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139화 (139/385)

야안 139화

46. 붉은 검 라테온

야안의 그 가정에 타이카 또한 동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야안의 가정을 들으며 자신이 보았던 역사를 꼼꼼히 집어 생각하다 말했다.

“야루스라는 이름은 생각한 것보다 오래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네. 사실 오크들이 야루스 산맥에 영역을 들인 것은 고대 시절 이후였으니 말이네.

모든 것은 그 악마가 말한 대로이네. 이 야루스 이름 이전 본래의 이름을 찾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그분의 봉인을 깨우게 될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네. 아니, 어쩌면 또 다른 우리가 모르던 진실을 알게 될지도.”

야안은 타이카의 말에 동의하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정된 정보였기에 그저 가정할 뿐 무엇도 확실한 것은 없었다.

‘어쩌면 전설의 반지를 통해 알 수 있을지도.’

야안의 그렇게 생각하였다. 정말 이 일이 전설의 현자와 관계가 있다면 전설의 반지가 자신에게 알려줄 것이다.

이번 파란토의 퀘스트처럼 말이다.

야안은 이미 나이에 비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강자였지만, 그것은 그저 나이에 비해 강자인 것이지 전설의 반지가 원하는 만큼은 힘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야안은 초조할 일이 없음에도 수련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만약 그 자신이 일과 가정에 대한 핑계로 수련을 게을리하였다면 이번 퀘스트는 실패하였을 것이니 말이다.

그는 긴 숨을 터뜨리며 운기행공을 끝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그가 기다렸던 새벽이었다. 그의 초감각 너머로 제코가 일어나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게 느껴졌다.

야안은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긴 뒤 밖을 나섰다. 주인님을 어떻게 깨워야 할지 방문 앞에서 서성이던 제코가 잠시 놀라다 이내 인사를 하고 얼른 앞서 나갔다.

야쿤을 챙기기 위해서인데,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야안이 미소를 보였다. 싱글거리며 준비를 마친 야쿤에 깨달은 바가 있어서이다.

‘가장 어리석은 이는 눈앞의 일에만 급급한 자이고, 가장 현명한 자는 현재에 충실한 자이다.’

멀리 보지 못하면 자신이 제대로 된 길을 가는지 모르기에 눈앞의 일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이에 집착하여 먼 미래와 지난 과거에 집착하는 자는 막상 현재를 살고 있음에도 그 마음은 다른 곳에 있으니 제대로 된 삶을 사는 자가 아니었다.

야안은 지난 불우했던 과거나 영지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할지에 대한 걱정보다 그런 것 없이 현재 제 일에 충실한 제코의 행동에서 깨달았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당연하면서 가장 단순한 진리였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없으니 걱정이고 고민인 것이다.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믿자. 생각하되 집착하지 말자.’

마음이 편해졌고, 그 깨달음에 머리가 맑아졌다. 그리고 눈앞에 정보창이 일어나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 깨달음으로 지혜가 3이 늘어난 것이다. 야안은 이 변화에 작게 미소를 보이다 이내 야쿤을 끌고 온 제코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고맙다. 네 덕분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에 제코는 어리둥절해 하였고, 그런 그의 모습에 미소를 보이던 야안은 이내 투레질을 하는 야쿤의 등 위에 올라 앞을 나섰다.

곧 허둥지둥 야쿤 위에 오른 제코 또한 야안의 뒤를 따랐다.

* * *

여름의 밤은 유난히도 짧다.

깊은 어둠이 일어선지 시간이 몇 지나지 않아 벌써 새벽의 동이 터 올랐다. 산맥의 중 터를 넘어선 터라 더욱 그러했다.

카람 백작 소속의 붉은 물결 기병인 가온은 자신을 깨우는 하인에 무거운 눈을 떴다.

“아, 대장도 참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저 너머로 수석 백인장인 제이가 언제 일어났는지 척후병을 통해 얻은 지도를 보며 앞으로 갈 길을 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온은 그 모습에 고개를 저어댔다.

“어지간히 긴장하신 모양이군. 하기야 라테온 기사님이 맡기신 중책이니. 이번에 동원된 병력만 이천오백이 넘었으니.”

단순히 병력만 따질 때 그 정도이지 그 외, 짐이나 말들을 다루기 위해 동원된 인력과 합치면 오천이 넘었다.

이들도, 병사들 수준에 못 미치지만 당장 위급 시 간단한 진을 펼칠 수 있는 창병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보급받는 창이라는 게 간단하게 만든 죽창 정도였지만.

솥을 걸어 음식 준비를 하는 그들을 보던 가온은 그 자신도 자신의 말을 다루기 위해 일어섰다.

그 많은 인원이 있음에도 요란스럽지 않은 모습을 본다면 이들이 얼마나 강병인지 알 수 있다. 그 자신도 이곳 병력에 포함되어 있지만, 자신들은 왕국에서도 손으로 꼽힌 강병을 운영하는 티온 백작 가와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당연히 그들 자신도 강병일 수밖에 없었다.

하인이 가져다준 신선한 여물을 먹는 말의 갈기를 긁어주던 가온은 중얼거렸다.

“이 정도의 병력이 갈 필요가 있는 것인가? 그래봐야 시골 자작 가 수준도 되지 않는 영지에 불과한데. 라데온 님께서도 너무 걱정이 많으시군.”

이번에 동원된 기병만 500이었다. 중장병은 동원되지 않았고, 궁병, 창병, 검수들 등 잘 조합된 병력 2000은 경험이 많은 정예병인 만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때와 시기만 잘 잡는다면 500기병만큼이나 두려운 병력이다.

자작 가의 병력이 운영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3000이었다. 마크 자작 가가 원래 남작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가 명예 만인장이라는 것을 받았다지만 그 실제 운영되는 병력은 많지 않을 것이다.

기껏 해야 2000 정도 남짓이 한계일 것이다.

물론, 검은 전갈을 없앤 마크 남작의 그 전술은 대단하지만 이미 치료사들로부터 잘 해봐야 5년 정도의 수명밖에 되지 않음을 공인된 그가 나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마크 자작의 무서움은 전장을 바라보는 눈이다. 그는 어디가 약하고, 어떻게 쳐야 흔들리는지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하지만 그 재능은 전술에 한해서이다. 전략에는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그렇기에 검은 전갈을 지워버린 마크 자작을 상대로 그 자신이 아닌 수석 백인장을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발이 묶이고 눈이 가려진 전술가는 그만큼 별 볼일이 없는 존재였다. 이미 그에 대한 정보를 라테온 경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기에, 가온은 걱정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산자락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 수가 상당한지,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때 그 수가 5000가량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눈이 좋은 챈들러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들이 모인 모습과 연기를 살펴볼 때 잘 훈련된 강병임을 알 수 있었다.

“만약을 위해 식사 때도 포진된 모습이라? 확실히 공략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군.”

상대하는 이가 다른 이였다면 그들의 그 모습만으로 꺼림이 있겠지만, 그들은 운이 나빴다.

붉은 물결이라 하지만 일천도 되지 않았고, 그 기동력도 산이라 제대로 쓰일 수도 없었다.

더구나 그들이 가장 불행인 것은 그 상대가 마크 자작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야 척후병을 풀어 이곳의 지리를 살피고 있지만, 마크 자작은 나프롬 자작 가를 봉쇄한 뒤 몇 달 동안 이곳의 지리를 상세하게 조사를 마친 뒤였다.

어디서 쳐야 하고, 어디서 몸을 빼야 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적들은 마크 자작이 원하는 시간에 자신들은 원하지 않는 장소에서 전투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사람으로 치면 장님이 된 것과 같은 것이니 아무리 날카로운 무기를 들었다 해도 그것을 맞추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렇다 해도 상대가 약하다면 그도 해볼 만도 하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마크 자작이 끌고 나온 병력은 이번에 창설된 일천의 기병과 중장병과 궁병, 창병이 조합된 500 병력이었다.

조합된 병력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근골이 좋아 빠른 속도로 자신의 기량을 올리고 있어 이미 정예 병력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일천의 기병들은 어떠한가. 최소가 하급 유저였으며, 그 백인장들은 중급 유저에 달하는 실력자들이다.

상급 유저가 셋이나 포함되었으며 그들을 이끄는 이는 초급 익스퍼트에 이른 챈들러였으니 오히려 그 힘이 강하면 강했지, 못하지 않았다.

이 전투는 이미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결정이 난 것이다. 다만, 얼마나 피해를 줄이며, 그 과정에서 지휘관인 챈들러나 백인장이 어떤 것을 배울 것이냐가 중점이라 할 수 있다.

잠시 그들을 살펴보던 챈들러는 말을 이끌고 뒤로 물러섰다. 오늘 저 식사는 그들에게 있어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이다.

‘또각, 또각-’

요란한 말굽 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내려서던 챈들러의 얼굴에는 근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열흘 전 자신의 주인이 영지에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그는 힘껏 이 전투에 나설 수 있었다.

그분의 제자이신 한스에게 들은 바로는, 결국 그 악마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한다. 그러며 한동안은 영지를 나서지 않으시다 하시니 자신의 주인께서 어떻게 될까 크게 걱정하던 그로서는 그보다 더 좋은 희소식이 없었다.

그분의 주군이신 마크 자작께서도 야안이 돌아온 뒤 근심을 덜어 놓은 듯했다. 사실 어린 한스로서는 내성을 지키는 데 무리가 있다 판단했는데, 이제 그 무위나 경험이 다양한 야안이 다시 총관을 맡았으니 그 근심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총관에 복귀하자마자 반간계를 성공적으로 보이고 있다고 하니, 영지를 나서 병력을 운용하는 그로서는 그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다.

말을 타고 산을 지나가는지라 말을 타고 지나가는 가온도 힘겹기 마찬가지였다. 평지와 달리 안장을 타 넘은 그 충격이 쌓이다 보니 강골인 그조차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마차와 짐을 이끄는 하인들을 보자면 불평을 할 수 없었다. 우거진 나뭇가지를 쳐 내며 나아가던 가온은 갑자기 앞에서 멈추라는 신호에 의문을 보였다.

출발한 지, 이제 2어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지난밤 쉬었던 덕분에 산길을 오르는 말도 아직 지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나무라도 쓰러진 것일까?’

하지만 카람 백작가의 경험 많은 정찰병이 그런 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아직 마크 자작과의 거리가 나흘 남은 지금 설마 그들이 매복하였음을 짐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앞에서 이유를 알리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의문을 풀 수 있었다.

‘푹, 픽픽-’

“으아아악!”

멀지 않은 언덕 위에서 화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가온은 자신의 앞을 가던 군사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며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방패를 꺼내라, 마차를 모아 붙여라.”

그 피해는 앞에서 가장 심한 듯 앞에서 요란한 소란이 벌어졌다. 하지만 역시나 강군이라 그런지 그들은 지시를 내리기 무섭게 움직였다.

다행이라면 운영되는 궁병의 수가 겨우 이백에 불과한 것이다. 제이는 그들이 이곳에 잠복했다면 이미 그 가지고 있는 화살도 상당한 것으로 보고 재빨리 공세를 취하도록 했다.

거리를 보아 이곳에서 활을 쏜다 하여 맞을 거리가 아니었기에 기병 100과 창병 200을 보내어 그들을 저지하기로 했다.

곧 기병 백인장 한 명이 그의 명령을 받아 그들은 곧 빠르게 수풀 너머로 움직였다.

잠시 후, 궁병이 있다 생각한 쪽에서 잠시 화살이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쳤다.

‘치졸한 형태군. 고작 이런 수라니. 확실히 라테온 경께서 우려할 일은 없겠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하들에게 방패를 내리고 다시 마차를 움직이도록 지시를 내렸다. 나선 병력들이 돌아오면 바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준비를 끝내기 무섭게 다시 화살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번 피해는 조금 전보다 더 심했다.

밀집된 형태 위로 화살들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쏟아지는 화살들은 마치 명궁사가 쏘아 내는 것만큼이나 적중률이 높았다.

그나마도 자신들을 보호하던 마차들은 움직이기 위해 다시 흩어 놓은 상태였기에, 방패를 내려놓은 그들로서는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방패를 들어, 마차를 다시 끌어와.”

혼란이었다. 고작 궁사는 이백에 불과했지만, 제대로 훈련을 마친 듯 화살은 끊어지지 않고 쏟아져 내려왔다.

제이는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내려오는 화살들을 검으로 내려치며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많은 적들이 잠복해 있구나.’

다른 기병도 아닌 수많은 전투에서 이겨 낸 노련한 기병들이 백기나 포함되어 있었다. 산속이라지만, 몸을 빼내고자 한다면 그들 중 몇은 벌써 모습을 보여서야 하는데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숨어 있는 적의 병력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그는 한숨을 흘리며 서둘러 밀집된 병력을 흩뜨리고 방패를 들어 올리도록 지휘하였다. 마차로 다시 방어하기에는 그 피해가 너무 크다 생각해서이다.

하지만, 그의 그 지시는 안타깝게도 큰 실수였다. 곧 수풀 너머로 요란한 먼지바람이 일어났다.

‘두두둑, 두둑-’

요란한 말굽 소리와 함께 산사태가 일어난 듯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곧, 화살 비가 그쳐지더니 이내 무섭게 기병들이 양쪽 수풀 너머에서 불쑥 튀어나와 그들을 감싸듯이 들이 닫히었다.

오십으로 나뉘어 총 20개로 묶여진 기병들은 거대한 창과 같이 그들을 갈라놓고 찢기 시작했다.

노련한 전투경험이 많은 그들이었지만, 밀집 형태가 아닌 화살 탓에 병력이 흩어진 터라 그 피해는 대단히 컸다.

제대로 된 진도 구축하지 못한지라 기병들이 지나가기 무섭게 병사들은 쓰러져 내렸다. 500에 달하는 붉은 물결이 있었지만, 그들도 큰 힘을 쓰지 못했다.

우선 그 위치가 좋지 못했고, 또한 그 개개인의 실력도 적들이 월등히 뛰어났다. 차라리 그것뿐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벌이는 기이한 형태의 진법이었다.

마치 뚫리지 않는 철벽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빈틈을 노려 검과 창을 찔러도 어느새 그 옆에 있는 기병이 그것을 막아섰고, 이내 흩어지더니 목이 베어졌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기수만을 죽일 뿐, 말에는 해를 가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들의 기량이 얼마나 압도적으로 뛰어난지를 알 수 있다.

그들 중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제이를 비롯해 백인대장들 또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그들 기수를 이끄는 사나운 기운이 풍기는 수장인 그 중년의 사내를 뛰어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 다루는 솜씨는 크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검 솜씨는 대단했다.

능히 자신들이 따르는 라테온 경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솜씨였다.

처음 이들의 수장임을 알고 서둘러 상대하려 했던 4 백인대장이 몇 번 검을 부딪치지도 못한 채 베어지는 것을 본 제이는 서둘러 남은 3명의 백인대장과 함께 그를 상대했다.

“이런, 빌어먹을!”

단, 한 번의 충격에 무기가 금이 가는 것과 동시에 큰 충격에 낙마를 할 뻔 했던 가온은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말을 진정시켰다.

‘익스퍼트에 오른 자로구나.’

대장인 제이가 상급 유저의 끝에 자리한 덕분에 시간을 끌고 있지만, 말 그대로 시간만을 끌 뿐이다. 저 사나우면서도 현란하게 검을 휘두르는 저자를 언제까지 붙들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다.

“으아악!”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5 백인대장이 팔을 하나 잃고 낙마했고, 이내 그가 휘두르는 검에 목이 떨어져 나갔다.

검기에 베어진 탓에 요란한 핏물조차 말라버린 채 목을 잃은 그의 모습은 흥분이 가득한 전장 속에서도 소름이 끼칠 만한 것이었다.

자신을 방해하는 4명 중 한 명을 그렇게 베어버린 챈들러는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솟는 듯 그의 검은 더욱 날카로운 면모를 보였다.

간간이 자신의 몸을 스치는 공격이 있었지만, 그조차 의도한 것인 듯 그의 갑주를 미처 뚫지 못한 적의 공격은 오히려 자신을 조이더니, 이내 덧없이 목숨을 잃었다.

가온은 자신이 마지막 남은 백인대장이 되어 버리자, 이내 말과 함께 돌격하며 소리쳤다.

“대장, 제가 잡을 테니 빨리 빠지십시오.”

비록 갑작스러운 기습에 자신들이 큰 수세에 몰려 있다고 하지만, 그 수는 현저하게 많았다. 물러선 뒤 하인들에게 죽창을 쥐어주고 원진을 펼치게 한다면 이들 기병을 막아설 여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린 제이는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이들의 수장인 자신이 죽는다면 더 이상 수습의 여지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듯한 어린 사내였다. 18~19 정도로 보이는 어린 기병이 자신을 막아서자, 제이는 코웃음을 흘리며 참마검을 들어 그를 베어냈다.

비록 수세에 몰렸다지만, 그의 검은 카람 백작 가의 상급 유저들 사이에서도 다섯 손에 들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겨우 일개의 기병 따위가 자신을 상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기병의 솜씨는 제이의 예상을 벗어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그의 날카로움과 무거움이 자리한 그의 검을 대수롭지 않게 쳐내던 기병 또한 그의 검 못지않은 검을 보이며 그를 공격하는 것이다.

일순간 그의 말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그럴수록 더욱더 그 기병의 검은 그를 향해 몰아치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가온의 비명이 들렸다. 제이는 그 비명에 이를 갈았다. 이제 다 틀려 버린 것이다. 지휘관으로서의 척 출정이 마지막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토록 비참했던 적이 있던가?’

검을 든 지 이십 년, 패배를 맞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처럼 철저하게 농락당한 것은 처음이었다.

원통하고 분했다. 비록 질에서 밀린다 하여도 병력의 수만 2배에 달했고, 하인들마저 동원한다면 그 수가 3배는 넘을 것인데 이 같은 패전을 하니 그 수치스러움에 스스로 목을 끊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더구나 수장도 아닌 일개의 기병에 발이 묶인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우습다.

그의 살기가 최고조에 오르며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몸속의 기운이 끓어올랐고, 이내 말과 함께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이놈! 네 녀석만은 죽여주지.”

그 살기 어린 모습은 대담한 이라 해도 절로 물러설 만한 것이었지만, 그를 막은 기병은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또한 말을 박차 돌격하더니 그의 검을 받아치기 시작했다.

두 개의 검이 현란하게 부딪혔다. 금속 비음이 끊이지 않았고, 그 사이로 부딪히는 기운에 전마로 단련된 말들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힘과 힘의 대결이었다.

제이는 점차 시간이 갈수록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상대하는 이가 자신 못지않은 경지에 오른 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아니, 나이가 있고 경험이 다르니 노련함으로 따지면 자신이 우세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 쓰이는 검법이 자신의 검법에 비해 매우 뛰어난 탓에 그 노련함을 살리지 못했다.

결국, 주위의 기병들이 다 정리될 때쯤 그 기량이 밀리는 제이는 상대의 검에 팔 한쪽을 잃었고, 그 이후 몇 번의 공격도 받아치지 못한 채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거센 숨을 몰아쉬며 말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터져 나오는 피를 지혈도 하지 않은 채 제이는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이의 검이 이 정도라면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일드 왕국은 천재기사의 등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제이는 패배한 적장이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게 물었다. 그의 그 물음에 사내는 답했다.

“테리. 마크 자작 가의 별동대 대장이다.”

적장의 예우라 생각한 탓인지 테리는 그의 물음에 담담히 답해주며 이내 숨을 헐떡거리는 그의 목을 쳤다.

주인이 죽은 모습에 지쳐 쓰러진 말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터진다.

잠시 상대하던 적장을 바라보던 테리는 이내 수하가 포획한 말로 갈아타며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려온 것인지, 궁병은 활을 버리고 창을 들어 창병과 함께 도주하는 적병들을 막아섰다. 이미 수풀 너머에 수많은 함정이 남은 지라 수풀에 들어가기 무섭게 비명이 끊어지지 않았다.

정오를 채 넘지도 않아 전장은 피 안개를 흩날리며 끝이 났다. 그렇게 그들은 총 5000의 병력 중 하인으로 데려온 농노병 2200을 포로를 잡아내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기병 중 스물 낙마하여 상을 입었고, 도망치는 적들을 상대하던 창병 중 70명 정도의 사상자가 나온 피해가 있을 뿐이다.

3배 이상의 병력을 상대하였다 보았을 때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대승리였다.

“과연, 마크 자작님이시다. 이 같은 결과라니.”

챈들러는 그 자신이 해 놓은 일에 대해 믿을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을 용병으로서 떠돌았던 그로서는 지금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아군의 기량이 크게 뛰어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마크 자작의 전술이 아니었다면 자신들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을 강병들이었다.

그런 강병은 간단한 심리를 이용해 손쉬운 먹잇감으로 만들었으니 전술의 대가답다고 그는 생각했다.

검이나 갑주 등 전리품들을 챙기게 한 챈들러는 이내 하루 거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크 자작이 이끌고 있는 부대에 잡은 포로들과 전리품들을 넘겨주었다.

마크 자작은 챈들러의 보고를 통해 그 피해가 제 생각보다 낮음에 크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이럴 수가. 훌륭하네. 이 같은 성과라니. 이 정도면 피해가 전무하다 할 수 있군. 더구나 포획한 말이 300기라.”

거기에 끌고 온 마차에 실은 식량과 병기와 같은 전리품. 거기에 농노병이 2200이었다. 이번에 카람 백작 가에서 보낸 병사들이 워낙 정예병인 탓에 다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농노병인 경우 살기 위해 대부분 항복했다.

어차피 가축 정도로 여겨지는 농노병이었기에 그들에게 충성심 따위는 없었다. 마크 자작은 이번 전투에서 얻은 것 중 이 농노병이 가장 큰 수확이라 생각했다.

일손이 부족한 영지에 바로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노병으로 뽑힐 만큼 그 체력도 여타 농노와 달리 튼실했으니 쓸 곳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돌아와 영지를 다시 다스리고 있는 야안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어쩌면 이들 중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재를 골라낼지도 모른다.

그는 잠시 챈들러를 비롯해 테리와 여러 수장을 치하하더니, 이내 그들 중 챈들러와 기마병 500을 이끌고 다시 다른 전투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송의 수장으로 테리에게 맡긴 마크 자작은 이곳에서 한나절 거리에 있는 다른 산의 중 터에 들어서며 멈추었다.

그들이 멈춰 선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기병 300과 더불어 700 정도의 보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바로 나프롬 자작 가의 병력으로 이들은 야안의 반간계에 의해 잘못된 정보를 받은 탓에 전혀 엉뚱한 곳에서 카람 백작 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이들의 병력이 합해졌다면 챈들러와 기병들이 뛰어난 전술을 펼쳐 보인다 해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마크 자작은 챈들러가 그들을 치는 동안 이들을 행적을 쫓고 전투를 벌일 곳의 지형에 맞춘 전술을 준비하고 병력을 풀어 적절한 함정을 준비하였다.

아직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그들이 오려면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있는 터라, 그간 지친 말을 쉬게 하고 전투식량으로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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