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89화
한동안 말문을 잃은 채 눈을 감던 그는 이내 야안에게 초연한 자세를 갖추며 말했다.
“제가 이토록 염치가 없는 줄 몰랐습니다. 이곳에서 저의 일이 정리되면 베론 야안 님을 따라도 되겠는지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것이 아닌지라 다소 놀란 모습을 보이던 야안은 이내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이오. 제크 경과 같은 분이 함께해 준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오.”
그야말로 길을 가다 황금을 줍는 것과도 같다.
적지 않은 나이나 그의 성실성을 본다면 아직 그의 성장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누군가 잘 끌어주기만 한다면 초인의 벽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야안은 그런 것보다 그의 기사도를 더 높게 평가했다.
곧고 올바른 그 같은 기사도를 지닌 자는 자신의 시대에서도 보기 힘든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울 뜻에 이 같은 자가 한 축을 담당한다면 그가 생각한 바를 넘어선 위대한 왕국이 만들어질지 모른다.
제크 경은 야안이 자신을 받아들인다 하자, 야안에게 주군의 맹세를 보인 뒤 과하지 않은 예를 보이고는 비워 두었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경비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 같은 자가 새로운 주군을 모시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한데, 이 같은 태도를 보이니 야안의 옆에 자리한 리트담 또한 절로 감탄을 흘린다.
“공과 사를 다루는데 저 같은 인물이라니. 야안 님께서는 정말 큰 인재를 얻은 신 것 같습니다.”
“이런 인연을 허락해주신 아리스 님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야안은 미소를 보이다, 그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이내 사신단을 재촉하여 움직였다.
요란스럽게 움직이는 그들의 움직임에도 제크 경은 마치 조금 전의 일이 거짓인 마냥 단 한 번도 그쪽으로 눈길 한 번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을 더 움직인 사신단은 셀리온 공작이 거주하는 대도시에 들어설 수 있었다.
야안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더 복잡하고 활기찬 모습이 자리한 이곳을 살펴보다, 이내 흥미를 일으키는 존재들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샤 대륙의 양식 복장을 한 상인들의 숫자나 그 거래규모가 매우 늘어난 것을 발견한 것인데, 그들뿐만 아니라 종종 제국의 귀족들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일이 잘 풀렸던 모양이구나.’
지난 셀리온 공작의 태도와 달리 생각보다 일찍 거병을 한 것이 이상하다 여기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 보아야겠지만, 확실히 스승님이신 하늘 산님이 크게 힘을 써주시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곧, 성에서 자신들을 맞이하러 온 이들이 보였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지난 야안과 대면이 있던 자였다.
바로 파툰 경으로 그는 공손하게 야안에게 예를 보이었는데, 그간 적지 않은 피를 묻힌 탓인지 상당한 실력 향상이 있어 보였다.
그런 파툰 경이 소속된 2기사단의 단장 아이손 경은 대표자인 야안에게 절제된 예를 보이었다.
“주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며 다시 공손하게 예를 보이던 그는 이미 수하들로부터 열어둔 길로 사신단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과연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닌 듯. 내성의 성문에서부터 그들을 맞을 준비를 마친 뒤였다.
자신들이 모습을 보이자 곧 셀리온 공작이 큰 미소를 보이며 그들을 맞이했고, 야안은 그런 그에 적절하게 예를 보이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과연 주위에는 제국의 귀족들이 몇몇 보이었는데, 그중 몇은 야안도 아는 자들이었다. 그의 스승인 하늘 산이 지난 과거에 알려준 실세들이라 할 수 있는 귀족들인데, 그들 또한 야안을 알아보고는 작게 목례를 보이며 반기었다.
간단히 셀리온 공작과 해후를 보인 야안은 곧 자신과 함께 온, 다섯 이종족 대표를 소개하였다.
드워프 대표자인 푸른 불, 엘프인 검은 장미, 카사 종족의 멜로딘, 태양 종족의 페로톤, 도론 종족의 몰코란을 소개한 야안은, 마지막으로 이번에 자신과 뜻을 함께한 리트담을 소개하였다.
“이분은 로케하르산 리트담이라고 합니다. 지난 조사님이 이룬 주술의 경지를 뛰어 넘으신 분으로 저조차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자이십니다.”
앞서 이종족의 대표자들과도 덤덤한 기색으로 인사를 나누던 셀리온 공작은 마지막 야안이 소개한 리트담에 잠시 멈칫했다.
그 또한 난세로 인해 사라진 비운의 로케하르산 가문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가문도 결국 북부의 가문이라 중앙의 귀족들에게 은근히 무시를 당한 터라 로케하르산 가문이 남 같지 않았었는데, 그들이 멸문하였다 하였을 때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한데, 그 마지막 후손이 자신의 눈앞에 있으니 그로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제국의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로케하르산을 뛰어넘어, 자신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강자인 야안과도 승부를 점칠 수 없는 강자로 성장했다니. 진정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강철의 심장을 타고난 자답게 셀리온 공작은 빠르게 그 감정을 수습하며 예를 보이는 리트담에게 인사를 보였다.
“로케하르산 가문의 비극은 저 또한 크게 안타깝게 여기던 일이었습니다. 한데, 그 가문의 젊은 천재가 세월이 흘러 위대한 주술사가 되어 나타났으니 악덕한 자들의 말로가 눈에 그려집니다. 바 대륙은 또다시 유서 깊은 로케하르산 가문을 보게 되겠군요.”
그런 셀리온의 말에 리트담은 그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더 이상 가문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았거니와 야안 님을 만나 더 거대한 대의를 위해 걷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측하지 못한 답변이라 셀리온 공작은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저어댔다. 그로서는 그 대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옛 제국을 건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을 뿐이다. 하여 물었다.
“그 대의가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의 말에 야안이 답했다.
“그것은 훗날 바 대륙의 난세가 사라져 다시 인간들이 하나로 통일이 된 그때 이야기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때 공작께서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며, 그 선택은 앞으로 바 대륙만이 아닌 세계의 모든 이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것입니다. 부디 옳은 선택을 하여 주시기를.”
하며 말하는지라, 셀리온 공작은 몹시 궁금하면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곧 준비된 연회장에서 음악과 음식, 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 되어 연회장은 끝이 났다. 다음 날, 야안과 리트담, 이종족 대표들은 셀리온 공작의 사람들과, 베론 제국에서 온 아홉 대표자와 동맹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었다.
“흡사 그 형태를 보니 베론 제국과 같은 형태의 모습을 보는 듯하군요.”
셀리온 공작의 말에 야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할 일이나, 실상 국가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각 종족이 모여 회맹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게 더 옳을 것입니다. 또한 이 회맹에 참여하는 종족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거인족은 물론 모롤타 종족도 함께 할 것입니다.”
셀리온 공작은 거인족이 야안이 말한 회맹에 속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거인족의 그 성정이 온순하고 욕심이 없어 그러하지, 그들이 마음을 먹고 일어선다면 전성기의 제국이라 해도 그 승부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런 셀리온 공작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안은 말을 이었다.
“하여, 말하면 몇 개의 소수 종족을 제외하면 여타의 종족들이 하나가 되어 회맹을 만들게 되는 것으로 저희는 북부의 패자이신 셀리온 가문을 이 회맹에 끌어들이고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동맹이 아닌 회맹으로 끌어들이기 왔다는 말에 셀리온 공작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야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북부의 세력이 이번 전쟁의 중심이 될 것이니만큼 회맹의 장으로 셀리온 공작을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셀리온 공작은 곧 다섯 이종족에게 예를 보이며 말했다.
“북부 연합의 장으로서 회맹에 들어설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부디 장으로서 부족함이 많으니 많은 도움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생각보다 선선히 받아들이는 그에 이종족들은 저마다 웃음을 흘리며 예를 보였다. 베론 제국의 대표들은 잠시 뒤로 물러나 있다, 셀리온 공작이 회맹의 장으로 들어서는 것에 대해 축하를 보였다.
베론 제국의 대표자는 인간 연합의 실세 중 하나인 터크만 공작으로 그는 예전 야안의 등장에 경계를 보였으나, 황제인 하늘 산으로부터 제국에 뜻이 없는 작은 연합 왕국을 만들려 하는 것을 알게 되고는 야안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 호의에는 정치적 계산도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그는 검으로 초인의 벽을 넘어선 소드 마스터로서 야안의 검이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검의 길을 가는 그 고행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아는 그로서는 당연히 야안에게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마치 성인을 보는 듯 인격이 높았고, 또한 그러면서도 그 힘과 위치에 맞지 않게 소탈한 면이 자리했다.
오만한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게 할 정도로 배울 점이 많은 이라 그가 야안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니 당연히 회의의 결과는 좋게 끝이 났다.
터크만 공작은 회의장에서 떠나는 야안에게 하나의 서신을 건네주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전해 달라 하시더군요. 어제 전해드려야 했으나 개인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렇게 전해드립니다.”
스승님의 서신이라는 말에 야안은 얼굴을 환히 밝히며 묻는다.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제 폐화께서는 평안하신지요.”
그 말에 터크만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지금까지 제가 보았던 황제 폐하가 맞는 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활발한 모습을 보이고 계십니다. 특히나 셀리온 공작에 대한 추천을 반기셨는데, 실제 제가 이렇게 와 그를 만나니 과연 귀공께서 추천하실 분답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미 상당한 첩자를 파견해 바 대륙의 정세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크게 부각되는 마땅한 인물이 없는 것이 아쉬웠던 차 셀리온 공작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소개해 주시니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실제 만나 보니 놀랍더군요. 그가 지난 반년 간 보인 행보는 이미 다른 세력을 내세우려던 이들의 입마저 막아 버렸습니다. 그저 감탄에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같았다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일말의 걱정마저 지워지자 야안은 크게 미소를 보이었고, 터크만 공작 또한 함께 미소를 보인다.
잠시의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곧 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실상 터크만 공작이 야안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과도 같았다.
야안으로서도 베론 제국의 인간 세력 중 실세라 할 수 있는 터크만 공작과 가까워진다면 왕국의 건설에 큰 힘이 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