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5화
미안한 기색으로 볼을 긁적이던 그는 주위를 돌아보며 그들의 시선이 곱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임을 다시금 확인했다. 반들반들한 바닥을 보면 상당히 공을 들여 청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자신이 더럽혔고 또한 바쁜 와중에 타 손님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듯했다.
야안은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품속에서 호넬이 준 서신을 마침 지나가는 직원을 잡아 건네주었다.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호넬 상단주께서 이곳을 추천해 주시더군요.”
야안에게 붙잡힌 직원은 이곳 직원 중에서 직위는 낮았지만,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는 호넬이라는 이름이 예전 주인이 몇 번 꺼내던 이름임을 생각했다. 그때에는 흘려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주인이 흠모하는 느낌으로 말을 했던 것 같았다.
그런 자의 추천을 받아 왔다면 예사 사람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 그는 등에 큰 짐을 지고 있는 야안을 공손히 대하며 접대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간단히 간식거리를 내주며 잠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후 주인에게 편지를 전해주러 갔다.
“후, 좋구나.”
오랫동안 사람 사는 곳을 벗어나서인지 거친 바람과 거친 음식에 지쳐 있던 야안은 한쪽에 자리한 벽난로 옆에서 온기를 쬐며 부드러운 간식을 천천히 삼키자 편안함을 느꼈다.
곧 마른 체형에 키가 큰 중년인이 접객실에 모습을 보였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곳을 책임지고 있는 로테리안이라고 합니다.”
그러며 야안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곧 뒤따라온 직원이 내준 고급스러운 식사를 권했다.
미소를 보이며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그를 살피던 야안은 그가 책상물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오랫동안 단련을 한 체형이었는데, 야안은 그가 상급 유저의 실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상급 유저의 실력자는 용병들 사이에서도 좀체 보기 힘든 실력자라, 단순히 호신을 위해서는 그만큼의 실력을 쌓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같은 자가 이 정도 규모의 상점을 운영하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졌다. 잠시 그를 살피던 야안은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라 사양하지 않고 그가 내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도 느꼈지만, 음식 하나만을 보더라도 문명의 이기라는 것이 사람을 이처럼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상기한 그에게 로테리안이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말을 꺼냈다.
“호넬 님이 추천하시는 분이시라니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편지에는 오우거 가죽을 거래하신다 하시던데. 저것인가 보군요.”
“네, 다섯 장 정도 됩니다.”
그 말에 로테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 오우거 가죽이 있는 보따리를 보며 눈짐작을 다시 했지만 역시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있으면 알 일에 대해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닐 터인데. 다섯 장이라니. 겨우 한 장 정도나 할 듯한 두께인데.’
그도 예전 다섯 차례 오우거 가죽을 거래한 적이 있었다. 화살도 잘 박히지 않고, 중급 이상의 수련자가 아니면 상처 내기도 힘든 것이 오우거였다. 더구나 보온 효과도 뛰어난지라, 최상의 갑옷이기도 했다.
또한 항마력이 있어 약한 마법인 경우 위력을 반감해 주기까지 하니, 전쟁을 앞둔 지금 그 가치는 대단한 것이다.
다만 이 오우거 가죽은 두껍고 무거운 것이 흠이었는데, 지금의 보따리를 보니 한 장 정도의 부피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어린 오우거 가죽이라고 해도 다섯 장이면 저보다 두 배의 부피를 지닐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아마 한 장만 들고 와 가격을 재보려 한다고 결론지었다. 식사를 하며 호넬 상단주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잡담을 나누던 그들은 분위기가 화목해지자 식사를 치우고 거래를 하기 시작했다.
야안은 자신이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헤쳐 그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동안 틈틈이 시간을 내어 손질을 본 가죽의 상태가 괜찮을지 걱정했다. 한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보는 눈과 전문가가 보는 눈은 다른 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야안의 걱정과 달리 로테리안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가죽의 손질이 좋고 나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이 오우거 가죽의 정체를 알아보았기에 그는 잠시 말문을 잃어야 했다.
침을 삼키며 잠시 가죽을 살피던 그는 이내 떨리는 손으로 오우거 가죽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것은 야루스 산맥에 존재한다는 블랙 오우거의 것인데. 어떻게 이것이…….”
블랙 오우거.
오우거 종 중에서도 유독 덩치가 다른 종에 비해 머리 두어 개는 작은 오우거였다. 하지만 작은 체격과 달리 힘은 기존 오우거를 상회하고, 항마력이 워낙 강해 마법도 잘 통하지 않았다.
또한 회복력이 빠르고 가죽이 워낙 질겨 상급 유저나 검기가 아니고는 상처도 잘 나지 않는 괴물이었다.
더구나 바람 같은 몸놀림을 보이는데 그 야생의 투지와 함께 폭발하는 이들의 전투력은 숙련된 초급 익스퍼트와 맞먹는다.
그런 괴물이고 재앙 같은 존재이지만 이들의 가죽은 그만큼이나 대단한 가치를 지녔다. 이유는 이 오우거의 가죽이 아주 얇고 가볍다는 점 때문이다. 마법도 위력이 가벼운 것은 경갑주를 안에 입는 것만으로도 큰 피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항마력을 자랑했다.
그런 오우거 가죽이 다섯 장.
갑주로 제작한다면 서른 벌이 나오는 대단한 물건이다. 그는 이제야 야안이 말한 다섯 장이 말 그대로의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귀한 것을 다섯 장이나.’
절대 시골에서 올라온 듯한 행색의 사내가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었다.
‘단체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그래, 그럴지도.’
이 블랙 오우거 가죽들의 상태를 보자니 잡은 존재는 마법사는 아니었다. 미진한 손질 부위를 자세히 보면 검기에 당한 흔적이 보이는지라, 적어도 초급 익스퍼트가 있는 무리라 생각했다.
야안의 행색을 보면 기사와는 거리가 머니 그는 야안이 대용병단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용병이며, 그 용병단장이 호넬과 친분이 있어 이렇게 서신까지 써 자신에게 보냈다고 결론지었다.
‘아마 운이 좋아 잡은 이 가죽들을 전쟁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자 좋은 값으로 팔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파리가 꼬일까 봐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수하를 보낸 것일 테고. 돈보다는 물건으로 바꾸어 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옷에 덮여 잘 보이지 않으나 그의 몸의 윤곽이나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아귀만 보아도 엄청난 훈련을 겪은 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 생각하는데 야안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혹시 하자라도 있습니까?”
그 말에 어지러운 마음을 다시 잡은 로테리안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하자라니요. 다만 좀 곤란하게 되었군요. 저로서는 이 오우거 가죽 두 장 정도를 구입하는 게 한계입니다. 워낙 고가의 물건인지라.”
그렇게 말하며 지금 일반 오우거 가죽과 블랙 오우거 가죽의 시세를 말하니 야안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가격만 보아도 알 수 있겠군. 어쩐지, 아무리 오우거라 해도 너무 괴물 같은 존재들이었어. 따로 나타났으니 다행이지. 만약 셋 이상 한꺼번에 달려들었다면 최소 사지 중 하나는 내줘야 했을 거야.’
그것도 전설의 검을 손에 쥔다는 가정하에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라면 목숨을 잃는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이 잡은 오우거의 정체와 그 가죽이 상당한 고가임을 짐작한 야안은 그럼에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역시 호넬이 추천한 자답다 생각했다.
“그러면 죄송하지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가죽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이것으로 제가 입을 갑주 하나를 만들어 주시고, 나머지 잔금으로 마정석을 좀 구해주시면 좋겠군요.”
그 말에 로테리안은 크게 반색을 했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 이런 갑주는 큰 재산이다. 단순히 돈만으로 그 가치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기에 이것을 잘 이용하면 좋은 인맥을 쌓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과연 물건으로 바꿔 가는구나.’
돈보다는 물건으로 바꾸어 가려 하자 로테리안은 자신의 추리가 맞는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자에게 편의를 제공하면 다음에 또 이자를 통해 대용병단과의 거래가 더 생길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조금 전보다 더 공손하게 야안을 대했다.
“오히려 그래 주시면 제가 더 감사할 따름입니다. 잘하면 저도 하나 장만하겠군요.”
그 또한 상인이기 전에 무인이었다. 비록 집안의 세를 물려받아 상인의 길을 가고 있지만, 가죽을 한 장 더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이 입을 갑주를 가지는 것도 무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야안은 이 믿음직해 보이는 로테리안에게 괜찮은 결혼식용 반지도 부탁했고, 잘 보이고자 하는 로테리안은 그 말에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문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작은 보석 상자를 들고 들어왔는데, 상자만을 보아도 오랜 세월이 지난 고물품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의 주인은 상당히 아낀 듯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흠 잡을 만한 데가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그 보석 상자 안에 있는 반지는 더욱 대단했다. 그것은 다이아몬드를 장인이 고심해서 커팅 한 물건이었는데 1캐럿도 되지 않는 크기지만 그 광택이 화려한 것이 보는 눈이 없는 야안도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좋군요. 유서 깊은 물건인 듯한데.”
궁금증을 보이는 야안에게 로테리안도 긍정을 표했다.
“물론입니다. 저희 아버지 대에 얻으신 물건인데 멸문한 귀족의 물건이라 하더군요. 보시면 알겠지만, 보관이 잘되어 있고 상당히 세련된 디자인이라, 지금 유행하는 보석류에 비해서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반지에 붙은 보석은 다이아몬드라는 것인데 뛰어난 장인이 아니면 손대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보석 자체는 크게 비싼 것은 아닌데, 이렇게 가공된 물건은 장인의 솜씨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그 강도는 미스릴보다 더하다고 하기에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하여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석의 뜻풀이를 들은 야안은 마음에 쏙 들었다. 이것이면 멜리나도 크게 기뻐할 것이다.
“좋습니다, 이것으로 하지요.”
야안은 그렇게 말하며 그 보석 값과 마정석 값을 제외한 선수금을 받았는데, 자그마치 1만 2,000골드에 달했다.
아직 반이 더 남았으니 적어도 그만큼의 돈이 들어올 것인데, 예전 생각처럼 기왕이면 물건으로 받는 게 좋다 생각해 그에게 튼튼한 마차와 그 말을 이끌 말 한 필을 더 부탁했다.
호넬이 준 말과 합쳐 준마 두 마리면 크게 이동 속도차이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많은 돈을 물품으로 바꾸어 가야 하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이곳에서 하루를 묵고 가기로 했다.
야안은 로테리안의 초대로 그의 집에서 신세를 졌는데, 여러모로 그가 신경을 써주어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막상 이렇게 일이 진행되니 여관에 묵는 것보다 마음이 편했다.
그가 내준 손님방은 고향에 있는 자신의 집 규모에 달하는지라 깜짝 놀라기도 했다.
‘확실히 로테리안이 부자긴 부자로군. 하기야 번화가에 그만한 건물을 운영하시는 분이시니.’
아니, 그 이전에 자신에게 그만한 거금을 선뜻 내줄 수 있다는 자체가 자금 유통이 활발하다는 것을 뜻했다.
야안은 방에 딸린 욕조에서 몸을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