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87화
하지만 야안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상처를 닦고 감은 부위를 깨끗하게 하여 다시 감아주었다. 그 같은 야안의 희생에 처음 멍청하다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전사는 야안에게 무어라 감히 말 할 수 없는 감동받았고, 그때부터 야안을 향한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상급자에 대한 예의를 야안에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태도에는 마음이 자리해 쟈칼 전사들에게 없는 경건한 모습마저 보였다.
야안은 그런 전사의 태도마저 아무런 말없이 마지막 한 점마저 받아 주었다.
전사는 그런 야안의 모습에서 생전 처음으로 타인을 위해 충성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나에게 기회가 있구나.’
문득 자신의 머리를 스치는 무언가에 그 전사는 마지막 생명을 불태웠다.
야안은 전사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워 버리자 걱정이 들어 그를 찾았는데, 부족에는 없는 듯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전사는 야안에게 있어서도 의미가 짙었다. 생전 처음 가지는 첫 수하이기도 했으며, 우두머리란 어떤 것인지 알게 해준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기에 누군가의 식량이 되어버릴 확률이 높은 그의 사라진 자취는 슬픈 일이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다시 보름이 지날 무렵.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다.
죽음의 향기가 짙은 자였다. 피고름이 터져 악취가 몸에서 풍기며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앙상한 몸을 한 괴인이었지만 야안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대는 살아 있었구나.”
걱정과 동시에 반기는 야안의 모습에 전사는 그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입가에 큰 호선을 그렸다.
지난 자신의 여정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험난했지만. 이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생각했다.
그는 이제 하나뿐인 팔로 품속을 뒤지더니 책자를 꺼내어 야안에게 건네었다.
글을 아는 이는 부족에서도 많지 않았지만, 뛰어난 두뇌를 지닌 야안에게 있어 단순한 형태인 공용어를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야안은 그 책자에 자리한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야안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물건에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코 군사 창술>
손재주가 뛰어나고 자신의 종족만큼은 아니나 힘이 뛰어나며 이성적인 군사체제를 갖춘 종족인 자코는 대륙의 12개 나라 중 강력한 왕국 중 하나였다.
특히 무기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무인들이 많은 곳으로도 알려지기도 했기에, 비록 군인에게 가르치는 창술이라도 뛰어난 묘용이 많았다.
이제 성인식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야안에게 있어 그것은 다시 없을 기연과도 같은 물건인 것이다.
하지만, 야안은 기뻐하지 못했다. 아니, 통렬하게 눈물을 흘렸다.
“누가 이런 것이 필요하다 했는가? 이 몰골이 무언가. 도대체 왜 부족한 나를 위해 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인가?”
그런 야안의 말에 그는 서서히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부디 우두머리가 되어 주십시오. 죽음 따위는 저처럼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전사들이 자리한 거대한 부족을 이뤄 주십시오. 부디, 부디…….”
그렇게 전사는 그 말을 유언으로 남긴 채 죽음을 맞이했다. 야안은 그의 마지막 유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부족함 많은 내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대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네.”
숭고한 죽음을 맞이한 그의 시체가 다른 존재에게 함부로 다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야안은 저 너머 무의 종족의 마지막처럼 그를 불로 태웠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말없이 바라보던 야안은 그렇게 자신의 다짐을 다져갔다.
시간이 지나 그날이 다가왔다. 쟈칼의 성인식이 시작된 것이다.
더 이상 야안은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없었다. 이는 그녀의 어머니가 복수의 칼날을 갈며 기다려왔던 날처럼 자신을 대외적으로 세상에 보여주었던 탓이다.
그리고 야안의 그 모습에 많은 부족민이 웅성거렸다.
성인이 된 야안은 몸은 상당히 작아 잘해봐야 여타의 최하급 쟈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야안의 아버지이자 족장이기도 한 그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자신을 독살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그녀의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설마 이같이 비수를 꼽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본래의 신색을 회복했다.
“저 녀석은 나의 자식이 아니다.”
그랬다. 전사 계급들 보다 두 배는 큰 덩치에 힘을 지닌 자신의 자식이 저처럼 형편없을 리는 없다고 판단한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워낙 야안의 어머니가 강력하게 주장한지라 주술사는 물을 떠 와 그 위에 야안의 피와 족장의 피를 올리고 주술을 펼쳤다.
그리고 그 결과 피가 섞이는 것 본 주술사는 공개적으로 야안이 족장의 아들임을 선언했다.
이번 성인식에 참가할 족장의 여섯 아들이 일곱으로 늘어난 순간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것을 기억하는 야안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족장의 아들임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걱정 따위는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향한 수많은 시선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며 되찾은 자신의 권한으로 새롭게 마련한 창을 손질하였다.
쟈칼의 성인식 방식은 이러하다. 백 명을 한 조로 나누어 단체 대련을 통해 그들 중 가장 강한 열 명을 전사로 삼는다. 다시 서른 명을 하급으로 나누며 그 남은 이들은 최하급으로 분류한다.
그렇게 모인 전사들은 다시 모여 단체 대련을 하여 백에 조장이 뽑히며 그들 중 가장 강한 이가 대장이 된다.
힘이 전부인 쟈칼의 종족의 습성답게 대장의 혜택은 대단하다.
가히 작은 부족의 족장 못지않은 권력을 누비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다음 대의 족장을 노려볼 수 있는 권한이 자리하기도 하기에 이 두 번째 단체 대련에서 죽어나가는 이들은 매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무시무시한 둔중 병기를 든 다른 이들과 달리 실없어 보이는 얄팍한 무기를 든 야안은 아주 노리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기존의 전사들은 야안이 든 창이 그 모습과 달리 무서운 무기임을 알고 있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쟈칼의 성정과 창은 궁합이 맞지 않았다. 창은 처음에는 다루기가 쉬운 무기이지만,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공을 들여야 했다.
대환도나 둔기 병기는 넓은 면적을 사용하는 형태라 그 쓰임새가 간단했다. 베는 의미보다는 오직 얼마나 빨리 휘두르고 치는가에 대한 것으로 습득률이 높으며 금세 손에 익었다. 또한, 그 단순한 형태에 비해 그 파괴력도 대단하였기에 쟈칼 종족의 성정에 맞았다.
하니, 익히기 쉽고 위력도 좋은 무기를 앞에 두고 창이나 검과 같은 난도가 있는 무기를 다룰 이유는 없었다. 아니, 애초 지능이 좋지 않은 쟈칼 종족은 그 면적이 좁아 섬세하게 다루어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무기를 다루기에 벅찬 것이다.
그런 점을 잘 알기에 여타의 전사들은 야안이 창을 들고 나오자 오히려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런 비웃음이 경악으로 바뀌게 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오오오-’
백 명에 달하는 쟈칼의 입에서 함성과 같은 기합 소리가 흘러나오자 대기가 요란스럽게 떨어댔다.
그리고 땅이 요란하게 흔들리더니 서로 잡아먹을 것 같은 모습으로 무시무시한 무기를 손에 쥔 그들이 이내 부딪혔다.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간 이들은 애초 체격이 작고 힘이 약한 쟈칼들이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약한 이들을 먼저 처리해야지 자신의 신분이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약한 쟈칼 중에는 야안도 자리했다. 유난히 약해 보이는 그인지라 그를 향해 달려드는 쟈칼 만해도 그 숫자가 셋이나 되었다.
하나같이 한 번의 휘두름에 몸을 갈라 벌릴 듯한 무기를 손에 쥐고 있었기에, 그 무기에 비해 불쏘시개 같은 무기를 쥔 야안의 패배는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아니,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놀라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야안의 어깨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창을 들고 있는 그의 손목이 비틀어지며 어느새 창은 앞을 쏟아 나갔다.
‘캉, 카캉-’
요란한 세 번의 금속울림과 동시에 다시 한 호흡이 채 지나지도 않아 둔탁한 소리가 들렸는데, 그 모습을 보던 몇몇 전사들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것은, 저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당한 것이지. 도대체가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군.”
그들도 텐의 창술을 보았지만, 저런 것은 처음 보았기에 그들의 놀라움은 작지 않았다. 어는 곳으로도 피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합공을 그 작은 무기로 되받아칠 뿐 아니라, 어느새 그들을 제압하였으니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순간 요란한 비무대에서 야안을 중심으로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본능이 강한 그들은 느낀 것이다. 놀라운 강자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말이다.
곧 그들의 예상처럼 잠시 자신이 한 일을 살피던 야안이 이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놀라웠다. 아니, 경악했다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 누구도 야안의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 비무대에 가장 강하다 칭송받던 대전사의 아들도 야안의 손에 쓰러졌고, 위기감에 열이나 되는 이들이 모여 야안을 공격했음에도 그의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찍고, 치며, 빠지다 이내 휘두르며 내려치는 야안의 창술은 신기와 같았다. 마치 여름날의 태풍처럼 야안의 창술이 그러했다.
야안의 등장으로 일반적으로 반나절이 넘는 시간동안 진행되던 대련은 그 반에 반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끝이 났다.
그 비무장 위에 남은 이는 야안에게 덤비지 않은 이들로 강자라 보기에는 많이 부족한 이들이 다수였다.
이유야 어쨌든 규칙대로 이들 아홉은 야안과 함께 전사의 직위를 받게 되었다.
야안의 아버지이자 족장은 야안의 그 같은 무위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같은 신기는 예전 단 한 차례 본 적이 있었던 탓인데 바로 자코 종족인 무인에 의해서였다.
그자를 잡기 위해 서른 명에 달하는 전사가 희생되어야 했다. 그도 그가 부상을 당해 잡은 것이지 그것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피해를 봤을지 모른다.
그는 야안의 창술을 보며 직감했다.
‘올해는 저 녀석이 대전사가 되겠군.’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다음 날, 대전사를 가리기 위해 시작된 이 비무는 오로지 야안만이 그 비무장에 서 있는 것으로 끝이 났다.
물론 지난 대련과는 달리 거르고 거른 이들을 모았던 탓에, 야안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어야 했지만, 그 정도는 여타 대전사가 탄생될 때 생기는 부상에 비한다면 큰 부상은 아니었다.
여타의 종족이었다면 생사를 오락가락할지 모르지만, 회복 능력이 높아 생명력이 질긴 쟈칼 종족 특성상 그 정도의 부상은 얼마 되지 않아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둔중한 병기로 맞은 것으로 한동안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하는 터라, 야안은 축제가 있던 며칠간 밖을 나오지 못했다.
아버지로부터 대전사의 직위를 상징하는 검은 투구를 받은 야안은 잠시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더니 이내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하는데, 곧 그의 몸에서 작은 진동이 일어났다. 바로 운기행공의 첫 모습을 보인 것인데 사실 이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호흡을 다루어 강력한 힘을 지니는 종족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마나를 다룬다기보다는 그 종족의 특성상 호흡으로 신체 능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운기행공이라는 것을 통해 효과적으로 마나를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한데 야안은 놀랍게도 이곳 대륙에 없는 운기법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