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입학 준비물 (1)
2년이 지난 어느 날.
“자, 진짜로 던져본다?”
“네! 티나 님, 준비됐습니다!”
외침과 동시에 티나의 손을 떠나는 단검들. 날아드는 단검을 바라보던 쿠제가 반구형 암연을 펼쳤다.
외부로 표출된 암연에 일정한 밀도가 이어지면서 생겨나는 암연의 돔이었다. 단검이 돔 안으로 들어오자, 그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저벅저벅.
이번엔 루빈이 반구형 암연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그는 무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중력장과 동일한 힘의 암연을 방출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역시 지난 2년간 루빈과 쿠제가 함께 연구하며 알아낸 사실이었다.
스윽, 스윽.
루빈은 공중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단검들을 하나씩 여유롭게 회수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실전에서도 써먹을 수 있겠어.”
“고생하셨습니다, 도련님.”
‘그림자 역장’의 부분적 완성이었다. 아직 완벽한 단계는 아니지만, 써먹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언젠가 다른 암살자들에게도 전수해야 할 거야. 일단 티나부터 가르쳐 보자.”
“엥? 나, 로이네크로우인데? 그리고 정보 수집하느라 바쁘다고!”
루빈과 쿠제가 위장별채에서 일상 대부분을 보내는 동안, 티나는 하루에 한 번씩 꼭 카포티니 도심을 돌아다녔다.
그러니까 루빈이 칙명부 몰래 퍼뜨린 정보망이었던 셈. 환혈족의 변신은 마법사들도 가려낼 수 없었기에 티나는 마음껏 카포티니를 활보할 수 있었다.
루빈이 티나를 통해 확인하려 한 정보는 페르 로렌치니와 클로이 위더스푼에 관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는 동안 그 이름들은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위더스푼 가문은 2년 전 그때만 여기 마법학교에 왔었던 거 아닐까요?”
“분명 그때 편입할 예정이라고 했었는데.”
“그때 와보곤 실망한 거 아닐까요? 마음을 바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다행일 텐데. 클로이를 떠올리면 왠지 그럴 것 같진 않거든.”
“아니요, 아마 돌아갔을 겁니다…….”
쿠제는 간절해 보였다.
“부디 그래야만 합니다…. 셀레스네 님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2년이 지났어도, 쿠제는 그때 티나가 저지른 만행을 용서할 수 없었다. 곧장 티나를 째려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위더스푼가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자리를 뜬 뒤였다.
“아무튼, 클로이 님은 도련님을 한 번에 못 알아볼 겁니다.”
“그렇겠지.”
쿠제는 놀랍다는 눈빛으로 루빈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내려다봤다.
고작 2년. 하지만 루빈의 육체에 나타난 변화는 마치 4년을 압축한 것 같았다. 발육 상태가 좋은 귀족가 자제들 기준으로도 3년 정도는 앞서 나가는 체격이 눈에 띄었다.
요릭의 두개골에서 빼내어 흡수한 기벤라트의 눈물 덕분이었다.
폭발적이진 않았지만, 꾸준히 그리고 빠른 속도로 절정의 몸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육체가 발전하는 만큼, 루빈의 경지도 빠르게 나아갔다. 어느덧 오러는 3성이 되었고, 암연은 4성이 되었다. 물론, 전생의 암연은 아직 온전히 운용하지 못했지만.
‘충분히 빠른 성장세야. 괜히 영혼무구라 불리는 게 아니군.’
‘기벤라트의 눈물’은 ‘핏빛서리’를 포함, 루빈의 두 번째 영혼무구였다.
이외에도 앞으로 선점해야 할 영혼무구가 세상엔 많았다. 회귀자인 루빈조차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영혼무구들 또한 많겠지.
‘언젠가 하나씩 찾아 독차지해 주마.’
이 모든 게 복수를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로젠탈러가 오네요.”
쿠제가 먼저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대로, 곧이어 로젠탈러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접선한 지 2주일 만의 방문. 로젠탈러는 성큼성큼 걸어와, 루빈 눈앞에서 종이 한 장을 흔들었다.
“뭐지?”
“어이, 암살검가 도련님. 시간이 됐다.”
“무슨 시간?”
“루든 포이넨이 카포티니 마법생도로 입학하는 시간 말이야.”
그가 건넨 종이 상단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카포티니 마법학교 입학 안내서
입학식에 대한 안내문과 함께,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할 목록들이 죽 나열되어 있었다. 모든 게 신분별로 나누어져 있었기에, 루빈은 귀족 신분의 준비물만 신경 쓰면 되었다.
“이제 마탑지구 근방에도 출입할 수 있으니, 내일부터 부지런히 마도구와 책들을 사둬야 할 거야.”
루빈도 바라던 바였다. 하루빨리 마탑지구에 들어가고 싶었으니까.
* * *
카포틴 호수.
카포티니 중심부에 자리 잡은 천연 호수의 이름이다. 호수 아래 깊숙이 매장된 거대 마나석 덕에, 이곳엔 늘 마나가 넘쳤다.
이 호수를 빙 둘러싼 고층의 탑 서른세 개가 바로 ‘마탑지구’라 불리는 곳이었다.
호수를 기준으로 북쪽의 열다섯 개 마탑은 마법학교 소속 건물. 그리고 서남쪽 아홉 개 마탑은 도시의 행정시설로, 동남쪽 아홉 개 마탑은 도시의 민간 상업시설로 쓰였다.
탑과 탑은 공중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모든 탑이 연결되어 있는 셈이니, 마탑 한곳에서 출발하여 모든 마탑을 거쳐 되돌아오는 것도 가능한 일.
단, 마탑을 이용하는 것도, 마탑 간에 이동하는 것도 오직 카포티니 출신 마법사이거나 마법생도여야만 가능했다. 바로 그게 칙명부에서 루빈을 마법학교에 입학시키는 이유이기도 했고.
-우리도 저기 가보자!
루빈의 머릿속에 티나의 전음이 울렸다. 지금 티나는 조그마한 생쥐 모습으로, 루빈의 가슴팍 작은 주머니에 들어가 있었다.
-나, 호수 구경하고 싶단 말이야.
일대 절경으로도 유명한 카포틴 호수였다. 거대 마나석의 영향으로 다채롭고 영롱한 빛으로 일렁이는 수면은 마치 보석과도 같았다. 티나가 떼쓰는 게 이해됐다.
게다가 오늘은 1년에 딱 하루 있는 날, 바로 카포틴 호수가 신입 마법생도를 위한 시장터로 쓰이는 날이었다.
이른바 ‘호수시장’이었다.
-저기 봐봐, 저 빛무리!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밤. 티나가 가리킨 곳에서 눈이 부실 정도의 환한 빛무리가 보였다.
그 유명한 호수시장이 열리는 날이니, 마법학교 측에서 평소보다 더 강한 불빛이 퍼져 나갈 수 있도록 한 거겠지.
물론 주변 마탑과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치를 마친 뒤였다. 호수 주변을 에워싼 하늘하늘한 거대 장막이 보였으니까. 분명 빛을 차단하는 역할일 것이다.
‘그런데도 빛이 새어 나올 정도면.’
장막 너머, ‘호수시장’은 얼마나 눈이 부실지 상상이 안 되었다. 아마 저리로 나아가면,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을 것 같았다.
-가자! 호수시장 가자!
-일단 내 물건들부터 사고, 그다음에 가자.
-오오? 너, 간다고 했다?
-나도 한 번쯤 구경해 보고 싶었거든.
-그치? 여긴 너무 시시하잖아. 너무 평범해. 지루하고.
툴툴거리는 생쥐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은 루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마탑상점’. 루빈과 같은 귀족 출신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다. 깔끔하고 세련됐지만, 티나 말처럼 시시하기 그지없다.
‘귀족은 마탑상점에서, 평민은 호수시장에서.’
이곳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법사들에게나 적용되는 규칙. 루빈과 티나는 암살자였다. 그러니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겠지.
웅성웅성.
마탑상점 역시 생도들로 붐비긴 마찬가지였다.
준비물을 담기 위한 수레를 끌고 지나가는 학생들 모두, 최소한 3등귀족 이상의 신분. 다들 하인도 없이 자기 손으로 직접 수레를 끈다는 사실에 어색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이거랑, 이거랑, 이거 좀 줘.”
반말이 낭자했고.
“아까 평민 애들 호수로 나가는 거 봤냐?”
“제기랄, 우리 가문이 최소한 모휘라도 됐어 봐. 평민들이랑 같이 학교 다닌다는 소리는 안 들었을 텐데! 왜 하필 삼휘 마법사로 태어나서는.”
“하… 그게 문제가 아냐. 난 저것들이 삼휘도 다 같은 삼휘로 생각할까 봐 걱정이다.”
무시하는 태도가 배어 있었다.
평민은 호수시장에서, 귀족은 마탑상점에서 준비물을 사야 한다는 규칙을 귀족 출신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그들의 계급주의적 사고방식은 굳건했다.
귀족 생도들 입장에선, 준비물을 구한답시고 곤돌라를 타고 호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천한 모습도 없었으니까.
“저기 봐. 쟤가 그 이엘로스 가문 맞지?”
“그 삼휘 기수 가문이라는 그 이엘로스?”
“와, 쟤를 여기서 보다니.”
스쳐 지나가는 생도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엘로스. 오늘만 벌써 몇 번째 듣는 건지. 마탑상점을 돌아다니는 동안 수없이 들은 그 이름 탓에 이젠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다.
마법사 가문 중 삼휘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이엘로스가.
마법사 사회에서 위상이 가장 낮은 삼휘였지만, 이엘로스라는 마법명가가 버티고 서 있으니 이 정도라도 유지하는 거 아니겠냐는 말이 있을 정도다.
‘카포티니 마법학교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라고 했는데.’
칙명부가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그랬다.
삼휘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이엘로스 가문과 카포티니 마법학교는 엄연히 다른 세력이었다.
이엘로스는 대륙 서남부에 독자적인 영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카포티니를 대놓고 무시했다. 반면 카포티니는 이엘로스의 오만을 경계했다.
그런 이엘로스가의 카포티니 입학이라. 그래도 관습은 관습이라는 건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결정?
하긴, 이엘로스 가문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터였다. 삼휘의 마법사를 다른 휘식의 마법학교로 보낼 수도 없었으니까.
-이름이 에릭이라고? 쟤, 딱 봐도 거만해 보이네.
티나가 전음으로 말했다.
다른 애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올라와 있는 큰 키에 잘생긴 외모. 주황빛 머리칼에 같은 색깔의 눈썹이 선명했다.
다른 학생들이 그렇듯, 루빈 역시 에릭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헉, 루빈! 너 본다, 너 본다고!
에릭의 시선이 루빈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곧 루빈을 향해 걸어왔다. 남들은 손으로 끌고 다니는 수레가 저절로 에릭을 따라왔다. 염동 마법을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부탁 하나 해도 될까?”
에릭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청량하지만, 한편으론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그러곤 루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아랫사람한테 교양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내가 슬슬 지겨워져서 말이야.”
“그래?”
“보니까 너는 7층 상점도 다녀왔나 봐.”
“맞아.”
7층 상점은 학교에서 필요한 의복을 지급하는 곳이었다. 에릭은 루빈의 수레에 잘 정돈된 채로 포개져 있는 의복을 바라봤다.
“나랑 키도 얼추 비슷한 거 같은데… 나한테 그걸 주고 다시 갔다 오는 게 어떨까?”
“…….”
“어때? 내 부탁 들어주는 인연으로 친해지면, 너한테도 좋은 거 아니겠어?”
“아, 그게 부탁이었어?”
루빈은 피식 웃었다. 마법사가 오만한 자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무뢰배가 있을 줄이야. 위더스푼의 막내딸도 이러진 않았다.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부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니야.”
“뭐?”
순간, 에릭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녀석은 그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겠지. 이엘로스 가문의 이름이 어느 정도까지 통하는지 말이다. 수레를 채운 다른 준비물들 역시 이런 식으로 구했을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루빈은 그 장단에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너무 어렵게 말했나? 싫다는 뜻이야.”
“그래? 알겠어.”
“알았으면 좀 비켜줄래?”
두 눈에 힘을 주며 한 발자국 빼주는 에릭. 막 지나가려는데, 다시 루빈을 불러세웠다.
“너, 가기 전에 하나만 알려줘.”
“내 이름?”
“아니, 그건 관심 없고. 난 여기 친구들을 네 개로 분류하거든. 그중에 네가 어디에 드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에릭의 분류는 이랬다.
A는 ‘귀족이면서 마법가문인 사람.’
B는 ‘귀족인데 마법가문은 아닌 사람.’
C는 ‘마법가문인데 귀족은 아닌 사람.’
D는 ‘마법가문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사람.’
이 분류에 따르면 루빈은 B였다. 하지만 그걸 말해줄 이유는 없었다. 루빈은 거꾸로 되물었다.
“너는 뭔데?”
“뭐?”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겠거든. 처음 보는 얼굴에 예의까지 없으니까, 좀 불쾌해서. 아마… 넌 D인가?”
“하…….”
그게 끝이었다. 루빈은 길을 비키지 않는 에릭을 옆으로 밀치며 지나쳤다. 모든 걸 지켜본 티나의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내가 이딴 똥통 학교 안 온다니까!”
루빈의 등 뒤로, 몸을 바르르 떠는 에릭의 중얼거림이 점차 멀어졌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
어느새 준비물들로 가득 채워진 수레.
통지서에는, 준비물들은 자동으로 기숙사 방에 비치될 거라고 쓰여 있었다. 이런 자동 시스템은 귀족 출신들만 누릴 수 있다는 강조 표시와 함께.
-이제 호수시장으로 가보자.
-오예!
루빈의 전음에, 포켓 주머니 너머로 고개를 삐쭉 내미는 티나. 이내 춤을 추는 건지, 한참을 꼼지락거렸다.
루빈은 타고 왔던 곤돌라에 다시 올라탔다. 곤돌라 뒤편에 있는 마나석에 손을 얹고, 간단한 조종을 시작했다.
스스슷, 스스슷.
곤돌라가 서서히 나아갔다.
거대 마나석의 영향에 따라, 곤돌라는 물길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었다. 안정적인 유속을 유지했고, 다른 곤돌라와 충돌하는 상황도 저절로 방지했다.
물론, 곤돌라가 너무 느릿해서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호수는 아직이야?
-금방이야, 기다려.
-이럴 바엔 내가 물고기로 변해서 헤엄치는 게 낫겠네!
루빈은 주변을 둘러봤다. 앞쪽과 뒤쪽, 루빈처럼 호수로 향하는 다른 곤돌라들이 빼곡하게 수로를 채웠다.
귀족 자제들은 대개 엇비슷한 인상을 지닌 반면, 평민 생도들은 면면이 다양했다. 농촌이나 광산에서 온 이들도 있었고, 사냥꾼의 자제처럼 보이는 아이도 있었다.
출신 지역부터 신분까지 워낙 제각각이었기에 그만큼 다양한 인상을 풍기는 것이다. 하나같이 마법생도 느낌을 내보려 했지만, 자신이 떠나온 곳의 자취를 감추는 데엔 실패한 모양.
‘삼휘 마법학교라 그런지 평민 출신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이내 루빈의 시선이 옮겨간 곳은 위쪽이었다.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보이는 수십 개의 마탑들.
지금, 마탑의 층 대부분이 불을 켜둔 상태였다. 창가로 나온 사람들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곤돌라 행렬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평민 출신들을 위한 호수시장은 마탑지구에서도 유명한 행사였기 때문이다.
-루빈, 루빈, 왔다! 왔어!
루빈이 마탑들을 올려다보며 사람들 관찰하고 있을 때, 티나의 호들갑스러운 전음이 울렸다.
그 말처럼, 스윽스윽 천천히 나아가던 곤돌라가 드디어 카포틴 호수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먼저 들어가는 순서대로 앞쪽 곤돌라에서부터 감탄사가 연거푸 울려 퍼졌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모두가 놀라워했다.
루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나아가는 루빈 앞으로 거대한 장막이 가로막았다. 부딪치는가 싶었는데, 마법 장막을 그대로 관통하며 나아갔다.
무려 네 겹이었다. 네 겹의 장막이 호수의 불빛이 퍼져 나가는 걸 막고 있었다. 한 겹씩 지나칠 때마다 영롱한 빛이 더 강렬해졌고, 루빈을 둘러싼 온기도 더 섬세해지는 것 같았다.
‘빛만 차단하는 건 아니겠지.’
분명 무언가 방어 마법 효과도 포함돼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무튼, 놀랍다.’
전생에도 이런 행사를 구경해 본 적은 없던 루빈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귓가에 울리는 노랫소리.
루빈은 본능에 이끌리듯, 손을 뻗어 곤돌라 바깥쪽으로 가져갔다. 물 아래로 손을 뻗는 순간, 어떤 따스함이 루빈을 감쌌다.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독특한 평화로움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따스함이 루빈을 감싸는 동시에, 마법호수의 노랫소리도 더욱 선명하게 찾아왔다.
그리고 이윽고, 눈앞에 ‘호수시장’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