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66화 (66/137)

〈 66화 〉 11. 불신과 맹신

* * *

11.불신과 맹신(1)

"이곳은.. 여전히 역겨운 냄새로 가득하군요."

쯧.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그의 반감을 선명하게 담아내고 있다.

"... 정화가, 절실해 보이는 장소입니다."

높은 하늘에서 남모르게 불어드는 바람 소리와, 그 강한 바람결로 검붉은 로브가 펄럭이는 소리에 앳된 소년의 목소리는 금방 흩어져 묻혀버리고 만다.

결계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해 보이는 바실리카.

주변으로 내리깔린 평온한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어긋남을 추구하는 저 모습에 구역질이 난다.

자신들이 숭배하는 성스러운 태양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이들.

저들이 과연 진실을 깨달을 수 있을지,

만약 진실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저들의 미련함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한심하고도, 안타깝다.

"..."

마침, 그들의 미련함을 한데 모아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성양구가 떠오르는 걸 내려다보던 괴인은 이내 자신의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어 가볍게 손짓해 보였다.

화르르륵.

그러자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부터 피어오른 불꽃은 이에 그치지 않고 두껍고 커다란 책의 형상을 이룬다.

촤라라라라락.

괴인의 신장의 절반은 될 법한 크기의 책은 그의 손짓에 따라 자유자재로 펼쳐진다.

대부분이 그을리고 불씨가 남아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는 이 책을 제대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지만, 주르륵 익숙하게 책장을 넘기다 어느 한곳에서 멈춰 선 그는 손가락으로 짚은 곳으로부터 아래로 유심히 읽어내린다.

그곳에 일렁이고 있는 단어들은 엘프, 세계수.

그리고... 모르부스.

어떤 의미를 읽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괴인은 그가 보게 된 내용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지 작게 한숨을 내쉰다.

"후.. 놓친 건가."

탁!

화르르륵..!

책장을 덮고 불씨 섞인 잿더미로 되돌려보낸 괴인은 바람을 타고 멀리 흩어져가는 재를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고상한 지렁이들의 땅굴 속에서.. 결국 불의 계약은 이행될 테지만, 이래서야... 시련의 조건이 성립되지 않을까 우려되는군요."

*

"으윽... 큭..!"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을 받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취한 행동은 내 목을 움켜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손은 끝내 목에 닿지 못한다.

철컹..! 쩔그렁...!

이 답답한 저항감.

손목에 씌워진 무겁고 단단한 쇳덩이의 감촉에, 방금 들은 철성이 어디에서 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손목뿐만이 아니었다.

두 발목에도 묵직하고 서늘한 쇠의 감촉이 전해져 온다.

"허억... 헉..."

족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제 막 돌아와 차오르는 숨을 억지로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쉽사리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암살?

납치?

철그렁..!

가깝게 울리는 쇳소리..

칠흙같은 어둠으로 주변이 보이지도 않았던 만큼, 어딘지 모를 좁고 어두운 장소에 결박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는 더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녀의 관...

관은 어디에 있지..?

신체의 자유를 빼앗긴 데다 어둠이 주는 불안감에 더해, 문득 그녀의 관이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남겨졌다는 사실까지 떠오르자 감정은 더욱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 사슬이.. 그야 쉽게 풀리지는 않겠지만...

하지만.

"... 윽..!"

먼저 신성한 기운을 통해 주변을 밝혀보려 했지만, 이에 대한 대비책은 준비되어 있었는지 힘을 내려고 할 때마다 손목과 발목의 속박을 통해 힘이 분산되어 사슬을 타고 흘러나가 버리는 게 느껴진다.

특수한 마법부여가 되어있는 족쇄임에 틀림없다.

이대로라면 신체의 강화는 커녕, 주변을 볼 수조차 없었다.

현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없다는 의미였다.

"..."

어지럽고 지끈거리는 머리에도 나는 정신이 끊어지기 직전의 상황을 기억해내기를 강요했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 공격을 받았지?

분명..

깨어나자마자 내가 목을 움켜쥐려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 아."

날카로운 칼날이 목을 가로로 긋고 지나가는 감촉과,

뜨거운 피가 모조리 흘러넘치려던 그 위태로운 느낌을 내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헹겔."

수인족의 대표, 고양이 수인인 그녀가 나를 공격한 범인이었다.

그녀는 그저 내 이름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 에단?'

형식적으로 내 신상을 확인하는 그 차가운 목소리에 내가 반응하여 뒤돌아 보았을 때, 나는 어둠 속에서 스산한 빛을 흩뿌리고 있는 두 눈동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 직후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입을 다물고 내게 달려들어 양손에 쥔 단검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살기에 내 몸도 무의식 중에 반응해 그녀를 막아서려 했으나, 아직 은총을 채 끌어올리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는 건 힘들었고, 결국 나는 온몸을 난도질당한 끝에 목이 베어지고 말았다.

'죽어버려.'

내 목을 베어내던 그 순간, 정면에서 나를 노려보던 헹겔의 그 서로 다른 흑백의 눈동자에는 착각할 여지없는 분노와 증오로 가득차 있었다.

실비아를 돌보고 있었을 그녀가 어째서 엘프들의 영역까지 침입하여 나를 공격했는지, 그런 감정을 품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또한 지금 나를 구속하고 있는 게 헹겔, 그녀라면 나는 이를 먼저 알아내야할 필요가 있다.

"... 후우.."

당연히 머리가 깨질듯 아파왔지만, 나는 상황을 기억해내기 위해 계속해서 억지로 머리를 쥐어짰다.

내가 공격당한 장소는... 외딴 지하 호숫가에 위치한 이비의 거처.

세계수와의 두 번째 만남 이후 단순히 은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정화의 신성문을 통해 한층 어려워진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세계수는 더 이상 나를 그 어둠 속에서 건져내주지 않았고...

따라서 이전만큼 일찍 깨어날 수 없었던 나는시체에 더 가까운 내 육체를 항상 세레스티아의 침실에 두는 것도, 막상 일어났을 때에 그녀의 지나친 돌봄과 걱정 어린 시선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웠기에 내가 쓰러지면 이비의 거처로 옮겨달라고 내 쪽에서 먼저 부탁을 했다.

그렇게... 4일.. 아니, 5일째가 되던 날,

밑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여전히 세계수의 정화를 위해 몸을 혹사시키다 또 다시 허무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 내가 막 정신을 차렸을 때였다.

보통 내가 일어날 때쯤이면 이비는 당일 연구에 필요한 것들을 옆에 몽땅 지저분하게 쌓아둔 채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등불 하나 켜져 있지 않고 인기척 또한 없었다.

아니지.. 오늘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를 모르니...

"... 제길."

어쨌든, 내가 공격받아야 했던 이유에 대해 그 단서를 찾기 위해 지난 행적을 되돌아보았지만 크게 짚이는 곳은 없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인과관계에 어색함이 있다.

그러다 문득.

잠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단순히..

"..."

...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헹겔을 그리 오래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비와 실비아를 대하는 태도에서 이번처럼 무작정 누군가를 공격할 만한 인물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런 그녀의 분노는 분명히 나를 향하고 있었으니 누군가의 명령이나 억압에서 이루어진 행동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나 자신이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철그렁.. 철겅... 철걱, 철겅...

불안과 불신으로 속박되어있는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한다.

'그 때와 비슷한 악몽.'

'우두커니 서서 이비를 노려보고 있었던 나 자신.'

'헹겔의 그 눈동자.'

'.. 평소와는 다르게조용했던 집안.'

"... 이비."

이비, 이비는 괜찮은 건가..?

"설마.. 나는, 또 다시 바실리카에서처럼..."

철컥! 끄극!! 끼기기기기긱..!

"...!!"

쇠가 긁혀나가는 불쾌한 소음과 함께, 검은 시야의 틈이 벌어지면서 세로로 이어진 하얀 실선이 급격하게 덩치를 불린다.

­ 철컹!!!

이 암실의 문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새까만 어둠 속에 눈이 익숙해져 있던 터라, 눈이 멀 것 같은 그 빛에 나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게 되었다.

터벅. 터벅. 터벅.

보이지 않는 시야로 인해 가까워지는 발소리만을 들을 수 있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다.

적어도 둘, 게다가 그 뒤로는 더 많은 인기척이 늘어서 있다.

".. 당신들은.. 누구지?"

내 질문에 상대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뻐억!!

"컥...?!"

".. 역겨운 놈."

폭력과 함께 욕설이 대답대신 날아왔을 뿐이다.

턱뼈가 어긋나 부서지는 후끈한 느낌과 함께 부러진 이빨이 입안에 머문다.

"끄윽.. 쿨럭..!"

투두둑. 뚝..

.. 투둑.

입안에 고인 피를 흘리듯 겨우 뱉어내자 부러진 이빨이 바닥에 부딪혀 소리를 낸다.

"... 네게 입을 열 자격은 없다."

겨우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성소 앞을 지키던 무장한 엘프들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치 못볼 것을 봤다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는 그들.

"너는 이대로 원로 재판에 회부될 거다."

"... 뭐..? 어째서?"

"하.. 어째서? 방금 어째서라고 했나?"

뻐억!! 뻑!!!

"컥! 커헉...!"

안면에 이어, 가슴께에도 사정없이 틀어박히는 발길질.

이내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고 당겨올리는 느낌을 받고 핏줄이 터진 붉고 희미한 시야 속에서 겨우 초점을 잡았다.

"네놈처럼 인간이기를 포기한 괴물에게조차 원로 재판의 절차가 거쳐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윽...!"

신경질적으로 놓은 머리채에 이제서야 몸을 늘어뜨릴 수 있었던 나는 부러진 것같은 목에, 시선만을 간신히 위로 끌어올렸다.

"..."

나를 내려다 보는 그들의 눈빛에 담겨있는 것은.. 헹겔의 그것과 별반 다름없는 경멸의 감정들이다.

내겐 익숙한 시선들이었던 만큼 이게 연기나 거짓이 아니라는 것 또한 금방 알 수 있다.

내가 상정한 최악의 상황에 대해..이를 뒷받침하는 정황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하자 마음 속으로 까맣게 불이 번져간다.

대체..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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