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11. 불신과 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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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불신과 맹신(2)
"안돼...!!! 안돼애애애애!!!!!!!"
넓은 공터에서 처량하게 찢어져가는 여성의 비명 소리.
"아흐아아.. 피피... 이 불쌍한 것... 아아... 아아악...!! 아아아아악!!!"
목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르며 뚝뚝 끊어지는 절규를 듣고소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손목을 꽉 붙잡고 있는 헹겔의 뒷모습을 보았다.
자신의 시야를 가려주기 위해..
아니, 다른 이들로부터 자신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부족할 것 없고,
도망칠 곳도 없는 이곳에서,
그것도 모두가 깨어있는 평화로운 때의 마을 한가운데에서 누구 하나 막지 못하고 벌어지고만 끔찍한 일에,
하나 둘 소식을 듣고 맨발로 달려온 아이들의 부모가 오열하는 모습을 모두가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아니.. 아니야... 아니야. 넌 아니야.. 그렇지?"
헹겔의 목소리는 불안한 것처럼 떨리고 있다.
무슨 대답을 바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홀로 중얼거리며 그녀는 연신 고개를 젓고, 또 끄덕이고 있다.
"잠시, 잠시만요! 비켜주세요..!"
마찬가지로 소식을 전해 듣고 창고 뒤의 공터로 황급히 달려온 라챤코 역시 몰려든 인파를 헤치고 들어가 구할 수 있는 아이를 찾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이 참혹한 현장을 살폈지만.
이제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아이들은 이미 모두가 하나같이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아아... 아.. 누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처럼 위태로이 흔들리고 있는 연갈색 눈동자는... 이내 헹겔에게로 가 닿는다.
"헹겔 님.."
그 목소리에, 소란에 몰려든 수인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헹겔에게로 모여든다.
".. 가장 먼저 발견하셨다면서요."
"....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낮게 깔린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는 끝내 말끝을 떨었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감정들을 눌러 담고 있는지를 느낀 라챤코는 조용히 입을 다문다.
"..."
하지만..
"... 그놈이야.. 그놈 짓이라고."
같은 수인인 자신들은 물론이고, 아무리 재수 없는 엘프들조차도 이런 일을 벌일 리는 없다고 생각한 끝에 마음속으로 다다른 그들의 결론은 각자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정신 나간 인간 놈의 짓이 틀림없어..!!"
"그, 그래...!! 처음 나타났을 때도 불길하게 피칠갑을 하고 있었지."
".. 누가 그놈을 데려왔지?"
"누가?"
현장에 남은 증거라고는 아이들의 목둘레에 선명하게 새겨진 시퍼런 손자국뿐이었지만,
그들은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벗어던지기 위해서인지, 타인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의미 없는 논쟁을 끊임없이 이어나가고 있다.
"다들 조용히...! 흥분하지 마세요! 아직 밝혀진 건아무것도없어요...!"
그런 논쟁조차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을 좀먹는 것임을 아는 라챤코가 굳이 나서서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헹겔에게 향한 샤샤의 울음 섞인 물음에 점차 분위기는 살벌해져만 간다.
"헹겔 님... 헹겔 님.. 말씀해 주세요... 어째서.. 잠깐 놀러갔다 오겠다던 제 아이가.. 피피가... 이렇게 잔인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는지.. 제발... 제발....."
자식을 잃은 어미는 의지할 마음의 기둥을 잃고, 헹겔에게 이 가슴이 찢어지는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주기를 바라온다.
"..."
그러나 헹겔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고뇌로 가득 차 지끈거리는 두통이 되어 흘러넘치고 있는 중이었다.
실비아는 그 남자의 냄새를 좇아 여기로 왔고.
그리고 이곳에 아이들이.. 죽어있었다.
같은 일행인 소녀가 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으면 했지, 불리해질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만큼, 모든 정황은 이 끔찍한 짓을 저지른 범인을 지목해 오고 있다.
무엇보다.. 아무런 죄도 없는 이 어린아이들을 하나같이 목을 직접 졸라 죽인 데에 이유라는 게 있을 리 없다.
광인이 아니고서야...
그래..
광인이 아니고서야....
"헹겔 님...! 피피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만 했나요.. 이 밝고 순수했던 아이가.. 어째서.."
"..."
"뭐라도 말해 주세요 네? 헹겔님.. 제발..... 제발.."
"... 샤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환하게 웃으며 머핀을 준비해 두겠다고 말하던 그녀가 이토록 헤어나오기 힘든 절망에 빠져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을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헹겔은 주저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장 처음으로 소녀와 함께 이곳에 벌어진 참상을 목격한 헹겔의 말은, 수인들의 대표라는 이름까지 더해져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사건을 파헤치는 것, 자신이 보고 겪은 것들을 그들에게 숨김없이 이야기해 주는 것
어느 쪽을 고르든..그 결과 자체에는 변함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으로 아이들을 발견한 건... 실비아야. 곧바로 뒤쫓아 간 나도 아이들을 발견했고.. 그리고 그땐 이미 아이들은 모두.. 숨을 쉬지 않고 있었어."
"..."
무채색으로 난잡하게 뒤얽히던 그들의 시선은, 한순간에 어둡게 물들어 간다.
헹겔의 등 뒤에 숨어있던 소녀는 그 까만 시선들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끼고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실비아는 자신의 일행인 에단의 냄새를 이곳에서 맡았다고 했어."
결국 헹겔은 말해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언젠가는 말해야 했던 것이었지만, 이렇게나 속에 찜찜한 무언가가 남는 이유는 자신의 등 뒤에서 떨고 있는 어린 소녀 때문이리라.
".. 그놈이... 역시 그놈이...!!"
"저.. 아까 봤습니다.. 사제복을 입은 수상한 자가 창고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어서.."
"뭐라고..?!"
"새.. 생소한 차림이기도 했고, 그래서 이번에 찾아온 외부인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정말... 죄송합니다.."
창고에서 일을 하는 젊은 수인 남성 하나가 벌벌 떨며 성급한 사과를 입에 담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금은 이미 더 커다란 과녁이 그들의 마음속에 떠올라 있는 상황이었다.
수많은 억측이 난무하고, 점차 이야기는 부서진 수레바퀴가 내리막길을 굴러떨어져 내리며 스스로 제 몸을 깎아 먹는 것과 비슷하게 지저분한 흙더미를 온통 묻혀 오기 시작했다.
"그놈을 지금 엘프들이 데리고 있다고요? 보호라도 해주고 있는 겁니까...!!"
"처음에 그놈을 데리고 온 것도 그 기분 나쁜 엘프 아니었습니까? 매일같이 아이들에게 친한 척 굴던 그.."
"어쩐지 엘프 주제에 수상하게도 가까이 다가온다 싶더라니...!"
"잠깐, 헹겔 님? 등 뒤에 그 녀석.. 그놈의 일행 아닙니까? 왜 헹겔님이 그 놈의 일행을 데리고 계신 겁니까..?"
"진정하세요..!! 여러분 진정하세요! 그가 아이들을 죽인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미 마음속으로 아이들을 죽인 범인이 누구라고 단정지어버린 그들에게 라챤코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모두가 깨어 있는 시간에, 마을 한가운데에서 이 죄 없고 불쌍한 아이들을 목졸라 죽일만한 광인이 요람 안에 그놈 밖에 더 있습니까?!"
"죄 없는 아이들이 불쌍하게 죽었는데, 라챤코님은 지금 그 자식의 편을 들어주기라도 하려는 겁니까 뭡니까?"
"아, 아뇨..! 저는 편을 들려는 게 아니라...!"
"허억.. 헉... 헉.."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려 온몸을 적시고,
숨은 목 근처에서 가쁘게 차오른다.
소녀는...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그들의 검은 시선이 점차 붉게 물들어 분노라는 감정으로 변해 불쾌하게 일렁여 오기 시작하자, 가슴께가 꽉 막혀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만큼의 답답함과 두려움에 자신의 목을 붙잡고야 말았다.
그들의 시선이.. 소녀의 목을서서히조여들고 있었다.
그런 고통스러운 가운데, 어떻게든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소녀의 앞에 놓인 것은
"너..."
소녀를 똑바로 향하고 있는 샤샤의 시선이었다.
자신을 향하는 그 차가운 눈빛에 담긴 커다란 증오와 원망을 느낀 소녀는 그대로 굳어져 버리고 만다.
그 부드러웠던 눈동자가...
이렇게나 돌변하여 시리게 가슴을 도려내자 소녀는 그대로 도망치려 했지만, 헹겔의 손에 붙잡혀 있어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
"샤샤..?"
뒤늦게 그녀의 시선이 실비아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눈치챈 헹겔이 그녀를 불렀지만.. 그 눈빛에 담긴 원색적인 감정은 변함없이 소녀를 향하고 있다.
"... 헹겔 님. 이 아이가.. 그 남자와 함께 온 일행이죠."
"잠깐, 샤샤. 실비아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 어린아이를 그런 식으로 쳐다보는 건 그만둬."
".. 그걸 헹겔님은 어떻게 확신하시는 건데요!!"
"..."
결국 한 번 목소리를 높이고 나서야, 머리에 찬물이 부어진 것처럼 핏발 선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바닥으로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샤샤를 보며, 헹겔은 그녀에게 뭐라고 더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 자신은 상상도 할 수 없을뿐더러... 그녀의 원래 성격을 알고 있던 만큼, 지금 이렇듯 돌변한 그녀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이 안타깝게만 느껴져 왔기 때문이었다.
"... 죄송해요.. 지금 저는.. 전..."
"아니야.. 괜찮으니까..."
웅성 웅성...
"잠시만 지나가겠습니다, 수인 주민 여러분.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뒤늦게 소란을 듣고, 낮은 돌담을 지키던 엘프 경비들 몇몇 역시도 이곳을 찾아왔다.
"다들... 이게 무슨 소란이죠?"
"발레리, 잠깐만.. 다들... 눈빛이.."
소란 속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엘프 중 하나가 그들의 시선이 몹시 흉흉하게 달아올라 있음을 눈치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인파는 하나의 벽이 되어 그들을 가두고, 중앙으로 그들을 몰아세우고 있다.
"이제서야 나타나다니... 그놈은 엘프들의 영역에 있다고 들었는데."
"예..? 그게 무슨...."
"그 미치광이 사제 놈 말이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외부인이라면 한동안 저희들은 보지 못했.."
".. 모르는 척하려는 거냐? 네놈들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챙!
"그런 게 아니에요! 뭡니까! 갑작스럽게 공격을 해오시다니...!"
결국은 참을성 부족한 수인 하나가 엘프 경비 하나를 공격해, 손과 장병기가 맞닿아 묵직한 철성을 내고 나서야 헹겔은 소녀의 손목을 놓고 떠밀리듯 앞으로 나섰다.
"다들 그만..!!!!"
힘이 가득 담긴 헹겔의 목소리가 공터를 쩌렁쩌렁 울리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모두의 행동이 잠시 동안 멎는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해진 가운데, 이어진 헹겔의 말에는 그다지.. 힘이 담겨있지는 않았다.
"다들... 그만해. 아이들이.. 듣고 있잖아...."
"....."
"내가.. 내가 해결할 테니까."
"수인... 아이들이.."
뒤늦게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을 발견하고 숨을 죽이는 엘프 경비들과, 그런 시선조차 힘겨운 것처럼 아이를 품속으로 더 깊이 끌어안는 부모들을 보며,
공터의 분위기는 숙연해져.. 숨이 끊어지고도 한참을 부릅뜨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눈을 소란스럽지 않은 가운데 감겨줄 수 있었다.
"라챤코, 아이들을 묻기 전에.. 직접적인 사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해. 네게 맡길게. 너 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어."
끄덕.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라챤코의 두 뿔에 달린 정신 사나운 장식들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울하게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헹겔은 그녀로부터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사과를 건넸다.
"... 가슴 아픈 일을 시켜서 미안."
"아니에요. 제게 맡겨 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만 더..."
"...?"
"실비아를.. 부탁할게."
"..."
어린 수인 소녀는 공터의 차디찬 흙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발밑으로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으로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보다도 까맣게 자신의 마음속이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며,
자신이 에단에게 품고 있던 믿음에 던져진 가혹한 질문에 대해 소녀는 대답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불처럼 번져가는 의심과 불신은 자신이 두려워한 검은 시선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그 무서움은 더 컸다.
"이리 오렴... 실비아.."
라챤코가 소녀의 붉어진 손목을 조심스럽게 쥐고 당기자, 마치 인형처럼 힘없이 그녀의 품에 안긴 소녀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빛도 담겨있지 않다.
그런 소녀가 걱정되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지금 당장 가장 걱정되는 건 자신들의 서투른 대표인, 헹겔이었다.
"헹겔 님은요?"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
자신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다는 말만을 남기고, 뚜벅뚜벅 두 명의 엘프 경비에게 다가가는 헹겔.
"거기 엘프들."
"... 네."
"봤겠지만, 이곳에서 아이들 다섯이 무참히 살해당했고.. 현장에는 그 사제 놈의 냄새가 남아있었어. 이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다면 당장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모든 수인들의 시선이 헹겔의 등을 떠밀어 온다.
그들의 모든 질척이고 부글거리는 감정들을 그녀가 대변해 주기를 바라며,
"... 아."
그런 가운데, 무언가 생각난 듯 불안한 눈빛을 보이는 엘프에게서 뒤이어 들려온 말은...
실비아를 생각해 언제까지고 중립을 지키고 싶었던 헹겔이 마음속에 억누르고 있던 불길에 기름을 들이붓는 꼴이 되고야 말았다.
"그저께.. 지혜의 줄기로부터 이런 주의를 받았습니다. 최근 들어... 외부인.. 그자의 행동이 이상하니.. 경계의 감시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요..."
"..."
"하지만 저희는 오늘 정말 아무것도 보지 못했..."
스윽..
"그래.. 그럼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네."
"...?!"
퍽! 퍽!!
"윽...?"
"어윽..."
털썩...!
어지러운 시야 속, 두 엘프를 기절시켜 쓰러뜨리는헹겔의모습을 본 소녀는 그녀의 이름을 애처로이 불렀다.
"헹...겔.."
그 목소리에 잠시 멈칫 한 헹겔이었지만, 그녀가 뒤를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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