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숨 한 조각까지
(81/112)
81. 숨 한 조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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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숨 한 조각까지
2022.07.10.
놀란 겨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그의 입술에서 손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확 끌어당기는 손길에 여린 몸이 그대로 시후의 가슴 위로 엎어졌다.
단단한 가슴 근육에 얼굴을 부딪친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 뜨여졌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으나 도로 그의 품에 폭 안길 수밖에 없었다. 부드럽게 목 뒤로 감긴 커다란 손 때문이었다.
“……꿈인가.”
약간의 비음이 섞인 달콤한 음색이 귓가를 뜨겁게 달구었다. 겨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온 적 없는데…….”
열기를 가득 품은 무더운 입술이 겨울의 입술 위에서 은밀하게 비벼졌다.
“보고 싶어서 꿈에 나타나 달라고 빌고 또 빌어도 안 나타나더니…… 드디어 만났네.”
그는 40도가 넘는 고열 때문에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하지도 못하는 듯했다.
“이리 와.”
부드럽게 허리를 감아 당기는 손길에 겨울의 가슴이 시후의 근육에 밀착해 지그시 눌렸다.
비스듬히 응시하는 까만 눈동자가 온몸을 꿰뚫는 듯한 착각에 겨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싼 시후가 말랑한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으며 속삭였다.
“꿈에서라도 네 곁에 있고 싶어…….”
타들어 갈 듯이 뜨거운 숨결이 겨울의 입술을 촉촉하게 적셨다.
열기를 품은 혀끝이 겨울의 젖은 가슴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놓았다.
뭐라 말을 하기 위해 벌어진 겨울의 입술을 삼키고 느리게 고개를 비튼 시후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이내 연한 입술 틈을 파고드는 아찔한 감촉에 겨울이 움찔 몸을 떨었다. 점차 짙어지는 움직임에 퍼뜩 정신을 차린 겨울이 빨개진 얼굴을 가리며 몸을 일으켰다.
“난 너 없이 안 돼, 겨울아…….”
나지막하게 속삭인 시후는 그대로 눈꺼풀을 닫았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얼굴이 온통 장밋빛으로 물든 겨울은 아직도 열기로 화끈거리는 입술을 가리고 속삭였다.
“……잠이나 자,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인 건지도 까맣게 모르고 시후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겨울은 작게 한숨 쉬며 열 오른 얼굴을 식혔다.
***
느지막한 시간까지 시후를 간호하고 호텔로 돌아온 겨울은 밤새 제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뜬 눈으로 하룻밤을 지새우고 심란한 마음을 이끈 채 클레르로 향했다.
낮 근무가 끝난 뒤 주형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겨울은 근처의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겨울아. 안녕!”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 주형이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 미소에 미안한 감정이 올라왔으나, 겨울은 더 이상 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오늘은 어디 갈래? 일단 맛있는 거부터 먹을까?”
“……미안.”
“……응? 뭐가?”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놀자는 게 아니라…… 저번 고백에 대해 대답을 하려고 불렀어.”
시선을 내리깐 겨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게 말을 이었다.
“나 네 마음을 받아줄 수 없어, 주형아.”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주형이 어깨를 으쓱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남편하고 다시 잘해보기로 한 거야?”
“……그런 건 아니야.”
이미 시후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누가 보더라도 주형의 손을 잡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게 이성적인 판단일 터였다.
하지만…….
“나, 그 사람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이런 마음으로 절대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어.”
담담하게 말을 이은 겨울이 정중하게 고개 숙였다.
“그래서…… 미안해.”
차마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워 눈을 내리깔고 입술만 달싹였다.
이미 예상했던 답변이었지만 그래도 적잖이 충격받은 주형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서로 입을 열지 않자 길고 긴 침묵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 오랜 정적을 뚫고 먼저 입을 뗀 것은 겨울이었다.
“그럼 이만 난 가볼게. 잘 지내.”
조심스럽게 속삭인 겨울이 뒤를 돌아 떠나려는 찰나였다.
주형이 다급하게 겨울을 붙잡으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래도 괜찮아!”
“뭐……?”
“네가 그 사람을 잊지 못해도 상관없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괜찮아. 내가 노력해서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돌아보게 만들 테니까…… 그러니까…….”
마지막 애원이라는 듯 주형이 간절하게 겨울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 나는 안 될까, 겨울아?”
“…….”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듯 애틋하게 저를 잡고 있는 주형의 커다란 손을 가만히 바라보던 겨울이 입술을 옹송그려 물었다.
……지금 이 손을 잡지 않으면, 언젠가 후회하는 날이 올까?
그는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친절하고, 배려심도 넘치고, 자상하고, 부족한 점이라고는 꼽을 수 없는 남자였다.
이렇게 좋은 사람과의 인연은 귀한 일이었고, 여기서 거절하면 이제 앞으로 친구로 지내기도 힘들어질 터였다.
“미안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감정을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겨울이 담담하게 거절하자 주형이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네 진심인 거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겨울을 붙잡고 있던 커다란 손이 떨어져 나갔다.
크게 심호흡한 주형은 이내 흐릿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확실히 말해줘서. 그래도 후회는 없어. 내 마음 전부 너한테 털어놨으니까. 부딪쳐 볼 만큼 부딪쳐 봤으니까.”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자 되려 후련해진 주형이 가볍게 웃으며 겨울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 서글프게 미소 지은 주형이 겨울과 시선을 마주하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겨울아……. 난 네가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다정한 목소리가 겨울의 귓가를 포근하게 감쌌다.
“어떤 상황에서든 네 행복이 최우선이라는 걸 꼭 기억해.”
그 말에 겨울이 조금 슬프게 웃음 지었다.
주형과 헤어진 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은 창밖으로 빠르게 바뀌는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후회는 없어. 내 마음 전부 너한테 털어놨으니까. 부딪쳐 볼 만큼 부딪쳐 봤으니까.”
조금 전 주형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었다.
……난 부딪쳐 볼 만큼 부딪쳐 봤다고 할 수 있나?
정말 내 감정에 진심으로 솔직했던 게 맞나?
미래의 일이나 상황보다 현재의 마음을 소중하게 여겼던 게 맞나?
“…….”
후회 없는 결정을 한 게 맞을까.
주먹을 꼭 움켜쥔 겨울이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불을 밝혔다.
캘린더에 표기해 놓은 2차 이혼 확인 기일이라는 글자가 아릿하게 눈가에 박혔다.
그와 법적으로 남남이 되는 12월 23일까지는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2차 이혼 확인 기일이 되었다.
서로 별다른 연락 없이 가정법원에 도착한 겨울과 시후는 약 일주일 만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겨울은 언제 아팠냐는 듯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시후를 보며 마음 한쪽이 울렁거렸다.
주차장과 법원은 조금 떨어져 있었고, 함께 오르막길을 올라가며 겨울은 최대한 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덤덤하게 모른 척 입술을 열었다.
“많이 아팠다더니, 다 나았나 보네.”
“……응.”
시후는 나지막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네 덕분에 나았어.”
그 말에 놀란 겨울의 가슴이 쿵 떨어졌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하지 못할 정도로 열이 높았기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으나 그건 겨울의 착각이었다.
“……다행이네. 도움이 됐다니.”
동요를 숨기고 무덤덤하게 답했으나 가슴은 한바탕 태풍이라도 몰려온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런 겨울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쥔 시후가 가만히 멈춰서서 겨울과 두 눈을 마주했다.
“……어젯밤에 울다 잤어?”
움찔한 겨울이 떨리는 눈으로 시후를 바라보았다.
“눈이 부었길래.”
제 속마음을 전부 들킨 것 같아서 겨울이 입술을 꼭 옹송그려 물었다.
그의 말대로 어젯밤에는 온몸의 수분이 전부 빠지도록 울고 또 울다가 그대로 잠들었었다.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시선을 피하자 시후의 나직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자꾸 널 울려서 미안해.”
겨울의 숨이 우뚝 끊겼다.
“……뭐?”
“어렸을 때 도서관 앞에서 네 책 밟고 간 거 미안해. 괴롭힘당하고 있는 거 모른 척 지나간 것도 미안하고, 가장 힘들었을 너한테 못된 말로 비수를 꽂아서 미안해.”
“무슨……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화재에서 널 구해줬던 사람이 나란 거 숨긴 것도 미안하고, 우리가 사랑해서 결혼한 거라고 거짓말해서 상처 준 것도 미안해.”
“……그만해. 듣기 싫어.”
“돈을 빌미로 억지로 원치 않은 결혼하게 한 것도 미안하고……. 웨딩드레스랑 반지 고를 때, 일부러 같이 안 가고 비서 보낸 것도 미안해.”
“그만…….”
“무엇보다…… 내 아버지가 너와 네 가족에게 한 일, 정말 미안해.”
“그만 하라니까……!”
울컥한 겨울이 결국 목소리를 드높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건데? 기억도 가물가물한 옛날 일까지 얘기하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겨울의 눈가가 거칠게 흔들렸다. 참아왔던 감정이 단번에 폭발하며 걷잡을 수 없이 동요가 밀려왔다.
따지듯이 시후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놀란 겨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여졌다.
“아……!”
순간 강한 힘이 실린 손길이 겨울을 끌어당겨 건물 구석의 외벽으로 몰아붙였다.
쾅, 등이 거칠게 벽으로 밀착하고 시후는 겨울의 입술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강렬하게 빨아들이는 힘에 놀란 겨울의 호흡이 아찔하게 잘렸다. 팔을 뻗어 겨울의 옆 벽면을 세게 짚은 시후가 잘록한 허리를 끌어당기며 격정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하얀 앞니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자지러진 겨울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 비좁은 틈새를 벌리고 들어간 시후가 깊숙이 파고들어 겨울의 입안을 휘저었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처럼 비좁은 입안이 샅샅이 열기로 뒤엉키고 겨울의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박동했다.
하아, 짧지만 강렬했던 키스 끝에 떨어진 두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오고 갔다.
시후는 한 손으로 겨울의 뺨을 어루만지며 떨리는 입술로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넌 다 지워. 내가 기억할 테니까…… 아픈 기억은 전부 버리고 웃어. 할 수 있어.”
들끓는 목소리가 목울대를 가르며 흘러나왔다.
“그리고 지금 이 말도 잊어.”
두 팔을 뻗어 겨울을 품에 강하게 끌어안은 시후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사랑해.”
나직한 속삭임에 굵은 눈물이 뺨으로 흘러나왔다.
커다란 눈이 물기에 젖은 채 거칠게 떨렸다.
알 수 없는 파동이 심장 안에서 요동치고 두 다리를 지탱하고 서 있기 힘들었다.
잠시간 겨울을 끌어안고 있던 시후가 품에 안은 여린 몸을 놓아주고 뒤를 돌아 걸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겨울은 시야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쏟아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다리를 움직여 시후에게로 달려갔다.
“…….”
놀란 시후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뒤에서 제 허리를 끌어안은 겨울 때문이었다.
“미안하면 책임져.”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가 시후의 귓가로 연약하게 잠겼다.
“책임지고 내 곁에 있어. 평생 내 옆에서 늙어 죽어…….”
투정하듯 속삭이며 굵직한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플라타너스의 줄기처럼 한없이 여리고 가는 팔이었지만, 절대 놓아줄 수 없다는 듯 힘만은 간절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울컥한 시후가 낮게 묻자 겨울이 아이처럼 울음을 쏟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뒤를 돈 시후가 눈물에 젖은 뺨을 감싸며 입술을 부딪쳐왔다. 심장이 아래로 꺼지는 듯한 기분에 겨울의 가슴이 쿵쿵쿵 뛰었다.
뒷머리를 강하게 끌어당기며 퍼붓는 키스는 달콤하면서도 짜릿했다.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을 가르며 들어와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짙은 감정을 폭발시키며 분출했다.
강렬하게 헤집는 감각에 딱딱하게 얼었던 겨울의 가슴이 무덥게 녹아내렸다.
조심스럽게 입술이 떨어지고, 낮게 시선을 내리깐 시후가 타들어 갈 듯이 뜨거운 눈으로 겨울을 내려다보았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욕심내본 건 너 하나밖에 없어.”
겨울을 터뜨릴 것처럼 세게 품 안에 넣은 시후가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뱉었다.
“너 하나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달려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야.”
감정이 벅차오른 겨울이 시후에게 매달려 숨을 헐떡였다. 그런 겨울의 호흡마저도 전부 삼켜버리겠다는 듯이 시후는 그녀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치며 속삭였다.
“이제 절대 놓치지 않아…….”
여린 숨을 삼키는 입술이 지독하리만큼 집요했다.
“내 삶의 이유는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