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10. 은방울꽃은 이슬을 떨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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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은방울꽃은 이슬을 떨군다(5)
"오늘은 마을 구경을 시켜주겠다냐~ 뭐어.. 먹을 게 떨어져서 그런 거지만. 냐하하하."
유쾌하게 웃으며 현관문을 연 헹겔은 그렇지 않은 듯 보여도 소녀를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
지상에서 온 데다가, 오기 직전 대삼림에서는 평범하지 못한 사건까지 겪은 듯 보였다.
그렇게 여태 남모르는 불안을 내비치고 낯을 심하게 가리던 소녀였으니 만큼 익숙해지기를 기다려 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비가 조용하고 한적한 자신의 집으로 굳이 찾아온 것도 어쩌면 이 소녀를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으흠.."
아니지..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생각이 깊지는 않으려나.
순간 눈앞으로 그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 그려졌기에 지난 기억들에 대한 미화가 그리 심각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
"아무튼..!"
소녀의 눈빛이 의아함을 드러내자 그제서야 자신이현관문을 열고 가만히 서서생각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민망함에 괜히 소녀에게 어서 나오라며 손짓을 하는 헹겔.
외출하는 그녀의 차림은 여전하다.
짧은 반바지에 어디선가 굴러다니던 샌들을 신고, 상체를 감아둔 붕대와 견갑의 매듭을 단단히 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약도 필요하겠다냐."
소녀의 양쪽 손목을 붙잡아 앞으로 내밀게 한 헹겔.
열 손가락이 하나도 빠짐없이 반창고들로 빽빽하게 감겨 있는 게 보인다.
단검을 쥐는 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고 이를 전투 중에도 신속하게 바꾸는 데에 익숙해져야만 다양한 공격 방식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대응능력에도 차이가 나는데..
이를 위한 연습에서 소녀는 놀랍게도 열 손가락을 모두 칼날에 베여버렸다.
어디 하나 잘려나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지경이다.
"흐냐앙.."
절망적인 재능에 놀라는 것도 잠시였고, 열 손가락을 모두 베여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연습을 계속하려는 소녀에게는 더 놀라서 어제의 연습은 그걸로 마쳤다.
".. 마을에는 수인들 밖에 없어서 불편하지는 않을 거다냐."
"... 응."
소녀는 기대와 긴장이 함께 느껴지는 눈빛으로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에게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에 내심 안심하여 붙잡고 있던 손목을 이끌고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려던 차였다.
"... 아.."
하지만 현관 앞에서 어째서인지 멈춰 서는 소녀.
조금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고 헹겔이 그 이유를 물으려 하자, 흔치않게도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들.. 있었어."
"... 아이들..? 아, 그렇지. 네 또래라면 아마 없겠지만 얼마전에 꼬맹이들이 몇 태어났다냥."
"나, 가져올게 있어."
"...?"
헹겔이 손목을 놓아주자마자 방안으로 오도도 뛰어간 소녀는, 배낭을 뒤져 그 안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주머니는 뭐냥?"
"아이들한테.. 주고 싶어서..."
"킁킁.. 어엄청~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가 난다냐아..."
툭 툭..
냄새에 홀려 고개를 들이미는 헹겔과, 어느새 가까이 와서 자신의 발목에 고개를 툭툭 부딪히고 있는 앙리를 보았지만, 소녀는 아쉽게도 주머니를 꼭 움켜쥐었다.
"안돼. 조금밖에, 없으니까..."
"아, 아무리 냐라도 애들 줄 걸 뺏어 먹지는 않는다냥. 그냥 냄새가 좋아서.. 냐하.. 맡고 있던 것뿐이다냐."
민망함에 가까이 다가온 앙리를 품에 들어안은 헹겔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에잇, 어서 가자냥!"
"응..!"
세계수와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헹겔의 오두막집에서 구불구불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가자, 성실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넓은 밭과 과일나무들이 싱그럽게 늘어서 있다.
이미 몇 번 식탁 위에서 본 적 있을 살이 통통하게 오른 닭과 돼지들의 우리에도 평온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 보인다.
올 때는 이비의 전이를 통해 도착했기 때문에 처음 보게 된 풍경이었던 만큼 쉴새없이 고개를 돌리며 주변의 모습들을 눈에 담고 있는 소녀.
그런 소녀를 보며 일부러 발걸음을 늦춰주는 헹겔은 앞서가려는 앙리를 능숙하게 붙잡아 다시 품 속에 가둔다.
"냐아아~"
두 고양이와 어린 늑대는 그렇게 평소보다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수인들의 주거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라, 헹겔님 어서 오세요. 정말 오랜만에 찾아오셨네요. 혹시 어딘가 다치시거나 그런 건 아니죠?"
"내가 다친 건 아니다냐, 다친 건 이쪽. 상처가 빨리 아무는 연고랑 소독약 좀 달라고 하려고 온 거다냥."
"그랬군요.. 이렇게나 사랑스러운 아이가... 어쩌다가 다친 걸까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녀를 살피던 사슴 수인은 이내 헹겔에게로 고개를 돌려 눈치를 주기 시작한다.
아이가 다치는 걸 두고보기만 했냐는 무언의 질책이었다.
"... 으겍."
하지만 정작 소녀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사슴 수인 여성의 머리 위로 난 뿔에 다양한 장식들이매달려 있는 게신기했던지 그쪽으로 온통 관심이 쏠려있었다.
"아, 이게 궁금한 거니?"
짤랑 짤랑
여성이 좌우로 고개를 슬쩍 흔들자 장식과 뿔이 부딪혀 맑은 소리를 내고 여러 방향으로 회전하며 다양한 각도로 반사된 빛을 흩뿌린다.
"나는 이 마을의 의사인 라챤코 라고 한단다, 수인들이야 언제나 건강하지만 아이들은 가끔씩 아플 때가 있거든.. 약이나 주사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이런 장식들을 달아놓은 거야."
"으응... 예뻐."
"어머~ 고마워라. 연고랑 소독약이라고 했지? 금방 가져다줄게."
마치 자신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어 부끄럽다는 것처럼 볼에 한 쪽 손을 가져다 대고 유난을 떠는 라챤코를 보며 코웃음을 치는 헹겔.
"네 머리의 그 정신사냐운 장식들이 예쁘다는 거다냥."
"어디 어디, 여기 연고랑.. 소독약을 내가 어디에 뒀더라?"
이를 가볍게 무시하고는 약병들 사이를 살피는 그녀를 보면, 헹겔은 수인들의 대표였지만 엘프들의 원로와는 달리 이들에게 그리 어려운 존재로 서 있지는 않은듯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앙리는 요새 괜찮아요?"
소독약을 찾았는지 이내 작은 약병 하나를 들고 몸을 일으킨 라챤코는 헹겔의 품에 얌전히 안겨있는 앙리를 보며 안부를 묻는다.
"괜찮아졌다냐. 그 때 준 약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냥."
"그거 잘 됐네요. 헹겔님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아이라고 들었으니까요."
"뭐어.. 그렇다냥."
"으후후.. 샤샤 씨의 집에서 도망친 아기 고양이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헹겔님의 집까지 가있을 줄은.. 모두가 깜짝 놀랐었죠."
그렇게 한참 대화를 주고받던 둘의 사이로 문득 의문 섞인 목소리가 작게 끼어든다.
"어..?"
이에 고개를 돌린 둘의 시선은 목소리가 들려온 한곳으로 동시에 향한다.
"...?"
"왜 그러니?"
그건 다름 아닌 실비아.
그리고 소녀의 의문은 첫날로부터 이어진 오해에 대한 것이었다.
"앙리... 먹을 거 아니었어?"
그녀의 질문에 셋 사이에는 잠시 필연적인 침묵이 맴돈다.
"...!"
"아.. 앙리는 먹는 게 아니다냥..!"
웃고있던 그 얼굴 그대로 하얗게 굳어져 버린 라챤코와, 펄쩍 뛰며 꼬리를 위아래로 흔드는 헹겔.
"지금까지 그런 시선으로 냐랑 앙리를 본 거냥..?!
"응... 안타깝다고, 생각했어."
"냐아.. 냐는 앙리를 엄청 좋아한다냥! 절대 잡아먹거나 하지 않을 거다냥..!"
쿵 쿵 쿵
흥분한 헹겔의 꼬리가 마룻바닥을 때리며 소리를 내고, 머리와 귀의 털이 삐죽삐죽 곤두선다.
"... 지상의 이들은 먹을 게 없어서 서로를 잡아먹기도 한다니까요. 기르는 고양이를 잡아먹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겠네요.."
씁쓸한 표정으로 이비의 머리를 쓰다듬는 라챤코의 침착한 대응 덕분에 헹겔은 금방 진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흐냐... 흐냐아아.."
"그렇구나.. 미안..."
"아, 아니다냐.. 네가 사과할 건 아니다냥. 아무튼 내가 앙리를 잡아먹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냐."
"응.."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는 실비아.
그런 소녀의 어깨를 라챤코가 상냥하게 다독여 준다.
"이 아이도 안타깝다고 생각했다는 걸 보면, 앙리를 귀엽게 여겨준 거겠죠."
"그랬지.. 냥.."
앙리와 성실하게도 놀아주던 소녀를 봤으면서도 성급하게 행동해 단번에 감정의 골이 생겨날 뻔했다.
"자, 여기 연고랑 소독약이에요. 너도 앞으로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렴."
"응.. 조심할게."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무사히 연고와 소독약을 얻어 마을의 약방을 나온 둘 사이에는 다행히 어색한 기류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귀여운 앙리를 먹을 걸로 생각할 수 있다는 시점에서 지상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 것 같다냐.. 오늘부터는 자기 전에 대화재 이전의 상식에 대해서도 알려주겠다냥."
"응, 고마워.."
소녀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재차 안심하게 된 헹겔은 이제서야 창고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저어기 멀리 보이는 곳이 식료품 창고, 잘 길러낸 먹을 것들을 보관하고 받을 수 있는 곳이다냥."
"먹을걸.. 받는곳?"
"그렇다냐, 세계수의 생명이 깃든 흙에서는 뭐든 쑥쑥 잘 자라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부족함 없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냥."
"... 와아.."
트라사에서 살아온 소녀에게는 이야기만 들어서는 상상이 되질 않았기에,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그중 반은 엘프들에게 넘겨야 하지만.. 뭐, 굶는 수인들은 없으니까냥."
살아갈 토지를 제공해 준 만큼, 수인들이 일해 키워낸 식자재들의 그 절반을 엘프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언뜻 주인을 위해 일하는 노예처럼 보일지도 몰라도, 살아갈 터전을 제공받았으니 이에 신체능력이 뛰어난 수인들이 노동으로 보답하는 것뿐이었다.
"아, 헹겔님! 안녕하세요. 지상에서 온 랑족 아이가 있다고 피피에게 들었는데, 헹겔님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나보네요."
길을 따라걷던 도중,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 마주친 것은 이상할만큼이나 고양이 냄새가 진하게 나는 곰 수인 여성이었다.
"샤샤? 오랜만이다냐~ 네 딸은 어디에 있냥? 실비아가 아까 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냐."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나는 주머니를 손가락 끝으로 쿡쿡 찌르며 아이들의 행방을 묻는 헹겔.
실비아라는 이름에 생소함을 느낀 수인 여성의 시선은 곧 그녀의 옆에 멀뚱히 서있던 소녀에게 닿는다.
"두 시간쯤 전에 밥 먹고 아이들이랑 놀러나갔어요. 아마 창고 뒤 공터나 마을 주변에 있을 텐데. 그리고.. 음~ 맛있는 냄새, 이건 쿠키인가 보구나? 우후후 고마워라."
"여기 샤샤도 빵이랑 쿠키를 엄청 잘 만든다냐, 창고에 다녀오는 길에 한 번 더 들르면 분명 맛있는 걸 준비해 놓을 거다냥."
마치 당연히 그렇게 해줄 거라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뻔뻔한 헹겔을 보면서도 그저 익숙하다는 듯이 웃은 곰 수인 여성은 알겠다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후한 덩치와 머리 위로 둥글게 나있는 귀에 어울리는 포근한 미소다.
"마침 오늘은 피피가 좋아하는 머핀을 하고 있었거든요. 느긋하게 걷고 오시면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냐하하, 기대하고 있겠다냥. 응, 그러니까.. 실비아가 기대하고 있다냐."
"우후후.. 그래요 그래요. 어서 다녀오세요."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미처 만끽할 수 없었던 평화로운 분위기의 마을.
부족함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마을 사람들의 후한 인심과 미소는 소녀의 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마치 꿈을 꾸는 것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냐하.."
풀려가는 실비아의 얼굴을 보며 데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한 헹겔은 이번에는 창고 안의 가득 쌓인 식자재를 보여줘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분명 좋아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지난번에는 앙리가..."
"..."
"... 정말 깜짝 놀랐다냥."
그렇게 헹겔의 마을 소개와, 주로 앙리가 친 사고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창고를 향해 즐겁게 걸어가고 있던 도중이었다.
"... 킁킁."
창고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실비아는 문득 맡게 된 익숙한 냄새에 발걸음을 멈췄다.
"응..? 왜 그러냥?"
".. 익숙한 냄새가... 나서.."
.. 에단의 냄새.
헹겔은 아직 분간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와 비교적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소녀는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를 따라다니는..이 미약하게 섞인 어두침침한 냄새는 틀림없었다.
"킁킁.. 가까워..."
그리고 그의 흔적은 가까워진 창고 주변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이곳에 있었다는 의미였다.
"에단.."
헹겔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먼저 달려나간 실비아는 그 냄새가 이어진 방향을 따라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하지만 헹겔에게 강해지는 법을 배우고 있는 지금이라면, 왜인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창고 뒤편에 가까워질수록 짙어지는 그의 냄새에 확신을 가지며, 발걸음을 늦추지 않은 소녀가 막 모퉁이를 지났을 때였다.
도도도...
도도..
..
확신을 가지고 달려가던 소녀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진다.
.....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온 길이 사실은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이의 늪이었던 것처럼.
....
...
느려지던 소녀의 발걸음은 끝내 멈춰서고야 만다.
".. 아."
소녀의 작은 폐가, 생기 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다.
창고 뒤편의 어두운 그늘 아래에서 불어온 서늘한 바람과도 비슷하다.
요람의 천장과, 조명으로 가공되어 주변에 늘어선 수정이 반짝거리며 길을 비추고 있었지만
깜빡.
깜빡.
이 넓은 공터에서만큼은 그 빛이 불안하게 깜빡거리고 있다.
잠시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고.
빛을 깜빡이다..
다시 어두워진다.
"실비아? 어딜 그렇게 급하게..."
그리고 다시 밝아진다.
실비아를 보고 늦추어졌던 헹겔의 발걸음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시 빨라져 그대로 소녀를 지나친다.
"..."
아이들이다.
어린아이들.
그들의 사이에는 가지고 놀던 것으로 보이는 헝겊으로 된 공 하나가 외로이 나뒹굴고 있고,
그 주변으로 아이들은 말없이 그 작은 몸을 누이고 있다.
바람이 불어온다.
서늘한 바람이.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아이들을 그냥 지나쳐 이곳으로 향한다.
"..."
아이들의 입밖으로 내밀어진 혀를 따라 침 섞인 거품이 지저분하게 흐르고, 핏줄이 터질 정도로 충혈된 눈동자는 뒤집혀 있다.
선명한 손자국으로 새파랗게 멍들어있는 그들의 목에 시선이 닿는다.
"실비아 눈 감아..!!!"
괴로움에 몸부림친 흔적이 차마 눈을 감지 못한 그 앳된 얼굴에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자신이 서있는 이곳과 저곳은 마치 격리되어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아니, 오히려 저쪽이 자신의 평생과는 익숙한 세상의 분위기이다.
헹겔이 무어라 소리쳤지만,
소녀의 멈춰있던 발걸음은 천천히 그들에게로 가까워진다.
"실비아..!! 오지마..! 오지 말라니까...!!"
... 냄새는 점차 선명해진다.
현실의 감각을 거짓이 침범해 들어온다.
거짓인지 진실인지 사실 분간할 수 없지만.
거짓으로 믿고 싶기에 그렇게 느낀다.
툭.
두구르르르...
"...... 아아.."
발끝에 걸린 무언가가 굴러가는 소리에, 문득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낡은 헝겊으로 된 공이 무심히 굴러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먹먹하던 귀가 이제서야 되돌아온다.
"실비아...!!"
툭..
들고 있던 자루가 힘없이 떨어져 벌어진 입구로 쿠키들을 쏟아낸다.
산산이 부서진 쿠키조각이 차가운 흙바닥 위로 나뒹군다.
그게 소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