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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112화 (112/385)

야안 112화

36. 아게로

하인을 따라 들어선 접객실에서는 이미 라진이 하얀 까마귀 부족의 큰 스승과 만나 여러 이야기를 끝낸 뒤였다.

그는 라진을 인정한 듯 왕족의 예로 대하고 있었다.

하얀 까마귀 부족의 큰 스승이라는 자는 지극히 나이가 많은 듯 회색의 머리 대신 긴 백발이 자리했고, 길고 풍성한 하얀 수염과 긴 주름이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노쇠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이는 일반 성인보다 머리 두 개 더 큰 키에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곧은 체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깊은 눈을 가진 그는 야안이 짐작하기 어려울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야안은 그가 중급 현자 마스터를 넘어 고위 현자 비기너에 오른 강자임을 알 수 있었다. 높은 경지에 올라 있는 그답게 야안의 경지를 짐작한 듯 감탄사를 흘렸다.

“놀랍군. 루론에게 들어 알고 있었으나, 혹시나 하였는데 실제, 그 나이에 그 같은 힘을 소유하니 믿기지 않는구나.”

감탄을 보이는 그에게 야안이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베론 야안이라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젊은 나이에 그 같은 능력을 지녔으면 없는 자만심이 생기기도 할 것인데 극진히 예를 보이는 야안의 태도에서 그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만하지도 않지만 그 능력에 맞는 자신감이 적당히 담긴 야안의 모습은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그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하얀 까마귀 부족의 큰 스승을 맡고 있는 테베즈라 하네. 그대 같은 인재를 만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군.”

그는 그렇게 말하며 라진을 보았고, 라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테베즈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을 하였다.

곧 테베즈는 자신이 가져온 목곽을 꺼내어 야안에게 건네었다.

야안은 테베즈가 내어준 목곽을 받아 열었는데, 그 안에는 하얀 까마귀가 그려진 작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을 발하는 보석으로 그가 예전 아내에게 준 반지에 달린 다이아몬드보다 강도가 뛰어나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진귀한 물건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의 부담스러운 마음을 아는 듯 테베즈가 그 물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그대를 명예 스승으로 둔다는 증표이네. 이것을 보여주면 최소 이곳에서만큼은 그대가 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일세.”

명예 스승이라는 말에, 야안은 극구 사양하려다 라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보이자 사양치 않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부족에서 스승의 직위는 드높았다. 그 권한만을 따진다면 중위 대전사의 권한과 유사했다.

더구나 이것은 하얀 까마귀와 같은 대부족에서 그런 것이고, 대부족이 아닌 일반 부족인 경우 족장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가 스승이라는 자리였다.

하니 야안에게 이 명예 스승이라는 직위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이들 저주받은 숲의 부족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이 같은 명예 스승의 직위가 있는 것이 자신의 행보에 큰 도움이 되리라 판단했다.

라진은 그것을 알고 테베즈에게 부탁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라진에게 작게 눈인사로 고마움을 표하고, 하인이 새로 가져온 이색적인 차를 마시며 잠시 담소를 나누다 분위기가 익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족장님을 치료하신다는 말씀을 들은 바 있습니다. 혹시 그 치료에 쓰이는 비법이 롱테온의 비법이 아닌지요?”

롱테온은 고대 시대의 현자로 그는 보기 드물다는 하프 엘프 출생이었다. 그는 엘프의 뛰어난 치료술에 관심이 많았는데, 테베즈가 대부족에게 펼치는 비법 또한 그가 만든 비법 중 하나였다.

테베즈는 자신도 옛 고문에서 겨우 찾아낸 롱테온의 비법을 야안이 알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대가 롱테온의 비법을 어떻게 아는가?”

테베즈의 말에 야안은 다시금 예를 보이며 말했다.

“고대 유물의 자취를 따르셨던 스승님께서 남긴 유품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는 스승님 덕분에 고대의 마법을 익힐 수 있는 기연을 얻었지요.”

“고대의 마법을 말인가?”

테베즈는 야안이 롱테온의 비법을 알고 있다는 말보다 더 놀라워하며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테베즈 님이 펼치실 롱테온의 비법은 지금의 마법 체계에 변형되어 성공할 확률이 낮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라면 ‘코우만’의 마법을 완벽하게 펼칠 수 있습니다.”

야안의 그 말에 테베즈는 작게 긍정하였다.

그는 야안이 중급 현자 익스퍼트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야안이 그 자신의 말대로 고대의 마법 체계를 따르고 있다면 어려움 없이 ‘코우만’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기뻐하는 그에게 야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롱테온의 비법을 성공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기 때문이지요.”

야안의 말에 누구보다 그것의 중요함을 알던 테베즈는 침통함을 보였다.

그 또한 그것이 가장 걱정스러운 점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 비법은 큰 재물의 희생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잘못되어 죽음을 맞이한다면 아슬아슬하게 두 세력을 막아서고 있는 중립 세력은 순식간에 와해되어 부족은 둘로 나누어질지 모른다.

그런 걱정은 알았던지 야안은 공간의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 공간의 주머니에 미리 넣어둔 현자의 지팡이를 꺼내어 테베즈 앞에 내놓았다.

“그것은 저의 스승님이신 마론 현자님께서 전설의 시대의 흔적을 좇다 찾게 된 물건입니다. 이것이라면 테베즈 님의 고민을 해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테베즈는 야안이 내놓은 현자의 지팡이를 본 순간 자신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고차원의 마법에 봉인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 물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워낙 대단하여 사용자가 해를 입을까 싶어 봉인한 것 같았다. 그 또한 진리를 걷는 자로서 그 같은 보물을 보게 되자 크게 흥미를 느끼게 되어 자세히 살피다, 이내 격정에 몸을 떨어댔다.

그는 믿기지 않는 듯 한참이나 현자의 지팡이를 살피다 떨리는 손으로 야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진정, 이것이 내가 생각하던 그것이 맞는가?”

“네, 아마 제가 알기로는 마지막 남은 세계수 가지일 것입니다. 전설의 시대에 있었다는 진정한 현자인 전설의 현자께서 만드셨고, 대현자 테무드께서 남기신 현자의 지팡이라는 물건이지요.”

그 말에 테베즈는 크게 기뻐하였다.

“하아~ 진정 아리스 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셨구나. 고맙네. 아게로 님을 그대가 구해준다면 우리 하얀 까마귀 부족은 그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네.”

앞으로 이틀이 지난다면, 첫째 후계자 세력에서 가져온 알레스로문의 나무로 만든 통이 완성될 것이다.

둘째 후계자 세력에서 마지막 남은 물건이 도착하는 시기 또한 이틀 정도라 하니, 3일째 되는 날에 치료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한데 공교롭게도, 이틀을 남긴 지금 결코 구할 수 없다는 세계수의 가지를 가지고 고대의 마법을 익힌 현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이것이 아리스 님이 말씀하신 운명이라 생각하였다.

테베즈는 이 기적과도 같은 운명의 날이 역사에 남아 사람들의 입과 입을 지나 긴 시간 동안 이 이야기는 잊히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로부터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야안은 하얀 까마귀 부족의 족장인 아게로의 상태를 진단했다. 그의 상태는 야안이 막연히 생각한 것보다 좋지 않았다.

처음 그의 목숨을 잡고 있던 영초가 지나치게 독한 기운인지라, 그 독한 성분을 잡기 위해 다른 성분의 약초를 쓰고, 시간이 지나 조금씩 쌓인 그 약초의 독한 성분을 잡기 위해 또 다른 약초를 돌려막으며 약을 써서 그의 몸은 지금 아슬아슬한 선을 잡고 있었다.

야안은 이처럼 아슬아슬한 선을 지키며 약을 쓰는 그의 솜씨에 감탄했다.

이 정도로 약을 쓰려면 그의 지식은 둘째라 하더라도 몇백 명의 위중한 환자들을 약으로 치료해야 한다.

그것은 한 나라의 왕족을 보살피는 치료사와 비교하여도 밑지지 않는 솜씨이다. 물론 환자가 절정에 달한 무인 중에서도 최절정에 달한 상급 익스퍼트에 달한 무인이 아니었다면 이처럼 약을 써 목숨을 붙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야안은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아게로에게 말을 건넸다.

“해독을 하기에는 현재 몸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저는 먼저 기운을 회복시킨 후 비법을 펼칠 생각입니다. 몸을 회복하기 시작하면 고통이 상당하실 것이지만, 절대 의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야안의 말에 그는 무겁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야안은 그의 눈에서 단호한 결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야안은 연속으로 여덟 번의 리젠을 펼쳤다.

그러자 몸이 급속도로 회복되며 아슬아슬하게 잠재되었던 약재의 독성 부분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곧 수많은 벌레에게 뜯어 먹히는 고통이 그에게 닥쳤고, 극심한 고통에 그의 핏대가 터져 나갔다.

온몸이 마비되어 신음 한 번 흘리지도, 작은 움직임도 뜻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같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세상의 어떤 고문보다 끔찍한 것이었다.

체력이 갓난아기보다 약해진 그로서는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정신을 잃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의 경지에 오르면서 단련된 그의 정신은 아슬아슬하게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야안은 자신이 펼친 리젠이 제 역할을 할 때까지 버티기를 바라며, 현자의 지팡이를 꺼냈다. 그 후, 그를 약재를 비롯해 수많은 재료의 위치가 맞는지를 확인한 뒤 코우만을 펼칠 준비를 했다.

그의 예상이 맞는다면, 그의 기력이 어느 정도 차려지며 약재의 독성을 극복하는 순간 약화되어 있던 영혼의 삭이 본래의 모습을 보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몸으로는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절명할 확률이 높았다.

1초의 시간조차 위험한 상황으로 흘러갈 수 있었기에, 야안은 ‘코우만’의 캐스팅을 끝낸 상태를 유지하느라 상당한 심력을 소비해야 했다.

“크흐흠.”

한 시간이 지날 때쯤 신음과 함께 그의 입이 열리며 죽은 피가 터져 나왔고, 야안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준비된 마법을 펼쳤다.

이내 마법이 펼쳐지며 통에 담겨 있던 재료들이 반발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야안은 지친 심력을 다스리며 현자의 지팡이를 통 안에 꽂았다.

쿠웅.

단단하기로는 미스릴 만큼이나 단단하다는 알레스로문 나무통이 부서질 듯한 거대한 진동을 보이더니 이내 검은색의 연기가 그 통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키이이익.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한차례 울음을 흘리며 꿈틀거리던 연기는 나무통을 비롯해 그 속에 자리한 재료들을 검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30분이 지나 연기는 사라지고 대신 짙은 검은색이 된 재료들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야안은 현자의 지팡이에 마력을 주입하다 비법이 끝이 나자 마력을 거두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와 남은 리젠의 횟수를 그에게 펼쳤다.

대현자의 지팡이에 마력을 주입하느라 심력의 소모가 상당했던지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리젠의 기운을 유도했다.

곧 창백한 아게로의 얼굴에 홍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갈라진 그의 피부는 윤기를 되찾았고, 독에 의해 흉측해진 그의 피부도 발진이 가라앉으며 말끔해졌다.

그렇게 고대에 사라진 롱테온의 비법을 부활시켜 그를 치료한 야안은 잠시 그의 상태를 확인하다 이내 초조하게 지켜보던 이들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게로가 정신이 든 것은 그로부터 한나절이 지난 뒤였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의식만이 살아 있었다. 죽은 자도 아니고 살아 있는 자도 아니었다.

오직 끝없는 고통만이 자리하였다. 그러했기에, 그는 잠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꾸욱.

그는 주먹을 쥐어보았다. 한때 강철 같았던 그의 육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그 쥐어진 주먹에 단단한 무언가가 들어간 듯 허술 한 틈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여느 아낙네보다 못한 근육이었지만, 그는 만족했다.

“하얀 까마귀는 두 번 죽는 법이지.”

고대 최초의 하얀 까마귀들은 두 번의 목숨을 산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그 피는 흐려졌지만, 두 번의 목숨까지는 아니어도 단련된 전사 이상의 존재들은 자신의 마나의 10%를 바치는 조건으로 전성기의 50%의 기량을 회복할 수 있다.

그 비법을 자신이 쓰게 될 줄 몰랐던 아게로는 눈을 감고, 오랜 시간을 잠자고 있던 마나 홀을 깨워냈다.

곧 고대의 힘을 부르는 언령을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천천히 그의 마나 홀과 바꿔 그의 육체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한나절이 다시 지난 뒤에야 그 비법은 끝이 났는데, 그 야안이라는 사내가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르지만 이미 육체의 대부분이 회복되어 있어 전성기의 70%가량의 기량을 회복하게 되었다.

“좋군. 이 정도라면.”

꽈악.

한나절 전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주먹이 쥐어지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뭉개지며 진공의 형태를 보인다.

저주받은 숲의 기이한 힘 덕분에 능히 지금만으로도 숲 밖의 상급 익스퍼트 끝자락에 자리한 자들도 잘해야 동수를 이루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는 지긋지긋했던 자신의 침대를 벗어나 준비된 하얀 까마귀가 그려진 예복으로 갈아입고 밖을 나섰다.

밖에는 그의 친우이며 부족의 큰 스승이기도 한 테베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게로는 테베즈에게 다가가 환하게 웃음을 보이며 물었다.

“정말 고마웠네. 그동안 고생하였어.”

“하하, 아셨다면 이 늙은이에게 맡긴 짐을 얼른 찾아가십시오.”

테베즈의 그 말에 아게로는 미소를 보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그간 못 한 일들을 해야겠지.”

그렇게 말을 하던 아게로는 그간 테베즈로부터 들었던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대족장의 일에 복귀한 아게로는 부족을 위기로 몰았던 두 후계자에게 벌을 내려 근신토록 했고, 자신의 딸과 사위의 권한을 축소했다.

이후 큰 스승을 도와 중립을 지킨 세력에 한해 상을 내리며 흐트러진 조직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또한 라진을 모셔 그를 왕족의 왕자로 인정하고 야안의 부탁대로 그의 새로운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대부족들 중에서도 이름 높은 하얀 까마귀가 그의 후원이 되어준다는 것은 1왕자 외 기존의 다른 왕자들 못지않은 세력을 형성함을 말한다.

이후 아게로는 야안이 하얀 까마귀 부족의 은인임을 공개적으로 선포했다. 또한, 그에게 하얀 까마귀 부족의 보물 중 하나인 하얀 정령석을 내주었는데, 이는 라진이 야안에게 정령에 재능이 있음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처음 야안을 만났을 때의 라진은 그야말로 이제 막 정령사가 된 햇병아리에 불과해 재능의 유무를 판단할 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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