으로 말하고 싶은 바는 단 하나일세.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것.”

그는 실패하였다. 후대는 그를 위대한 황제로, 훌륭한 아버지로, 뛰어난 장군으로 평할지도 모르겠지만, 카를로스 자신은 항상 더 멀리 나아가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다가가는 만큼 더 멀어지는 것일지도 모르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전 좌절하고야 말았다.

그의 아들 펠리페의 대에서든, 언젠가 신께서 자비를 내리시어 제정신 차리게 해주실 - 그러기를 바라마지 않는 - 손주 카를로스의 대에서든, 자신이 못다 이룬 바를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이탈리아까지 왔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이제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탈리아의 은행가들로부터 전비를 마련할 수 없다면, 그가 이룩한 제국, 숱한 적을 만들며 넓힌 영토는 더 넓히기는커녕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 카를로스는 글으로라도 남기고 싶었다. 이 땅에, 지금껏 그 어떤 에우로파 군주보다도 더 많은 군주들의 혈통을 한데 모았던 카를로스라는 사내가 있어, 신의 은총을 받아 황제 자리에 올랐고, 끝내 세상의 벽을 깨뜨리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금이 갈 때까지 온 힘을 다해 공성추를 당기고 밀었노라고.

그의 힘이 부족하고, 지혜가 달렸으며, 여건이 좋지 못하여 끝내 실패하였을 뿐, 그의 목표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고.

“코우지오니스 자네는 행실로, 여기 타고스 박사는 말로 주장하였지. 나의 꿈, 한 사람의 군주 아래 단합된 세상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들은 언행으로써 보였다. 모든 사람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욕심과 정의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위하여 발버둥치는 것은 비록 억누를 수는 있어도 아예 막아버릴 수는 없음을.

그리고, 결국 도시들의 욕심, 압스부르고의 국채와 지중해와 홍해 사이 운하가 가져올 막대한 이익에 대한 욕심이 황제의 발목을 잡았다.

“모두가 저의 욕심대로, 저의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결국 이 세상은 영영 여럿으로 쪼개져 영원히 다툴 수밖에 없을 것일세. 만일 국경이 사라져 하나의 나라로 합쳐진다면 그 안의 제후들이 다툴 것이요, 제후마저 사라져 자유도시만 남는다면 도시들끼리 싸울 것이고, 도시마저 사라져 씨족만 남는다면 그때는 사람 하나하나가 서로 다투겠지.

내가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본 에우로파가 그러하였네. 거대한 적이 동쪽에 도사리고 있고, 서쪽에는 아직 문명과 신앙을 알지 못하는 야만인들이 있고, 또 나머지 세상에는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부가 있었지. 그러나 에우로파는 그들끼리 갈라져 다투기만을 고집하였으므로,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였네.

나는 그들이 하나되어 기독교 세계를 지키고, 나머지 세계로 나아가고, 마침내 평화와 번영을, 도덕과 정의를 얻을 수 있게끔 하기를 바랐네. 그리고 지금도, 비록 실패하였지만 내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타고스는 그러한 나라의 이상을 이야기했다. 한 사람의 황제가 홀로 서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나라. 황제의 뜻에 따라 역법이 제정되고, 음률이 정해지며, 황제를 정점으로 한 위대한 질서 속에 가장 높은 귀족부터 가장 비천한 거지까지 모두가 포함되어 한 치 어긋남이 없는 나라.

믿음이 없는 이교도의 나라라는 것 하나를 제외하면, 그 나라의 이상은 실로 완벽하였다. 만약 시나인들이 올바른 신앙을 따라 그들의 나라를 세우고 만사를 믿음에 맞게 하였다면, 그로써 도덕과 정의를 바로 세웠다면, 그들의 왕조는 이백 년에 한 번씩 바뀌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도시 로마와 같이 영원하였을 것이다.

“위대한 한 사람이 홀로 서서 모든 것을 아우른다면, 모든 믿음을 하나로 뭉치고 모든 다툼을 하나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비로소 혼란이 다스려질 것일세.”

황제의 긴 말이 끝나고, 그것을 받아 옮기는 말도 끝났다. 나직한 목소리로 시작한 이야기는 역시 나직하게 끝났으므로, 곧 주변의 속되고도 일상적인 소리가 황제와 백정 사이를 메웠다.

“나는 어르신 말씀이 틀렸다고 보오.”

카를로스는 자신의 말을 당당하게, 그리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정면으로 반박하는 코우지오니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리 생각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이 세상에 펼쳐나간다면, 반드시 더욱 큰 어지러움이 온 세상에 닥칠 것이다.

이미 그 생각의 아주 작은 일부인 소위 ‘신앙의 자유’만으로도, 곧 엄청난 파란이 닥쳐올 터였다.

교황청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연합을 이끌고 외세로부터의 자유와 안전을 얻는다는 데 온 마음이 쏠려 있어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거나, 아니면 어떻게든 공의회를 통해 무마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 듯했다. 허나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다면 그 뒤에 다른 자유를 말하지 못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혼란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방 역시 에우로파와 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역시 조만간 큰 혼란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허나 황제는, 거기에서 생각의 타래를 끊었다. 눈앞의 사람은 사색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람이요,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는 자가 아니라 지붕을 짊어진 뒤 옆에 있는 사람에게 같이 깔려죽기 싫으면 얼른 기둥을 세워 받치라고 윽박지르는 자였으므로.

“그야 그렇겠지.”

“허나 어르신께서 그런 생각 품고 계신다면, 내 굳이 트집 잡을 이유가 어디 있겠소? 그러니 여기 탁오 선생이라면 모를까, 나는 딱히 어르신께 반박하지는 않겠소. 이미 나 때문에 가뜩이나 머리도 아프고 무릎도 쑤시실 텐데, 괜히 더 열 받게 만들 것은 없으니 말이오.”

과연 예상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사색하는 카를로스에서, 비록 얼마 남지는 않았지만 그의 나라와 가문을 다스리는 자로 돌아올 때였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하겠네···”

“··· 그리하여 카를로스 그 어르신도 군말없이 우리네 제안을 받아들이고는 군사를 물리게 되었소. 뭐, 그건 어르신도 아시겠지만.”

꺽정이와 이탁오가 황제와 대담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정된 대로 북쪽 도시들과 교황령의 사절들이 황제의 군영에 닿았다.

그리고 황제가 사실상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제의를 함으로써, 이 틈을 타 무언가 더 합리적인 (즉 악독한) 요구를 하려던 몇몇 사절들의 뜻은 좌절되고야 말았다.

그것을 제외하면 황제가 내건 조건들은 대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 어리석게 보일 만큼 관대하였으므로, 모두가 여기에 동의하였다.

여기에는 황제의 군영에서 가장 가까운 소도시의 이름을 따 ‘프라스카티(Frascati)’ 조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게 내 알 바인가?”

“그게 어르신 입에서 나올 소리요?”

미켈란젤로가 시큰둥하게 대꾸하곤 <성전 정화> 상 쪽으로 눈길을 돌리니, 그 조각상 구경하러 온 김에 그사이 벌어진 일을 열심히 설명해준 꺽정이와 이탁오만 무안해졌다.

“나는 교황청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이 ‘자유로운 석공’ 모임의 사람이지. 다른 도시에서도 이 모임에 들고 싶다는 놈들이 꽤 나오고 있던데.”

“아무리 그래도 같은 이달라 사람 아니오.”

옆에서 이탁오가 ‘이탈리아’라고 정정해주고, 꺽정이는 그거나 그거나 같은 말 아니냐고 항변하는 사이, 여전히 시큰둥한 늙은이 말대꾸가 돌아왔다.

“하! 이탈리아? 지난 백여 년 동안 이탈리아끼리 뭉쳐야 한다고 떠든 놈들은 많았는데, 개중 입 발린 소리 말고 진심으로 그렇게 떠드는 놈은 없었네.

요즘 헛바람 든 것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마키아벨리 놈도, 막상 입에 거미줄 칠 지경이 되니 그렇게 싫어하던 메디치 사람들에게 잘만 아첨하더군. 그놈들이야말로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면서.”

“그래도 그렇게 군말없이 빚 갚겠노라 약조한 직후에 북쪽 도시랑 여기 교종님네 나라랑 다 뭉쳐서 따로 약조까지 하였답디다. 앞으로는 같은 나라는 아니어도 같은 나라처럼 지내자고.”

그 말대로, 프라스카티에서 돌아온 베네치아, 제노바, 피렌체, 밀라노 등등의 사절들은 저들 도시로 돌아가는 대신 이곳 로마에 남아, 더욱 어려운 협상을 하고 있었다.

황제가 너무나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던지라 영 찜찜하기도 했거니와, 또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가 제시한 조건들은 언제든 황제나 그의 후계자가 돌아와 군대로 윽박지르면 물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인수하기로 한 합스부르크의 빚이 한두 두카트가 아닌지라, 만에 하나 그들 도시들 중 어느 하나라도 삐딱하게 굴고자 마음을 먹게 되면 큰일이 날 터였다.

그것으로 끝난다 치더라도 여간 골머리 아픈 것이 아닐 텐데, 엄연히 합스부르크의 봉신인 밀라노와 피렌체를 두고서는 법적인 문제까지 얽혔다. 숫제 합스부르크에서 독립하겠노라 선언한다면, 언제든 이를 빌미삼아 신성로마제국을 승계한 페르디난트가 북쪽에서 쳐들어올 것이요, 그렇다고 그냥 봉신으로 남는다고 선언한다면 이번에는 독립국인 베네치아나 교황령 쪽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워낙 문제삼을 게 많다 보니, 우선 이름만이라도 평범하게 이탈리아 연맹(Lega Italica)으로 하겠노라고 합의를 보았답니다.

거기에 공의회인가 뭔가 하는 문제까지 걸렸고. 그건 어르신께도 꽤 중한 일일 것이오. 여기 대웅전 맞은편에 있는 그 불당(시스티나 경당) 탱화가 불경하다고 한 소리 들으셨다는데, 공의회에서 어찌할지 정한다고 합디다.”

“뭐, 알아서들 하겠지. 내가 죽기 전에 끝나기는 하려나.”

“금방 끝낼 것이라고는 하던데 말이오. 저기 옆동네 나라 임금들이 하도 이탈리아를 집적거리니, 지금 같은 때 단김에 쇠뿔 뽑듯 결착을 볼 모양입디다.”

“내 본래 정치니 뭐니 하는 데는 별반 관심은 없지만, 그래도 여든 평생 이 땅을 전전하며 살았네. 자네가 어떻게 잘 에스파냐 사람들을 몰아냈으니, 이제 프란치아 사람들이 빈틈 생겼으니 좋다면서 쳐들어오겠지. 그것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있었던 일이니 말일세.”

미켈란젤로가 ‘여든 평생‘이라는 말 무색하게, 힘차게 저의 손에 든 정을 내리찍으며 말했다. 돌조각 하나가 툭 튀어, 꺽정이 옆에서 구경하던 도키치로 이마에 맞았다.

“그래서 내가 프란치아로 갈 심산이오.

나는 삼 년 동안 우리 동네 떠나 있기로 스스로 약조했는데, 아직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오. 그러니 적어도 몇 달은 더 눌러앉아서 구경을 해야지. 카를로스 어르신이 그러는데, 프란치아 그 나라 도읍 파리인가가 그렇게 좋답니다.”

겉으로 내세운 핑계는 이러하였고, 실제로는 카를로스 본인의 부탁도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말한 것과 거의 같은 이유를 내세우며, 이탈리아 국가들이 프란치아 쪽으로 아예 넘어가, 에스파냐 쪽에서 기껏 손에 넣은 북이탈리아를 고스란히 잃어버리는 일을 막아달라 청한 것이다.

당연히 꺽정이 한 사람만 믿고 그런 부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믿음의 자유를 두고 말하게 되면, 저지대가 그대로 걸린 에스파냐도, 남부의 신교도들이 걸린 프란치아도 곤란해지는 것은 매한가지. 공의회는 곧 두 강국이 모두 어지러워지기를 내심 바라는 이탈리아와, 자신 빼고 상대방만 어지러워지기를 바라는 두 강국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에서의 일보 후퇴를 받아들인 카를로스는 펠리페로 하여금 마땅한 수를 강구토록 할 생각이었는데, 그런 매우 많은 수 중 하나가, 얻어걸리면 좋다는 심정으로 꺽정이를 부추겨 프랑스로 가게끔 한 것이었다.

꺽정이로서도, 이왕 이탈리아 연맹이 하나로 뭉쳐서 그 운하의 일을 추진하게 된 김에, 이왕이면 누군가의 농간에 놀아나지 않고 뚝심 있게 그것을 밀어붙일 수 있도록 확실히 해두는 쪽이 더 마음이 놓이는 일이었다.

허나 그런 속내까지 미켈란젤로 이 괴팍한 늙은이에게 모두 털어놓을 이유는 없었다.

“자네 따르는 이들만 고생이군그래.”

“그게 내 알 바요?”

“하긴, 자네 말이 맞네.”

괴팍한 늙은이와 성질 못된 우두머리가 주고받는 대화를 곁에서 들은 흑의군들만 한숨을 쉬었다.

그 무렵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에는 용한 의원이 하나 있었는데, 정작 저의 의술보다는 취미로 배운 점성술로 더욱 큰 명성과 이익을 얻었다.

자신의 재능을 깨달은 그는, 몇 년 전 운세에 관한 문구를 덧붙인 달력을 만들어 팔았는데,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자 얼마 전에는 작정하고 <예언서>라는 제목까지 단 책을 새로 냈다.

그리고 이 또한 불티나듯 팔려나가, 새로 증보판을 찍기에 이르렀다. 무릇 증보판이라 하면 말 그대로 증보되는 부분이 있어야 팔리기 마련. 점쟁이 겸 의원은 그리하여 이번에는 무슨 예언을 추가할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정말로 별의 운행을 바탕으로 (딴에는) 합리적인 계산 끝에 내놓는 예측도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분량이 맞추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다재다능한 이 의원에게는 문재(文才)도 제법 있었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는 대충 맞아떨어질 만한 절묘한 절구(쿼트랭quatrains)를 지으면 될 일이었다.

이제 대충 한두 줄만 더 쓰면 증보판 원고도 완성될 터. 마지막으로 채워 넣을 절구를 둘 중 무엇으로 할지, 틈틈이 써놓은 절구 두 연을 두고 고민하는 차였다.

하나는 이러하였다.

‘젊은 사자가 늙은 사자를 무너뜨리리라. 전장에서 단판 싸움으로, 황금 우리를 찔러 그의 눈을 꿰뚫으니, 두 상처는 하나가 되고 비참한 죽음을 맞으리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얼마 전 이탈리아로부터의 소식을 듣고 급히 쓴 것이었다.

‘동쪽에서 우환이 찾아오리라. 둘은 하나가 되고, 하나는 반절이 되니, 옥좌에는 탄식이 깃들고 왕관에는 녹이 스는구나. ’

아무래도 호사가들의 관심 끄는 것은 ‘동방’ 운운하는 것일 듯하여, 미셸 드 노트르담이라 불리는 이 점쟁이 겸 의원은 끝내 후자를 추가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리하여 라틴어 느낌으로 꾸민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라는 이름으로 <예언서> 1556년 증보판이 파리에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무엇이 일어나든 얼추 끼워 맞출 수 있는 절구였는데, 그 일어날 ‘무엇’이 의원 미셸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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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불려나와 미켈란젤로에게 얻어맞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피렌체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치와는 별 연 없이 예술가로 살아갔던 미켈란젤로와 달리 마키아벨리는 지식인-관료의 길을 걸었고, 현실정치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이 퇴출된 뒤 수립된 공화정 정부 소속 외교관으로 활동했는데, 그로 인해 후일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가 재집권하자 반정부인사로 낙인찍혀 곤궁한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지금은 불후의 명저로 널리 읽히는 <군주론>은, 본디 만년의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 아래에서 다시 공직에 오르기 위해 헌정한 책이었지요. (여담으로, 미켈란젤로는 1530년에 잠시 피렌체 시 성벽 건축 및 보강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년 전 마키아벨리가 맡았던 직무이기도 했지요.)

이전 화에 종종 등장했던 카를로 카라파 추기경은, 원 역사에서는 1559년에 실각합니다. 바오로 4세가 연이은 실정으로 가뜩이나 없던 인기를 더 잃게 되면서, 삼촌과 달리 부정부패한 인물이었던 카라파 본인도 공격에 노출된 것이지요. 결국 그는 1559년 1월 추기경직에서 퇴출당하고, 바오로 4세의 후임인 비오 4세가 즉위하자마자 부패와 살인, 이단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다만 그가 삼촌과 마찬가지로 극렬한 반스페인 성향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첩자로 활동하였다는 것은 작중의 완전한 창작입니다.

카를 5세는 원 역사에서는 1556년 그간 자신이 사실상 은거하고 있던 저지대(네덜란드, 벨기에)를 떠나 에스파냐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아직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군주의 자리를 각각 아우 페르디난트와 아들 펠리페에게 나누어준 뒤, 1557년 겨울, 수도원 - 말이 수도원이지 실제로는 별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고 전합니다 - 에 들어가 그 인생의 마지막 1년을 보내게 됩니다. 지병이었던 통풍은 마음고생으로 인해 더욱 심해져, 말년에는 휠체어 없이 거동을 못할 지경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동양과 달리 태상황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고, 황제가 생전에 퇴위하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카를 5세의 은퇴는 당대 많은 이들의 관심과 동정을 받았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중 하나는 당연히 작중의 창작이지만, 다른 하나는 실제로 <예언서>에 있는 구절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작중 서술된 것처럼 의사보다는 다른 일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던 - 점성술로 이름을 떨치기 전에도 부유하였던 처갓집 재산을 이곳저곳에 투자해 큰 이득을 남겼습니다 - 노스트라다무스는 정형시의 일종인 쿼트랭으로 예언을 남겼는데, 세기말(1999년)에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졌던 ‘공포의 대왕 앙골모아’ 운운하는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예언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차후에 두고 볼 일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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