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 10. 은방울꽃은 이슬을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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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은방울꽃은 이슬을 떨군다(4)
"그것은 마치.. 그래요. 성인의 숭고한 희생처럼도 보였습니다."
수장인 세레스티아가 단독 행동을 이어나가고 있었기에, 원로회가 이렇듯 밀회를 가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푸르기스 원로, 당신이 하려는 짓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겁니까?"
성인이나 숭고, 그리고 희생같은 형편 좋은 단어들을 입에 담고는 있지만 푸르기스의 목소리에는 그 어떠한 존경이나, 그에 가까운 감정조차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모르겠습니까 마티나 원로, 어머니의 나무가 그의 기운을 흡수하여 생기를 되찾는 그 모습을 저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인간 사제는 멀쩡히 제 발로 지혜의 줄기를 걸어나갔습니다. 푸르기스 원로, 정말 그는 한 번 목숨을 잃었습니까?"
"그는 무한한 은총과 더불어, 죽지 않는 신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푸르기스의 단언에 여덟 명의 원로들 모두가 일제히 심음을 삼킨다.
"..."
그도 그럴게 그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푸르기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용의 저주에 대해 들어본 바 있습니다. 그야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불로불사의 능력은 저주이겠으나.."
".. 분명 그 능력이라면.."
"....."
푸르기스는 모두가 이미 자신과 같은 판단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여기에서 더 등을 떠밀어줘야 한다는 필요성 또한 느끼고 있었다.
자긍심 높은 엘프들은 화염과 마물을 피해 지하에 숨어들어가 그 위상이 비록 예전만 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그렇기에 더더욱 하이 엘프들인 그들이 자신의 체면을 얼마나 지키려 드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엾은 어린 엘프들은 앞으로도 생명의 요람에서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되겠죠."
"..."
"저희들이 이렇게 하루하루 불안에 떨 이유도 없어질 테고요."
"....."
"뿐만 아니라, 이곳에 신세를 지고 있는 수인족들과의 약속을 깨뜨리는 일 없이 언제까지나 그들을 지키고 구해주는 길이기도 하겠지요."
다들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푸르기스는 이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의 나무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어린 엘프들과 수인들까지도 구해낼 수 있는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이 눈앞에 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망설이시는 겁니까 다들."
"푸르기스 원로."
"예, 루치아나 원로."
"... 신탁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않는군요."
신탁.
새로이 여정을 떠날 용사 일행에 대한 신탁.
사악한 용을 무찌르고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과 푸른 하늘을 가져와줄 존재.
그리고.. 에단은 그 일행의 사제였다.
하지만 푸르기스가 이를 고려하지 않았을리 없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한 번 실패하고 사명으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친 두 배반자들에게 다시 한번 모두의 미래를 맡긴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그중 한 명은 레베카 님이시죠."
"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저희가 미스텔테인을 넘겨준 것에 대한 값을 보은의 형태로 치른 것일 뿐입니다만."
"저희 라... 미스텔테인을 빌려준 것은 선대 원로회 수장님의 결정이었죠. 당시 세레스티아 님만이 유일하게 찬성하셨었고요."
그가 잘 포장하여 감춰둔 말들을 하나하나 짚어오는 루치아나 원로.
이 어느 편에도 서고 싶지 않아하는 성가신 하이 엘프가 세레스티아를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에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흐음.."
계속 이래서야 곤란하다.
지혜의 줄기로부터 금서고의 열쇠로 선택된 세레스티아가 언제나 유리한 명분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만큼. 나머지 아홉 원로의 의견은 반드시 합치되어야만 했다.
"후우.. 인정하겠습니다. 그래서 루치아나 원로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식으로 계속 발을 빼려고 하는 겁니까?"
"... 발을.. 빼려고 하다니요? 그저 이를 위해서는 세레스티아 님께 무례를 저지를 수밖에 없어 보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뿐이에요."
"이번 회의에 이렇게 참석하셔놓고도 잘도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군요."
"..."
수장인 세레스티아가 빠진 상황에서 조용히 이루어진 이 밀회에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의 제안에 관심을 보였다는 뜻이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라 함은 결국 자신들의 체면.
그렇다면 이를 해결해주는 것이 우선이었다.
푸르기스는 싱그럽게 피어나는 꽃을 닮은 따스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들을 안심시킨다.
"그 누구도 악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안심하시죠."
악인이 될 필요 없다는 그 말에 보기 드물게 원로들의 무거운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한다.
"... 그 말, 확실한 거겠죠."
"예.. 확실하고 말고요."
푸르기스의 웃고있는 얼굴 위로 소름끼칠 정도로 차가운 눈동자를 보게된 루치아나 원로는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끝내 꼬리를 내리고 말았고,
그의 입가에만족스러운미소가 더욱 진해진다.
"모든 것은.. 더 많은 생명을 지켜내기 위함입니다."
*
"뭐어... 마침 심심했으니 상관없지만 냐아~"
느긋하게 몸을 풀고 있는 아담한 체구의 고양이 수인은 자신의 건강한 갈색피부 위로 오밀조밀하게 자리잡은 잔근육을 드러내보이며 어울리지 않게 손등을 그루밍하고 있다.
뾰족한 혀끝을 날름거릴 때마다 그녀의 짧은 흰색 머리칼이 찰랑인다.
"싸움을 가르쳐달라고 한 이상 편하게 지낼 수는 없을 거라고 냐는 분명히 말했다냥."
냐아~
"읏차~ 앙리이~"
자신의 품으로 뛰어올라온 앙리를 여유롭게 받아내 안아 들고는 마구 쓰다듬어 주던 행겔은 벌써 며칠째 똑같은 모습으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바닥에 뻗어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악.. 하악...."
솔직히 말하자면 소녀에게 재능은 없었다.
"으으으... 윽.."
아니, 포기하지 않는 것도 재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 단정 지을 수는 없나.
그렇게나 나가떨어지고도 여전히 비적비적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는 소녀를 보며 헹겔은 그래도 낙법만큼은 볼만해졌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그래, 이빨 다루는 법을 알려주겠다냐."
"이빨...?"
"네가 손에 들고 있는 그걸 말하는 거다냥."
자신의 단검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실비아.
작은 체구의 소녀에게는 가장 익숙한 무기이자 부담없이 다룰 수 있는 무기였다.
"우선은 잡는 법이다냐, 상대하는 녀석의 힘이 무식하게 세거나 단단한 갑옷 따위를 입었을 때는 그야 갑옷의 틈새나 약한 관절 부위를 노리는 게 정석이지만~ 상대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고 정확히 상대의 약점을 찌르는 게 힘들다면..."
텁.
헹겔은 소녀의 반대편 손을 들어 단검을 쥔 손의 손목에 감싸듯 놓아주었다.
"우선 이렇게 손목을 보호해야 할 거다냐, 운 좋게 찔러 넣었다고 해도 상대가 곧바로 반응해서 몸을 비틀거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만으로도 네 얇은 손목은 뚝! 하고 부러져 버릴 거다냥."
"... 으응."
"그러니 단검이 갑옷 사이에 단단히 끼어버리거나 숨통을 단번에 끊지 못했는데도 미처 뽑아내지 못했다면 그냥 무기에서 손을 놓도록 해라냐."
"..."
질문이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는 실비아.
헹겔은 소녀의 그 눈동자에 괜히 기특하다는 감정이 북받쳐올랐으나 애써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친절하게도 물었다.
"궁금한 게 있는 거냥?"
"... 하지만.. 손에서 놓으면..."
빈 손바닥을 들어보이는 실비아.
소녀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았던지 헹겔은 눈매를 둥글게 휘어 웃으며 대답한다.
"냐하하~ 그런 거라면 걱정 마라냐, 보이지 않는 곳에 늘 다른 이빨들을 숨겨두는 건 당연한 거니까냥."
소녀가 두르고 있는 로브의 안쪽을 툭툭 두드려주는 헹겔.
폭신한 소파위에 슬라임처럼 녹아내려 메말라 가는 것을 즐기던 평소와는 다르게, 잘 벼려진 그 흑백의 눈동자로 소녀를 바라보며 헹겔은 손을 쭉 펼쳐보인다.
챙..!
그러자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단검들이 어느새 그녀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나란히 늘어서 나타나 있다.
"날카로운 송곳니는 한 개가 아니니까냥."
이를 드러내 웃으며 그녀는 자신의 윗니와 아랫니로 뾰족하게 돋아난 송곳니 한 쌍씩을 드러내 보인다.
마치 대단한 걸 본 것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
"응..!"
아직 덜자란 여린 송곳니를 가진 소녀였지만, 분명 앞으로 성장해 나가며 더 날카롭게 벼려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가르침을 청해온 그 날로부터 매일같이 이렇게 모질게 흙바닥을 구르게 했으니 몸 어디가 쑤시지 않은 날이 없었을 텐데도, 저 순수한 진은색 눈동자는 배움에 대한 열망과 열정이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으니까.
꼭 자신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연단될 칼날.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고 부러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만큼은 부디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무기란 단단할 수록 더 잘 부러지고 마는 법이었으니까.
"뭐어.. 사실 그런 경우에는 도망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너는 은근히 고집이 세니까냥.."
"응, 도망칠 수 없어."
"그래 그래애.."
아직까지도 이 어린 소녀에게 싸움을 가르치는 것에 내심 불안을 느끼고 있는 헹겔이었지만, 그녀의 이런 생각과는 다르게 소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존재가 선명한 형태로 보이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점점 익숙하게, 덜 아프게 넘어질 수 있게 되었고, 더 빠르게 일어나 달려들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언제든지 주변을 살피고 근처의 그 무엇이든 활용하여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항상 긴장된 새로운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그녀에게는 손끝하나 대보지도 못하고 항상 이리저리 집어던져지기만 했고,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온몸이 고통스러웠지만..
.. 이전처럼 억울하게 얻어맞고 흙바닥을 구르며 느끼던 고통과는 전혀 다른, 의미있는 성장통이라고 생각하면 그 고통조차 기분 좋게 느껴져 금방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
흙먼지투성이의 소녀에게서 그런 분명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던 헹겔은 정말 오랜만에 자신의 가슴이 달구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아... 그러엄.."
휘리리리릭...! 휘리릭! 휙!
한 손으로 단검을 쥔 그녀는 손이 베이는 것이 조금도 무섭지 않다는 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익숙하게 단검을 손에서 빙글빙글 돌려 잡으며 유려한 곡선으로 허공에 길을 만들어낸다.
곡예에 가까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빛을 반짝이는 실비아.
"이빨과 친해지기 위한 특별한 훈련을 시작해 볼까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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