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20화 (20/137)

〈 20화 〉 4. 추모의 밤은 깊어만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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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추모의 밤은 깊어만 가고(7)

트라사의 해변을 따라 주욱 늘어선 가게들은 정말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즐거운 소란을 담아내고 있다.

세상의 절반이 불길에 휩싸이고, 태양이 용의 뱃속으로 가라앉은 절망스러운 시기.

아침이 되어도 어둠이 내리깔린 창밖을 보며 혼란과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으나 이것조차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을 즈음, 아름다운 석양으로 유명한 관광지였던 트라사 역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가고 있는 중이었건만...

어째서인지 주민들은 마을을 장식하고, 노란색과 푸른색의 등불을 밝히고 대로를 말끔하게 청소해 두고, 부엌에서는 작은 불꽃을 지폈다.

그 이유라 함은 용이 내려앉은 땅을 앞둔 용사 일행의 마지막 휴식을 책임져주기 위해서다.

용사 일행은 이곳에 이틀간 머무르며 정비를 할 예정이었고, 주민들은 누군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스스로 문밖으로 나와 극진히 그들의 대접을 신경 썼다.

마을에 몇 남지도 않은 가축의 멱을 따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생선구이와 아껴둔 술을 대접했다.

마치 연회였다.

이 어두운 시기를 몰아내, 다시 하늘에 빛을 되찾아줄 용사 일행이 이미 용을 무찌른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이른 축배를 들었다.

처음에는 정중하게 거절하던 그들이었지만 마을 주민들 모두가 모여 보인 성의에 끝까지 답하지 않는 것 또한 실례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다들, 아.. 다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용사님..! 감사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자, 어서 이쪽으로 오시죠."

"레베카! 어디 가는 거야?"

"난 됐어. 휴식이라면 조용한 곳에서 하고 싶으니까."

허리까지 닿는 검보랏빛 머리칼을 무신경하게 쓸어넘기며용사의 부름에도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떠나는 마법사.

"... 저렇게 말은 해도 결국 여러분의 성의에 못이겨 여기까지 와서 돌아간 거니 너무 서운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사제님.."

"아, 무릎을 다치셨던 분이죠. 이제 불편함은 없으신가요."

"그런 것까지 기억해 주시다니..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허리가 굽은 노파가 그의 사제복을 붙잡고 늘어지며 다소 과한 감사를 전하고 있었지만, 선한 눈매를 가진 흑발의 사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

"에단..! 어서 와! 도착하자마자 주민분들 치유해 주느라 아가사랑 둘이서 바빴잖아."

"지금 갈게."

찰랑이는 고운 금발의 토끼 수인은 자신의 긴 귀를 크게 팔랑이며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진 음식들을 해맑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에단 어서 와. 음식들이 말하고 있어. 식기 전에 먹는 게 분명 맛있을 거라고 말이야."

"아가사는?"

"으음~ 저쪽 저쪽."

성찬을 앞두고 먼저 성녀를 찾은 그는 용사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곳에서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의자를 빼던 손을 놓고 그쪽으로 향한다.

"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정말..."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열심히 준비해 주시고 계신데 저도..."

"성녀님."

술이 들어있는 병을 양손으로 조심스레 들고, 테이블 위로 나르는 것을 돕고 있던 성녀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아, 에단 씨. 오셨군요. 고생 많으셨죠? 죄송해요. 도와드리겠다고 했는데.. 겨우 몇 분밖에 치유해 드리지 못하고 은총을 전부 나누어 드려서요.."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분들을 돕고 계셨던 건가요?"

"네, 맞아요."

"음... 그래도 이제 다 끝나가는 모양이네요."

척 보기에도 높은 신분처럼 보이는 의복을 입고 있는 성녀가 손수 두 팔을 걷어올리고 자신들과 함께 술병을 나르고 있자 어쩔 줄 모르는 주민들의 눈치를 살피며, 사제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 그렇죠?"

"마, 맞습니다..! 성녀님께서는 자리로 돌아가셔도 이제 남은 건 저희들끼리 충분합니다..!"

"하지만 아직 병이 저렇게나 많이..."

"네, 그럼. 주민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성녀가 들고 있던 병을 자연스레 넘겨받듯 가져간 사제는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닌 듯 능숙하게 그녀를 데리고 테이블 쪽으로 향한다.

"노아 씨.. 벌써 맛있게 드시고 계시네요. 그런데.."

"레베카라면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런가요.."

"그러니 저희라도 열심히 성의를 받아주어야 주민분들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죠?"

"네, 에단 씨 말씀이 맞아요."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가슴이 따뜻해진다.

신이 만약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왔다면, 분명 저만큼 아름다우리라, 저만큼 상냥하리라, 저만큼 남을 돌보리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아리따운 성녀님과.

그녀의 옆을 지키며 신탁과 함께 내려온 축복으로, 아픈 이들을 마르지 않는 은총으로 치유하는 선한 눈매의 사제님.

겉보기에는 조금 앳되어 보이지만, 그를 마주하고 그 기운을 느낀다면 분명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용사 다운 자신감과 기백을 가지고 있으니.

등 뒤로 교차하여 롱소드와 단검, 정확히 그 중간 정도 길이의 두 자루 검을 매고 있는 수인 용사님.

그리고, 그들을 존경을 담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수인 모녀가 있었다.

"엄마! 엄마! 저분들이 용사님과 동료님들이셔?"

짧게 자른 은회색 머리칼 위로 쫑긋 솟아오른 두 귀를 흥분한 듯 연신 움찔거리며, 복슬복슬한 꼬리까지 붕붕 휘두르고 있는 자신의 귀여운 딸을 보며 그녀는 싱긋 웃었다.

"그래, 마법사님은 잠깐 안계시는 것 같은데.. 저분들이 바로 우리들의 용사님들이셔."

"그렇구나아.. 그럼 저분들이 이제 그 나쁜 용도 물리치고, 햇님도 되찾아 주시는 거야?"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들을 대신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계시는 분들이지."

"와아...!"

밝게 웃으며 제자리에서 폴짝거리는 딸이 너무 귀여웠던지 그녀는 테이블로 나르고 있던 술병을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원래는 엄마가 용사님께 가져다드리려고 한 건데, 우리 라니아가 해주겠니?"

"응...!"

자신의 딸이 밝게 웃으며 수인 용사, 노아에게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여인.

딸이 자신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술병을 품에 안고 다가와 건네주자 처음에는 당황했다가 크게 기뻐하며 이를 받아드는 그의 두 손은, 한눈에 보기에도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굳은살과, 몇 번을 찢어지고 아문 흉터로 가득하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그들은 신의 선택을 받고 사랑하는자신의가족들과 떨어져 그 공포스러운 용과 맞서기 위해 이 먼 길을 나선 것인데, 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생각하고 결과에 대한 막연한 확신에 차있는 몇몇 이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만다.

그들이 저 노력의 증거를 꼭 두 눈으로 확인해야...

"용사님 손 진~짜 못생겼다..!"

"... 라니아!"

"하하..! 괜찮아요. 정말 귀여운 아이네요."

그래도 역시 아이의 앞에서 보여주기에는 부끄러웠는지 괜히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아 흉터를 숨기는 용사님을 보니,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고 만다.

"죄송합니다.. 라니아 너도 어서..!"

"죄송해요..."

정말 큰 실례를 저지른 것이었지만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용사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뿐이다.

"이런 작은 아이도 이렇게나 저희를 응원해 주고 있으니.. 더욱 힘내야겠어요."

아이까지 있는 자신이 보기에는 용사 일행의 이들 역시 아직은 어린 아이처럼 느껴졌기에 조금 어색하게 들렸지만 말에 담긴 고마움과 전해지는 마음의 크기는 변함없다.

분명 이 앞으로의 길 위에서 이들은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고, 겪지 않아도 될 슬픔을 겪고, 겪지 않아도 될 외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겪어야 했을 고통과 슬픔, 그리고 외로움을 이들이 전부 삼켜내줬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리고 말겠지.

그럼에도 마지막에 이들이 느끼게 될 감정이 절망과 후회가 아닌 자부심이기를 이기적으로 바라본다.

사랑스러운 딸 라니아가, 자신처럼 태양 아래 평화로운 시대에서 지낼 수 있기를 바라니까.

결국 자신 역시 모든 것을 저들의 어깨에 맡길 수밖에 없다.

간절히 바랍니다...

이들의 여정이 부디 잘 마무리되기를.

*

"..."

하지만 결국 그녀의 딸은 두 번 다시 태양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딸이 낳게 된 이 어린 소녀 역시.. 여전히 이 어두운 세상에서 힘겹게 연명하고 있다.

그 때의 조그마했던 수인 소녀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다시 만나게 된 건, 운명의 고약한 장난처럼도 느껴진다.

마지막 숨을 내쉬던 때, 그녀는 우리를 원망하고 있었을까.

"... 그런 일도 있었던가.."

트라사에 들렀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가 그자리에 있었음에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정말이지...

"후..."

금발의 토끼 수인 용사님...

그리고 흑발의 아름다운 성녀님이라...

노아와 아가사, 그 둘의 이름을 떠올리고 입에 담을 때마다 나는 익숙함을 느낀다.

그곳으로부터 파생되어오는 감정은 크나큰 동경, 안타까움, 그리움.

그리고 결코 단순하게 얽혀있지 않은 이 감정들만큼이나 커다란 미안함이다.

이 감정들로부터 계속해서 뭔가 중요한 것이 떠오르려 하지만 늘 잘되지 않는다.

마음속에 커다란 구멍이 나버려서.. 그 텅 비어버린 공간으로 아무것도 쌓이지 않고, 그대로 빠져나가 흘러내려 버리는 것처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곳에는 없는 것을 찾기 위해 나는 또다시 의미 없는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그것이 분명 내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마음의 조각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 아."

관위로 올려놓은 두 손이,

내 어깨가 가볍게 떨리고 있다.

마치 잊고 있었던 어깨 위의 짐을 다시 기억해 내라고 내게 말하고 있는 것만같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날 찾아온 짙은 안개는, 전해들은 이야기마저 내 기억으로 남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처럼..

단어 하나 하나를 흩어내고 소녀의 목소리를 흐릿하게 지워내고 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내 애원에도, 목아래로 들끓던 감정들은 거짓말처럼 진정되어간다.

"..."

"... 슬퍼 보여."

"이상하지. 어째서 슬픈지 그 이유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이렇게나 가슴이 찢어질듯 욱신거리는 걸까..

소녀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매년 이곳에 찾아왔지만 단 한 번도 이만큼의 선명한 감정의 울림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나는.."

만약 이 저주가 끝나고, 그 마지막 순간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내가 잃어버린 기억을 전부 되찾게 된다면..

그때에서야 나는 이유 있는 슬픔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일까.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슬픔에 빠지겠지만, 그 아픈 감정만큼이나 그들을 사랑했던 기억은 분명...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지 않을까?

"... 돌아가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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