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이브
(84/112)
84.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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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이브
2022.07.20.
“저기요. 혹시 죄송하지만 저 사진 하나만 찍어 주시히익……!”
말을 잇던 희수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흠칫 놀라 기겁했다.
“재, 재환 오빠?”
또다시 우연히 마주친 전 남자친구 신재환에 놀란 희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희수구나. 여기서 다 만나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반갑게 인사하는 재환과 달리 모든 걸 기억하는 희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 그러게…… 우연이네. 오빠는 여긴 웬일이야?”
“나? 나는 그…… 뭐냐, 애프터눈티세트인지 뭔지 먹으러 왔어.”
“애프터눈티세트? 오빠가 그런 거에 관심이 있던가…….”
조금 의아했으나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의 취향도 변했겠거니 하고 수긍했다.
“뭐 그냥 먹는 거지. 근데 넌 여기 웬일이야?”
“어? 나는 그냥…… 커피 마시러. 그…… 여기가 예쁘다고 SNS에서 막 난리길래…….”
말끝을 흐린 희수가 머쓱하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술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고 맨정신으로 마주한 두 남녀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조금 긴장한 희수가 부자연스럽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 재환이 그녀의 휴대전화를 가져가며 손짓했다.
“조금 전에 사진 찍어 달라고 했지? 찍어줄게. 거기 서 봐.”
“어? 어…….”
연애 시절 8등신으로 길어 보이게 밑에서 위로 찍으라고 구박하고 세뇌한 덕인지, 재환은 굳이 시키지 않아도 계단 아래로 내려가 납작 허리까지 굽혀서 사진을 찍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장인 정신을 발휘해 영혼을 담아 사진을 찍는 재환을 보니 새삼스럽게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20대 초반만 해도 사진 찍는 걸 병적으로 좋아했고, 당시 남자친구였던 재환은 그런 희수의 전문 사진사나 다름없었다.
“희수야. 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다른 포즈 해봐.”
“응? 이, 이렇게? 어떻게?”
차마 사진 찍어준다는 전 남자친구 앞에서 예쁜 척은 못 하겠고…….
세상 로봇처럼 뚝딱거리며 어색한 사진 타임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오빠.”
그러던 중 은근슬쩍 주위를 스캔하던 희수가 문득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여기 혼자 왔나 봐?”
“응? 아…… 뭐.”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yes’로 받아들인 희수는 왠지 조금 들뜨는 기분을 느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애프터눈티세트를 먹으러 왔다니, 전혀 안 어울리지만 뭔가 좀 귀엽기도…….
“그럼 우리 같이 먹을래? 나도 혼자 왔는데.”
“아, 그게…….”
희수의 제안에 재환이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하이톤의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
“오빠아!”
돌연 아래에서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 올라온 여자는 재환의 옆으로 다가와 호들갑을 떨었다. 놀란 희수의 숨이 우뚝 끊겼다.
“여기 화장실도 개이뻐. 역시 오길 잘했다. 그렇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리고 예쁜 여자아이는 재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꺄르르 웃었다.
“이제 얼른 들어가자. 나 빨리 먹고 싶어.”
“기다려봐. 잠깐 나 친구랑 얘기 좀 하고.”
“친구? 누구? 저분?”
재환의 옆에 딱 달라붙은 여자는 계단 위에 서 있는 희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견딜 수 없는 창피함을 느낀 희수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아.”
혼자 김칫국을 원샷하다 못해 대서양까지 횡단하고 온 기분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30대 남자가 혼자 이런 카페에 올 리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어색하게 웃었다.
“같이 온 사람 있었구나. 몰랐네. 그…… 나는 올라가 봐야겠다. 맛있게 먹어!”
“잠깐만, 희수야! 핸드폰 가져가야…….”
“어, 어?”
당황한 희수가 말을 더듬으며 빠르게 등을 돌린 찰나였다.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려다가 재환의 부름에 얼떨떨하게 뒤를 돈 희수가 그만 발을 삐끗했다.
“으…… 꺄악!!!”
계단 위에서 위태롭게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휘청거리던 희수는 그대로 층계 아래로 쿠당탕 굴러떨어졌다.
놀란 재환이 희수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그의 옆을 지나 계단 밑으로 떼구르르 구르며 바닥까지 추락했다.
“희수야!!!”
아연실색한 재환이 다급하게 뛰어가 엎어진 희수를 부축해 일으켜 안았다.
“괜찮아? 정신 들어?”
“어머. 괜찮으세요, 언니?”
재환과 여자가 양옆에서 부축하며 걱정을 쏟아내었으나 희수의 귀로는 그들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온몸이 욱신욱신 깨질 것처럼 아팠으나 그 고통조차도 미칠 듯한 쪽팔림 아래에 묻히고 말아버렸다.
“아뇨. 아뇨. 저 진짜 괜찮아요. 괜찮아, 오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에라도 다이빙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게,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제 얼굴이 얼마나 시뻘게졌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나 걸을 수 있어, 오빠.”
“아니야. 그렇게 심하게 굴렀는데, 같이 병원을…….”
“진짜 괜찮아. 나 갈게.”
어수선하게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한 희수가 여자를 향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죄송해요, 데이트 방해해서. 그럼 이만…….”
경황없이 아무렇게나 말한 뒤 확 몸을 돌렸는데, 재환이 뒤에서 희수의 손을 붙잡았다.
그 힘에 우뚝 멈춰선 희수가 얼빠진 얼굴로 재환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어? 왜?”
“너…… 코에…….”
“……코?”
……뭐지, 이 묘한 데자뷔는?
설마…….
“쌍코피…….”
주르륵, 희수는 제 코에서 무언가 뜨끈한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쓱 코를 한번 문지르니 붉은색 선혈이 까꿍, 하고 묻어나왔다.
“이, 씨…….”
또 쌍코피…….
……내 비싼 실리콘,
재수술……각…….
쿵!!!
“희수야!!!”
놀란 재환이 낙엽처럼 힘없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는 희수를 황급히 일으켜 등에 업었다.
완전히 기절해 의식이 없는 그녀를 업고 서둘러 근처 대학병원의 응급실로 향했다.
***
“으음…….”
찌뿌둥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낯선 천장이 달려들었다.
미간을 좁힌 희수가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옆에 앉아 있던 재환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희수야! 괜찮아? 정신이 들어?”
“오빠……. 어떻게 된 거야?”
마지막 기억은 분명 카페에서 재환과 그의 애인으로 추정되는 여자 앞에서 계단을 구르고 쌍코피가 터진 일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눈앞이 핑글 돌더니 정신이 뚝 끊기고, 이후로부터는 완전히 암전이었다.
“너 갑자기 쓰러져서 내가 응급실로 데려왔어. 많이 아파? 괜찮아?”
“아…… 미안, 민폐 끼쳤네. 나 괜찮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희수의 얼굴이 또다시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이게 웬 생쇼야, 진짜…….’
차라리 드라마였다면 넘어질 때부터 남자 주인공이 짠, 하고 멋지게 붙잡아줬겠지만, 당연하게도 현실에 그딴 건 없었다.
그저 계단 구르기 곡예 쇼와 쌍코피 요정만이 존재할 뿐.
“민희수 환자분?”
그때, 저 멀리서 하얀 가운을 걸친 의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코 끝에 걸친 안경을 위로 올린 그는 검사결과지와 희수를 번갈아 보며 볼펜으로 무언가를 적었다.
“네. 제가 민희수인데요.”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옆에 보호자분은 혹시 남편분이십니까?”
“아, 저는…….”
“아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재환이 대답하기도 전에 희수가 황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그러자 재환이 희수를 물끄러미 보고는 의사를 향해 고개 돌렸다.
“네. 그냥 친구입니다.”
“그럼 민희수 환자분, 이른 시일 내에 남편분 모시고 우리 병원 산부인과로 내원하세요.”
“……네?”
그 순간 희수의 머릿속에서 띵, 하고 출처 없는 종소리가 울렸다.
제 귀가 잘못된 건가 싶어 얼빠진 얼굴로 다시금 되물었다.
“어디요?”
“산부인과요.”
“거길 제가 왜…….”
“임신하셨는데요. 모르셨습니까?”
쿵. 희수의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네?”
“임신이시라고요. 원래 초기에는 빈혈 증세가 급격하게 올 수 있어요. 예민한 시기인데 갑자기 외부충격도 같이 받아서 일시적으로 혼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희수의 동공이 거칠게 떨렸다. 맥이 탁 풀리며 눈앞이 까맣게 물드는 기분이었다.
“더 자세한 건 산부인과에서 다시 검사를 받아보세요. 이 수액 다 맞으시고 수납하신 뒤에 귀가하시면 됩니다. 그럼.”
할 말을 끝낸 뒤 의사는 곧바로 저벅저벅 걸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뒤에 덩그러니 남은 희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
임신이라고?
……임신?
내가 임신? 내가 왜 임신?
최근 1년 동안 남자친구도 없었는데……?
3주 전쯤 술 마시고 신재환이랑 실수로 하룻밤 보낸 거 외엔 남자랑 잔 적도 없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있던 희수를 현실 세계로 끌어들인 것은 재환의 목소리였다.
“희수야. 너…….”
희수 못지않게 놀란 재환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만나는 남자 있었어……?”
“…….”
재환의 말에 희수가 헛숨을 터뜨렸다.
느껴지지 않던 현실감이 돌연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울컥 감정이 치받쳐 올라올라온 희수의 눈가가 촉촉하게 달아올랐다.
커다란 눈가에 하나둘 고이기 시작한 투명한 눈물이 소리 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희, 희수야. 울어?”
돌연 울음을 터뜨린 희수에 당황한 재환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를 달랬으나 그럴수록 희수의 울음은 더욱더 커질 뿐이었다.
“어떤 놈이야. 내가 가서 반 죽여놓을게. 웬 미친 자식이 너를…….”
“…….”
“너 이렇게 만든 자식 전화번호 뭐야. 당장 가서 그 새끼 거시기에 자물쇠를 채우든, 거세를 하든 할 테니까 빨리 말해!”
“…….”
“누구냐니까? 왜 말을 안 해…….”
다그치는 재환 앞에서 희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점차 커지는 울음은 결국 오열로 번지고 희수는 재환의 품에 안겨 엉엉 목을 놓아 대성통곡을 했다.
……그냥 하룻밤 흑역사로 끝났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랑 잔 것조차 기억 못 하는 전 남자친구의 애를 갖는 일은 없어야만 했다.
한 10년 후 그땐 그랬었지, 하고 가볍게 추억할 만한 어린 날의 귀여운 실수 정도에서 그쳐야 했다.
“희수야, 울지 마. 괜찮아…….”
재환이 엉엉 우는 희수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려고 노력했으나 그녀의 울음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하룻밤 실수한 건데…… 딱 하룻밤…….’
군대에서도 사격 1등 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더니, 아주 백발백중 명사수가 따로 없다.
“제발 다 꿈이라고 해줘…….”
……20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
평생 잊지 못할 역대급 흑역사가 생성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