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분대장 엔크리드
천막 사이에는 횃대가 있다.
그리고 보급 막사에는 기름이 있고.
며칠을 오늘을 반복하며 소리를 듣는 훈련을 해 왔다.
주변에 뭐가 있는지 위치가 어디인지는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었다.
“잠시 다녀오죠.”
정말 간단한 일이었다.
소리로 순찰병의 위치를 파악하고 몰래 보급 막사에서 기름을 가져오는 건.
가져온 기름을 천막에 대강 뿌린다.
이후는 더 쉽다.
횃대를 툭 차고 넘어뜨리면 그만이었다.
보는 사람이 없어야 했으니 그림자를 벗 삼아 포복으로 기어서 횃대를 당겨 안쪽으로 넘어뜨렸다.
횃대 끝에 있던 불씨가 기름을 만나 화르륵- 하고 반갑다며 크게 인사했다.
“재주가 좋네.”
중대장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거 칭찬인가?
엔크리드는 그리 생각하며 천막에 불을 질렀다.
당연하게도 기름을 부은 곳에 먼저 불이 붙었고.
엔크리드는 불길을 적당히 피해 검댕을 얼굴에 묻히고 연기도 조금 마셨다.
어설픈 연기보다는 실제로 반응하는 게 훨씬 쉽다.
“콜록!”
기침을 토한 엔크리드는 쓰러진 주근깨 병사를 업고 중대장이 들어왔던 천막의 찢어진 부근으로 나가서 막사를 빙 돌아 의무 막사 앞에서 쓰러졌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불이야!”
불을 낸 것도 일부러 순찰병이 오는 타이밍에 했다.
아니, 그래야 했다.
옆 막사 불침번 자식은 서서 자기의 달인이었다.
통 안 깼다.
엔크리드는 암살자가 저 친구한테도 독침을 쏘고 간 줄 알았다.
여기까지 대단한 준비도 필요 없었다.
이미 알고 있던 보급 막사에서 기름 훔치고.
횃대만 넘어뜨리면 끝인 일이었으니.
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크랑과 중대장은 퍽 인상 깊은 듯했다.
“정말 어디 도적단에 갔으면 우두머리쯤은 뚝딱해 먹었을 것 같은데.”
떠나기 직전, 크랑이 한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그걸 칭찬이라고 하는 건지.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올리자, 꼬부라진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걸렸다.
‘머리카락도 좀 잘라야겠네.’
그는 얼굴에 묻은 검댕을 닦을 생각도 안 하고 바닥에 누웠다.
큰불은 아니다. 그리 큰 사고도 아닐 것이다.
죽은 사람도 없으니까.
불침번에 관한 핑계도 대충 생각해 뒀다.
‘내일 물어봐라. 내일.’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정말 이대로 누워서 자 버리고 싶었다.
긴 밤이었다.
정말 긴 오늘이었고.
두통을 넘어서 머리통이 멍해졌다.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생존자는?”
“저쪽입니다. 근데, 음. 이제 기절했나 봅니다.”
엔크리드 자신을 향한 말인 건 알았지만,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피로가 엄습했다.
* * *
불침번이었던 주근깨 병사는 아니겠지만, 엔크리드는 그에게 일방적인 친밀감을 느꼈다.
‘넌 모르겠지만.’
엔크리드는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의 고향을 알고.
고향에 두고 온 여자 친구의 존재도 알며.
왜 군대에 왔는지도 들었다.
그에게는 없지만, 자신에게는 있는 오늘이었다.
덕분에 생긴 친밀감이다.
거기에 화재도, 습격도 그의 잘못은 아니니까.
그래서 적당한 핑계를 대줬다.
불이 나자마자 그가 소리쳤고, 안에 있는 이들을 구하려고 했다고.
그러다 연기를 들이켜서 기절했다고.
이제 막 훈련을 끝낸 신병이다.
그 훈련 중에 막사 화재에 관한 훈련은 없을 테니.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만한 이유였다.
“제가 그랬다고요?”
다만 제 기억에 없는 일이니, 황당해 되묻기는 했지만.
“기억이 날아갔나 보군.”
보급 중대장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엔크리드는 누가 자신을 의심하진 않을까 했지만, 그런 일도 없었다.
그게, 너무 딱딱 맞게 변명을 잘 대니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보급 중대장은 그저 보급 막사에 불이 안 붙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걸 노린 것도 있었으니, 상황 자체는 마음먹은 대로 됐다고 할 수도 있었다.
새로이 밝은 아침.
오늘은 반복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난 엔크리드는 여전히 두통을 느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오늘’을 다시 넘겼으니까.
“날 구했다고?”
얼굴과 몸을 씻고 탄내가 나는 옷을 갈아입은 채 단검을 들어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한 뒤 나선 길이다.
벤젠스가 보급품이 든 박스에 궁둥이를 걸친 채 물었다.
“눈앞에서 불에 타 죽게 둘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엔크리드의 말에 벤젠스가 입을 오물거렸다.
뭐라고 웅얼거리던 그가 물었다.
“……왜?”
엔크리드는 이게 이유가 필요한 일인가 싶었다.
아직도 지끈거리는 머리 때문에 딱히 길게 말을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전우니까요.”
그래서 별생각 없이 말했다.
그걸 들은 벤젠스의 표정이 굳었다.
“쓰읍.”
표정이 굳어진 그를 보며 엔크리드가 입을 열었다.
“전장의 꽃은.”
“……보병이다.”
보병 중대의 인사다.
그 말과 함께 엔크리드가 몸을 돌렸다.
조금 전 복귀 명령을 받은 참이었다.
“못되게만 굴었는데.”
뒤에서 벤젠스가 툴툴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스쳤다.
본래라면 들리지 않았을 소리가 들린다.
‘청각 단련.’
엔크리드는 자신이 얻은 능력을 곱씹었다.
그리고 어젯밤 요정 중대장이 칼을 옆으로 쳐 내는 것도 떠올렸으며.
찌르기와 암살자의 공격을 피한 것도 되새겼다.
저절로 드는 의문.
‘난 여전히 제자리인가?’
심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과연 어제의 자신과 오늘의 자신은 얼마나 다를 것인가.
갑자기 렘과 한판 붙어 보고 싶었다.
‘일단은.’
본 막사로 돌아가서 푹 쉬는 게 먼저다. 머리가 아직도 지끈거렸다.
“날씨는 참 좋네.”
몇 걸음 걷지 않고 엔크리드는 자신의 오른쪽으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봤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맑게 갠 새파란 캔버스가 보였다.
그 위로 뭉게구름이 조각조각 펼쳐져 있었고,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따사로웠다.
오늘은 무척 맑은 날이었다.
걷기만 해도 두통이 가실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 * *
크라이스는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엔크리드가 자리를 비운 게 딱 일주일이었다.
‘그때는 대체 어떻게 지냈지?’
눈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크라이스의 정신은 현실에서 도피했다.
크라이스는 엔크리드가 없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분대장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까 지금 막사 앞으로 모이라는 거고.”
‘그러니까’를 연신 반복하던 분대장.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그리고 첫 전장에서 비명횡사했다.
“내 뒤를 따라라!”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온 듯했다.
사고뭉치 분대는 숫자는 몇 안 되지만, 실력만큼은 일품이라고.
그런 이들이 얌전히 제 뒤를 따라 주리라 생각했단 말인가.
혼자 돌진하다가 창에 머리가 꿰였다.
그가 썼던 투구가 도로 날아오자 렘이 그걸 뒤돌려차기로 날려 버렸었다.
‘그다음 분대장이.’
“싸움 좀 한다고 들었는데, 실력 테스트 한번 해 볼까? 나랑 붙어 볼 사람 없나?”
귀족의 자제라고 들었다. 무슨 죄를 지어서 종군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건 모르겠고 몇 달만 여기에서 구르다가 도로 돌아간다고 했었다.
그 귀족은 자신감이 넘쳤고 경험은 없었다.
“감히 분대장님과 대련을 해도 됩니까?”
렘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고.
“음, 너 말고, 그래, 너 나와 봐라. 적갈색 머리통 너.”
그는 작센을 상대로 골랐다.
렘이야 겉만 봐서는 불한당 그 자체니, 누가 봐도 싸움 좀 하게 생겼다.
그렇다고 크라이스를 부르자니, 그건 너무 양심 없는 짓이고.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게 작센이었나 보다.
당연하게도 큰 실수였다.
“저 말입니까?”
“그래. 나와라. 겨뤄 보자. 하하, 난 이제까지 져 본 적이 없다.”
“대련하다 다치면 어떻게 합니까?”
“사내가 그런 걸 두려워한단 말인가? 불문에 부치는 거지!”
오만하고 건방진 귀족 분대장은.
“아아악!”
팔뚝이 부러졌다.
“당연히 피할 줄 알았는데.”
평소의 작센은 서글서글하게 굴지만, 가끔은 상당한 미친놈이 된다.
대충 상대하던 작센을 구경하며 도발한 렘과 다른 분대원 탓이었다.
“저기서는 왼발을 앞으로 내뻗었어야지.”
“웃기시네, 그냥 발을 냅다 걸어서 자빠뜨리면 될 것을.”
“검을 쓰는 손에 힘이 좀 빠진다. 더 세게 쥐어라. 상대를 얕보다간 네가 다친다.”
“쯧, 어디서 여자 하나 자빠뜨리는 것도 못 할 빈약한 놈이로다. 나였으면 진작에 끝냈다. 아, 지루해.”
그 말에 작센이 사납게 변했고.
귀족 분대장의 팔을 부러뜨린 대가로 중대장이 버럭 화를 냈었다.
“상관 폭행을 해?”
“불문에 부친다고 반드시 싸우자고 그랬습니다.”
“맞아. 맞아. 남자가 한 입 갖고 두말하면 거시기가 떨어지는 법인데.”
“입은 하나인데, 말은 계속 변하니, 아, 죄인은 속죄하나이다.”
분대원이 한마디씩 뱉으니 중대장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사실이었다.
불문에 부치기로 하고 붙은 거였다.
당연히 귀족 분대장은 그대로 꼬리를 감췄다.
제 가문에서야 자신한테 져 줄 돈에 팔린 칼잡이가 넘쳐났겠지만, 여긴 전장이다.
애초에 중대장도 귀족 분대장을 전장에 끌고 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대충 분대장 지위만 붙여 준 거지.
‘그다음 분대장도 뭐.’
다 오십보백보였다.
버럭 화를 잘 내던 분대장은 렘과 밖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더니 더는 까불지 않고 조용히 전출을 신청했었고.
그 외에도 비슷한 연유로 다 뛰쳐나갔다.
그나마 버틴 사람들도 소 닭 보듯 지낸 게 전부였는데.
“후.”
크라이스는 뒤에서 들리는 한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고개를 돌린 크라이스가 얼굴을 확인하고는 안도감과 함께 중얼거렸다.
“뭐냐, 이 꼴은.”
엔크리드였다. 그가 관자놀이를 오른 검지로 꾹꾹 누르며 다가왔다.
엔크리드는 4분대 막사 앞에서 대치한 둘을 바라봤다.
크라이스가 도피했던 현실이다.
“분대장이 없으니까 내가 부분대장이나 다름없다고 했지? 그러니까 까라면 까야지. 라그나 분대원?”
“이름을 부르지 말고 성에 님을 붙여서 말해라. 야만인.”
“허, 이 편식쟁이가 귀족 껍데기를 뒤집어쓰셨나.”
“인간이 덜된 짐승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불쾌할 뿐이다.”
“오, 그래? 짐승한테 마구잡이로 뜯겨 봐야 정신 차리겠네?”
으르릉거리는 렘의 손에 핏줄이 돋았다.
금방이라고 도끼를 날려 상대의 머리를 쪼갤 기세였다.
라그나라 불린 분대원은 대수롭지 않게 그를 마주했다.
손을 늘어뜨리고 아무렇지 않게 섰다.
저게 라그나의 준비 자세였다.
작센은 상관없다는 듯 구경하고.
남은 분대원 하나는 조용히 기도를 올리며 둘을 말렸다.
“형제님, 투쟁과 폭력은 나쁜 겁니다.”
“빠져라, 종교쟁이.”
“뒤로 물러나라. 검에는 눈이 없으니.”
렘과 라그나가 동시에 답한다.
‘분대 꼴 잘 돌아간다.’
고작 일주일에 이 모양 이 꼴이라니.
걸으며 날아갔던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크라이스, 남는 약 없나?”
작센은 싸우든 말든 제 할 말만 했다. 그가 엔크리드를 보고 눈인사를 하며 크라이스에게 물었다.
“지금은 없어요. 분대장님, 오셨네요. 안 그래도 찾아뵐까 했는데. 일이 좀 있었거든요.”
크라이스가 작센에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엔크리드를 향해 말했다.
“잠시만.”
일단 저 둘을 말리고 봐야 할 것 아닌가.
그대로 놔두면 정말 피를 볼 기세였다.
자신이 온 날도 이랬었다.
그때 상대는 라그나가 아니라, 기도하던 분대원이었지만.
“투쟁과 폭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저리 말하는 저 작자도 정상은 아니지.
“이봐!”
엔크리드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무시하고 둘 사이를 막았다.
이들의 싸움을 말리는 법은 단순하다.
말로는 어림도 없다.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엔크리드가 둘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진짜, 뭘 모르면 용감하다더니, 왔수?”
렘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등 혈관이 꿈틀거리다 멈췄다.
“이거야 뭐 같이 벨 수도 없고. 분대장은 음, 아니다.”
노려보던 렘과 라그나가 뒤로 물러난다. 물러나면서도 서로 덕담을 건네는 건 잊지 않았다.
“넌 전장에서 죽지 마라, 내가 죽여야 하니까.”
라그나가 말하고.
“응? 뭐라고? 내일 뒈지고 싶다고? 렘 님의 도끼 맛을 너무 보고 싶다고?”
렘이 받아친다.
“그만.”
그 사이에서 엔크리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이들은 사이가 이렇게 나쁜 거지.
모른다. 처음부터 이랬으니까.
둘이 아직도 서로를 노려보는 중이다.
거참, 돌아오자마자 본 게 싸움질이라니.
“하여간 분대장 없는 동안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고요.”
뒤에서 크라이스가 다시금 입을 연다.
“그러냐?”
딱 봐도 알겠다.
의무 막사에 있을 때, 라그나가 막사가 개판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괜찮다.
하도 험한 일을 겪고 왔더니, 이들이 친 사고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식사 당번을 안 챙겨서 각자 식사를 챙긴 것.
옆 막사 분대원과 시비가 붙어 그놈 턱을 갈긴 것.
소대장 호출을 무시한 것.
‘나 하나 없다고 너무 개판인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이 부쩍 들긴 했지만, 정말 괜찮았다.
크라이스는 종알종알 말을 계속했고.
엔크리드는 난리의 종류가 사고뭉치 분대에만 있진 않다는 걸 알았다.
“저주?”
엔크리드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잊고 되물었다.
“네, 진지 전체에 저주가 걸렸다고 하던데요.”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두통을 잊을 만한 헛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