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457화
-컷!
감독님의 호쾌한 선언에 얼굴에 힘을 빼고 웃었다.
마침내 촬영 끝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우주 씨, 너무 고생했어!”
출연자들과 손뼉을 치면서 촬영 종료를 축하할 때.
황정구 감독님이 메가폰을 들었다.
-우주야.
“네!”
-정말 잘했다. 오늘.
길지 않은 말이었지만 진심이 전해져 왔다.
중간에 화면 보면서 같이 모니터링을 할 때도 느꼈는데 감독님의 눈에서 불안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일찍 퇴근한다며 좋아하는 스탭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민기 형에게 받은 손수건으로 땀을 훔쳤다.
“후아…….”
“힘들었지?”
“완전 다 젖었어요. 긴장했더니 땀이 나서.”
옷을 펄럭이는 내 모습에 민기 형이 웃었다.
“애들 기다리는 데로 갈까?”
“일단 저분들한테 인사하고 갈게요. 그냥 가면 서운해하실 수도 있어서.”
구경하고 있는 행인들에게 다가가 살갑게 인사를 했다.
같이 셀카도 찍고,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자~ 그래서 첫 방송이 언제라고요?”
“8월 14일!”
이구동성으로 외친 사람들에게 웃으며 물었다.
“무슨 요일이라고요?”
“일요일!”
“우리 가족은?”
“외계인!”
“그리고 저는?”
마지막에 가서 대답이 엉켰다.
김우주가 나와야 되는데 우주선이 나오고, 선우주가 나오고.
엉망진창이 된 마지막 대답에 웃음을 터뜨리고는 사람들에게 꾸벅하며 손을 흔들었다.
“저 그러면 들어갈게요!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구경한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 주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동생들의 재촉 때문이었다.
지호 [주차장 커몬 베이비]
지호 [얼른 와요!!]
대체 뭘 준비했길래 이렇게 성화를 부리나 궁금해서 발걸음을 옮길 때.
주차장에서 스탭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다가가자, 나를 발견한 동생들이 얼른 오라며 손짓했다.
“형! 얼른 이리 와여!”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그리고 주머니는 또 왜…?”
볼록한 주머니를 지적하는 리혁이에게 내가 주머니에서 고깃집 박하사탕, 누룽지 사탕 등을 꺼내 보여주었다.
“어르신들이 주시더라고.”
웃음을 터뜨리는 동생들에게 물었다.
“근데 여긴 왜 오라고 한 거야?”
“아, 저희가 오늘 형을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선물로 밥차를 준비했어여.”
“……진짜?”
안 그래도 배가 꼬르륵 하고 있었는데 굉장히 기쁜 소식이었다.
“여러분! 저희 형 잘 부탁드려요!”
“이 형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에여!”
“가끔씩 이상한 마술할 때가 있는데, 그냥 힘들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주시면 돼요!”
……얘네는 누가 안 데려가나.
빵 터진 스탭들을 바라보며 민망하게 웃고는 동생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개구쟁이 같은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고마움이 밀려온다.
“…….”
사실 첫 드라마 촬영이라서 엄청 떨고 있었다.
다른 활동과는 다르게 나 홀로 하는 일이라, 왠지 모르게 뒤가 허전하고 천적의 습격을 받을 것만 같고.
낯선 환경이라 긴장했는데 동생들이 와서 마음이 든든했다.
이렇게 와서 면을 세워 주는 것도 너무 좋고.
마치 개코원숭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지켜 주는 기분.
“고마워.”
내가 조용히 속삭인 인사에 졸개들이 좋아할 때.
“근데, 얘들아.”
“넹.”
“그래서 밥차는 어디……?”
동생들의 등 뒤.
본래 밥차가 있어야 할 이곳에는 천막밖에 없었다.
“밥차가 여기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아, 그게요.”
비주가 소곤거리듯 말했다.
“형이 촬영을 너무 일찍 끝내 버려서 밥차가 아직 못 왔어요…….”
“…….”
“30분 정도 같이 시간 때워요. 형.”
그럼 그렇지.
우리가 이렇게 순탄하게 흘러가는 그룹이 아니었다.
30분 동안 무얼 할지 고민하다가 눈을 또랑또랑 뜨고 있는 스탭들에게 웃으며 물었다.
“30분 동안 마술 보실 분?”
황정구 감독님이 제일 먼저 손을 들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내가 받은 7화 대본에 ‘마술사 김우주’가 새로운 위장 역할로 들어가 있었다.
* * *
본격적으로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면서 시간이 쑥쑥 지나갔다.
50분짜리 시트콤이라 회당 60~70분인 미니 시리즈에 비하면 나름대로 짧은 분량.
그리고 여기서 내 비중은 적은 편이었다.
정말 극에 딱 필요한 만큼만 나오는 정도라서 널널하겠다며 좋아했었는데 웬걸.
“흐어어어어…….”
“형, 어디가 조금 더 아파요. 어깨? 아니면 목.”
“목이 좀 더… 어어어…….”
숙소에서 쉬는 날을 맞이하여 우리 셋째의 안마를 받았다.
소파에서 뒹굴거리며 대본을 보던 막내가 키득거렸다.
“엄청 힘들져?”
“아니, 이게 길어야 전체 5분 정도 나오니까 그냥 짧게 찍고 끝나는 건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니었다.
야외 촬영이면 갑자기 변수가 생길 때도 있고, 뭔가 딜레이가 생기는 상황도 생기고.
거기에 촬영 시간도 생각보다 길다.
왜 저번에 슬립 촬영장에서 본 서노을 선배가 담요에 싸인 채 굴러갔는지 알 것 같다고 할까.
“역시 난 가수가 체질인가 봐.”
아무래도 분야가 달라서 그런가.
작곡을 할 때는 사람들을 작업실 안에 가둬 두고 며칠 밤을 새도 피로가 안 느껴졌는데.
연기는 몇 시간만 해도 금세 피곤해졌다.
그에 반해…….
“그렇게 재미있어?”
“저는 대본 보면 가슴이 설레고 그래여.”
반짝반짝.
시간 가는 것도 모르고 대본을 보면서 입꼬리가 씰룩씰룩하는 막내.
자기 대본을 넘기는 막내에게 데굴데굴 굴러가 구경했다.
제목은 ‘신이(神異).’
신기하고 이상하다는 뜻의 신이하다에서 유래한 제목인데,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른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 때.
“안 돼여!”
“…….”
“형들은 이거 미튜브로 나오면 보도록 해여.”
“왜 안 되는데?”
“이게 다 이유가 있어여.”
촬영 현장에도 못 오게 하고. 내용도 비밀이라며 좀처럼 알려 주지 않는 막내였다.
저번에 다 같이 막내가 없을 때 막내 방에 들어가 대본을 훔쳐오는 작전을 짰는데.
-느아아아아! 아악!
가위바위보에 져서 들어간 리혁이가 부비 트랩으로 설치된 그물에 생포되는 광경을 보고는 포기했다.
아마존에서 100달러 주고 산 거라나.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응원할 겸 우리 이름으로 커피차라도 보내 줄까 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죄송한데 스케줄을 좀 조율해야 돼서요.
이미 지호 이름으로 예약된 게 꽉 차 있다고 말을 해 주었다.
비단 막내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의 개인 스케줄도 마찬가지였다.
리혁이가 가사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도 그래서 밥차로 방향을 튼 거예요. 아저씨 커피차 스케줄이 이미 꽉 차 있어서.”
“그렇게 많았어?”
“장난 아니던데요. 이미 예약된 것만 10팀이라고.”
장소원 선배와 리사 선배, 미스터 프로듀서 멤버 6인, 명곡단 제작진, 하승주 피디님 등등.
김우주 축하축하 하는 커피차만 벌써 10팀.
멤버인 우리가 밀리는 상황에 흐뭇한 웃음이 나왔다.
“이게 다 공덕을 잘 쌓아서 그런가.”
“공덕이 뭐예여?”
“가슴이 공덕공덕하다는 뜻이야.”
“아하.”
“얘한테 이상하게 알려 주지 마요.”
리혁이의 핀잔에 그럼 네가 설명해 주든가~ 하면서 에베베 웃었다.
그러는 동안 거실 한가운데서 빙글빙글 선녀춤을 추던 비주가 내게 말했다.
“형, 이건 어때요?”
“아까보다 더 나은 거 같아.”
“으음… 조금 더 개선을 해야 될 것 같은데.”
“중심축을 거기서 조금 더 틀어 봐. 회전할 때 중심선이 좀 흔들리는 것 같아.”
요즘 비주는 평소보다 더 춤 삼매경이었다.
바로 얼마 뒤에 있을 댄스 예능 ‘I MOVE’의 녹화 때문이었다.
가제였던 춤신춤왕도 좋은 타이틀 같은데,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을 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1차 경연이 <우리 가족은 외계인>이 방영되고 난 뒤였는데 그때 다 같이 응원을 가기로 했다.
그렇게 각자의 개인 스케줄이 착착 진행되는 동안.
세상의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다.
거실 TV에서 흘러나오는 올림픽 뉴스를 보던 막내가 물었다.
“우리 근데 올림픽 볼 시간은 있을까여?”
“그냥 결과 안 보고 기다렸다가 재방송으로 실감나게 보자.”
2016 브라질 리우 올림픽이 개막하면서 온 나라가 올림픽 소식에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매일 같이 올림픽과 관련된 기사가 올라왔는데.
그걸 보면서 뭔가 이전과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챘다.
-태권도 대표팀 인증샷 공개, ‘우리가 태권도계의 뉴블랙’
-주말 안방극 경쟁 치열, ‘어머니들의 뉴블랙’ 배우 송유찬 PBS <시어머니가 줄어들었어요> 출연 확정
-요즘 인기 땅콩버터칩, “과자계의 뉴블랙이 떴다”
뉴블랙이 대명사처럼 변해 있었다.
처음에 우리를 검색했는데 과자가 자기가 뉴블랙이라고 하고 있어서 당황했다.
그 외에 몇몇 선수들이 좋아하는 아이돌은 뉴블랙! 하면서 수플레라고 인증한 인터뷰도 올라오고.
민망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저희가 경기 꼭 볼게요…!”
“수플레가 금메달을 따면 진짜 대박인 거예여!”
“벌써부터 SNS 부제도 떠올랐어요. 팬들이 너무 강함.”
팬의 성공은 가수의 성공 아니던가.
얼른 메달을 딴 수플레의 성과를 날로 가로채고 싶어서 가슴이 설렜다.
그때 막내가 핸드폰을 보여 주었다.
“오! 이거 봤어여? 우리 이름이 현지에서 나왔대여.”
“그래?”
현지 치안이 좋지 않아 이번 올림픽에는 현지를 방문하는 예능 촬영이 없었다.
대신 기자들이 취재를 하러 갔는데, 거기서 우리 인기를 이야기하는 기사들이 종종 보였다.
-리우에서 확인한 K팝 인기, ‘두유 노 뉴블랙?’
“어어! 왜 브라질까지 가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고 들은 거라는데요?”
“아하.”
브라질 수플레들이 한국에서 왔다는 취재진에게 ‘너 뉴블랙 아냐?’ 해서 놀랐다는 그런 류의 취재 후기였다.
사진 속에서 수플레들에게 포옹을 당한 기자님이 행복 100프로로 웃는 걸 보며 무운을 기원했다.
부인 분이 보신다면 아마 브라질에서 돌아오지 말라고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브라질도 내년 해외 투어 지역으로 한 번 건의해 보자.”
작년에 투어를 하면서 한 번 다녀온 곳이긴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수요가 확 늘어난 것 같았다.
그렇게 올림픽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는 걸 보는 한편.
어느덧 단체 스케줄도 빽빽해지고 있었다.
우선 며칠 뒤에 뉴블랙 TV의 토크쇼에 아주 귀한 손님이 방문 예정이었다.
[뉴블랙 TV - 헤일리 블루 방문]
믿기지가 않아서 캘린더에 적힌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동생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헤일리 블루…?!
-헤일리 블루가 와여? 왜여?
-왜 오는 거지…?
그래미 어워즈에서 앨범상도 수상한 적 있고, 현재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가수 중 하나.
슈퍼볼 하프타임 합동공연에도 출연한 바 있는 싱어송 라이터였다.
유명 할리우드 배우를 만났을 때도 그렇구나 했는데, 이쪽은 가수라서 그런지 이름만 들어도 떨렸다.
“헤일리 블루가 온다니… 내가 이러려고 성공했구나.”
“흐하핫! 우주 형 봐여. 눈 진짜 촉촉해졌어.”
“나 진짜 팬이거든.”
08년도였나.
첫 앨범을 냈을 때부터 좋아했던 가수 중 하나였다.
안 그래도 정규 앨범을 앞두고 영감이 좀 필요했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덕순덕순해지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추석에 맞춰 여러 특집 예능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미스터 프로듀서에 두 달간 나온 이후에는 대중들의 피로도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예능이나 광고를 자제하고 있었는데.
이제 슬슬 다시 몸을 풀 타이밍이었다.
대표적으로 TBC의 주세한과 미팅을 하고 있었다.
-좋은 조건으로 합의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요즘 주세한도 시청률이 많이 내려간 편이기도 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긴 하지만, 일요일 예능판에 등장한 신흥 강자 때문이었다.
HBS의 <온 더 스테이지>
우리에게 지금도 출연하라며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KM 엔터 허강민 대표의 야심작이었다.
내가 학창시절 때 한창 유행했던 대국민 오디션처럼 KM 엔터의 신규 보이그룹을 시청자들이 직접 뽑는 서바이벌.
이게 지금 1회부터 대박이 났다.
-드디어 베일 벗은 ‘온더스’, 보이그룹 데뷔할 연습생은 누구..?
-이제는 아이돌도 시청자가 뽑는다..“지나친 경쟁 우려”
-[어제TV] ‘온더스’ 1회부터 시청률 대박.. ‘HBS 부진의 늪 벗어나나’
전문가들로부터 너무 자극적이고 과하다, 하는 말이 나왔지만 이게 대중들에겐 잘 먹혔던 모양이다.
리혁이가 말했다.
“나는 서바이벌 같은 거 못 보겠어요. 담이 약해서.”
“나도.”
공감했다.
“보면 심장이 떨려서. 어떤 부분에서 재미를 느껴야 되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도 서바이벌은 잘 못 보겠어요.”
“그냥 데뷔는 회사 안에서 결정하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리모컨으로 TV를 앞뒤로 조종하던 막내가 물었다.
“그래도 한 번 봐 볼까여? 허강민 대표님이 자꾸 1회성으로라도 나와 보라고 하잖아여.”
“뭐, 그럼 한 번 볼까…?”
트렌드 파악 차원에서 온더스 1화를 시청하기로 했다.
과연 대중들이 어떤 포인트에서 이런 포맷을 좋아했나 고민을 하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대국민 서바이벌 오디션!]
[이제는 아이돌이다!]
온갖 자극적인 예고가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트레이너에게 혼나는 연습생을 보며 손에 땀을 쥐고, 허강민 대표가 ‘데뷔해야지’ 하는 말에 움찔하고.
총 89명의 연습생이 참여했고, 또 추가 오디션으로 누굴 선발했는지 하는 내용이 지나갔다.
“요즘 사람들은 자극적인 걸 좋아하나 보네.”
“그러게여. 근데 어떤 부분이 재미있는 거지…?”
연습생들의 인터뷰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평소에 눈치가 없다는 말을 좀 많이 들어서요. 막내기도 하고… 좀 잘해 보고 싶어요.]
“허엇…….”
[어떻게든 데뷔하고 싶어요.]
“……김유성 연습생! 제가 응원할게여!”
눈빛이 변한 막내를 보며 웃고 있을 때.
점점 몰입이 되기 시작했다.
댄스 1위로 꼽힌 연습생이 수줍게 등장했다.
[아 정말요? 다른 친구들이 저보고 춤을 잘 춘다고… 아, 근데 요즘 들어 확신이 없는 것 같아요.]
“아닌데. 확신 가져도 돼요!”
[춤을 빼고 제가 뛰어난 부분이 뭐가 있나…….]
“어어어! 저 친구 어떡해…!”
그리고 어딘가 씩씩한 인상의 연습생도 나왔다.
[포지션은 랩이고요. 좋아하는 가수는… TNT의 구선웅 선배님 존경하고요. 뉴블랙의 중현 선배님도 정말 좋아합니다! 두 분 다 진짜 랩할 때 너무 멋있으세요!]
“노진구 연습생. 넌 나의 표를 얻었다.”
“강진구라는데여….”
[데뷔를 하게 되면 꼭 보고 싶어요. 데뷔… 할 수 있겠죠? 하핳!]
“우리 가족의 표는 이제 네 거다.”
그런 동생들을 보며 웃을 때.
모영훈이라는 큼지막한 명찰과 함께 어딘가 눈에 익은 얼굴도 흘러나왔다.
“어?”
“왜여. 아는 얼굴이에여?”
“TJ에서 잠깐 있다가… 간 형이거든.”
엄밀히 말하자면 춤을 못 춰서 쫓겨난 거긴 하지만, 짧게 안면을 튼 연습생이었다.
반가우면서도 묘한 기분이 들 때.
[나이가 좀 많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어요. 그런데 이게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
[그런 각오였어요. 춤이 안 되면 될 때까지 100년이 걸리더라도 해보자. 그래서 기획사 이곳저곳을 가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았어요. 10년이 걸렸는데 이제는 그 결실을 보고 싶습니다.]
담담한 말투에 내가 핸드폰을 뒤적였다.
“왜 그래여. 형?”
“생방송 문자 투표가 언제부터인지 알아보려고.”
“오, 저도 볼래요.”
그러는 동안 옹기종기 모여 투표 날짜와 연습생들에 대한 감상글을 살피는 우리를 리혁이가 비웃었다.
“뭘 그렇게 몰입을…….”
“어! 리혁이 형이다!”
화면 속에 날카로운 인상의 연습생이 등장했다.
[이 프로그램에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제가 조금 인상도 날카로운 편이고, 말투도 부드럽지 못해서…….]
“…….”
[오해를 받을까 봐 걱정돼요. 이게 TV로는 보이는 게 전부니까.]
“…….”
리혁이가 고개를 홱 돌렸다.
“투표가 언제라고요?”
“이리 와 봐. 우리도 온라인 사전 투표 해 보자.”
핸드폰으로 톡톡톡 응원 메시지를 남기며 TV 속 온더스 1화에 나온 89명의 연습생들을 지켜보았다.
“아이고! 아니지! 아니, 그 곡을 고르면 안 되지!”
“저 춤 저기서 추면 안 되는데…! 어어어! 아우우…!”
“저저 봐. 저거 곡 가지고 싸움이 날 수밖에 없다니까. 저건 싸우라고 조 편성을 해 놓은 거야.”
자극적인 장면이 나올 때마다 우리가 탄식을 하거나 응원을 하며 시청했다.
“어어어어! 그래! 그거지!”
“옳지!”
“안 돼애애! 그런 드립 치지 마! 그런 말하면 욕먹는다고 우주 형이 그랬단 말이야…!”
처음에는 욕을 하면서 보다가 후반에 가면서는 응원을 하면서 시끌벅적하게 관람했다.
매번 느끼지만 역시 인기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 * *
며칠 후.
KM 엔터 측에 잠깐 멘토로 출연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사인을 보냈다.
곧바로 플랑크톤 사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레드 카펫을 깔아 주겠다.’
그건 됐다고 했다.
나중에 여러 보이그룹의 곡을 커버하는 무대를 하는데.
거기서 뉴블랙 곡을 커버하는 회차에 짧게 조언 정도 톡 해 주고 가는 역할로 나갈 듯했다.
아마 훈훈한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흐아아아악!
-흐악! 흐앗!
-죽어라, 김중현! 엇…! 막대기가 부러졌어…?
에이텐 삼촌들은 들어가시고.
귓가에 울리는 환청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세트장을 둘러보았다.
“경치 좋네.”
“여기 오면 마음이 땃땃해져여.”
“포근하고.”
중현이가 창문을 열자 8월의 무더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으악! 형! 닫아요! 닫아!”
“역시 경치는 에어컨 바람 쐬면서 봐야 예뻐여.”
유리창 밖으로 야외 정원이 보이고, 안에는 전형적인 한옥 가옥 구조로 된 건물.
현판에 한글 붓글씨로 써진 [누불액 월두]까지.
이곳은 뉴블랙 월드의 전용 세트장으로 내한하는 해외 스타들을 맞이하는 장소였다.
처음에 이벤트성으로 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외국인들이 한옥 토크쇼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임대를 했다.
컨셉은 조선을 방문하는 이방인 여행자를 반기는 선비들.
성균관 유생들 차림으로 차려 입은 우리가 외국의 가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꽃신, 그리고 알록달록한 한복을 차려입은 파랑 머리의 미인이 SUV에서 사뿐하게 발을 내렸다.
헤일리 블루.
북유럽 계통의 외모가 인상적인 여성이 거구의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걸어왔다.
「안녕-」
파란 머리카락에 파란 눈이라서 그런지, 보다 보면 물의 요정 같은 맑은 인상이었다.
마에다 선생님이 긴장할 만큼 거친 발언에 각종 사건사고로 타블로이드 메인을 장식하는 셀럽이라 긴장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부드러운 미소에 마음을 놓았다.
우리 스탭이 마이크를 달아 주는 동안 그녀가 말했다.
「촬영 전에 뭐 하나 물어볼래.」
「네. 그럼요.」
「발언 수위는 어느 정도로?」
「자유롭게 해요. 형식만 있는 거니까. 예를 들어서 한국에 와서 뭐가 좋았나? 물으면 뭐가 좋다 이런 식으로.」
예행연습을 하듯 내가 한국에 와서 좋은 점을 묻자 헤일리 블루가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엿 같은 파파라치 새끼들이 없어서 정말 좋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F 워드에 자체적으로 귀에서 삐가 6번 정도 울린 것 같다.
“……어, 음.”
잠시 고민이 됐는데.
어차피 한국인도 아니고 워낙 이런 발언으로 유명한 가수라서 아무 반발도 없을 것 같다.
「……어, 그. 솔직함이 좋네요.」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거침없는 마인드를 부러워할 때, 비주가 내게 속삭였다.
“형, 이분 말이에요.”
“응.”
“…누구 떠오르는 것 같지 않아요?”
“어?”
요정 같은 비주얼과 그렇지 못한 발언.
“……!”
“……!”
헤일리 블루의 뒤에서 6개의 존나가 물방울처럼 둥실거리다가 뽕 하고 터지는 듯했다.
그제야 얻은 깨달음에 동생들과 말없이 훈훈한 미소를 교환했다.
‘갑자기 친근하네여.’
‘아랫집 애들한테 잃어버린 누나가 있었나.’
‘왜 이렇게 긴장이 풀리지.’
낯선 외국인에게서 익숙한 이웃집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