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03화
24. 통일 제국
하지만 이 놀라운 경지에 올라선 야안도 섣불리 이 유물에 손을 쓸 수 없었다.
‘지난 만년의 시간이 변수구나.’
본래라면 이 유물은 만 년 전에 만들어졌어야 할 물건이었다.
물론 녹이 스는 것 같은 이유라면 그에게 어려움이 없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이유 따위가 아닌 이 철궤의 묘용 때문이다.
잡철로 만들어진 이 철궤가 법칙을 거스르는 힘을 지녔기 때문인데, 하니 그 시간 동안 그 속에 있는 유물의 변이가 얼마나 되었을지 야안으로서는 쉽사리 감이 오지 않았다.
“감당할 수 있을까?”
야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모든 것을 녹여 버릴 것 같은 열기를 맞이하다, 곧 망설임을 지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할 수 있다.’
막연함 따위가 아닌 확고한 확신이 야안에게 일어났다. 세상 모든 것을 다루는 경지에 올라섰었음을 그 스스로 다시금 확신을 가진 것이다.
‘화르르륵-’
야안이 황금 드워프의 망치를 들자 이내 모든 것을 지워버릴 불길이 크게 치솟아 오르더니 순식간에 망치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초고온도의 열기가 망치에 자리했음에도 망치는 녹아버리거나 붉게 달아오르는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전과 차이점이 없었던 것인데, 그 차이는 망치가 철궤를 향해 내려치면서 일어났다.
‘쾅-’
그 거대한 공간이 뒤흔들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하지만 그 소리는 철궤에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가 아닌 망치가 철궤를 그대로 통과해 유물을 때리면서 나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세상 모든 것을 다루게 된 대장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리법칙을 넘어선 그 놀라운 이능을 보인 망치는 다시 위로 솟아올랐고,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용광로에서 다시금 열기가 일어나 망치에 들어섰다.
‘쾅, 쾅, 쾅-’
엄청난 폭음에서 일어나는 그 거대한 진동은 만약 이 용광로의 불길이 아닌 다른 불길이었다면 큰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점차 거세어지는 열기는 야안마저 태워버릴 것 같았지만, 야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을 감당하지 못한 듯 불길을 비키더니 결국 야안을 보호하는 형태를 보이었다.
거대한 불길이 자신을 집어삼킬 듯 둘러쌌음에도 야안의 호흡은 거침이 없었다. 조금의 갑갑함도 없이 가늘고 길게 이루어졌으며, 어느 순간 무호흡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없이 숨은 길어졌다.
그렇게 황금 드워프들의 왕 황금 망치가 남긴 유물은 야안의 손에 의해 그 완성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다시 보름이 흘렀다.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을까? 야안은 그에 대해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다. 시간을 넘어서고, 공간을 넘어서 완벽하게 물아일체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천지를 뒤흔들 것 같은 폭음 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시간이 더 흘러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과정이 더 고되어 보인다. 내려치는 그 힘이나 망치에 모여드는 열기는 지난 야안의 망치질에 비해 수십 배에 다 달했으니.
오랜 시간을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망치질을 하건만, 야안의 모습은 처음 이 용광로에 들어왔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아무리 초인이라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트담과 같은 탈인의 경지에 오른 주술사라면 모를까? 지금의 야안으로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야안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실제 야안이 이룬 대장장이의 경지가 하늘에 다 달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이 일을 하는 순간에는 절대적인 법칙인 시간도 그에게 있어 비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땅, 땅, 땅-’
작지만, 다시금 망치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야안이 바랐던 소리인지라 야안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를 물리치는 힘마저 자리한 그 일정한 소리는 불길과 어울리더니 마지막 용광로의 불길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다시 시간은 흘러가기 시작한다.
‘차아아앙-’
유리가 깨지는 듯 맑은 음색을 울리며 철궤가 부서졌다. 동시에 야안이 쥐고 있던 망치도 자루까지 타오르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을 유물을 감싸던 철궤는 그 마지막에 일어난 불길 속에 타올라 그 자취를 감추었고, 망치의 잔재는 유물의 마지막 퍼즐이 되어 끼워 맞추어 졌다.
‘지이잉. 지이이잉-’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 울음을 터뜨리듯 유물은 처음 세상에 나오자 그 창공 너머를 꿰뚫을 만큼 크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 울음에는 파사의 기운이 자리해, 삿된 기운이 자리한 몬스터나 그와 관련된 존재들은 고통에 휘말린 채 크게 뒤로 몸을 물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야안은 그 유물로부터 마치 또 다른 자신의 분신을 만난 느낌을 가졌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이 유물의 정체는 겨우 야안의 팔목을 가릴 정도의 크기를 지닌 작은 방패였다.
오랜 세월 동안 변화된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금속으로 만들어진 이 방패는 오리하르콘보다 더 단단했다.
마치 전설의 검처럼 그 무엇으로도 부서뜨릴 수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이 유물의 마지막 아비가 되었던 야안은 이 방패의 모습이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본질이 방패인 것은 맞으나, 그것은 때로는 전설의 검처럼 무기의 역할이 되었고, 야안을 보호할 갑옷의 역할을 가질 것은 안 것이다.
다만, 전설의 검이 그러하고, 현자의 지팡이가 그랬듯 현재 야안이 이 방패를 감당할 수준이 이 정도인지라 이 유물이 스스로 이런 형태를 보이는 것뿐이다.
“고맙다. 갑갑할 것인데.”
스스로 그 같이 변모한 유물에 그렇게 말을 꺼낸 야안에 유물은 그 말을 알아들은 듯 잘게 울음을 흘린다.
야안은 그 울음이 말하는 바를 알았던 터라 망설이지 않고 말을 꺼냈다.
“너를 완성하게 되면서 생각한 이름이 있다. 너의 이름은 이제 플로메티아다. 신화시대 아리스 님이 최초로 탄생시킨 수호신의 이름이기도 하지.”
유물, 아니, 이제 플로메티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방패는 야안이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든 듯 찬란한 빛을 뿜으며 이제 꺼버린 용광로를 밝히기 시작했다.
* * *
배춘만은 다른 상단이 그러했듯 이번 상행에 사활을 걸었다.
자신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한 가신들 또한 적극적으로 이 상행을 지지하였고, 그들은 마지막 자신들의 거주지마저 팔아 치워 긁어모은 자금으로 이번 상행을 꾸렸다.
다행히 선대의 연이 닿은 모용이란 낭인을 고용하게 되면서 사막 행에 필요한 다른 낭인들도 구할 수 있었다.
모용이라는 낭인은 이 일대의 호족들도 섣불리 대하지 못하는 실력자로, 이미 두 차례나 사막 행을 성공한 경험이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낭인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이로, 당장에라도 원한다면 문파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런 것보다 검을 수련하는 것에 치중하던 터라 그런 것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여러 우연곡절이 있었지만, 무사히 목표로 한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던 상단은 돌아오던 도중, 모래폭풍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용한 길잡이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상단은 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장님이 더듬거리며 가야 할 시국에 이루게 된 것인데, 그 식량과 식수가 부족해지면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모용이라는 낭인이 중심을 잃지 않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는 않겠지만, 시간이 지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상단의 눈이 밝은이가 어렴풋이 기억에 의지해 잘못 들어선 상단을 다시 이끌고 있었지만, 앞으로의 여정이 상당기간이 남았음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물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그가 보고 있는 곳을 돌아보았고, 곧 그들은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상단주인 배춘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오아시스 덕분에 최악의 상황에서 다시 한 걸음 멀어지게 된 것이다. 다가가니 여타의 오아시스보다 그 규모는 작은 편이지만,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도 남은 규모였다.
어둠이 찾아오자 모닥불을 피워 주위를 밝히던 그들은 저마다 소량 배급된 식사를 하며 저마다 자신의 일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낭인들은 지난 몬스터들과의 충돌에서 흠이 생긴 자신의 무기들을 점검했으며, 상인들은 거래한 물건의 상태가 잘못되지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배춘만은 그런 그들을 살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곳에 오아시스라? 길을 어디서부터 잘못 들어선 것인가?’
눈이 밝은 수하의 말을 근거로 대충이나마 그린 지도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오아시스가 없어야 정상이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의 행보가 걱정스럽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을 하는데, 말없이 나무에 기대어 있던 모용이 흠칫한 모습을 보이며 허리를 튕기며 일어섰다.
그는 안색을 굳히며 저 멀리 어둠만이 자리한 어딘가를 바라보았는데, 그 모습이 심상치 않은 터라 저마다 흩어져 있던 낭인들이 자신의 무기를 쥐며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인들도 그제야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터라, 짐을 서둘러 묶고 엄폐물 뒤로 피신하였다.
잠을 자는 도롱들을 깨우며 천천히 뒤로 물러서던 하인들은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곧 저 멀리서 두 인영이 모습을 보인다.
모용은 검은 천으로 몸을 감싼 이들 중 특히 일반인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자에게서 이곳 사막의 초대형 몬스터에게서나 볼 위험한 향기를 느꼈다.
그 자신이라도 해도 상대가 가능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니, 이곳에 자리한 모든 낭인과 함께한다고 해도 이길 것으로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긴장을 감추지 못하는데, 어느새 이제 그 어둠을 뚫고 온 두 인영 중 머리 하나 작은 사내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을 꺼낸다.
“적대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이곳 샤 대륙의 사람이 아닌 백인이라 불리는 타 대륙의 사람으로, 선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자리한 덩치 큰 자는 얼굴까지 가린 채 여전히 무거운 중압감을 풍기다, 말을 꺼낸 이가 손을 젓자 이내 그 은근히 풍기던 기세를 거두어 들였다.
압박하던 기세가 거두어들이자 그 경지가 낮은 낭인들은 작게 한숨을 터뜨린다. 숨도 쉬기 힘든 압박감에 해방되어지자 저도 모르게 나타난 변화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미소를 보이던 그 사내는 말없이 그 자리에 멈추어 모용을 바라보았고, 그의 눈을 바라보던 모용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검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배춘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