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첫사랑, 마지막 사랑
(83/112)
83. 첫사랑, 마지막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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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첫사랑, 마지막 사랑
2022.07.17.
오롯하게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환희와 열락의 시간이 흐르고, 기진맥진해진 겨울은 침대에 늘어진 채 노곤하게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 옆의 시후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겨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내려갈 줄 모르고 솟아 있는 입꼬리를 흘끗 본 겨울이 입술을 쫑긋거렸다.
“뭐야. 왜 웃어?”
“그냥.”
엎드려 누워 있는 겨울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좋아서.”
나사 하나 풀린 사람처럼 실실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강시후답지 않았다.
마냥 좋다는 듯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는 시후 때문에 겨울의 양 볼이 핑크빛으로 달아올랐다.
새삼스럽게 창피해진 겨울이 덮고 있던 이불로 몸을 가리며 엉거주춤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샤워하려고.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찝찝해…….”
제어하는 법을 잃고 무자비한 횟수로 겨울을 안았던 시후였고, 그런 그를 있는 힘껏 받아들이느라 겨울의 여린 몸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힘이 풀린 다리로 바들바들 떨며 걸어가는 겨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후가 나직하게 웃으며 팔을 뻗었다.
“꺅!”
잘록한 허리를 단번에 한팔로 확 끌어당긴 시후가 겨울을 도로 침대에 눕히고는 자신의 품에 집어넣었다.
놀란 겨울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단단한 팔은 이미 가느다란 육체를 강하게 끌어안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옭아맨 후였다.
“이따가 같이 씻자. 지금은 이렇게 널 안고 있고 싶어.”
달콤한 속삭임에 겨울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듯, 두 팔로 강하게 끌어안는 힘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땀 많이 흘려서 미끈거리는데…… 침대 더러워지잖아.”
“원래 신혼부부의 침대는 늘 난잡한 법이지.”
장난스럽게 속삭이며 겨울의 귓가에 입술을 묻은 시후가 후,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겨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화르륵 상기되었다.
“아, 이거 놔!”
부끄러움 게이지가 한계치에 도달한 겨울이 두 팔을 마구 버둥댔으나 시후는 결코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두 팔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활어회처럼 팔딱거리던 겨울은 결국 시후에게서 벗어나길 포기하고 헥헥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내가 말했지, 절대 안 놓아줄 거라고.”
“……그게 이렇게 물리적으로 잡고 안 놓아준다는 뜻이었어?”
“글쎄, 맘 같아서는 365일 너랑 이렇게 붙어 있고 싶은데.”
관능적으로 속삭인 입술이 겨울의 목덜미에 가볍게 키스를 퍼부었다.
예민해진 감각에 움찔 몸을 떤 겨울이 야릇한 신음을 흘리자 그에 자극받은 시후의 손이 점차 엉큼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쇄골 아래를 쓸어내리던 커다란 손이 겨울의 보들보들한 배로 내려가며 부드러운 곡선을 따라 흘렀다.
움푹 파인 배꼽 아래를 문지르는 손길에 겨울이 어깨를 움찔한 순간, 납작한 배에서 꼬르륵하고 노골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소리가 큰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심지어는 하필 시후가 겨울의 배를 문지르고 있을 때였기에 발뺌할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시후가 설핏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여보는 남편보다 다른 게 고픈가 보네.”
“……이씨.”
창피해진 겨울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빨개진 뺨이 더없이 사랑스러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그녀의 몸을 가볍게 번쩍 안아 들었다.
“씻고 저녁 먹자. 배고프지?”
“이번엔 혼자 씻을 거야. 내려줘!”
“욕심이 크네. 그렇게는 안 되지.”
심통 나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겨울을 귀엽게 보던 시후가 그녀의 입술에 쪽 뽀뽀했다. 그제야 쉴 새 없이 쫑알거리는 입술이 얌전해지고, 삐쭉 나와 있던 입술이 쏙 들어갔다.
결국 시후의 욕망대로 또다시 같이 샤워하며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낸 뒤, 저녁은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다.
“진짜 이거면 돼? 그래도 우리 다시 만난 날인데 어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라도…….”
“으휴, 촌스럽기는.”
겨울은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익고 있는 고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생글생글 웃었다.
“난 사실 스테이크보다 삼겹살이 좋아. 여기에 맥주 한 캔, 그리고 볶음밥도 해 먹으면 완벽!”
“……나보다 고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야. 오빠가 1퍼센트 정도 더 좋아.”
“돼지한테 질투 날 것 같아.”
불만스럽게 삼겹살을 쳐다보던 시후가 집게로 고기를 꾹 누르며 쯧, 혀를 찼다.
물론 질투는 질투고 고기는 고기. 유난히 홀쭉해진 겨울의 배를 빵빵하게 채워줘야 했기에 고기를 굽는데 열성을 다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맛있게 먹는 겨울을 보며 시후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서렸다. 이제는 겨울이 오물오물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지경이었다.
“……고마워, 겨울아.”
“응?”
가볍게 캔맥주로 건배한 시후가 조금 촉촉해진 가슴을 느끼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내 곁에 있겠다고 해줘서.”
“……그렇게 좋아할 거 아니야. 이건 오빠한테 주는 벌이라니까?”
“…….”
“평생 나 하나만 사랑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서 늙어 죽어야 해. 내가 지긋지긋하도록 싫고 미워져도 절대 못 떠나. 내가 안 놔줄 거니까.”
겨울이 짐짓 무섭게 눈을 부릅뜨며 강조했다.
“그러니까 바람만 피워봐. 가루 될 때까지 맞을 줄 알아.”
다소 과격한 언사에 시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느슨하게 턱을 괸 시후가 은근한 눈빛으로 겨울을 주시했다.
“널 두고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날 것 같아?”
맞물려오는 시선은 몸이 떨릴 정도로 뜨겁고 거셌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한텐 너밖에 없었어.”
조금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솔직한 속삭임이었다.
“첫사랑이 마지막 사랑이야.”
그렇게 속삭이는 눈에서는 불꽃이라도 튀는 듯했다. 안면이 뜨거워지다 못해 화끈화끈했다.
……어쩌면 저렇게 창피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지.
“너무 사람이 능글맞아. 원래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원래? 언제?”
“언제는 무슨.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시베리아 한복판이었잖아. 쇼윈도 부부로 지낼 때는 완전히 나를 유령 취급하고 세상 싸늘한 눈으로 보고…….”
새삼스럽게 과거의 일이 떠오른 겨울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당시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시후의 태도에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뿐인가? 솔직히 옛날 일이라 말 안 하려고 했는데…… 내가 남편도 없이 드레스에 반지에, 식장까지 혼자 보러 다니면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 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그리고 또?”
“응?”
“서운했던 거 다 말해봐.”
“……신혼여행을 못 갔어. 해외는커녕 제주도도 못 갔어.”
16살 때 마지막으로 갔던 해외여행 이후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비행기 근처도 가보지 못한 겨울이었기에 당시 은근히 기대했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허울뿐이었던 결혼에 신혼여행은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늦었지만 신혼여행 갈까? 연말에.”
“진짜? 비행기 타고?”
“응.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어디든 데려가 줄게.”
“좋아, 좋아!”
언제 꽁해 있었냐는 듯 두 팔을 번쩍 올린 겨울이 아이처럼 좋아했다.
해맑고 순수한 미소가 마치 어린 시절 겨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 시후의 가슴이 예고 없이 두근거렸다.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손을 뻗은 시후가 하얀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이렇게 귀여워.”
쪽.
“사랑해, 여보.”
쪽, 쪽.
충동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후가 겨울의 뺨과 이마, 입술에 마구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식사 도중에 진하게 키스를 나눈 겨울과 시후는 오랜 탐닉 끝에 느릿하게 떨어졌다.
“……날 포기하지 않아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
겨울이 흐릿하게 숨소리처럼 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많겠지만…… 이제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오빠 곁에 있고 싶어.”
가만히 겨울을 내려다보는 시후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빛으로 변했다.
그녀가 제게 돌아오기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아픔이 있었을지 알기에 더더욱 책임감과 고마움을 느꼈다.
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집안을 몰락하게 한 자의 아들을 사랑하기로 한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테니까.
“내 아버지가 너와 네 가족에게 한 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부 죗값 치르게 할 거야. 그걸로 진 빚이 전부 사라지진 않겠지만.”
결연한 눈빛에서 비치는 그의 각오를 맞닥뜨린 겨울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난 솔직히 걱정돼. 강 회장이 지은 죄만큼 벌을 받길 원하지만, 그러다가 오빠가 다칠까 봐…….”
문득 불길함이 몰려온 겨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순 머릿속을 파고든 것은 미래에서 온 서른아홉 강시후의 목소리였다.
‘넌 3개월 뒤…… 날 살리려다가 죽어.’
그는 겨울이 시후를 구하려다가 죽었다고 말했었다. 그 말은 애초에 목숨의 위협을 당했던 건 겨울이 아니라 시후였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악마일지언정 제 친아들을 죽이려고 했을까 싶다가도, 계속해서 파고드는 우려를 떨칠 수는 없었다.
“나랑 절대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해. 무리하지 않기로.”
“당연하지. 평생 네 곁에 있기로 했잖아.”
두 팔을 뻗은 시후가 겨울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아 소중하게 토닥였다.
그 든든한 온기에 젖은 겨울이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미소 지었다.
***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가 찾아왔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던 희수는 묘하게 우울한 기분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 우울하다.”
일 년에 한 번뿐인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이렇게 집에만 처박혀서 혼자 뒹굴뒹굴하고 있는 이 현실이 착잡했다.
“친구들은 전부 연애한다고 바쁘고……. 함겨울도 다시 제 남편이랑 붙어서 염장질이고…….”
다시 화해해서 다행이긴 하였으나 왠지 심통 나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20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남들은 다 깔깔거리며 세상 신난 것 같은데…….
“…….”
슬그머니 핸드폰을 주워든 희수가 연락처에 저장된 재환의 번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그렇게 술기운에 원나잇 한 이후, 간간이 연락은 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다.
“……뭐, 어차피 나랑 잔 것도 기억 못 하는 놈인데 뭘.”
과음으로 필름이 끊겨 그날 밤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던 재환의 말을 다시금 떠올린 희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송장처럼 누워서 가만히 숨만 쉬다가 문득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니야!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면 집에 박혀 있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어?”
두 주먹을 불끈 쥔 희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나도 놀 거야!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
곧장 외출 준비를 하고 나온 희수는 SNS에서 포토존으로 유명한 강남의 한 카페로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크리스마스이브답게 가게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군중 속 유일하게 혼자인 희수는 괜히 주눅이 들어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구석진 테이블에 쭈그리고 앉았다.
원래는 베이커리와 케이크, 차가 화려하게 서비스되는 애프터눈티세트를 먹고 싶었으나 차마 혼자 먹을 자신은 없어 밍숭맹숭한 커피만 홀짝였다.
‘……혼자 온 사람은 나밖에 없네.’
그냥 아무나라도 데리고 올걸. 하다못해 박주형 놈이라도…….
한껏 멋 부리고 예쁜 카페에 왔지만 전혀 신나지 않았다. 오히려 우울한 기분이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그렇게 불편한 기분으로 약 10분을 보내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희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아, 여기…….”
걸음을 옮기던 희수가 멈칫했다. 계단 앞에는 아름다운 꽃들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는데, 요즘 SNS에서 제일 유명한 포토존 중 하나였다.
여기까지 온 거 포토존에서 사진은 찍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핸드폰을 셀카 기능으로 바꾸어 손을 한껏 뻗어봤지만, 예쁜 배경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희수가 때마침 위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발견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혹시 죄송하지만 저 사진 하나만 찍어 주시히익……!”
말을 잇던 희수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흠칫 놀라 기겁했다.
“재, 재환 오빠?”
또다시 우연히 마주친 전 남자친구 신재환에 놀란 희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