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피가 흐른다.
내 피다.
살갗을 파고든 검날.
죽음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걸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정신은 더없이 침착하다. 마치 탁 트인 하늘처럼 개운했다.
―두근, 두근.
불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고동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심장이 귀에 달려있는 것 같은 감각이다.
“아닙니다.”
차갑게 식은 눈동자가 전신을 훑는다.
“뭐가 아니라는 거지?”
올곧은 눈동자에는 신념이 담겨있다. 그녀가 쥐고 있는 검처럼 예리하고, 서늘하며, 올곧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의심에 찬 시선.
지금 이곳에서 나는 철저한 이방인이었다.
‘교관급이 최소 열둘….’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인 만큼,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관들 또한 손꼽히는 강자들이었다.
‘…이길 수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내게는 아스모데우스의 권능이 있었으니까. 그녀의 화신체 일부분만 이곳에 현현(顯現)하다 하여도 상황은 가볍게 종료될 것이다.
애초에 마신(魔神)이란 존재는 인간의 이지를 넘어선 재앙(災殃)이기에.
허나 문제는 내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냐는 것이다.
지금의 육체로는 아주 약간의 힘을 빌려오는 것만으로도 사망에 이를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가 우려했던 부분도 이런 것이었다.
그녀가 지닌 힘의 크기를 비유하자면…….
―무저갱(無低坑).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深淵)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단순히 그 편린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광기에 휩싸여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이 몸이 지닌 혈통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위험성이 큰 도박이었다.
더 이상 나에게 이곳은 소설 속세계 따위가 아닌 현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정말 만에 하나 운 좋게 이곳을 벗어난다고 해도 평생을 제국에 쫒기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세계에 멸망을 방관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주축이 되는 인물들은 필연적으로 이곳 살로몬 아카데미에 모이게 된다.
그들을 회유하여 아군으로 만들고, 나아가 소천마(小天魔) 천악천(天惡天)을 죽이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멸망한다.
정해진 결말을 바꾸지 못한다면, 맞이하는 것은 확정된 종말(終末) 뿐 이었다.
“저는 이교도가 아닙니다. 부디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생각해라.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이용하여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도출해라.
“저는 그저 몰락한 백작가의 후계자일 뿐입니다. 분명 무슨 착오가….”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차갑게 날이 선 음성이 귓가에 박혔다.
“세 치 혀 놀리지 마라.”
“저는 정말 억울…!”
날이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소를 짓고 있던 여인의 눈동자에는 증오에서 비롯된 노골적인 살의가 깃들어져 있었다.
“경고는 한 번 뿐이다.”
“…….”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목을 베겠다.”
말이 통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속이 들끓었다.
전신의 혈액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수험번호 444번. 자일 지그하르트. 너는 지금부터 이단 심문을 위해 라파엘 교단으로 이송될 것이다. 그곳에서 너는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내가 입을 여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감정의 격변.
머리에 피가 쏠린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증명하고 싶다면 그곳에서 얌전히 심문에 응해라. 교단 직속 이단 심문관들은 나처럼 무르지 않다. 괜히 세 치 혀를 놀리다가는―”
이 상황에서 흥분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용솟음친다. 눈꺼풀이 덜덜 떨린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충동이 전신에 엄습한다.
눈앞에 여인의 입을 찢고, 머리통을 부수고, 심장을 파내고 싶다.
“그 혀를 다신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저 차가운 얼굴이, 고통과 두려움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싶다.
차라리 내가 안드로말리우스의 사도라는 것을 당당히 밝힌다면? 만약 내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잠입해있는 교인들이 기꺼이 나설 것이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신의 사도를 죽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곳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겠지.
감히 일개 교관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것이 너무나도 화가 난다.
-뭘 고민하고 있어. 죽여, 죽여 버려.
두근. 두근.
이제는 환청까지 들린다. 이게 마약에 중독된 이들이 겪는 기분일까?
이 충동에 몸을 맡기면, 인간이 아닌 무엇인가가 돼버릴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럼에도….
“이게 무슨 소란이지.”
혹한의 한파를 떠올리게 하는 서슬 퍼런 음성.
또각. 또각.
적막 속에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구두소리.
“무슨 소란이냐고 물었습니다. 레이첼 수석 교관.”
창백하리만큼 희고 고운 피부,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나는 머리칼.
“…아, 이사장님. 이교도를 색출했습니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눈동자. 신이 자신의 욕망을 담아 직접 창조한 듯한 이지적인 외모.
“이교도―?”
살로몬 아카데미의 이사장이며, 가장 고귀한 별 ‘루나(Luna)’의 이름을 하사 받은 초월자.
대마도사(大魔道師), 아슈타르.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이자가?”
“그렇습니다.”
푸른 수정을 떠올리게 하는 냉랭한 눈동자가 잔잔한 호수처럼 일렁거렸다.
“이름이 뭐지?”
“…자일 지그하르트 입니다.”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지그하르트라…. 가문의 인장을 지니고 있나?”
나는 품에서 인장을 꺼내며 슬쩍 교관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녀가 손짓하자, 인장이 공중으로 떠올라 그녀의 품에 안착했다.
“진짜네.”
그렇게 중얼거린 아슈타르가 레이첼에게 시선을 옮겼다.
“레이첼 수석 교관. 그대는 이 자가 이교도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했지?”
“알튼 주교의 축복이 깃든 신성석(神聖石)이 파괴되었습니다.”
“내가 직접 확인해보도록하지.”
레이첼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다가온 아슈타르가 머리에 손을 올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가만히 있거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용암처럼 들끓던 속이 순식간에 진정됐다. 그녀가 손을 떼며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자는 이교도(異敎徒)가 아니다.”
레이첼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분명 제 눈으로 확인했단 말입니다!”
아슈타르의 푸른 안광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레이첼 수석교관. 그대는 지금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인가―?”
칼날처럼 예리한 음색.
“그, 그게 아니라….”
“레이첼. 그대는 마신숭배자들에 의해 가족을 잃었지.”
질끈.
레이첼이 입술을 짓이겼다.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슈타르는 말을 이어갔다.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였다.
“…그렇습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그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허나 이자는 마신숭배자도, 이교도도, 흑마술사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보증하지.”
“…그렇다면 작금의 현상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입니까. 축복이 깃든 신성석(神聖石)은 오로지 이교도들이 지니고 있는 사악한 마력에만 반응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닌 마력에 따라 색이 검게 물드는 것이 그 특징이지요. 허나 저 자는 신성석(神聖石) 자체를 파괴해버렸습니다. 이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건이란 말입니다!”
“신성석(神聖石)이 반응하는 것은 비단 사악한 마력 뿐 만이 아니다.”
“…….”
“저주(詛呪).”
“!”
“그것도 악룡 파프니르의 목숨을 매개체로 행한 피의 저주라면, 주교의 축복 따위가 깃든 신성석(神聖石)은 견딜 수가 없겠지. 자일 지그하르트, 그대는 알고 있었는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것은 그대의 선조와 몇몇 초월자들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 그대의 부친께서는 단명하지 않았는가?”
“…네.”
“이는 그대 일족의 피에 깃든 저주 때문이다. 용살자(龍殺者), 지그하르트. 그 이명답게 수많은 용을 사냥한 그대의 선조는 악룡 파프니르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제국을 구했지만, 끔직한 저주에 걸렸다. 마력을 운용할 때마다 제 생명력을 갉아먹는 형태의 저주이지. 혈계전승(血界傳承)이라고 들어봤나? 대개는 축복이나 권능의 형태가 보편적이지만 그대는 저주를 전승받는 것이다. 이로 인해 지그하르트 일족의 혈액 속에는 마나와 마기가 공존을 한다. 그대의 아버지가 단명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지.”
“…그렇다면 저도 죽게 되는 겁니까?”
“저주를 해주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충격이 상당했는지 레이첼은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어느새 나를 둘러싸고 있던 교관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이제 이 검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그제야 레이첼은 목에 있던 검을 회수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내가 오해를 했다.”
허나 나는 보았다. 고개를 숙이던 그녀의 얼굴은, ‘미안함’이 아닌 ‘그럴 리가 없다.’였다. 그것이 본인의 아집(我執)에서 비롯된 것일지는 몰라도, 감 하나는 좋은 여자였다.
“괜찮습….”
그때. 아슈타르가 내 말을 잘랐다.
“레이첼 수석교관. 전란의 위기에서 제국을 구한 영웅의 일족을 본인의 심증만으로 이교도로 몰아놓고선 하는 사과가 고작 그뿐인가?”
레이첼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미안하네. 내가 오해했네.”
아슈타르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레이첼이 다시 사과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제 고집으로 인해 이러한 수모를 겪게 했습니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레이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정말….”
“…….”
레이첼은 그제야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죄송합니다.”
쿵-!
“전부 제 고집으로 인해 벌어진 일입니다.”
쿵-!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슈타르는 나지막이 중얼거린 뒤 자리를 떠났다.
“긍지 높은 살로몬 아카데미의 수석 교관으로서 행실을 똑바로 하길 바랍니다.”
쿵-!
“용서만 해주신다면.”
쿵-!
“그 어떤 일이라도….”
나는 그녀를 제지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일어나세요.”
레이첼이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이마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가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정말 죄송….”
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 이해합니다.”
“저, 정말입니까?”
“그럼요. 그럴 수 있죠.”
“정말 감사합….”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끝났다 한들 지속해서 날 관찰하고, 감시할 것이다.
“근데요.”
그래서 난 그녀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줄 생각이다.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저 흑마술사 맞아요. 그것도 마신의 축복을 받은 사도랍니다.
그 짧은 순간, 내 이마에 새겨진 육망성(六芒星)이 번뜩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레이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저 이제 가도 되는 거죠?”
멍하니 날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을 뒤로 한 채 두 번째 시험장으로 향했다.
‘쥐 죽은 듯 살기는 글렀군.’
어떻게 상황은 잘 마무리 됐지만,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살로몬 아카데미의 이사장, 대마도사 아슈타르.
그녀가 대체 무슨 목적을 지니고 나를 도와준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워낙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차 알게 되겠지. 그보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했군. 앞으로는 더욱 신중하게 행동해야겠어.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 한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정도로.
흑마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대역죄인이니까.
‘…레이첼은 한 일주일 정도 있으면 죽으려나? 처음 사용해보는 거라 감이 안 잡히는군.’
사자(死者)의 맹약.
거창한 이름과는 별개로 아주 기초적인 흑마술 중 하나이다.
해주 자체는 이제 갓 신관이 된 이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나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방치해 두다가는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 고안된 흑마술.
‘다시 볼일은 없을테니 신경끄고 시험에 집중하자.’
난 그렇게 다짐하며 두 번째 시험장의 문을 열었다.
* * *
두 번째 시험장에 들어서자, 날카로운 시선들이 일제히 쏟아졌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좋든 싫든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무시한 채 대기석에 앉았다. 앞선 사건으로 인해 내 심신은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어째 수험번호부터 찝찝하다 했더니…. 역시는 역시군.’
그때, 옆자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옆에 앉아도 괜찮을까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옆자리에 앉은 이는 정문에서부터 나를 향해 승부욕을 불태우던 소년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 거리던 그는 이내 조심스레 운을 띄었다.
“…자일 지그하르트 공 맞으시죠?”
“예, 그렇습니다.”
“…영웅의 일족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 또한 명망 높은 검술가의 후계자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는 놀란 듯 되물었다.
“…저를 아십니까?”
물론, 알고 있다.
“당연하죠. 제국 내에서 칼리고 백작가의 명성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졌다.
“…그런가요.”
프레이 칼리고.
훗날 대륙 최고의 소드마스터가 되어.
“프레이.”
―소천마(小天魔) 천악천(天惡天)과 함께 세계를 멸망시킬 여인 중 한 명이었다.
“네?”
“어째서 남장을 하고 다니는 겁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아군으로 만들 수 없다면 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인물.’
그것이 프레이 칼리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