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아끼고 아껴서
(85/112)
85. 아끼고 아껴서
(85/112)
85. 아끼고 아껴서
2022.07.24.
일 년에 단 하루뿐인, 모두가 들뜬 분위기에 젖어 드는 크리스마스이브.
함께 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시후와 겨울에게 지금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모처럼 되찾은 여유였기에, 아침부터 찰떡처럼 달라붙어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분위기 좋은 카페도 다녀온 겨울과 시후는 집 근처 공원을 함께 거닐며 달콤한 데이트를 즐겼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 너무 좋다. 눈도 예쁘게 내리고.”
크리스마스를 맞아 다채로운 전구로 나무들을 화려하게 장식해놓은 공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낭만적이고 로맨틱했다.
살랑살랑 내리는 눈송이와 기분 좋게 불어오는 겨울바람에 겨울이 화사하게 웃으며 시후의 팔을 잡아당겼다.
“여기 잠깐만 기다려봐, 오빠.”
“뭐 하게?”
대답 대신 무작정 무릎을 굽힌 겨울이 뽀얀 손으로 새하얀 눈을 만지작거리며 둥글게 뭉쳤다.
동글동글한 눈덩이는 크기가 꽤 커지더니 머지않아 시후의 주먹보다도 커다란 크기가 되었다.
그 위에 비교적 작은 눈덩이를 만들어 합체시킨 겨울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짠! 강시후 눈사람.”
눈코입도 없는 맨송맨송한 눈사람을 보며 픽 웃음을 흘린 시후가 주저앉아 눈사람을 콕콕 찔렀다.
“인간적으로 너무 못 만들었다. 예술 점수 빵점이네.”
“뭐래. 그러는 오빠는 얼마나 잘 만들길래?”
“이런 건 특징을 잘 잡아서 디테일을 살려야지. 내 뛰어난 미적 감각을 한번 보여줘야겠네.”
시후가 장난스럽게 눈을 뭉치며 겨울의 미니미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겨울의 주먹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눈덩이 두 개를 겹친 뒤 머리 부분에는 손가락으로 커다랗게 홈을 움푹 파서 눈 모양을 두 개 만들었다.
왕눈이 눈사람이 완성되고 시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겨울에게 눈짓했다.
“자, 봐봐. 디테일이 살아있지?”
“디테일은 무슨. 내가 이렇게 쪼그마하고 못생겼어?”
“쪼그마한 건 맞지. 손도 아기처럼 작고, 발도 어떻게 걷는지 신기할 정도로 자그마하고.”
“나 대한민국 여자 평균이거든?! 이거 봐!”
작은 손바닥을 쫙 펼친 겨울이 최대한 길어 보이도록 뼈마디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래 봐야 한없이 앙증맞은 손이 사랑스러워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자신의 손에서 장갑을 빼내 그녀의 손에 꼭 끼워주었다.
“귀엽다는 뜻이야.”
시후의 장갑은 그의 손만큼이나 커다랬기에 겨울의 손가락이 들어가고도 반 마디 이상이 남아돌았다. 그 끝을 쥔 시후가 귀여워죽겠다는 듯한 눈으로 겨울을 보자 부끄러워진 그녀가 커다란 동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장갑을 사이좋게 나눠 낀 두 사람은 시린 맨손은 주머니에 넣고 따뜻하게 장갑을 낀 손을 마주 잡은 채 여유롭게 공원을 따라 걸었다.
마치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처럼 설레는 기분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에 취해 추위도 모르고 하염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얼마나 걸었을까, 공원의 끝자락에 다다른 겨울과 시후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헐, 계단이 왜 이렇게 많아?”
화려한 분수대가 있는 광장으로 올라가는 기다란 계단을 앞두고 겨울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런 겨울의 굽 높은 부츠를 흘끗 본 시후가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갯짓했다.
“너 신발 때문에 더 걷기 힘들 것 같은데. 돌아갈까, 이제?”
“어허, 어딜. 여기까지 왔는데 분수대는 보고 가야지!”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겨울이 자그마한 주먹을 치켜들며 악동처럼 웃었다.
“우리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업어주기로 할래?”
“뭐? 네가 날 어떻게 업는다고…….”
“안 내면 진 거, 가위바위보!”
얼렁뚱땅 가위바위보를 시작한 겨울 때문에 시후가 얼떨결에 보자기를 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주먹을 내밀고 시무룩하니 입술이 댓 발 나온 채 시후의 손을 원망스럽게 보는 겨울이 있었다.
“이, 씨…….”
“그러게, 본전도 못 찾을 거 왜 하자고 했어? 원래 이런 건 하자고 하는 사람이 지는 거야.”
“은근히 져주는 센스는 없나? 내가 뭐 내는지 보고 0.1초 정도 늦게 내는 동체 시력 없냐고.”
“안타깝게도 남편이 그 정도로 대단한 놈은 아니라서.”
시후가 겨울의 찹쌀떡 같은 볼을 가볍게 꼬집고 늘이며 웃었다.
“빨리 안 오면 떼 놓고 간다?”
“아, 같이 가!”
성큼성큼 위로 멀어져가는 길쭉한 다리를 바쁘게 쫓아갔다.
잡으라는 듯 뒤로 뻗어진 손을 얄밉게 바라보던 겨울이 와다다 달려가 시후의 목덜미를 꽉 끌어안고 매달렸다.
거대한 체구는 겨울이 매달렸는데도 휘청거리기는커녕 뿌리 깊은 나무처럼 굳건했다. 그런 시후의 등에 매달리며 겨울이 장난스럽게 헤실거렸다.
“나 업어주면 안 잡아먹지.”
무섭긴커녕 사랑스럽기만 한 협박에 웃음을 터뜨린 시후가 등에 달라붙은 겨울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제대로 업었다.
떨어지지 않도록 겨울의 허벅지를 양팔로 지탱한 시후가 천천히 계단을 밟으며 위로 올라갔다.
“함겨울 네가 날 잡아먹어? 100년은 이를 것 같은데.”
“그럼 100년 뒤에 꼬부랑 할아버지 되면 잡아먹으면 되지. 의학 기술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130살까지 못 살겠어?”
“130살 되어도 넌 나한테 안 돼.”
나직하게 웃은 시후가 은근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속삭였다.
“평생 내가 조금씩 아끼고 아껴서 잡아먹고 살 거니까.”
“……이씨.”
창피해진 겨울이 시후의 등을 투덕거리며 시위했다.
“기분 나빠졌어. 내려줘!”
“싫어.”
“내려달라니까?”
“절대 싫어. 위에 올라갈 때까지 안 내려줄 거……아!”
일순 귓바퀴에 느껴지는 자극에 놀란 시후가 움찔했다. 하얀 이로 시후의 귀를 깨문 겨울이 그가 주춤한 사이를 틈타 널찍한 등에서 펄쩍 떨어져나와 계단 위로 빠르게 도주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계단의 끝에서 붙잡혔고, 커다란 거구에 둘러싸인 겨울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미안. 항복! 백기……!”
“항복은 누구 맘대로 항복? 덕분에 불타오르는데.”
장난스럽게 속삭이는 말과는 달리 눈빛은 당장에라도 눕혀버릴 것처럼 욕망으로 가득했다.
“우리 여보……. 내 성감대가 귀인 건 또 어떻게 알고.”
온통 흑심뿐인 눈이 은근하게 유혹하는 듯이 내려왔다. 그 섹시한 자태에 심쿵해버린 겨울이 얼굴을 붉히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2차 도주를 꿈꿨다.
그러나 잘록한 허리를 꽉 끌어안은 단단한 팔뚝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하고 그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놔. 여기 밖이야!”
“밖이면 뭐 어때서. 우리가 부부인 거 온 세상이 아는데.”
섹시하게 속삭이며 내려다보는 눈빛은 겨울의 심장을 단숨에 달아오르게 했다.
살살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설렌 겨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지난밤을 떠올리게 하는 길쭉한 손가락이 겨울의 귓불과 뺨을 야릇하게 스치자 여린 다리가 움찔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으나 허리를 감싼 팔 때문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겨우 두 밤 몸을 섞었으나 벌써 겨울의 몸을 통달한 듯 그는 여유만만이었다.
어딜 어떻게 만져야 겨울이 좋아하는지, 어떻게 키스하고 어디를 공략해야 귀여운 소리를 내며 품에 안기는지…….
“오늘 밤에는, 네가 또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데.”
겨울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부분을 날마다 개척해나가는 시후였기에,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달아오르며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버렸다.
그런 겨울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린 시후가 그녀의 작은 손을 움켜쥐고 하얀 뺨에 쪽 뽀뽀했다.
“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해…….”
부끄러워하는 얼굴도, 장난스럽게 웃는 표정도.
그녀의 향기로운 체향과 짜그르르 울리는 웃음소리 하나까지도 소중해서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도 아쉬울 정도였다.
“……나도 행복해, 오빠.”
겨울이 살며시 웃으며 시후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온기가 한데 얽혀 뒤섞이자마자 광장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분수에서는 화려한 물줄기가 축배를 들듯 치솟았다.
“와, 예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춰 갖가지 아름다운 조명으로 수놓아져 있는 분수는 웅장하고 눈부셨다.
시후와 겨울은 서로의 온기에 기댄 채 그 영롱한 풍경을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잠깐 벤치에 앉아서 쉴까?”
“응. 그러자.”
분수대 옆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은 시후와 겨울은 잠시간 감상에 빠졌다.
환상적이고 눈이 즐거운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겨울이 문득 살며시 웃음을 터뜨렸다.
“……있지, 오빠.”
찰나의 침묵을 뚫고 입을 연 겨울이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사실 나…… 기억을 잃기 전에도 오빠를 좋아했었어.”
“…….”
“사랑해서, 그 마음이 버려지지 않아서 미치도록 괴로웠어.”
처음 안 사실이었다. 쇼윈도 부부로 지내는 동안 겨울이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한다고만 생각했었지, 좋아하는 감정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어본 적 없었다.
“그래서 오빠 새어머니가 나한테 혼전 계약서를 제안했을 때도 거절했었어. 무려 1억이나 준다고 했는데, 못하겠더라. 도저히 오빠를 배신하는 짓은 못 하겠더라고…….”
“……그럼 그 계약서는 결국…….”
“응, 가짜였어.”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 피임을 철저히 하고, 생기면 그 즉시 임신중절수술을 받겠다는 서약이 담긴 계약서는 전부 유서진의 조작이었다.
“이미 고인 된 사람 탓하기도 뭐하지만, 기억을 잃은 걸 빌미로 내 사인까지 위조해서 그런 계약서를 만든 건…… 너무 소름 끼쳐.”
그 조작된 계약서로 인해 시후와 심한 갈등을 겪었었기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제 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유서진에게 왜 그랬냐며 따질 수도 없었다.
“참. 그런데 돌아가신 새어머니랑 동생…… 교통사고 사건은 어떻게 됐어? 타살이라고 했잖아. 범인은 아직 안 잡힌 거지?”
“응. 범인은 아직 안 잡혔어. 그런데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아.”
왜 유서진과 강창영은 폭우까지 쏟아지던 그 늦은 밤에 CCTV도 없는 시골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는지, 유서진이 사망 전 핸드폰에 남긴 12345라는 숫자는 무슨 의미인지…….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너무도 많았다.
“그리고 내 이복동생, 강창영은 아직 살아 있어.”
“뭐?”
놀란 겨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번에 이미 장례식까지 다 치렀잖아. 어떻게…….”
“유서진은 사고 직후에 바로 사망했는데, 강창영은 지금 의식불명으로 아직 숨이 붙어 있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독하긴 하지만.”
“……설마 그거, 강 회장이 꾸민 일이야?”
등골이 서늘해진 겨울이 건넨 질문에 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계를 이을 자식이 식물인간 상태라는 걸 세간에서 알게 되면 치명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살아 있는 자식을 죽었다고 거짓으로 꾸며서 강원도에 있는 의료원에 가둬놨더라고.”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그래도 지금 강창영은 내가 데리고 있어.”
“오빠가?”
“응. 강 회장이 더는 너와 네 가족, 그리고 나를 위협하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카드야. 그 인간으로서는 강창영이 살아 있다는 게 세간에 알려지면 곤란할 테니까.”
잠시 할 말을 잃은 겨울이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여러 가지 정황을 조합하며 상황을 파악하던 중,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겨울이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의문을 품은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어떤 점이?”
“아무리 회사에 사활을 건 사람이라고 해도 숨이 붙어 있는 아들을 사망한 것으로 둔갑시켰다는 게…….”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일지라도, 식물인간이든 어떻든 심장이 뛰고 있는 자식을 죽은 것으로 꾸민 것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빠 동생이, 뭔가 죄를 지은 게 아닐까?”
조심스럽게 던진 물음에 시후의 눈이 소리 없이 커졌다.
“친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겨울이 목소리를 나직하게 내리깔았다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