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와인, 마차, 테라스 (1)
알프스 이남과 이북을 막론하고, 근래 에우로파 사람들에게 결코 부족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바로 이야깃거리였다.
지중해와 홍해 두 바다를 하나로 잇는 운하의 계획, 갑작스러운 교황 칙서의 반포와 공의회 소집, 그리고 황제의 침공 아닌 침공과 패배 아닌 패배, 당연히 누구 하나쯤 배신하리라 여겼건만 의외로 굳건히 버틴 이탈리아 연맹 등등.
현명한 식자들은, 이러한 사건의 연속 이면에 있는 숨겨진 동인들을 합리적 사고 (다른 말로는, 지레짐작)를 바탕으로 밝혀내곤 했다.
운하가 침체일로를 걷는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에게 큰 이익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였다. 이 공동의 목표는 너무나 큰 이익을 약속하였고, 또 그만큼 비용도 클 것이 자명하였으므로, 이탈리아 국가들은 전례없이 공고한 연합을 이루었으며, 그들의 연대 앞에서 교황도, 황제도 끝내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모든 일에는 그럴싸한 원인이 있기 마련이라 여기는 소위 식자들의 추측이었다.
반면 우매한 대중은, 이 모든 일이 동쪽의 대국 시나 황제의 대리인 코우지오니스로부터 말미암은 것 아니냐며 떠들곤 했다. 애초에 운하고 연맹이고 하는 머나먼 일은 관심 바깥이었고, 그저 저들이 높으신 분들 앞에서 쩔쩔매듯, 그 높으신 분들이 이방인 사절 앞에서 쩔쩔맸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쾌감을 느낄 뿐이었다.
“이처럼 모두의 주목을 어떤 식으로든 받고 있으니, 더더욱 언행에 주의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꺽정이가 파리로 떠날 뜻을 밝히자 교황청의 높은 이들은 곧장 기나긴 회의에 들어갔다. 어찌하면 교회와 이탈리아 연맹에 억울하게 피해가 돌아오는 것을 방지하고, (가능하다면)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무엇에도 타협하지 않는 완고함을 자랑하던 교황이 미켈란젤로와 그 일파에 의해 뜻 꺾이고 - 교황 본인의 속내가 무엇이든, 바깥에서 보기엔 그러하였다 - 타협한 데 이어 측근 카라파 추기경까지 잃었으므로, 지금의 교황청은 다시 한 번 조용하고도 경건한 권력투쟁의 장으로 화하였다.
허나 그런 암투와는 별개로, 코우지오니스에게 반드시 교황청의 사람을 하나 이상 붙여야만 화란을 조금이라도 면할 가능성이 생긴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맹세에 충실할 뿐 교황청 내부의 다툼과는 거리를 한참 두고 있던, 따라서 중립파라 할 수 있는 로욜라가 꺽정이 곁에 붙게 되었다.
“도둑놈도 본디 양상군자(梁上君子)라 하여 군자의 한 별종으로 친다오. 그러니 나만한 군자도 드물지 않겠소.”
그의 벗 하비에르가 어쩌다 이런 작자와 얽히게 되었는지, 은근히 지구 반대편의 친우를 원망하게 되는 로욜라였다.
“걱정은 마시오. 나도 이래봬도 나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오. 좋은 눈치를 주로 고깝게 구는 놈 아픈 곳 찌르는 데 써서 그렇지, 작정만 하면 점잖게 굴 수도 있소.
만에 하나 무례하거나 우악스런 짓을 하게 되더라도 어지간하면 선을 넘지는 말아야 할 테니, 프란치아 그 나라 사정이나 좀 들려주시오. 알아야 뭐라도 하지.”
“알겠습니다. 부디 제 이야기를 듣고 한 귀로 흘리지는 말아주십시오.”
애초에 로욜라가 이렇게 미리 꺽정이를 찾아온 목적이 여기에 있었으므로, 곧 로욜라는 교황청에서 나름대로 정리한 프랑스 관련 동정을 하나씩 짚어주었다.
황제 카를 5세가 이탈리아 연맹을 사실상 인정하게 되면서, 그간 대를 이어가며 합스부르크와 싸워왔던 프랑스의 발루아 왕가는 가만 앉아 큰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탈리아 연맹은 공식적으로는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 그저 공동의 이익을 지닌 교황령과 베네치아 등 여러 도시들, 그리고 밀라노와 피렌체 등 합스부르크의 봉신들이 뭉친 것에 불과하였다.
허나 아 연맹이 실제로는 여느 국가 이상의 힘을 쥐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국가의 생존에는 힘이 필요하고, 작금의 전쟁에서 그 힘이란 곧 돈인데, 이탈리아 도시들은 바로 그것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한동안은, 황제 카를의 뒤를 이을 그의 아우 페르디난트도, 에스파냐 국왕으로서 카를로스의 자리를 물려받을 그의 아들 펠리페도 북이탈리아에 손을 대기 어려울 터였다.
그간의 전쟁에서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에스파냐에 사정없이 밀리고 있었지만, 저지대 방면으로는 나름 소득이 있던 프랑스였다. 이제 온전히 북쪽으로만 나라의 힘을 기울인다면, 어쩌면 잉글랜드령 칼레(Calais)를 빼앗고 더 나아가 저지대의 부유한 도시들까지 차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쟁에 호소하든, 아니면 위협만을 가하면서 협상의 천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울이든, 어느 쪽이든 프랑스의 앙리 2세에게는 참으로 흡족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 될 것입니다.”
에스파냐와의 대립이 끝난 뒤, 앙리 2세가 그의 선조들처럼 이탈리아를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비옥한 농지와 많은 인구 덕택에 프랑스는 큰 빚을 지지 않고도 나름대로 전쟁을 수행할 여력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앙리 2세는 독실한 카톨릭으로, 위그노(Huguenot)라고도 불리는 자국 내 칼뱅 추종자들에게 그 어떤 자비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 그러니 공의회를 통해서든, 속세의 수단을 통해서든 이탈리아 측에 간섭하려 할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입장에서도, 또 연맹의 입장에서도 그리 바람직하다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단에 대한 단호함은 로욜라를 비롯해 많은 교황청 사람들이 공유하는 바였으나, 이번 소동을 거치며 이단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들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기껏 공의회에서 오로지 교회만의 뜻을 모으고, 교회 스스로 논의하고 처결할 기회를 얻었으므로, 프랑스 측에서 간섭하는 것을 교황청의 그 누구도 바라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에스파냐 측과 우리 교황청, 그리고 연맹의 뜻이 하나로 모이는 셈입니다. 프란치에의 엔리케(앙리) 국왕께서 두 나라 사이의 평화에 만족하고 이탈리아 쪽으로도, 또 공의회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것이 목표라 하겠습니다.”
“잘 되었구려. 마침 카를로스 어르신도 나더러 그쪽 나라 가서 훼방 좀 놓아달라 부탁하던데.”
꺽정이 딴에는, 나름 ‘그 어르신’네 군영에서 대접도 받았거니와, 겨우 뚫은 사업당 장삿길이 이왕이면 탄탄하게 버티는 것이 이득이었으므로 그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꺽정이네 패거리가 고작 운하 파고 장사하는 일 때문에 이렇게 여러 나라를 돌면서 모조리 뒤엎고 다닌다는 그 속내를 다른 군주들이 듣는다면, 첫째로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둘째로 꺽정이 일당의 정신 상태를 의심할 것이었다.
“지금까지 제가 보아왔던 것을 바탕으로 보면, 그 ‘훼방’이라는 것은 대체로 엄청난 후과를 수반하는 듯하더군요. 무엇을 생각하고 계시든 자제해주시기를 거듭 청합니다.
엔리케 국왕의 호방하고도 결단력 있는 성품은 잘 알려져 있으니, 우리 측에서 준비하고 있는 이단 대응책에 대해 이해하신다면 금방 우리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시늉만 하고 있으란 말씀이시오?”
“’대출 받은 곡식 포대’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수께서는 셀림 왕자와 더불어 그저 귀빈으로서 국왕의 접대에만 응하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호의가 될 것입니다.”
잠깐 생각하던 꺽정이가 답했다.
“뭐,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누가 먼저 나를 건드리거나 하지 않는 이상에는 어르신을 믿고 가만 있도록 하겠소. 그 엔리케인지 앙리인지 하는 분 마음에 맞춰주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시지 않소?”
로욜라는 은근한 불안을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모든 준비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꺽정이가 중간에, 고아 종교재판소를 날려먹은 일에 대해 면죄부를 달라면서 가뜩이나 낙담해 있는 바오로 4세를 찾아가 그 속을 또 한 차례 뒤집어엎는 사소한 소란이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로욜라와 모로네 추기경이 제때 개입하여 이 또한 좋게 풀렸다.
공의회에서 이단과 이교도들이 누릴 수 있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결론이 나기 전까지, ‘몇몇 특수한 상황’ - 예컨대, 이교도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기독교인들의 식민지 등 - 에서 이교도 공직자의 존재를 한시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 발표되었고, 교황청에서는 클리스마 운하 부지와 홍해 일대를 시찰하기 위해 파견될 이탈리아 연맹 대표단을 통해 고아까지 그것이 전달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애초에 식민지를 보유한 것은 포르투갈이지 교황령이 아니었고, 더구나 실제 고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보다 정확한 보고는 아직 로마는커녕 리스본에도 도착하지 않았기에, 꺽정이 말만 들었을 때는 고아와 말라카에서의 사건도 그저 사소한 오해의 산물이라고 판단할 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의 군대가 완전히 해산되고,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그럭저럭 평화가 돌아올 무렵, 로마에서 거창한 사절단이 출발하게 되었다.
셰자데 셀림이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 사절단, 교황령과 연맹 측의 사절단, 그리고 (자칭) 시나 황제의 사절단까지. 로마에서 알프스에 이르기까지, 또 알프스에서 파리에 이르기까지 구경하는 이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구경꾼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가장 수수하고 꾸밈없어 겉보기에는 그저 조금 잘 차려입은 도적떼 같았던 시나 사절단이었다.
시나와 그 옆 디오시온에서는 엄연히 기사 노릇을 하며 그 국왕의 근위대로도 복무한다고 하였던가.그런 이들이 들리는 마을마다 웃고 떠들며, 말은 통하지 않아도 여염의 백성들과 어울려 싸우기도 하고 노닐기도 하니, 어찌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좋게 말하면 동네 건달 같고, 나쁘게 말해도 동네 건달 같은 동방 기사들. 그리고 그 기사들 앞에서 쩔쩔매는 이탈리아 귀족들 이야기가, 사절단 뒤에 이는 흙먼지처럼 함께 일어나 퍼졌다.
“얼핏 듣기로 백성들 사이에서 임 당수의 추종자들이 많은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더군요.”
“흑의군 놈팽이들 말씀이시오?”
파리를 눈앞에 둘 무렵 로욜라가 문득 꺽정이 곁에 찾아와 물었다. 오는 내내 부쩍 친해진 이탁오와 함께였다.
“그렇습니다. 당수의 ‘흑갑 기사단’ 사람들 얘기입니다.”
오늘도 흑의군 몇몇이 구경하러 온 마을 사람들 앞에서 힘자랑을 하고 있었다. 그간 꺽정이와 명희에게 열심히 구른 보람을 구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묵직한 짐을 짊어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지를 않나, 어설프게 저들 당수 하는 것 따라 공중제비를 돌지 않나. 꺽정이 보기에는 그저 까불대는 것이었지만, 볼거리와 즐길거리 드문 프랑스 백성들 눈에는 이만한 눈요기가 없었다.
모여든 시골뜨기들이 좋다고 박수를 치면, 또 더욱 으쓱하여 저들 솜씨를 보이곤 했다. 병장기가 나오고 그간 꺽정이 상대로 대련하며 갈고 닦은 재간을 보이니, 기사들의 주트(Joute, 마상창시합)에서는 볼 수 없던 묘기에 또 감탄이 연신 나왔다.
차마 돈까지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대신 술로, 또 맛난 먹거리로 보답을 받곤 했으므로, 흑의군 가는 길은 매일이 잔치였다. 연회라고 부르기에는 격이 떨어져, 다른 사절단들은 스스로 거리를 두고, 다만 꺽정이 부추김 받아 평복하고 찾아오는 셀림이 귀빈의 전부였다.
(가끔 사절단에서 몰래 나와 이 흥겨운 잔치를 구경하던 젊은이들은, 저 금발 뚱보는 대체 누구기에 어딜 가든 저렇게 끼어 술을 들이키는가 궁금하게 여기곤 했다.)
점잖은 이들이야, 저것이 어릿광대지 무슨 황제의 사절단이냐 비웃겠지만, 그렇다 한들 이 사절단은 물론이요 프랑스 왕국 전체를 통틀어 흑의군의 저러한 행각을 만류할 자는 없었으므로 비웃음으로 그칠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예수회도, 또 살라망카와 다른 이베리아 대학의 저명한 신학자들도, 이단을 막고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든다는 이상은 내세웠지만 정작 이를 어떻게 실천할지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지요.
살아 숨쉬는 답이 늘 우리 곁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오랜 벗 하비에르의 서신을 받아든 이래로, 로욜라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였으나 항상 고민해 왔다. 신앙의 자유 아래에서, 모든 이들이 자신의 의지로 믿음을 지닐 때 비로소 그 믿음이 가치가 있다는 과격한 주장. 로욜라는 내심 그에 찬동하면서도, 이단과 이교도가 사방에서 교회를 위협하는 이 시국에 그러한 이상이 설 자리는 없으리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로마에서 그 온갖 소동을 겪으며, 하비에르가 보내온 서신을 곰곰이 읽고 또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하비에르가 인용하는 동방 철학자들의 주장이 궁금해져, 마침 같은 로마에 있는 이탁오를 찾아가 그에게 물었다.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자, 비로소 로욜라의 눈에는 작금의 위기를 헤쳐나갈 답이 보였다.
“어느 나라를 가든, 배운 사람들은 학문을 하면서 뜬구름 잡는 소리 하는 재주도 함께 터득하는 모양이오. 대체 무슨 답을 말씀하시는 게요?”
또 한 차례 환성이 들려왔다. 밤이가 저의 엉터리 태껸 솜씨를 선보인 모양이었다.
“실은, 파리에 도착하기 전 언제고 우리 교회가 어떻게 엔리케 국왕 폐하를 설득하려 하는지 설명드리고자 했습니다. 지금만한 때가 또 없겠지요.”
로욜라가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미소를 지었다.
“임 당수께서는 어찌하여 이 땅 에우로파에 소위 ‘신교’라는 이단이 날뛴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듣기로는, 음, 어르신 앞에서 거론하자니 좀 민망하긴 한데, 어르신네 도우(道友)들이 영 모자란 짓을 해서 민심이 돌아섰다고 하였소.”
“아예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간 교회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고, 여기에 실망한 이들이 다른 답을 찾아 헤메다가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경우도 분명 있지요.
허나 실제로는 훨씬 복잡합니다.”
한때 이 땅 에우로파의 모든 것은 교회를 통하였다.
교회가 만사에 얽혀 있었으므로, 교회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의 속뜻도 천차만별이었다.
누군가는 교회가 차지한 재산을 노리며 그 주인을 고발하였다. 또 누군가는, 교회를 비판하며 대신 자신의 생각, 자신의 뜻을 내세워 자신이 옳다 여기는 바를 구현하려 하였다.
누군가는 교회가 자신의 재산이나 자유를 위협하는 영주나 국왕의 편을 들어준다 여기며, 저의 편을 들지 않는 교회는 필요 없다고 오만한 주장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단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원인이 된 교회부터 스스로 고쳐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더 많은 이들이 이단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가르치고 깨우쳐야 하겠지요.
엔리케 폐하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도 이것입니다.”
교황이 세속군주들의 위에 서서, 그들을 이끌고 교화할 수 있던 시기는 지났다. 그들과 같은 싸움터에 서서, 위세로서 찍어누르려 한들 더 이상 효험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국가가 아니었다. 세속의 국가들에게 유리한 싸움터에서 정면으로 대립하는 대신, 오로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면, 비로소 교회는 세속을 떠나면서도 세속에서 배제되지 않고올바른 힘과 권세로서 에우로파의 만민을 아우를 수 있을 것이다.
“동방의 공자 역시, 가르치지 않았으면서 죽이는 것을 잔인하다 이르고, 깨우치지 않았으면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을 포악하다 이른다 하였다는군요 (不教而殺謂之虐 不戒視成謂之暴). 당수 역시 당수의 나라에서 널리 학교를 세워 누구든지 배울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들었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하고자 합니다.”
이미 위대한 이교도 철학자 플라톤도 의무교육을 말하지 않았던가. 더 멀리 볼 것도 없이, 루터의 뜻을 따르는 몇몇 제후들도 이미 비슷하게 학교를 세우고 있다 하였다.
그러니 믿음의 자유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이단들에게 세금을 걷고 그 세금으로 학교를 세운다. 그 학교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교양뿐 아니라, 올바른 교리 역시 가르칠 것이다. 가장 어리석은 농민의 아들조차, 학교에서 군주에 대한 충심과 교회에 대한 헌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사이 교황청의 추기경들과 여러 성직자들이 로욜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내놓은 대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프랑스 국왕 엔리케 폐하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당장 얼마 전까지 로마 앞에서 대치하였던 카를로스 폐하와 그 가족들에게 선뜻 다가가 먼저 이런 계획에 동참해달라 청할 수는 없는 일이니 말입니다.”
“내가 그 사람 성정은 잘 모르지만, 언뜻 듣기로는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는 듯하오. 어르신 말씀대로 되었으면 좋겠구려.”
“당수께서 뭔가 큰일만 벌이지 않으신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의 뜻이 전해졌다 여기는 로욜라가 또 한 번 웃음을 지었다.
멀찍이 보이는 파리, 그곳에 닿자마자 그 웃음이 곧 싹 지워지리라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그 무렵 ‘파리는 도시가 아닌 우주(Lutetia non urbs, sed orbis)‘라는 말이 있었다. 심지어 황제 카를 5세가 처음으로 그 말을 입에 올렸다는 설도 있었는데, 그만큼 파리 시민들의 자부심은 드높았다.
“빛의 도시 루테시아, 파리에 온 것을 환영하오.”
이미 누차 환영을 하였지만, 루브르(Louvre) 궁에서 바라보는 야경을 마주하자 자신의 도성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가슴이 재차 벅차오른 국왕 앙리 2세가 또 한 번 환영의 말을 꺼냈다.
그 말마따나, 널찍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파리의 야경은, 아무리 소박하게 말해도 멋들어졌다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달빛 아래로 멀리 교회의 첨탑들은 그 위용을 드러내고, 가지런히 늘어선 삼사층 건물들 사이에는 밤의 어둠과 어우러져 춤사위 벌이는 횃불과 등불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우주홍황(宇宙洪荒)이라 하였으니, 실로 우주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넓고 생김새가 거칠긴 합니다그려.”
허나 어쩔 수 없는 중화의 사람 이탁오 눈에는 영 차지 않았다.
“세상 모든 성읍이 북경과 같을 수는 없지 않겠소? 민호의 수가 물경 삼십오만 구(口)에 달한다는데, 그만하면 우리네 한양의 갑절은 족히 될 것이오.”
“조선이 작은 나라니 그렇지요. 삼십오만이면 제 고향 천주(泉州)랑 비슷한 정도입니다. 더구나 좁은곳에 모여사느라 집을 높게 짓는 데만 힘쓰니, 더욱 보기 흉하지 않습니까.”
“대국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은 안 해 봤소? 이만하면 로마보다 낫고 코스탄티니예랑 비슷한 정도는 될 것이오.”
“코스탄티니예를 너무 낮추어보는 것 아니오?”
이탁오 뒤를 이어 건축의 미학에는 일견식도 없는 꺽정이와, 너무 눈이 높은 셀림까지 논쟁에 끼어들었다.
“하하! 그대들이 무어라 말하든, 이 사람은 파리를 그 어디와도 바꾸지 않겠소. 그곳이 콘스탄티노플이든, 페킹(북경)이든, 하니양(한양)이든 말이오.”
이미 흥과 술에 가득 취한 호남아 앙리 2세는, 저의 목전에서 오가는 대화를 전해 듣고도 호탕히 웃을 뿐이었다.
“자, 어쨌든 이 밤을 즐깁시다! 그··· 뭐라 하였더라? 여기 타고스 박사가 아주 좋은 격언을 알려주었는데 말이오··· 아, 그렇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전대미문의 사절단을 앙리 2세는 전대미문의 환영으로 맞이하였다. 오늘로 벌써 루브르 궁에서의 연회만 사흘째였는데,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사절단 사람들은 모두 지쳐 나가떨어지고, 술 좋아하는 작자들 또는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 - 주로, 이 경사를 맞이하여 한껏 고생을 하고 있던 시종과 근위병들 - 만 남았다.
그와 더불어 며칠 뒤에는 프랑스의 훌륭한 기사들을 멀리 동쪽에서 온 사절들 앞에서 자랑하기 위한 투르누아(토너먼트)까지 예정되어 있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이 그저 군주 한 사람의 즉흥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 전쟁이 알아서, 그것도 합스부르크의 주걱턱만큼이나 높은 콧대가 부러지는 형태로 끝나게 되었다는 기쁨도 기쁨이었지만, 그보다는 곧 급변하게 될 정세 가운데서 이탈리아 연맹과 공의회가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 취하게끔 하려는 의도가 더 컸다.
특히 공의회로 말하자면, 앙리 2세의 적인 남부의 위그노들에게는 불리하게, 그의 적의 적인 저지대의 신교도들에게는 유리하게 결론이 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이렇게 편향된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얼핏 모순이었으나, 그런 모순을 논리로 감추는 것이 바로 배운 사람들의 할 일 아니겠는가.
“그보다 우리 기사단장 임 당수의 모험담을 더 듣고 싶구려.”
그렇게 또 한 순배 포도주가 돈 뒤, 국왕 앙리 2세가 거나해진 얼굴 내세우며 꺽정이를 불렀다.
“하, 물론이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 류큐인가 레퀴오스인가 하는 섬에서의 모험에 대해 막 이야기하려던 차였소.”
이미 카를로스 앞에서 한 번 풀어놓은 이야기였으므로, 말주변 딱히 없는 꺽정이도 제법 살을 붙여 저의 모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더구나 술 좀 들어가면, 모든 이야기를 백 배쯤 거창하게 부풀릴 수 있는 것이 꺽정이뿐 아니라 모든 사내들의 상정(常情).
그리하여 꺽정이가 술 들이키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는데, 아무래도 에스파냐 놈들 당하는 이야기는 에스파냐 사람들 외 모든 에우로파 사람들이 즐겁게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금방 앙리 2세도 좋다고 귀를 기울였다.
“하하! 통쾌하군그래! 그래서 놈들을 물리친 다음에 어찌하였소?”
“한 판 제대로 다시 붙어보자고 했지. 그래서 그 백사장에서 제대로 창검과 갑주 차려입은 에스파냐 놈들 삼백과 나 혼자서 다시 싸움 한 판 거하게 벌이게 되었소.”
“아니, 혼자서 삼백을?”
실제로는 그에 한참 못 미쳤지만, 어차피 이 자리에는 레가스피도 없었으므로 - 그는 그의 주군 카를로스를 따라 에스파냐로 돌아갔다 - 그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자, 덤벼라!’ 한 마디 하고서는 곧장 붙었는데, 과연 강병(强兵) 소리 들을 법도 합디다. 한 열일곱 자빠뜨리고 넘어뜨리니 내 주변이 놈들로 가득 메워졌소. 여기선 창대 들이밀고 저기선 목검 내미는데 그 기세가 여간 날카로운 게 아니었소···”
결국 술자리 모험담은, 그 삼백 중 대략 이백아흔 정도를 꺽정이가 때려눕히고 끝내 마지막 열 명에게 지고야 말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헌데 그것을 들은 앙리 2세의 반응이 묘하였다.
“하하! 역시 기사단장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군! 이보시오, 임 당수. 그 놀라운 무용담을 들으니, 문득 실제로 이 사람 눈앞에서 보고 싶다는 욕심이 드는데 말이오··· 어찌 생각하시오?”
“뭐, 그 정도야 언제든 선보일 수 있지. 내 한 몸 재주 감추어 무엇하겠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하여도, 분명 로욜라 그이가 어지간하면 국왕의 비위를 맞추어주라 하지 않았던가. 꺽정이는 그러므로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좋소! 좋아! 하하! 드십시다! 내 언제 또 이런 영웅호걸을 만날까!”
그렇게 또 밤이 지나고, 끔찍한 두통과 더불어 낮이 찾아오자 꺽정이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니, 그 토랭인가 투르누아인가 하는 것에 나더러 참여하라고?”
“그, 분명 제가 듣기로는 어제 기꺼이 승낙하셨다고 하였습니다만···”
꺽정이를 찾아온 시종이 쩔쩔매며 말끝을 흐렸다.
“뭐, 그, 일단 승낙은 했는데···”
그제야 어제 그 말이 빈말 아니었음을 떠올린 꺽정이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저희 쪽에서 갑주와 말, 랜스 모두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그 부분은 믿고 맡겨주셔도 됩니다. 다만 한 가지···”
“또 무엇이오?”
“국왕 폐하께서도 투르누아에 직접 참여하시기로 했습니다. 동방의 이름 높은, 흑갑 기사단 단장이시자 깃털 숲 근위대의 대장이신 당수와 겨루기를 바라신다고 하셨습니다.”
꺽정이도 물론 말은 탈 줄 알았고, 그 옛날 무술 배울 때는 말 위에서 창 다루는 법도 나름 배웠지만, 그 무식하게 생긴 장창(랜스)은 꺽정이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허나 국왕 체통을 생각하면 함부로 물릴 수도 없는 노릇. 다행히 이 투르누아에서 겨루는 주트라는 것은 그 규칙이 매우 간단하여, 꺽정이도 금방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말 타고 - 어째 말이 조금 불쌍했다 - 몇 번 연습을 하던 차, 소식 듣고 급히 이탁오가 달려오는 것이 투구 틈 사이로 보였다.
“관운장도, 여봉선(여포)도, 조자룡도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수. 그냥 져주는 게 좋겠습니다.”
“나도 그 정도 식견은 있소. 하지만 나름 성의를 보여야 할 것 아니오? 괜히 어설프게 응했다가 모양 빠지는 꼴이라도 당하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할 것이오.”
“그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만···”
“그리고 이 장창 보시오. 갑주에 닿자마자 부서지도록 일부러 낭창낭창하게 만들었던데, 여기에 맞는다고 갑옷이 꿰뚫릴 일은 전혀 없소.”
당사자가 그리 단언하니 어쩌겠는가. 결국 이탁오도 이왕 이리 된 것 마음 비우고 전례없는 구경이나 하기로 하였다. (왠지 주전부리가 당기기도 했다.)
허나 경기 당일, 솜씨 어설픈 꺽정이가 랜스를 저의 온 힘 다해 힘껏 내지르는 바람에 앙리 2세가 그대로 낙마할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열심히 만류하였을 것이었다.
결국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들어맞았으니, 동방에서 찾아온 우환에 의해, 주트 경기에서 서로 마주하며 달려나간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살아남게 되었다.
낙마한 한 사람의 몸은 하필 재수없게도 절반으로 접혔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자리에서 즉사한바 왕관은 주인을 잃게 되었다.
장창 내지르는 것 한 번으로 국왕의 목숨을 거두었으니, 이는 조자룡이나 여봉선은 물론이요 관운장도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꺽정이조차도 황망하기 이를 데 없었으므로,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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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2세의 죽음은 놀랍게도 고증입니다. 원 역사에서 1559년 이탈리아 전쟁을 완전히 종결하는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면서, 앙리 2세는 영국의 메리 여왕이 사망하면서 다시 홑몸이 된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게 자신의 장녀 엘리자베트(이사벨라)를 시집보내게 되었는데, 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벌인 마상창시합에 투구 없이 참여하였다가 부러진 장창의 파편을 눈에 맞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빠르게 사망한 작중에서와 달리, 원 역사의 앙리 2세는 이로 인한 감염으로 열흘 넘게 고통을 받다가 끝내 패혈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로욜라가 언급한 것처럼, 당시의 많은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16세기 프랑스 역시 신구교 갈등으로 인해 진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남프랑스는 이미 중세부터 많은 기독교 교파들 - 모두 이단으로 낙인찍혀 극심한 탄압 끝에 소멸되었습니다 - 이 활동한 바 있었고, 1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칼뱅주의자들의 활동으로 적지 않은 대영주와 귀족, 도시 부르주아들이 위그노로 돌아서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신앙의 문제를 넘어, 중앙과 지방의 권력투쟁 성격도 지니고 있었고, 결국 앙리 2세의 어이없는 죽음과 후계자 프랑수아 2세의 요절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프랑스는 한동안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결국 본디 위그노 집안이었던 부르봉 가의 앙리(나바르의 앙리)가 1598년 카톨릭으로 개종한 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 칙령을 발표하고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 이러한 혼란은 일단락됩니다.
유럽에서 의무교육을 진지하게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은 작중 언급된 것처럼 종교개혁의 산물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루터는 모든 기독교인들 - 정확히는 기독교인 ‘남성’ - 이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기를 원했고, 이는 교육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였지요. 신교도 중소 제후들 사이에서 조금씩 이루어지던 의무교육은 이후 두 세기에 걸쳐 조금씩 유럽과 아메리카로 확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