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52화
16. 상행 I
1년 전, 아내가 임신했던 당시 야안은 하나의 거대한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 벽은 다름 아닌, 중급 현자 입문의 벽이었다. 틈틈이 마법을 수련한 덕에 초급 마스터에 완전히 자리 잡았던 그에게 드디어 중급 현자의 문을 두드릴 기회가 생긴 것이다.
꾸준히 영지 주위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면서 경험을 쌓은 야안은 레벨을 8단계를 더 올린 터라 여유 스탯이 20에 달했다.
야안은 이 스탯을 이용해 벽을 부수기로 했는데, 그러려면 그만큼의 충분한 마법의 기운 운용법과 그간 못다한 마법 공부에 전념할 시간이 필요했다.
임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인에게 미안했으나, 하루빨리 강해져 자신의 것을 지킬 힘을 얻고 스승의 유지를 이루고 싶은 마음에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그는 폐관 수련에 들어섰다.
단 보름밖에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 당시 그는 예전 ‘카의 조각’을 만들었을 때만큼이나 열정적이었다. 복수면으로 더 이상 잠을 줄일 수 없었지만, 가볍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파래로 영양분을 보급하며 지식을 탐했다.
복수면으로 수련의 시간을 만들었다지만, 그의 흡수력을 생각한다면 부족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최근 들어 한스와 제자들이 그의 일을 도와주게 되고, 세 명의 행정 인들이 거름을 책임지면서 시간이 늘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것은 변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수련에만 빠지고 싶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었다.
인간은 고대어로 사람 인과 사이 간을 합쳐 만들어진 단어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존재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야안에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다 팽개치고 자신만의 삶에 빠진다면 당장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에 좋아할 수도 있지만 길게 보면 그것은 타인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 의심을 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니 이는 자아 성찰에 크게 악영향을 끼치는 일이었다.
돈에 미친 자가, 권력을 탐하는 자가 젊은 시절 냉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세상을 대하여 그 자리에 올랐지만, 말년에 후회하면서도 스스로 선택에 대해 정당하다 주장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결국 자신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지경이 되어 자아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인간으로서도 실패한 것이고 무언가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도 그 목적에 다가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인간으로서의 삶이 고되다 할지라도, 상황을 비판하며 회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급히 줄다리를 만든다고 반대쪽의 줄을 서둘러 묶느라 본래의 자리에 줄을 허술하게 묶는 우둔함과 다름이 없다.
야안은 그것을 깨달았기에, 그 벅찬 일상과 함께 수련을 병행했다.
그는 보름간의 고행 끝에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고 때를 놓치지 않고 스탯을 올렸다. 각 2스탯을 올린 뒤 남은 10스탯을 지혜에 투자했다.
그의 이 방식은 예전 중급 익스퍼트에 올라섰던 때, 전설의 추종자를 얻게 되면서 각 5스탯을 올리게 되자 벽을 깬 것을 상기해 시도한 것인데, 과연 그의 생각대로 그는 훌륭하게 벽을 깰 수 있었다.
지혜가 12나 늘어나면서 중급 현자에 들어선 그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다. 초급 현자였을 때와 차원이 다른 기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고, 자연히 마법 수식의 운영이 더 자유로워졌다.
그 덕분에 지혜와 행운에 각 2가 더 늘어나게 되었는데, 정확한 당시의 정보 창은 이러했다.
[이름 : 야안
레벨 : 48
직업 : 전설의 추종자
칭호 : 최초의 이방인
생명력 : 860
마나양 : 1,100
힘 : 28(+15)
민첩성 : 28(+15)
행운 : 25(+15)
지혜 : 34(+15)
마나 : 40(+15)
분배되지 않은 스탯 : 0]
마나 또한 여행을 끝나고 왔을 때보다 1년간 얻은 마나 7에서 5가 더 늘어나게 되었는데, 덕분에 이제 중급 마법은 마스터급만 아니면 큰 무리 없이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지혜가 늘어나자 영지의 행정 업무도 더 수월해졌고, 한스를 가르치는 일도 체계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이 당시에 포도에 쓰일 거름을 크게 개량하여 지금의 포도주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올해는 비료를 개량하는 것에 약간의 도움을 주고 나머지를 행정 3인에게 맡겼는데, 이는 그들 수준의 체계적인 자료를 쌓아가는 것이 좋다 생각했던 탓이다.
그것을 평생 자신이 관리할 수는 없으니 해결하자는 것인데, 과연 어디서 보았는지 덩굴장미와 함께 포도를 키우면 맛이 더 좋아진다는 자료를 얻어 실험에 들어가고 있었다.
성장이 빠른 덩굴장미가 다른 식물들의 성장을 방해하지만, 이것을 적절히 이용하면 오히려 이로써 더 질 좋은 포도를 얻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이 또한 비료의 성장력이 없다면 이도 저도 아닌 둘 다 죽이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아무튼 동굴 속을 돌아보며 예전의 자취를 살피던 야안은 다시 부딪힌 벽을 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가 부딪힌 벽은 중급 현자 익스퍼트의 경지였다.
본래 정상적인 방법이었다면 중급 현자 익스퍼트의 벽을 만나기란 빨라도 10년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중급 현자 비기너에 오를 때 지혜에 상당한 스탯을 올랐기에 이처럼 이른 시일에 벽에 부딪힐 수 있었다.
다행히 초급 현자에서 중급 현자로 올라설 때만큼 큰 벽은 아니었다. 그가 천천히 노력한다면 2, 3년이면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는 벽이었다.
하지만 이번 거래를 통해 해야 할 일이 있기에 그는 그 시간을 앞당기려고 시도 중이었다.
이는 중급 현자 비기너에 오르고 그 경지를 완전히 수습할 때쯤 생긴 퀘스트 때문이었다.
[전설의 반지 퀘스트(고대 거인의 비사를 알아내어라.)
등급 : B-
고대 거인들의 비극이 담겨 있는 유적이 그곳에 있다. 죽음의 지배자의 힘의 파편에 오염된 거인들이 잠들어 있다. 이곳에 있는 오염된 거인들의 수장을 일깨워라. 그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유적에 가까워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염된 거인들의 수장을 일깨워 그에게서 또 다른 고대 거인의 비사를 들어라.
*깨어난 오염된 거인들의 수장을 도와 죽음의 힘 파편을 처리하라.
*보상 : 퀘스트 완료 과정과 그 결과에 따라 경험치가 달리 주어진다. 또한, 다음 퀘스트의 힌트를 알 수 있다.]
등급은 B-로 예전 붉은 오크 때보다 한 등급이 더 높았다. 당시 라쿤 백작의 몬스터 토벌전이 아니었다면 그 혼자서 반년을 넘게 그들과 싸우고 숨어다니며 치열한 혈전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더구나 제사장 등급의 주술사까지 있었으니, 기척을 숨기려 해도 곧 발각되어 편히 쉬지도 못할 것이니 결국 물러나다 목숨을 잃으며 실패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그보다 더 등급이 높았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게 된 야안이었지만, 지금의 자신이라 해도 붉은 오크 퀘스트는 반년의 시간을 공들여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기에, 지금 이른 시기에 익스퍼트에 도전하였다.
야안은 당시 마법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한 점에 상당히 아쉬움이 컸다. 당시 마법에 제대로 적응할 시간이 짧았던 탓도 있었지만, 마나 운영 능력이 낮아 검기를 날리는 것보다 더한 마나양이 필요했다.
그때의 실패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장점인 검과 마법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위해 연구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두 가지 기술로 바로 파이어 핑거와 파이어 피스트였다.
불의 구 마법을 일순간 검기를 일으키는 방법으로 전환해 펼치는 것인데 열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압축되어 마나양에 비해 파괴력이 대단했다.
같은 급의 마법인 마나 애로우와 비교할 수 없는 파괴력이었는데 바위를 부수며 파고들고 나무를 뚫는 힘이라, 거죽이 단단한 트롤과 오우거라도 상당한 데미지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파이어 피스트는 그가 최근에서야 만든 것인데 불의 구의 상위 마법인 불의 벽의 마법을 검기를 날리는 형식으로 펼치는 것이었다.
준비 시간이 걸리고, 검기보다 사정거리가 짧지만, 파괴 범위가 그보다 크고 매우 강력하였다. 주먹으로 펼치는 것이라, 손을 내지를 때의 회전력으로 더욱 위력이 강해져 그 관통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예전 블랙 오우거라 할지라도 적중만 한다면 이 한 번의 손길에 머리가 터져 나가거나 심장이 부서질 것이다.
야안은 이 파이어 피스트 때문에라도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르려 했다. 지금은 마나 유동 능력이 낮아 사용되는 마나양이 많고 준비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스퍼트에 올라 마나 유동 능력이 향상되고 계산 능력이 빨라진다면 파이어 핑거만큼은 아니라도 사용에 큰 부담이 없을 것이다.
만약 야안이 중급 현자 마스터에 자리를 오른다면 한 번에 다섯 개의 파이어 핑거를 뽑아 쓸 수 있을 것이고, 연달아 세 번의 파이어 피스트를 펼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이번에도 그동안 주위의 몬스터들을 베어내며 경험을 쌓았는데, 덕분에 다시 여섯 개의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오늘은 그 비법을 겪고 난 뒤 마나 스탯을 7이나 더 올린 영향 때문인지 벽을 넘을 실마리를 본 듯하였기에 다른 날보다 더 진중해야 했다.
운기를 하며 마나 운영 능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밤이 지나 새벽이 올 때쯤에야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는 급히 남은 6스탯을 지혜에 부여했고, 과연 이번에도 하늘이 부서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몸이 둘로 나뉘었다.
이 현자로서의 깨달음과 검의 길에서의 깨달음에서 나타나는 고대어로 관(명시하다)의 현상은 같으면서도 그 보고자 하는 부분이 달랐다.
검의 길에서의 관은 자아를 살핀다. 오직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다.
그것은 기의 흐름이나 스스로 감정과 욕구에 살피는 것을 말한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재물욕, 식욕, 색욕, 명예욕, 수면욕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알게 되고, 그것을 자신의 의지 아래 제어가 가능하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에 대해서도 자제를 할 수 있는데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 이 일곱 가지 감정을 제대로 알고 행할 수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하면 사람의 머리와 가슴이 시키는 것은 다른 법인데 이것을 중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뜻이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제어하니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그것이 검의 길을 가는 자의 관이었다.
그에 비해 이 현자의 길에서 보는 관은 다르다. 자신이 아닌 대우주를 살핀다.
천지 만물 아래 존재하는 자신의 이유에 대해 묻고 답하며, 대우주를 살핀다. 겨우 인간의 작은 몸에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관람하기에 세상을 움직이는 마나의 길을 보는 안목이 넓어지는 것이다.
그로 마나 운용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고, 수식이 세상에 접하는 과정을 점차 알아가기에 마나 손실률이 낮아진다.
다만 지금 야안의 경우같이 무리하면서 이 관의 경지를 맞아들이게 되면, 이 관에서 다시 자신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혼선이 일기 쉽다.
이런 경우를 맞은 자들은 보통 미치거나 반신불수가 되기 마련인데, 야안이 그런 위험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뇌전의 정화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