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13화
하지만 실전을 겪고 야안 덕분에 정령술을 노련하게 다루게 되어 하급 정령 익스퍼트에 오른 뒤 이곳에서 정령에 대한 여러 책자를 접하게 되면서 야안 또한 보기 드물게 정령에 재능이 있는 자임을 알게 되었다.
뛰어난 그의 오성이라면 자신과 달리 이론을 통달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야안이 말했듯 재앙이라 하여도 무방할 존재를 척살하기 위해서, 정령과의 계약은 그에게 큰 힘을 줄 것이다.
아게로가 내준 정령석은 라진이 그의 어머니에게 받은 것보다 한 단계 높은 정령석으로, 정령석 중에서도 보기 드문 특급에 속하는 정령석이었다.
전전대의 족장이었던 그의 할아버지가 큰 공을 세워 붉은 눈 부족의 왕에게 받은 포상이었는데, 여태 자신의 부족에 정령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자가 없어 모셔두었던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 야안에게 건네게 된 것이다.
이 특급 정령석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령에 재능이 있는 자의 능력을 향상해 주며 정령과 계약 시 자신과 가장 최적화된 정령을 잇게 해준다.
또한 정령술을 배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정령과의 감응의 시간을 반으로 줄이기까지 했다. 정령과 감응의 시간이 반으로 준다는 것은 정령이 들어설 공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이 3분의 1로 줄어든다는 말과도 같았다.
야안은 라진을 통해서 정령이라는 것이 검사의 손에 들어간다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지 잘 알기에,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아게로는 야안이 정령석을 받아들이는 데 크게 기꺼워하자 다행이라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야안은 아게로의 지원을 받아 정령에 대한 자료를 습득하고, 라진에게는 감응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가 내준 정령석 때문인지 야안은 보름 만에 감응을 하는 기초를 뗄 수 있었다.
그 속도는 정령술에 있어 천재적 재능을 지닌 라진 못지않았다.
더구나 암기나 이해에서 범인과 차원이 다른 그의 머리로 정령술에 필요한 자료를 습득하는 데 보름의 시간이면 충분하였다.
아게로는 라진을 후원한다는 뜻을 알리기 위해, 그의 신물 중 하나를 라진에게 내주었고 부족의 일이 정리되기 무섭게 그에게 붉은 눈 부족으로 가는 길을 안내할 호위들을 붙여주었다.
그 호위의 장으로는 대전사인 루론을 붙여 주었는데, 그는 야안 일행과 안면이 있고, 지난 의회의 일로 세 번이나 붉은 눈 부족에 간 경험이 있어 그 길을 안내하기에는 적당했다.
대전사 루론을 필두로 전사 200을 내어준 아게로는 자신을 구함으로써 자기 부족의 미래를 구한 야안과의 헤어짐을 크게 아쉬워하며 며칠 동안 성대한 파티를 열어 그 아쉬움을 대신하였다.
아게로가 야안 일행에게 내린 상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붉은 눈의 왕자와 부족을 구한 야안을 모셔 온 포를란의 공을 인정하여 그에게 내린 벌을 철회하여 다시 하얀 까마귀 부족의 전사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친우인 루론의 밑으로 들어가 야안과 라진을 붉은 눈 부족에게 안내할 이번 전사 중 한 명으로 뽑혔다.
예전 자신이 살던 집을 되찾은 로즈는 기뻐했다. 편견 어린 시선과 안 좋은 일밖에 없었던 숲 밖의 세상에 진저머리가 난지라 다시 하얀 까마귀의 일원이 되어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의 아버지처럼 감사하였다.
오래된 그 집에서 어린 시절의 흔적을 살피던 그녀는 언제나 몸속에 지니고 다녔던, 어머니의 유품인 낡은 빗을 어린 시절 어머니와 추억이 많은 집 앞에 자리한 소나무 밑에 묻었다.
라진은 그녀와 헤어지자, 그제야 자신의 감정에 대해 솔직해졌다.
이후 언제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을 확률이 높았다.
그는 출정 전날 그녀를 불러, 며칠간 고민 끝에 자신의 마음을 담은 서신과 유모가 그에게 남긴 유품인 낡은 브로치를 건네며 말했다.
“지금 그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아 고백합니다.”
로즈는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신분인 하얀 까마귀 부족의 지지를 받는 붉은 눈 부족의 왕자인 라진이 자신을 불러 하는 말에 의아스러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자신의 외모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가진 그녀였기에, 라진이 자신에게 서신과 브로치를 건네는 그 순간에도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궁금증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라진의 심장은 더욱 크게 뛰었고, 머리는 어지러워졌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혼자 몇 번이고 생각하며 말하고자 했던 그 한마디를 그녀에게 말하지 못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었다.
크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긴장을 풀던 라진은 그렇게 29년 인생에 처음으로 이성에게 고백을 하였다.
“그대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이 마음을 알게 된 것은 며칠 전이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저는 그대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대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라진의 고백에 로즈는 잠시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하였던 라진은 그녀에게 쥐여준 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서신에는 부족하나마 그대를 향한 저의 마음을 적어 두었습니다. 부디 저의 마음을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마친 라진은 로즈가 자신의 고백을 거절할까 두려워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 남은 로즈는 흔들리는 눈으로 라진이 가는 모습을 보다, 이내 자신의 손에 쥐여준 서신과 브로치를 오랫동안 바라만 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촛불을 켠 그녀는 라진이 준 서신을 섣불리 열기 힘들었다.
너무나 의외의 순간에 의외의 인물이 고백한 사실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의 고백은 지난 여정에서 그가 보인 호의나 눈빛 등을 생각나게 하였다.
당시에는 그저 신분에 맞지 않게 친절한 사람이다 생각하였다.
붉은 눈의 왕족 이전 체만 왕국의 귀족 특유의 분위기가 자리한 그의 신분은 범상치 않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그 또한 혼혈이라 하지만, 노예와 부족에서 죄를 지어 쫓겨난 전사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과 그의 신분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 먼 것이었다.
변방의 더러운 일을 맡는 숲의 자식 중 하나인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는 낯선 것이었고, 처음 부담스러운 시기를 넘기자 인간적으로 그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같은 혼혈이라는 공통점이 그에게 마음을 열게 했고, 전성기 때의 아버지만큼이나 강한 그의 모습은 검을 수련하는 자로서도 호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준, 그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는 사연이 있어 보이는 브로치를 매만지던 그녀는 천천히 촛농으로 서신의 봉한 부분을 떼어냈다.
시간이 지나 서신을 모두 다 읽은 그녀의 볼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누군가 자신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고,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매가 매력적인 라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생각이 담긴 서신을 읽고 난 뒤라 긴 여정 동안 그가 보인 호의가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왔다.
아무런 생각 없이 넘겼던 그의 호의가 어떤 생각으로 한 것인지, 가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그녀는 가슴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작게 중얼거렸다.
“한마디만 해달라 하신 겁니까?”
그 한마디의 의미는 너무나 컸기에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라진이 준 서신의 마지막에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준다면 그가 준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한마디를 해달라 적혀 있었다.
기다리겠다고, 자신을 기다리겠다는 그 한마디만 해준다면 그는 반드시 돌아와 그녀를 아내로 삼겠다 하였다.
붉은 눈 부족의 왕자의 신부는 숲 밖의 왕자들이 신부를 고르는 만큼이나 조건이 까다로웠다. 라진이 말한 것처럼 하기 위해서는 라진은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 또한 하얀 까마귀 부족에 와 붉은 눈 부족의 왕족으로서의 교육을 받은 만큼 자신이 원하는 신부를 맞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울지 잘 알고 있었으나, 힘들다 하여 그녀를 포기할 만큼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이 부족하지 않았다.
로즈는 서신을 통해 라진의 확고한 마음을 알았고, 지난 여정을 떠올리며 그에게 호감의 마음이 싹텄기에 라진 같은 사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자신이 앞날이 창창한 왕자의 앞길을 막는 것은 염치없는 행동이라 생각하였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고민에 빠져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라진은 날이 밝아올수록 초조해져 갔다.
자신이 경솔했던 것이 아닐까? 일방적인 마음에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면 어떡할 것인가?
그런 그의 마음과 상관없이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갔고, 상황은 점차 여정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야안은 친구의 초조한 모습이 걱정이 되어 진실의 눈을 펼쳤고, 그가 포를란의 딸 로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쪽에는 영 눈치가 없는 야안이라 그가 그녀를 사모하고 있었음을 전혀 몰랐기에 상당히 놀라웠다.
그의 마음을 알고 나니 예전 자신의 부인인 멜리나와 연애를 하던 시절이 생각나 작게 미소를 짓던 야안은 초조해하는 라진에게 하얀 까마귀 부족에서 준비한 머루술을 술병째 건네며 말했다.
“로즈, 그녀 때문이라면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라진은 자신도 며칠 전에야 깨달은 자신의 마음을 야안이 알고 있자, 놀라다 쓰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알고 있었는가?”
야안은 사실대로 말하려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네.”
야안의 말에 라진은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없이 땅을 쳐다보다 이내 머루술을 들이켰다. 초조해서인지 술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야안이 건넨 술을 몇 모금 더 삼키던 그는 자조하며 말했다.
“하하, 나도 참 멍청한 놈이 아닌가? 옆에 있는 이도 아는 나의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어제 그녀에게 고백하였네. 쉽지 않겠지만, 나를 기다려줄 수 있겠는지 말일세.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나의 마음을 받아주기란 어려움이 많을 것 같네.”
야안은 진실의 눈을 통해 라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말없이 그가 건넨 머루술을 마시다 그의 처친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네가 사랑하는 여인이라면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말게. 가게나. 아직 시간이 남았네.”
라진은 야안의 그 말에 짙은 안갯속을 벗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야안은 다시 그의 등을 밀며 말했다.
“뭐하는가? 가지 않고. 사랑이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자, 이 유부남의 충고를 받아들이게나.”
라진은 재차 독촉하는 야안에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친구.”
“정말 고마우면 어서 가시게. 그리고 말하게. 반드시 데려오겠다고 말일세.”
야안의 말을 뒤로하며 라진은 서둘러 뛰어나갔다. 갑자기 호위의 대상인 왕자가 어디론가 뛰어나가자, 전사들을 지휘하며 물품 정비를 하던 루론이 놀라 따라가려 했지만 야안이 그를 말렸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돌아올 것이니 말입니다. 그는 사내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 가는 것이니.”
야안의 그 말에 루론은 영문을 알지 못하다, 이내 야안의 말을 믿고 다시 물품 정리 일을 시작했다.
라진의 걸음은 그녀의 집에 다가갈수록 점차 느려졌다.
하지만, 그는 느려질지언정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용기를 담아 걸으며 그녀의 집에 자리한 거대한 소나무를 넘은 그는 이른 새벽에도 그녀의 집에 불이 켜져 있음을 발견했다.
쿵쿵.
그는 말없이 그녀의 집 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문을 두들겼다.
“라진입니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이 흔들려서인지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곧 집 안이 부산스러워지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자신의 고백에 고민을 하였던지 잠을 이루지 못해 초췌해진 그녀에 라진의 마음이 크게 요동을 쳤다.
흔들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이 시간에 이곳을 어떻게.”
그녀의 말에 라진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눈이 어지럽게 흔들리다, 그녀의 왼손에 자신이 준 브로치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짧게 감탄사를 질렀다. 그는 그때만큼 스스로 직감에 확신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녀도 나에게 마음이 있다.’
그것이 자신의 마음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는 그것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하였다.
정령과 계약을 했을 때보다도, 상급 유저의 벽을 깼을 때보다도 더 행복했다. 아니, 생전 처음 야안이라는 평생의 친구를 만들었을 때만큼 그는 가슴이 들떴다.
그는 아름다운 눈으로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는 어여쁜 여인에게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저는, 반드시 돌아와 그대를 데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를 저의 평생의 반려자로 삼겠습니다. 저는 이 말을 하기 위해 그대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말에 로즈는 얼굴을 크게 붉혔다. 머리가 멍해지고 피가 뜨겁게 흘리며 잘게 손을 떨어댔는데, 라진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낀 어머니의 유품인 루비 반지를 빼내어 그녀의 손에 끼워주었다.
거부할 수도 없는 힘에 휩싸인 듯 힘없이 손가락을 내주었다. 로즈는 단련 때문에 투박해진 자신의 손이 그처럼 부끄러울 수 없었다.
“이것은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직접 남겨주신 마지막 유품입니다. 또한, 그대를 반드시 데려가겠다는 저의 의지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그대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 드리겠습니다.”
이런 쪽에 면역성이 없는 로즈는 라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고, 라진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다 참지 못해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로즈는 놀랐지만 잠시 움찔했을 뿐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두툼한 입술과 숨결은 그녀가 겪은 그 어떤 것보다 달콤했고 향기로웠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입맞춤을 한 라진은 스스로 한 일에 놀라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 그녀를 안으며 중얼거렸다.
“반드시,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라진의 말을 들은 듯 그녀는 그의 품속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