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34화 (34/385)

야안 34화

10. 뇌전의 정화

이른 새벽.

아직 동이 채 떠오르지도 않은 아스날 성벽에는 어제 미처 들어오지 못한 대규모의 상단들이 그 앞에 천막을 친 채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철제 무기를 취급하는 무기 상인들로, 이들이 이곳 변경까지 온 이유는 열흘 전 공식적으로 결정된 왕국 연합과 카리엘 제국의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은 많은 것을 잃게도 하지만 또한 새로운 강력한 신흥 세력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울수록 영지를 넓히기도 하고 지위를 올릴 수도 있는 일이다.

한데 마일드 왕국의 왕 위리스 13세는 투쟁보다는 화합의 정치를 펼치는지라 이런 점에서 많은 귀족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 왕국 연합과 카리엘 제국과의 전쟁이 일어난다 했을 때도 귀족들은 회의적인 모습이었다. 이번에도 전쟁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위리스 13세는 내치를 중점으로 한 만큼 정치적인 견해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지금 현재 큰 권세를 잡고 있는 귀족들은 큰 당파를 이룰 정도로 너무나 오랫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이 상황은 조만간 자신이 물러가고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을 때 상당히 지독한 현상을 낳게 된다.

최악의 경우 신하의 힘이 왕을 넘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지금의 판도를 새로 물갈이해야 한다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큰 명분이 생겨 전쟁할 수 있는 판이 생기자 다른 왕국들에 비해 상당히 적극적으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이번에 1왕자를 전쟁에 내보내어 자신의 신하들이 아닌 아들의 신하가 될 만한 이를 눈여겨보라 명했다.

그런 판국이니 각지의, 중앙 권력에 손을 대고자 하는 귀족들은 저마다 전쟁 물자를 준비하기 바빴고, 때아닌 호재에 무기 상인들은 쾌재를 불렀다.

이런 연유로 지금 변경 쪽에 유난히 많은 무기 상인들이 몰렸는데, 야안은 그들 사이에서 불 당번을 지키고 있었다.

불쏘시개로 다시금 식어가는 장작불을 살리려 이리저리 쑤시는 그는 지난 20일간의 도피 생활을 통해 한층 성숙했다.

상당히 고생한 탓에 비록 많이 야위었지만, 그만큼 무위로나 정신적으로나 크게 성장할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사실이 그랬다. 그는 그 20일 동안 지독한 경험들을 해야 했다. 매번 맛없는 파래로 끼니를 때우며, 몬스터의 위협을 생각해 나무 위에서 선잠을 이루었다.

중간 중간 만난, 오크들에 밀려난 몬스터들과의 전투는 험악하기 그지없었고, 잘못 들어선 오우거들의 영역에서 그는 오크와는 차원이 다른 그들의 위력에 질려 버리기도 했다.

덕분에 그 비싸다는 오우거 가죽을 다섯 장이나 얻어 인벤토리는 지금 포화 상태였다.

야안은 마침 멜리나에게 줄 반지를 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오우거 가죽이면 상질의 보석이 박힌 반지를 살 수 있을 듯했다.

아스날 영지가 비록 변경 쪽이지만 물류가 흐르는 지점으로는 상당한 수의 상인들이 오고 가는지라 이곳에서 좋은 제품을 구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침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생기자, 야안은 이번 해에 자신이 관료 시험을 치른 게 정말 천운이라 생각했다.

만약 이번에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면 저 야심 많은 마크 남작이 이끄는 군에 자신도 끌려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이번 몬스터 토벌전을 통해서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치열하고 위험한 것인지를 뼈저리게 깨달은 그였다. 강하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신분이 높다고 하여 안전한 것도 아니다.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모두가 공평했고, 편법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그것이 그가 겪은 전쟁에 대한 견해였다.

한데 하물며 카리엘 제국과의 전쟁이라니.

자신이 겪었던 전쟁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대륙의 역사에 길이 남을 거대한 전쟁일 것이 뻔했다. 비록 오크들을 뒤로한 채 정복 전쟁까지 나서지 않겠지만, 재수가 없으면 이 전쟁의 여파로 왕국 하나가 분열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아리스 님께서 보살펴주고 계심이야.’

이미 마을의 촌장이신 아버지이신 만큼 어쩌면 지금쯤 이야기를 들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하루하루가 지나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나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시겠지.’

그 때문에 야안은 그새 정이 든 말을 찾지 않고 최단의 거리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여러 가지로 운이 좋았다. 일주일 전에 만난 상인들이 아니었다면 그 소식을 듣지도 못하고 백작가로 몸을 돌렸을 테니.

상인으로서는 무리한 일정을 맞추려 아로스 산맥을 넘다 위기를 맞이했는데 야안을 만난 것이 천운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런저런 걱정에 깊은 상념에 빠진 야안을 깨운 것은 인상이 좋은 호넬이라는 자로 상단을 이끄는 자였다.

“어째 고민이 많은 것 같소.”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으나 웬만한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과시하는 자이기도 했다. 성정이 유쾌하고 농담을 자주 해 가벼워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인의를 아는 자라 중소 상단장이지만 그 인맥이 대단해 기회만 있으면 단숨에 대상단을 꾸릴 수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런 자인 만큼 자신의 상단이 떠돌이 오크들에게 용병 대부분을 잃고 큰 위기에 처할 때, 나타나 크게 도와준 야안을 은인으로 생각했는지라, 야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편의를 봐주었다.

오우거 가죽을 판매할 만한 곳을 가르쳐줄 수 있겠냐는 말에 그는 자신이 잘 아는 곳에 가면 좋은 값을 치러줄 것이라며 약도와 직인이 찍힌 서신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본래 상인은 돈을 좇는 이들이라 후안무치한 자들이 많았는데, 이런 호인을 만나니 기이하다 여기며 본래 자신이 인복이 많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의 호의가 퇴색되어 버릴까 봐 그에게는 이미지 마법을 펼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잠시 호넬과의 인연을 생각하던 야안은 고개를 털며 말했다.

“아닙니다. 젊은 사람이 고민이라 할 만한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좀 더 주무시지 않고 왜.”

그 말에 호넬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야안의 옆에 앉았다.

“헐헐, 고민이 어디 나이 가린답니까? 세 살배기도 하루하루 매번 다른 일로 고민하건만.”

그렇게 말하며 담배 파이프에 불을 붙이던 그는 길게 연기를 마시며 뿜었다. 새벽빛에 사라져가는 담배 연기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재를 털어내며 말했다.

“오래 살다 보니 내 깨달은 것 중 하나가 당시에 걱정거리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니 추억이 된다는 것이외다. 길게 보면 사실 별것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럼에도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걱정하는 것조차 지금의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시간이 더 흐르기 전 많이 고민하고 많은 것을 걱정하며 많은 경험을 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이 만든 아집의 벽에 막혀만 가 이런 감정들이 변색되어 느껴지니 말이외다.”

그렇게 말하던 그는 품속을 꼼지락거리며 검은 옥에 기이한 문양이 그려진 조그만 패를 꺼냈다.

“내 이번에 급히 영주 성에 들어가면 은공과 헤어질 것임을 잘 아오. 그래서 미리 주는 것이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주시오.”

야안은 이것이 상당히 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무엇인지 몰라도 귀한 것 같은데.”

그 말에 호넬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외다. 그저 은공과 내가 나중에 다시 만나는 데 필요 절차를 없애는 물건일 뿐이오. 그저 잘 가지고 있다가, 내 생각이 나면 그때 들고 오시면 되오.”

그러며 억지로 야안의 손에 패를 쥐여준 그는 헛기침을 하며 ‘어디 물품 조사나 시작해 볼까.’라는 능청을 떨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야안은 그런 그의 모습에 미소를 띠며 검은 옥을 품속에 넣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나서야 나팔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이곳 영주 성의 문은 네 곳으로 되어 있는데 호넬은 바로 영주 성에 들른 후 북쪽 문으로 다시 여정을 떠나야 했고, 야안도 이곳에서 오우거 가죽을 처리하고 물품을 구입한 후 떠나야 했기에 성문 입구에서 헤어졌다.

아쉬움을 달래며 상단과 헤어진 그는 호넬이 내준 말을 타고 그가 준 약도를 살피며 소개해 준 상점을 찾았다.

대도시를 보고 난 뒤여서 그런지 몰라도 제법 발달된 이곳의 모습에도 감흥이 없었다. 약도가 자세하여 많은 갈림길에서도 상점을 찾기 어렵지 않았다.

상점은 제법 규모가 있는 4층 높이에 달하는 건물이었다. 상점 앞에는 여러 마차가 서 있었는데, 마차마다 그 제작 방법이 많이 차이 나 아마도 대부분이 이곳에 거래하러 온 상인들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야안이 상점 안에 들어가니 이른 시간임에도 물품을 거래하려는 이들로 북적거렸다. 아무래도 이번 전쟁 준비의 여파로 상인들의 이동이 활발해진 탓인 듯했다.

그동안의 노숙과 야루스 산맥에서의 경험 때문에 야안의 신색은 빈곤해 보였다. 막 농사일을 끝마치고 시간이 남아 볼일을 보러 온 촌놈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그 때문에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야안을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쳤는데, 사실 더러운 신발로 상점 안을 누비는 것에 대해 대놓고 짜증을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할 일이다.

어쩐지 자신을 보는 직원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음을 느낀 야안은 그제야 자신의 몰골을 살피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오기 전에 좀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고 올 것을.’

오우거 가죽을 인벤토리에 꺼내 가져오기 편하게 정리하느라 자신의 몰골을 생각지 못한 게 실수였다. 그동안 몰골에 신경을 쓸 여유도 없었고, 상단의 상인들도 그런 자신의 몰골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대해 잊고 있었다지만 조금만 주위를 신경 썼으면 될 일이었다.

미안한 기색으로 볼을 긁적이던 그는 주위를 돌아보며 그들의 시선이 곱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반들반들한 바닥을 보면 상당히 공을 들여 청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이 더럽혔고 또한 바쁜 와중에 타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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