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18. 비명이 파묻힌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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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비명이 파묻힌 도시(3)
이 거대한 도시의 대로를 걸으며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는 굳게 닫힌 문과 나무 판자를 덧대 막아놓은 창, 그리고 어두운 골목뿐이다.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며 헤메고 있는 듯한 느낌에 방향이라도 물을 이가 있었으면 했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하나같이 집안에 틀어박혀 숨을 죽이고 창밖을 멀리하고 있다.
노인의 말대로였다.
"..."
철그렁, 철그럭.
철걱, 철그럭.
겁쟁이들과 벙어리들이 모여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 무기력한 고요 속에서 내 어깨 위로 얹어진 사슬 소리만이 더욱 선명하게 골목 사이를 울린다.
북부지구에서 성당이 있다는 동부지구를 향하는 동안 나와 소녀는 몇 번이고 광장을 지났다.
앙상히 마른 노인들이긴 막대를 쥐고시체를 불길 속으로 밀어 넣는 모습을 그만큼이나 지나쳤을 즈음에나 겨우 건물의 지붕 너머로 뾰족하게 솟은 성당의 첨탑이 눈에 들어왔다.
".. 제대로 왔나보군."
그나마 성당이 대로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솔직히, 자세한 위치도 모르고 일단 대로를 쭉 따라 걸으며 동부지구로 향한 거였으니 말이다.
거리에 나와있는 주민을 찾아야 하는 수고를 덜었다.
대로는 마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이나 잘 관리되어 심지어는 양옆으로 늘어선 가로등까지 거리를 제대로 밝히고 있었지만, 이곳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거리를 다니는 주민들을 보지 못했으니 분명 한참이 걸렸을 것이다.
철걱, 철그럭...
규칙적으로 거리를 울리는 쇳소리에 창을 막아놓은 판자의 좁은 틈으로 조심스럽게 눈만 내민 이들의 기척은 몇 번 느껴진 것 같지만, 그것마저도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있었다.
.. 그래도 일단,
"도착은 했다만..."
발걸음을 멈춰선 끝에 보이는 건 양옆으로 높이 솟은 첨탑이 인상적인 석재 건축물이다.
유리창은 다 깨져나가고 입구의 문짝까지도 뜯겨나간 채 희미한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성당을 소녀와 함께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당이 있는 동부지구에서역병이시작되었다는 노인의 말에 의문이 들었는데..
폐허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이곳의 모습을 보니 어쩔 수 없이 고개가 끄덕여진다.
만약 성당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다면 역병이 이렇게까지 퍼지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바실리카와 오랜 시간 교류가 단절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왕국에 있어서 사제들은 고급인력이다.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땅에 은총을 내릴 필요가 있었으니까.
.. 그들을 방치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제들은 성당을 두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킁킁.."
".. 실비아?"
그때 실비아는 무언가 냄새를 맡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걸어나가더니 이내 성당 바로 옆쪽으로 남아있는 널찍한 공간으로 향한다.
특별한 거라고는 없는 공터에 나무 기둥을 가로로 길게 걸어둔 것이 그나마 눈에 들어온다.
마차를 세우고 말들을 묶어두는 공간정도로 보이는데..
"에단, 이거.."
곧이어 뭔가 발견했는지 나무 기둥에 가까이 다가가 무언가를 손으로 가리키는 소녀를 따라 나도 허리를 숙였고, 곧 기둥에 매듭 지어져 있는 튼튼한 고삐 줄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줄을 따라 훑어내자 알게 된 건 고삐 줄이 무언가 거친 날에 의해 끊어져 있다는 사실.
사절단에 함께한 나이 든 주교가 말을 타고 있었다는 데에 생각이 닿았을 즈음에는, 고삐의 묶음줄에 바실리카의 문양이 작게 새겨진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노인의 말대로.. 사절단은 이곳에 들렀던 모양이야, 잘했어."
"... 우으.."
칭찬이 어색한지 깊게 눌러쓴 후드 위로 양쪽 귀가 움찔거리는 게 보인다.
도시 전체가 시체 태우는 냄새로 가득했으니 코가 아플 만도 한데, 내게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퍽 기특하다는 감상이다.
뭐, 실제로도 도움이 되고 있었고 말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더 살펴봐야겠어. 머무를 만한 공간인지 확인할 필요도 있고."
"응.."
소문이 과장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노인이 말한 역귀의 존재가 아무래도 신경 쓰이기도 하고, 황제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지금에는 임시로라도 거점이 필요했다.
"..."
.. 그러나 막상 성당 내부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이곳에서 머물러야겠다는 생각만큼은 분명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나가있으라고 말하고는 싶지만... 참아줬으면 한다."
"...."
철걱...! 철그르르르륵...
쿵,
사슬을 풀고 소녀의 옆에 관을 내려둔 나는 성당 한가운데를 빙 두르듯 세워져 있는 수십 개의 나무 십자가를 향해 다가섰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지 피가 끈적하게 말라붙어있는 나무 십자가에는 대못이 여럿 박혀있다.
"딜런에게는 안타까운 소식이겠어."
대주교 님 앞에서는 차마 티를 낼 수 없었던 모양이지만, 사절단으로 차출된 자신의 부하 병사들에 대한 걱정을 내 앞에서는 솔직하게 털어놓던 딜런의 모습이 떠올라 괜히 입맛이 쓰다.
사람이 매달려 있던 것으로 보이는 십자가에는 그들의 손목과 발목 위치에, 그리고 심장을 관통하는 위치에 박혀들어간 대못들이 찢겨나간 옷가지와 살점 조각을 남기고 있다.
"... 사절단의 이들인 건 확실한데.."
그 근거로, 십자가들이 바라보는 가운데에는 병사들의 갑옷과, 붕대와의약품들이 들어있는작은 나무 상자들이 한 무더기가 타다 남아 쓸쓸히 자리하고 있다.
... 성당 안에서의 처형이라니, 취미도 고약하다.
귀족들을 분쇄기에 갈아 돼지들에게 먹이로 주었다는 것도 이젠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 처형 당한 이들의 시체는 다 어디로 간 걸까.
화아악...!
은총으로 주변을 밝히자 더욱 자세하게 드러난 처형의 현장은 마치 악신을 부르기 위한 제단처럼도 보여 무거운 한숨을 자아낸다.
"... 핏자국.."
대못 주변으로 여전히 남아있는 이 살점들은, 처형 이후 전시라도 하듯 매달아둔 이들을 누군가 강제로 잡아당겨 뜯어낸 탓에 지저분하게 찢겨나간 흔적이었다.
그리고 이젠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바닥의 끈적거리는 핏자국 역시도, 나와 소녀가 성당 안으로 들어온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 영문을 모르겠단 말이지.
흔적은 솔직하다 느껴질 만큼이나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뒤숭숭한 기분으로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늘어나고만 있다.
가운데로 걸어가 타다 남은 사절단의 유품 앞에 선 나는, 성호를 긋고 짧은 기도 끝에 무거운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후우.."
처형에 사용된 십자가의 수가 이전에 보았던 사절단의 수에 비해 다소 부족해 보인다는 점만이 그나마 위안 삼을 만하지만, 살아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 이들을 이제 어디에서부터 다시 찾아야 할지 막막하다.
거리에 나와 있는 이들이 없으니 수소문을 하기에도 상황이 여의치 않고, 여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던 도시의 경비대나.. 이 이해되지 않는 흔적들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두통을 불러일으키는 요인들이다.
신탁의 선택을 받은 용사와 성녀를 찾기 위해 보낸 사절단이었건만, 이제 와서는 사절단부터 찾아야 했으니 이 상황이 우습지도 않다.
더이상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건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등을 돌리자, 내려놓은 관 옆에서 얌전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실비아의 모습이 보인다.
이럴 때라도 등에 메고있는 배낭은 내려놓던가 하면 좋을 텐데..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아마 힘들어도 참고 있을 게 분명하다.
"... 실비아, 몸 상태는 어때."
"고약한 탄내... 코 안쪽 따끔거려서.. 머리, 아프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어."
역시나,
가만보면 고집이 꽤 있단 말이지.
"아무도 너한테 참으라고 말한 적 없어."
"..."
"배낭도이럴 때는 잠깐내려놓고, 무겁잖아."
".. 하지만... 갑자기 도망쳐야할수도.. 있고.."
이 대답은 예상 외였다.
소녀에게 그런 상황까지 대비하고 있으라고는 말하지 않았건만.. 아마도 헹겔과 같이 있으면서 뭔가 영향을 받은 모양이지.
"그럼 더더욱 메고 있을 이유가 없지."
"...?"
"배낭보다는 네가 제대로 도망치는 게 더 중요하니까. 여차하면 버리더라도 널 탓하진 않아. 내가 이런 것까지 말해줘야 하나?"
"..."
잠깐동안 멍하니 나를 올려다 보던 실비아는,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조그마한 입을 오물거리다 끝내 고개를 푹 숙인다.
툭,
커다란 배낭을 이제서야 바닥에 내려놓는 소녀를 보고있자면..
뭐라고 해야할까.
... 한편으로는 조금 답답한, 하지만 이게 싫다는 느낌은 아니라 의문스러운, 이상한 감정이 든다.
"가까이 와."
단순히 시체 탄내를 오래 맡은 탓에 그런 거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던 만큼 나는 소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고 가볍게 치유와 정화를 마쳤다.
"힘들다던가, 몸에 무슨 이상이 생기면, 조그마한 거라도 나한테 곧바로 이야기해."
"... 으응.."
사제인 만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은총은 만능이 아니라는 것.
치유와 정화는 어떤 상황에서든 최대한 빠르게 이루어지는 편이 좋다.
"화내는 거 아니야. 역병의 정체를 모르는 만큼 주의해서 나쁠 건 없다는 거니까."
".. 응, 고마워."
그렇다고 딱히 걱정해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감사 인사를 하는 소녀를 한 번 힐끗 바라본 나는 다시 관을 짊어지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철걱.
그리고 내가 막 사슬을 손에 쥐었을 때,
나는 들어올리려던 관을 다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 에단.."
".. 알고 있어."
어느새 주변으로 몰려들어있는 수많은 기척들.
상당히 능숙한 자세로 자신의 다리 옆에서 검은 날의 단검을 꺼내드는 소녀의 어깨를 잡아 내 등 뒤로 물러서게 한 나는 성당의 입구와 창문 구멍들로 고개를 들이민 그림자들을 바라보았다.
"..."
하나같이 몸과 얼굴 위로 천을 여럿 감싸놓고 있는 그들은, 손에는 둔기나 날붙이따위를 든 채로 이쪽을 향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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