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흑마술사로 살아남기-22화 (22/180)

22화

살로몬 아카데미 상층에 위치한 교직원 전용 회의실.

거대한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교수들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마법학부의 수석 교수인 루덴과 메디카였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살로몬 아카데미에서 이블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쯧. 이 무슨 망신인지…. 이 일이 밖에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살로몬 아카데미의 위상은 바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이거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학장님?”

마법학부 학장 맥스웰이 자신의 수염을 어루만지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상당히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심히 중대한 사안이긴 하지요. 아카데미 창립 이후 가지각색의 사건들이 일어났지만 신입생 입학시험에서 이블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확실히 전례가 없긴 합니다. 자칫하면 끔찍한 대참사로 이어질 뻔 했죠.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라면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이블(evil)이 얼마나 위험하고, 끔찍한 존재인지. 그것은 재앙(災殃)입니다.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좀 먹는 악마죠. 그러한 존재가 이 아카데미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아니, 있어선 안 되는 얘기죠.”

반대편에 앉아있던 벨라 트레이가 흉흉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으나 맥스웰은 무시한 채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시험의 총 관리자인 벨라 트레이 수석 교수는 시험이 끝나기 직전까지 그 사실조차 알지 못했지요. 이게 있을 수나 있는 일입니까? 총 관리자라는 사람이 어찌 시험 도중 생긴 이변조차 인지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인명피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천운(天運)이었습니다. 조금만 잘못됐더라면 우리 아카데미의 소중한 학생들이 목숨을 잃을 뻔 했지요.”

맥스웰의 시선이 벨라 트레이에게로 향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뱀의 눈동자처럼 날카로운 시선.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지시겠습니까, 벨라 트레이 수석 교관?”

붉게 물든 벨라 트레이의 머리가 서서히 요동쳤다. 그녀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마나에 반응한 것이다.

“레이첼 수석 교관에게 독점권한을 준 것은 학장…님이지 않습니까?”

이를 악문 채 말을 내뱉는 그녀의 눈동자에 분노가 어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상태.

“그것이 뭐 어떻단 말입니까? 저는 제가 지닌 권한을 통해 그녀를 배려해준 것 뿐 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레이첼 수석교관은 입학시험 때 자그마한 실수를 범했지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본인이 맡겠다는 것을 저는 용인해주었을 뿐입니다.”

쾅!

벨라 트레이의 주먹이 책상을 내리쳤다. 보호마법이 걸려있는 책상이었기에 다행히 금이 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벨라 트레이가 으르렁 대자, 맞은편에 있던 마법학부 교수들이 소리쳤다.

“벨라 트레이! 지금 학장님 앞에서 뭐하는 짓입니까!”

“이토록 무례하다니! 본인 감정조절조차 못하는 인물이 어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학장 맥스웰이 싱긋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진정들 하시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녀는 용병 출신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기본적인 예의에 관해서는 무지할 수도 있지요. 다 이해합니다.”

뚝.

벨라 트레이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붉은 오라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장내 전체를 뒤덮었다.

“이 마법쟁이들이 지금 한 번 해보잔….”

그 순간, 그녀의 옆에 있던 남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만.”

남성의 말 한 마디에 벨라 트레이를 포함한 모든 교직원들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인자한 얼굴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성.

마법학부 학장 멕스웰의 쌍둥이 동생이자 기사학부의 학장인 맥도웰이었다.

“하지만 이 인간들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용히 하시죠. 벨라.”

벨라 트레이는 분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맥도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시험의 총 감독관인 벨라 트레이 교수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번 사태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요.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끼리 논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사장님이 오시면 그때 가서 다시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요한 크루이트 교수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테이블 구석에 있던 한 남성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방금까지 잠을 잔 것인지 입가에는 늘러 붙은 침 자국이, 뺨에는 눌린 자국이 있었다.

그러한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이목을 사로잡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의 남성이었다.

“예, 뭐… 그렇게 하시죠….”

마법학부 학장 맥스웰은 말없이 요한을 응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 말을 마친 요한은 다시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다.

‘요한, 저 싸가지 없는 자식이 재능 좀 있다고 거들먹대기는….’

심기가 불편했다. 마법학부 소속 교수임에도 불구하고, 자신 편을 들기는커녕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듯 안하무인(眼下無人)한 태도.

처음 봤을 때부터 교수가 된 지금까지 한결 같은 저 태도가 심히 거슬렸다.

“모두 정숙해주십시오. 이사장님 들어오십니다.”

비서의 말 한 마디에 어수선했던 장내가 순식간에 정리됐다.

끼익.

또각. 또각.

문이 열리며 이지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여성이 걸어와 상석에 앉았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를 시작하죠.”

대마도사 아슈타르.

인간은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9서클을 넘어, 10서클에 도달했을 거라 추측되는 초월자.

가장 고귀한 별 루나(Luna)의 이름을 하사 받은 제국의 빛.

그녀에 대한 소문은 무궁무진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아카데미 창설 이후부터 지금까지 가장 오랜 기간 이사장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외에는.

“요한. 일어나세요.”

그제야 고개를 든 요한은 비몽사몽한 얼굴로 입가를 닦았다.

“아, 예…. 벌써 시작했나요?”

감히 이사장을 눈앞에 두고 잠을 청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동료 교수들은 이미 익숙한 광경이라는 듯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벨라 트레이 수석 교수.”

“예, 이사장님.”

“보고하세요.”

“시험이 시작한지 꽤 지났지만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조가 있다는 사실을 제 부관인 막심교관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뒤늦게 그 조를 담당하던 레이첼 교관과 부교관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직접 시험장을 확인해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레이첼 교관으로 보이는 인물이 이블(evil)로 변모해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청십자회(靑十字會)를 부른 겁니까?”

“예. 이블과 관련된 일은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급하게 전언을 보냈습니다. 운이 좋게도 아카데미 인근에 청십자회 차기 대주교로 거론되는 인물인 크리스 경이 계셨고, 직접 토벌하였습니다.”

“차기 주교라…. 아, 어릴 때 한 번 본 적이 있었네요. 신의 가호를 덕지덕지 달고 있는 아이라 인상 깊게 봤던 기억이 있군요. 학생들은 괜찮습니까?”

“네. 크고 작은 부상들은 있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있는 학생은 없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다행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 덕에 장내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것은 다름 아닌 요한이었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맥스웰이 대답했다.

“무엇이 말인가?”

“제 아무리 유망한 인재들이라 하여도 이제 갓 입학시험을 치루는 학생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블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을까요?”

“…….”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현장에 직접 도착한 벨라 트레이 또한 그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현장을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한눈에 봐도 격렬한 전투의 흔적.

검상과 마법들로 인해 주변 일대는 쑥대밭이었다.

그 말은 즉, 아이들이 이블에게 대항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는 것인데….

벨라 트레이 본인조차도 이블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이들의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허나 그와 별개로 이단심문관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이 어떻게 버틸 수 있었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자리에 있는 교수님들 중에 이블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그냥 어중이떠중이면 모를까, 레이첼 교관은 기사학부에서도 손꼽히는 기사지 않습니까?”

이블의 강함은 생전에 강함과 비례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 누구도 섣불리 자신할 수 없었다.

괜시리 헛기침을 하던 마법학부 교수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크흠.”

“확실히…. 힘들겠네요.”

“최근 제국 내에서도 마신숭배자 놈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하던데 이번 사건 또한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죠.”

“가증스러운 흑마술사 놈들. 마신을 숭배하는 그 바퀴벌레 같은 놈들을 박멸해야만 저희와 같은 정통파 마법사들이 제대로 설 수 있습니다.”

제국 최고의 아카데미에서 수석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이들조차도 단언할 수 없었다.

살로몬 아카데미의 교수라는 자긍심 하나만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들에게도 이블은 규격 외에 존재인 것이다.

요한이 물었다.

“이사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평소에 매가리 없는 눈동자가 아닌,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어린 아이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이사장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평소에 도통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그녀였기에 주변에 있던 교수들 또한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확실히 흥미로운 얘기입니다. 요한. 그대의 말처럼 일반적인 학생들이라면 이블을 상대로 버티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지요.”

“그 말은… 그 아이들이 일반적인 학생이 아니라는 얘기입니까? 그래봤자 신입생들 수준일 텐데 이블을 상대로 버티는 것은….”

“지그하르트라면 모르지요.”

그 말을 들은 요한의 눈이 커졌다.

“…지그하르트. 그 전설 속 지그하르트 가문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번 사건을 겪은 학생들 중 하나인 자일 지그하르트가 바로 그 가문의 후예이지요.”

요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저 전설 속 이야기지 않습니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한껏 부풀려진 이야기 따위를 대체 어떻게 신용한단 말입니까.”

“요한. 전설이라는 것은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 전설이 그저 부풀려져 전해져 내려온 허황된 얘기인지, 혹은 저희가 모르는 빙산의 일각일지는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지요.”

요한은 입을 다물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맞은편에 있던 기사학부의 학장 맥도웰이 상념에 잠긴 채 중얼거렸다.

“소문이 사실이었나. 정말 그 지그하르트라니…. 악룡 파프니르를 토벌한 혈족이라면… 항마(降魔)의 힘을 다룰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블을 상대하는 것이 정말 불가능하지는….”

마법학부와 기사학부의 교수들은 충격이 큰지 저마다 열띤 토론을 벌였다.

“소문은 소문일 뿐. 이제 고작 입학시험을 치르는 신입생들이 어찌 이블을 상대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또 모르지 않소. 정말로 그 전설 속 가문의 핏줄이라면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힘을 지니고 있을지.”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미지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도 이블입니다! 이블! 그런 재앙을 상대로 버틴다는 것 자체가 오류라고요! 막말로 7서클 기사인 교수님은 단신으로 이블을 상대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내가 상대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걸 루덴 당신이 어찌 안다고 단언하는 겁니까! 검도 한 번 안 잡아본 여인이!”

“뭐요? 지금 여인이라고 무시하는 겁니까! 이 뇌까지 근육인 양반이!”

탁!

이사장이 손가락을 부딪치자 시끄럽게 떠들던 교수들의 입이 닫혔다.

“추가로 발표할 사실이 있습니다. 올 해부터 우리 살로몬 아카데미에 새로운 클래스를 창설할 계획입니다.”

마법학부 학장 맥스웰이 조심스레 물었다.

“새로운 클래스라 하면….”

“학교 측에서도 관찰이 필요한 학생들을 한 곳에 모을 겁니다. S 클래스라고 명하도록 하죠.”

“허나 그리하면 A 클래스 학생들과 그 부모들의 반발이….”

이사장은 물끄러미 맥스웰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바라본 것 뿐 인데도 굴복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맥스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형식상 S 클래스라는 이름이 붙을 뿐, A 클래스가 최고의 학생들을 모아놓은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굳이 평가를 내리자면 문제아들을 모아 놓은 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알겠습니다.”

“이블에 대한 수사는 벨라 트레이 그대에게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된 처벌은 그 후에 묻도록 하죠.”

“예, 알겠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전 교직원은 아카데미 내에 이교도, 흑마술사, 마신숭배자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색출하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하세요. 이사장 명령입니다.”

교직원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예!”

말을 마친 교직원들이 차례대로 회의실을 나갔다. 어느덧 남아있는 것은 이사장 아슈타르 뿐이었다.

잠시 후.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이미 누가 올지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이든.”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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