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육 上
에이든이 레인디아를 데려온 곳은 또 다른 건물이었다.
그는 한 팔로 레인디아를 감싸 안고 있었다. 눈밭을 걸을 때 레인디아가 헛구역질을 하는 소리를 듣더니 앞으로 안아 든 것이다.
덕분에 몸은 편해졌지만 레인디아는 심적으로 한계에 달해 있었다. 고개를 들면 그의 얼굴이 바로 보였으니까. 거기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숨소리도 가까웠다. 마치 육식 동물의 입 안에서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날카로운 이빨에 꿰뚫려 숨통이 끊어지기만 기다리는 먹잇감처럼.
“여기가 본관이야.”
여기가 본관이라니. 그렇다는 건…….
레인디아는 자신이 도망친 곳이 별채였단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독립적으로 놓고 보면 별채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크기였다. 도망칠 때만 해도 사방이 온통 새하얀 눈밭이었으니까. 설원을 둘러싼 숲조차 손톱처럼 보일 만큼 멀었다.
별채가 그 정도라면 본관은 그보다 훨씬 넓단 뜻이었다.
맨다리로 이곳을 도망치는 게 가능할까? 어디를 보아도 아득한 절망뿐이었다.
레인디아는 여전히 에이든의 품에 기댄 채 회오리 모양의 원형 계단을 올라갔다. 빙글빙글 시야가 돌아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윽고 침실에 도착했다. 방 안의 가구들은 전부 먼지가 쌓이지 않게 천으로 덮어놓은 상태였다.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소파에 앉히더니 관성처럼 난로로 다가갔다.
탁, 탁.
정확히 두 번의 마찰음과 함께 성냥에 불이 붙었다. 에이든은 난로 안에 성냥을 집어 던지곤 창가로 걸어갔다.
촤라락!
겨우 커튼을 하나를 걷었을 뿐인데 방 안 가득 햇살이 들어찼다. 레인디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살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공기를 둥둥 떠다니는 먼지 입자는 마치 겨울철 바람에 섞여드는 얼음 알갱이 같았다.
“어때? 마음에 들어? 채광이 가장 좋은 방이야. 전에 있던 방은 너무 칙칙했잖아.”
아. 에이든이 작게 탄식하는 소리에 레인디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디아의 짐을 안 챙겨왔네. 가방 하나를 침대 밑에 숨겨두었지?”
레인디아는 심장이 철렁했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 있던 허리가 붕 떴다. 에이든 역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든의 두 눈이 얄궂게 휘었다.
“그 안에서 재밌는 걸 봤는데,”
“자, 잘못 가져온 가방이에요. 백작가의 하녀도 함께 왔는데, 가방이…… 비슷해서…….”
어쩌면 에이든은 자신이 여자란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지표들이 모여 하나의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거짓말이 터져 나왔다. 처음 내뱉은 거짓말을 주워 담기 위해 계속, 계속…….
에이든은 그런 레인디아를 보더니 흐음, 소리를 냈다.
“그렇게 생긴 가방이 여러 개 있을 수도 있구나?”
색이 다른 천으로 누덕누덕 기운 가방이었다. 그제야 레인디아는 꾹 입을 다물었다. 에이든이 소파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소파 등받이에 손을 얹은 채 몸을 숙였다.
“왜 겁먹어. 디아한테 화내는 거 아닌데.”
“……죄, 죄송해요. 저는, 거짓말을 하려던 게…….”
“미안해.”
뜻밖의 태도에 레인디아는 얼떨떨했다. 사과는 자신이 해야 하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이 남자가…? 어째서?
“내가 못되게 굴어서 미안해. 많이 겁먹었지?”
못되게 굴었단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의 흘러내린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가는 머리카락은 힘없이 툭툭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에이든은 정성껏 머리카락을 넘겨 그녀의 시야를 확보해 줬다.
“디아가 남잔 줄 알았어. 그래서 엄청 화가 났거든. 그 여자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났는데 하필이면 남자라니. 내 꼴이 우습잖아?”
그 여자는 에이든이 그리워한다는 사람이겠지?
하지만 자신은 그 여자가 아니었다.
“저, 저는 그 여자가 아니에요.”
“그래, 그 여자는 잊자. 난 디아가 맘에 들거든. 그래서 네가 나와 이곳에 계속 있어 주면 좋겠어.”
“흣……!”
에이든은 허공에서 가볍게 휘젓던 손을 레인디아의 뺨에 얹었다. 에이든을 만나기 전 바닥에 쓸려 상처가 난 오른뺨이었다. 그가 붙여준 거즈는 도망치는 동안 떨어져 버렸다. 다행히 피는 멈췄고 흉이 남지 않을 만큼의 얇은 딱지가 얹어져 있었다. 에이든은 그 부위를 제외하고 레인디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생각해 봐. 오랫동안 굶주려 있던 사람이 음식을 찾아냈어. 그런데 알고 보니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각품이었던 거야.”
에이든은 상처를 피해 뺨을 토독토독 두드렸다.
“기분이 어떨 거 같아? 누구든 원망했을 거야. 디아라면 어땠을까?”
“……저, 저는…….”
레인디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 레인디아의 정신을 지배하는 건 스물넷 처녀의 몸에 갇힌 어린 소녀였다. 사창가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런 레인디아를 보던 에이든이 슥 한쪽 바지를 걷어 올렸다.
푸욱!
발목에 감추어둔 단검을 빼내 소파에 박아넣는 덴 3초도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레인디아가 그 사실을 알아채는 게 더 오래 걸렸다.
“나라면 그 가짜를 박살을 내버렸을 거야. 디아가 수컷이었다면 이걸 너의 하얀 목덜미에 처박았을 거란 뜻이기도 해.”
에이든이 서늘한 경고를 내뱉었다.
멈춰 있던 레인디아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단검을 쥔 에이든의 손등엔 굵은 핏줄 가닥이 불거져 있었다.
“디아, 거짓말은 나쁜 거야. 앞으로 나한텐 거짓말하지 마.”
에이든은 꽂힌 단검으로 소파를 부욱 긁었다. 천이 벌어지며 솜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레인디아의 눈엔 새하얀 솜이 짐승의 내장처럼 붉어 보였다. 그리고 뜯겨나간 것은 소파가 아니라 사람의 가죽.
“대답.”
“네. 네……, 거, 거짓말, 하지 않을게요…….”
레인디아는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다.”
에이든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는 뽑아 든 단검을 등 뒤로 휙 던져버렸다. 벽에 부딪힌 단검이 바닥에 떨어져 핑그르르 돌다가 멈추었다. 서슬 퍼런 칼날은 레인디아를 향해 있었다. 레인디아가 질끈 눈을 감았다. 에이든은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오늘까지만 불편하게 지내자. 내일이면 사람들이 올 거야. 그래서 말인데, 필요한 거 있어?”
사람이 온다고? 어떻게? 멍하니 생각하던 레인디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물건이 아니라 이곳을 빠져나갈 구멍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요구했다간…….
“무엇이든 말만 해. 디아가 원하는 건 전부 구해 줄 테니까.”
이 저택을 벗어나는 건 제외하고.
섬뜩한 목소리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 같았다.
“춥지? 난로 앞에서 몸 녹이고 있자. 침대는 내가 치워둘게.”
에이든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레인디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난로 옆에 있는 흔들의자에 그녀를 앉혔다. 레인디아는 타들어 가는 장작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에이든이 침대를 덮고 있는 새하얀 천을 거둬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시트가 가볍게 흔들렸다. 창밖에서 들어온 햇빛 속에서 먼지 입자가 금싸라기처럼 반짝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데 눈에 눈물이 괴었다. 레인디아는 황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제 어쩌면 좋지.’
아가씨와 앤. 두 사람은 무사히 노스빌리움에 도착했을까?
그리고 나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 공금 by Jira
* * *
벨리타와 앤이 노스빌리움에 머문 지 며칠이 지났다.
달리 말하자면 레인디아가 실종된 지도 그만큼 시일이 지났단 뜻이었다. 레인디아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앤은 벨리타를 힐끗거렸다. 평소 레인디아와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이쯤 되니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가씨, 정말로 안 찾으실 생각이세요?”
앤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벨리타는 푹신한 쿠션에 등을 기댄 채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다리 위엔 초콜릿이 가득 담긴 고급스러운 원형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벨리타는 야금야금 초콜릿을 먹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찾다니? 뭘?”
“그 아이요. 레인디아 말이에요.”
앤이 우물쭈물 대답하자 벨리타는 흥 코웃음을 쳤다.
“내가 걜 왜 찾는데?”
“늑대에게 잡아먹혔으면요? 그 숲 주변엔 변종 늑대가 산다고 들었는데…….”
“어휴, 시끄러워. 죽으면 죽은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너 걔랑 그렇게 친했니?”
벨리타가 치를 떨었다.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앤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레인디아가 사라지고 나니 벨리타의 짜증이 전부 자신에게 향해 죽을 맛이었다.
‘레인디아는 어떻게 저 미친 성격을 다 받아줬대?’
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다 입을 틀어막고 벨리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벨리타는 지그문 후작이 선물해 준 초콜릿을 먹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걔 그래 보여도 엄청 독종이야.”
“네?”
“예전에도 꽤 오래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적이 있어.”
“그, 그게 정말인가요? 대체 언제요?”
벨리타는 기억을 더듬느라 눈살을 찌푸렸다.
“성축일(聖祝日)에 수도를 방문했을 때 갑자기 사라져서……. 하여튼 우리 가족은 축일이 끝나고 백작령으로 돌아갔는데, 그년이 한참 뒤에 거지꼴이 돼서 나타난 거야, 글쎄.”
“레인디아만 두고 백작령으로 돌아가셨단 건가요?”
“그럼 그년을 기다리리? 그때 수도에서 난리 난 거 몰라? 헉!”
버럭 소리치던 벨리타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의아함을 느끼던 앤도 마찬가지로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벨리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왜 그런 걸 물어서 날 곤란하게 해? 내가 감옥에 들어갔으면 좋겠어?”
“아, 아니에요. 아가씨! 당치도 않으세요. 그리고 감옥에 들어간다면, 저도 같이 들어가겠죠…….”
앤은 혹여 누가 들은 건 아닐까 주변을 살피기까지 했다.
성축일은 신성 솔레디온 제국의 4대 축일 중 하나였다. 역사가 가장 긴 축일이기도 해서 성축일 기간이 되면 온 백성이 수도 하이락에 모였다.
8년 전, 성축일 당일 수도가 봉쇄된 적이 있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른 채 몇 날 며칠을 수도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 탓에 봉쇄 기간 동안 성벽 안에선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살인귀가 돌아다닌다느니, 황궁에서 살인이 일어났다느니 하는. 레인디아는 하필 이 기간에 실종이 됐다.
가뜩이나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여관은 만원이 됐고 돈이 없는 백성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크고 작은 범죄가 일어났고, 귀족 중 일부는 경비대에 뒷돈을 찔러넣은 뒤 몰래 고향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벨리타의 가족은 봉쇄가 풀리는 즉시 백작령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황명이 있었다.
‘수도가 봉쇄된 해 성축일을 입에 올리는 자는 엄형에 처한다.’
실제로 엄형에 처한 자는 없었으나 수도가 봉쇄된 것은 제국의 건국 이래 처음 있던 일이었고, 성축일 당시의 공포는 여전히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건재했다. 그 때문에 백성들은 굳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지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벨리타는 당시 10살도 안 됐으나 그녀의 부모가 워낙 신신당부했던 까닭에 그때의 기억을 잊고 살았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살인귀에게 죽은 줄 알았던 레인디아가 거지꼴을 하고 백작령에 돌아왔단 사실이었다.
그레제 백작 부인은 레인디아가 사라진 이유를 묻지 않았고, 레인디아도 황명을 어기면서까지 자신이 사라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사실은 레인디아가 인신매매단에 납치되었었단 걸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됐을 뿐이다. 벨리타는 그런 레인디아에게 동정심을 느끼긴커녕, 꾸역꾸역 백작가로 기어 돌아온 모습을 바퀴벌레처럼 여기며 역겨워했다.
“하여튼 기분 나빠. 내가 걔였다면 진즉 죽었을걸? 이렇게 사는 게 비참해서라도.”
벨리타의 입 안에서 초콜릿이 아그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사창가에서 꾸역꾸역 기어 나와선.”
“어머. 걔 창녀였어요?”
앤이 귀를 쫑긋 세우며 되물었다.
“아니. 어릴 때 엄마가 구해 줘서 몸 팔기 전에 거길 나온 거야.”
앤은 그제야 레인디아가 백작가에서 노예처럼 부려지는 이유를 이해했다.
‘그 지옥에서 꺼내준 은인인데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 싶겠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인간이라면.
레인디아의 모습은 은혜를 갚는 것을 넘어서 복종에 가까웠으나 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가뜩이나 백작가의 사정이 안 좋아져 봉급이 줄었는데, 이젠 레인디아의 몫까지 자신이 배로 일해야 했다. 그것이 퍽 못마땅했다.
‘내 코가 석 잔데 누굴 걱정해. 어휴, 망할 년.’
앤은 마음속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으앙~ 맛있어. 초콜릿은 하이락보다 낫네.”
벨리타는 방정맞게 두 다리를 흔들었다.
앤은 몹시 부러운 눈빛으로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를 바라봤다. 황후의 눈 밖에 나도 결국 귀족은 귀족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인맥으로 북부에서 온갖 부귀는 다 누렸으니 말이다. 자신처럼 천한 하녀가 이런 삶을 누리려면 다시 태어나는 방법밖엔 없겠지.
“그렇게 맛있으세요?”
앤이 은근히 묻자 벨리타가 초콜릿 하나를 쥐고 흔들었다.
“너도 줄까?”
“네, 네?”
앤은 못 알아들은 척 되물으며 꿀꺽 침을 삼켰다. 벨리타의 눈이 얄궂게 휘었다.
“자. 가서 주워 먹어.”
벨리타가 침대 아래로 초콜릿을 던졌다. 앤은 황급히 굴러가는 초콜릿을 따라갔다. 바닥에 쭈그려 앉은 그녀는 초콜릿을 주워 후후 불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에 집어넣었다.
“어때? 맛있지?”
벨리타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앤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 아주 살살 녹아요.”
생전 처음 먹어보는 초콜릿은 혀가 아릴 만큼 달콤했다. 바닥에 떨어진 게 무슨 대수일까? 여긴 하녀들이 하루에 서너 번은 청소하는 후작가의 침실이었다. 앤은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비참함을 잊고자 했다.
“앤. 넌 백작가의 하녀인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해. 너 같은 게 언제 그런 걸 먹어보겠니? 안 그래?”
벨리타가 앙증맞게 웃으며 묻는 말에 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단맛은 사라지고 씁쓸한 패배감만이 남아 혀를 감싸고 있었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 앤, 나는 방금 일어난 거야. 알았어?”
“네! 아가씨……!”
앤은 벨리타가 들고 있던 초콜릿 함을 닫아 황급히 침대 아래에 숨겼다. 그사이 벨리타는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가 누웠다. 벨리타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나다, 벨리타.”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지그문 후작이었다.
머스탱 지그문.
그레제 백작의 친구이자 이 대저택의 주인이었다.
지그문 후작은 일찍이 부인을 잃고 다섯 딸을 홀로 키웠다. 그의 딸들은 하나같이 현숙한 숙녀로 자라 시집을 갔고, 2년 전 막내딸까지 둥지를 떠나 새 가족을 꾸렸다. 그렇게 머스탱은 홀로 고향 땅에 남아 연로한 공작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동시에 적적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후작저는 사용인 수만 200명에 달하는 대저택이었다. 회색 담장을 타고 무성히 자란 붉은 장미는 노스빌리움의 손꼽히는 명물 중 하나였다. 화려하고 웅장한 외관과 달리 자식들을 모두 떠나보낸 저택 안은 시종일관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벨리타가 노스빌리움에 도착한 이후 후작가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하녀들은 오랜만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정성스럽게 저택을 단장했고, 벨리타를 위한 식사와 달콤한 디저트를 만드느라 취사장의 불은 밤낮으로 꺼지지 않았다. 지그문 후작 또한 지극정성으로 벨리타를 돌보았다. 그는 벨리타에게 그리운 딸들의 얼굴을 겹쳐 보았다.
“몸은 좀 어떠니? 오늘도 악몽을 꾸었느냐, 얘야?”
지그문 후작은 침대맡으로 다가와 벨리타의 안색을 살폈다. 벨리타는 초콜릿 향이 풍길까 봐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오늘은 괜찮아요. 그나저나 매일 침대에만 누워 있어서 너무 죄송한 거 있죠. 저는 집주인을 기쁘게 해드릴 의무가 있는데…….”
벨리타는 말끝을 흐리며 훌쩍 우는 소리까지 냈다. 앤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참으로 대단한 명연기였다.
벨리타의 모습을 보고 지그문 후작은 진심으로 안타깝게 탄식했다.
‘숲에서 마차 바퀴가 고장 나 얼마나 두려웠을꼬.’
더욱이 지그문 후작은 벨리타가 자신을 위해 노스빌리움에 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레제 백작 부인은 황실 데뷔탕트의 일은 감쪽같이 숨긴 채, 딸들을 시집보내고 홀로 적적하게 살 지그문 후작이 걱정된다 운을 떼며 편지를 썼다. 벨리타를 노스빌리움에 보내 견문을 넓혀주고, 지그문 후작에게는 집 안에 사랑스러운 딸아이를 둔 기쁨을 다시금 느끼게 해 주고 싶다 덧붙이며 말이다.
지그문 후작으로선 모녀의 다정한 배려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러니 숲에서 큰 봉변을 당할 뻔한 벨리타가 더욱 측은하게 느껴질 수밖에.
“의무라니! 얘야, 네 아비와 나는 절친한 벗이었단다. 의무감에 날 기쁘게 해 줄 필요 없다.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야. 네가 노스빌리움에서 좋은 추억을 잔뜩 만들어가는 일이지.”
지그문 후작은 벨리타의 코끝을 톡 두드렸다. 그러자 벨리타는 아이처럼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벨리타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후작의 시선이 서글퍼졌다.
“아직 수척해 보이는구나. 환영회는 무리겠지?”
“네? 환영회요?”
벨리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는 황급히 입을 닫고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북부는 이방인에게 폐쇄적이지 않니. 그래서 내가 다스리는 노스빌리움에선 귀한 손님이 도착하면 성대한 파티를 열어 환영해 주는 문화를 장려하고 있단다.”
지그문 후작의 얼굴엔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환영회를 위해 별관도 치우라 일러두었는데…….”
“벼, 별관을 청소해 준 하녀들을 위해서라도 환영회엔 꼭 참석해야겠어요! 오늘인가요? 오늘 저녁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하하. 진정하려무나, 얘야. 당장 오늘이 아니더라도 네가 원하는 날에 언제든 환영회를 열어줄 테니.”
후작은 벨리타를 다독이며 몸을 일으켰다.
“저, 정말로요?”
벨리타가 다급하게 후작의 손을 붙잡았다.
“낯선 곳에서, 친구가 없는 건 싫어요…….”
벨리타가 훌쩍 우는 소리를 냈다. 후작은 가슴이 아릿했다.
“물론이지, 벨리타. 너는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니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나게 될 거란다.”
“그럼……, 최대한 빨리 환영회를 하고 싶어요.”
“오냐. 지금부터 초대장을 만들어 보내도록 하마.”
후작이 벨리타를 다독여주는데, 하녀가 공손히 말했다.
“어르신,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음? 가만, 오늘 방문 예정인 사람이 있던가?”
“아니요, 어르신이 아니라.”
하녀는 슬며시 벨리타를 바라봤다.
“볼레어 경께서 벨리타 아가씨의 상태가 염려되어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나. 앤이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탄식했다.
볼레어는 북군 경비대장이었다. 벨리타 일행이 꼼짝없이 숲에 갇혔을 때, 순찰조를 이끌던 볼레어가 이들을 발견해 노스빌리움으로 데려와 줬다. 북부인다운 우람한 체구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부드러운 미소가 돋보이는 미남이었다.
“볼레어 경이? 근무 시간일 텐데 널 보려고 휴가를 낸 모양이구나. 벨리타, 이참에 볼레어 경과 산책이라도 하지 그러니? 조금씩 몸을 움직이는 것도 회복에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맞아요, 아가씨! 후작님의 말씀을 듣는 게 어떨까요?”
잘생긴 볼레어 경을 다시 볼 수 있단 생각에 앤이 주책맞게 끼어들었다. 벨리타가 그녀만 눈치채게 눈을 흘기고 나서야 앤은 꾹 입을 다물었다.
“그럴까요? 후작님이 허락해 주신다면요.”
벨리타는 머뭇거리는 척 되물었다.
* * *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덕분에요. 볼레어 경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그대로 늑대 밥이 됐을지도 몰라요.”
벨리타는 힝 소리를 내며 볼레어에게 붙었다. 볼레어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벨리타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두 사람은 나란히 광장을 걷고 있었다. 앤은 한 걸음 떨어져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어머. 저 군인들은 뭔가요?”
그때 벨리타가 어딘가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집된 대원들입니다.”
“소집이요? 전투가 있나요?”
“아. 그건…….”
볼레어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벨리타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곤란하면 알려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러며 조금 서운한 얼굴로 덧붙였다.
“저는 외부인이니까요.”
“전투는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일단은, 중요한 분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라고 해두지요.”
중요한 분?
현재 노스빌리움의 공작은 자식이 없는 늙은 황족이었다.
제국에선 일정한 규모 이상의 토지는 황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북부의 수도라 불리는 노스빌리움도 이에 해당했다. 이 경우 표면적으로만 황족이 토지를 소유하고 실제로 영지를 관리하는 건 지역 유지 귀족이었다. 노스빌리움의 경우 지그문 후작이 그러했다.
지그문 가는 노스빌리움의 토착 귀족이었다. 선조 대대로 노스빌리움의 발전에 이바지했고, 지그문 후작 또한 훌륭한 인품으로 북부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그렇게 머스탱이 공작령의 영지 경영을 위임받으며 후작위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런 지그문 후작보다 중요한 사람이 있다고?’
그게 대체 누구일까?
벨리타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 금방 포기해버렸다.
‘어차피 그 사람도 내 환영회에 오겠지.’
잘생긴 남자라면 좋을 텐데. 미혼이면 더 좋고. 기혼이어도 마음에 들면 밀회를 이어가다 수도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암, 그렇고말고. 노스빌리움에 오래 남아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벨리타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 *
“디아, 오늘 밤은 혼자 자도록 해.”
에이든은 별관에서 찾아온 가방을 건네주며 말했다.
레인디아는 그에게 어디를 가는 거냐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수 없었다. 벌어진 가방 안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하녀복을 본 순간 목이 턱 막혔다. 에이든이 그린 음탕한 초상화가 자꾸만 떠올라서, 레인디아는 가방을 끌어안는 척 하녀복을 숨겼다.
“밤사이에 위험한 일은 없을 테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이름을 부르고. 알겠지, 디아?”
에이든이 부드럽게 레인디아의 뺨을 쓸며 물었다.
레인디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레인디아에게 가장 큰 위협은 에이든이었다. 그의 이름을 부른다고 자신을 노스빌리움에 데려다주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에이든은 홀연히 사라졌다.
에이든은 문을 잠그지 않았다. 그러나 레인디아는 도망갈 수 없었다. 바깥에는 짝을 잃은 변종 늑대가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테니까. 복수심을 불태우며 말이다.
레인디아는 에이든이 사라지고도 가방을 움켜쥔 채 한참을 서 있었다. 겨우 마음이 진정됐을 때 그녀는 창가로 걸어갔다. 레인디아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달빛을 머금은 회색 구름이 몰려와 하늘이 캄캄해질 즘에야 그녀는 침대로 돌아왔다.
레인디아는 머리맡에 가방을 내려두고 그 안에서 책을 꺼냈다. 너덜너덜해진 표지를 쓰다듬는데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레인디아는 에이든과의 대화를 속으로 곱씹었다. 어떻게든 그를 벗어날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여자를 찾고 있어.’
‘그 여자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타났는데 하필이면 남자라니. 내 꼴이 우습잖아?’
‘그 후론 늘 그 여자를 떠올리며 자위했어. 상상 속에서도 난 그 여자를 건들지 않아. 그런데도 꼴리더라고. 미치게.’
저를 이곳에 가둔 이유.
간단명료했다.
에이든이 오랜 세월 그리워한 여자를 닮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자를 향한 감정이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란 점이다. 에이든은 그 여자를 사랑했다. 그뿐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그리움은 병적인 집착으로 변질했다. 그 여자를 닮은 초상화를 수도 없이 그리고, 그녀를 닮은 사람이 남자란 사실에 화가 나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만큼.
‘나라면 그 가짜를 박살을 내버렸을 거야. 디아가 수컷이었다면 이걸 너의 하얀 목덜미에 처박았을 거란 뜻이기도 해.’
레인디아는 살그머니 제 목을 붙잡았다. 굳이 무기를 쓰지 않아도 에이든의 악력이라면 맨손으로도 충분히 그녀의 목을 꺾는 게 가능했다. 레인디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닮은 꼴이어도 상관없다는 걸까?’
에이든은 그 여자는 잊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마음에 든다고. 그러니 앞으로 계속 함께 있어달라고.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대용품 따위로 만족할까?
대용품. 그래, 자신은 대용품이었다.
가짜는 결코 진짜를 대신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제게 품은 환상도 사라지겠지. 그땐 여기서 내보내 줄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에이든의 변덕이 도진다면, 그가 예상보다 쉽게 질린다면, 저 또한 눈밭에서 총을 맞고 죽어버린 늑대의 운명을 따라가는 것은 아닐까?
‘설마…… 진짜 죽이겠어?’
레인디아는 에이든이 전쟁 영웅이자, 황제의 조카이자, 고귀한 황족이란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비웃는 것이 에이든이란 남자였다.
에이든의 앞에선 상식도 윤리도 통하지 않았다. 전쟁 영웅이란 반지르르한 살가죽 안에 숨겨진 그의 진짜 모습은 두말할 것 없는 악, 그 자체였으니까.
그날 밤.
레인디아는 백작 부인에게 받은 책을 꼭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잠이 든 후에도 두려움의 잔재가 오랫동안 그녀의 육신에 남아 있었다. 악몽이 내리 이어져서 레인디아는 눈을 떴다 잠들기를 거듭 반복했다.
* * *
침대를 빙 두른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커튼을 치고 잔 기억은 없어서 조심스럽게 바깥을 보자 하녀들이 분주하게 침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이상한 꿈이네.’
하지만 어쩐지 위험한 악몽 같지는 않았다. 안심한 레인디아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화장대는 거울이 깨졌는데 어쩌죠? 사람을 불러 교체할까요?”
“깨어나실지 모르니 가구를 옮기는 건 나중에 하도록 해.”
바깥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닥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붓으로 도자기를 털 듯이 먼지떨이를 조심조심 흔들었다.
‘꿈이, 아니야.’
뒤늦게 현실임을 깨달은 레인디아가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하녀들이 하던 일을 우뚝 멈추었다.
“죄송합니다, 레인디아 아가씨. 최대한 조용히 치운다고 했는데…….”
하녀들이 일렬로 서더니 동시에 고개를 조아렸다. 저를 아가씨라 부르는 소리에 현실감이 붕 떠서 또다시 꿈인 줄만 알았다.
‘오늘까지만 불편하게 지내자. 내일이면 사람들이 올 거야. 그래서 말인데, 필요한 거 있어?’
불현듯 에이든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말도 안 돼. 정말로 하루 만에 사람들이 왔다니. 레인디아는 뒷걸음을 치다가 가까이 있는 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그대로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보였다.
파도가 밀려오듯 마차가 줄줄이 도착했고, 그 안에서 하인들이 내려 제 할 일을 시작했다. 가구를 옮기는 사람, 식기를 확인하는 사람, 경비견과 말을 끌고 가는 사람……. 집사로 보이는 노신사가 이들을 통솔하고 있었다.
바로 아래를 보자 조경사들이 비어 있는 화단에 꽃과 덤불을 옮겨 심고 있었다. 어느새 새하얀 눈으로 둘러싸여 있던 저택의 외관은 초록빛으로 무성해졌다. 마치 웅덩이를 넓혀 바다로 만들고 야트막한 언덕을 산으로 만드는 기적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유령이 나와도 이상치 않을 만큼 으스스한 저택은 불과 반나절 만에 호화로운 대저택으로 탈바꿈했다.
‘입구는 어디지?’
레인디아는 저 많은 사람이 어디로 도착한 것인지 알아내려 했다.
대지가 워낙 넓어 육안으론 저택 입구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다행히 건실해 보이는 남자들이 쉴 틈 없이 눈을 퍼 날라 돌로 된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레인디아는 그 길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아직 파헤치지 않은 눈밭엔 검은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경비견을 끌고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들은 총 대신 석궁이나 조용한 마취총으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늑대를 사냥했다.
‘도망칠 수, 있을까?’
이제는 늑대가 아닌 군인과 경비견을 피해 탈출해야 했다. 그리고 저 많은 사람의 눈을 속여서.
레인디아의 유약한 마음이 꺾이려 할 때였다.
“아가씨, 마저 청소해도 될까요?”
등 뒤에서 하녀가 슬그머니 말했다.
레인디아는 휙 몸을 돌렸다. 하녀들은 여전히 같은 자세로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인디아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저도 청소를 도울게요. 다 같이 치우면 금방 끝낼 거예요.”
“안 돼요, 아가씨!”
레인디아가 창틀에 놓인 걸레를 잡으려 하자 하녀가 소리쳤다. 이윽고 큰 결례를 저지른 것처럼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안절부절못했다. 레인디아는 걸레를 잡으려던 손을 바로 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손에는 물 한 방울도 묻히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어서…….”
“괜찮아요. 무엇보다 저는 아가씨가 아니에요. 저는 그레제 가문의,”
레인디아는 슥 제 몸을 훑어내렸다.
아직도 그녀의 가슴은 붕대로 감싸 밋밋했고, 아주 형편없는 남장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라 부르는 걸 보면 어차피 저 사람들도 알고 있겠지. 그 사실을 깨닫자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마땅히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 에이든의 앞에서 하녀복을 입고 싶지 않았다. 하녀복을 입은 제 초상화에 정액을 싸지른 남자가 아니던가. 하지만 소개는 제대로 해야겠지.
“저는 여러분과 같은 하녀예요.”
레인디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 저희는 그저 맡은 일을 할 뿐이에요. 아가씨를 모시고 존중하는 것이 저희의 역할인걸요. 다른 것은 저희와는 아무런 상관없어요.”
그녀들의 표정엔 투철한 직업의식이 가득했다. 모르는 사람이긴 해도 얼마 전까지 저와 같이 일하던 하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생소한 직업을 대하듯이 기분이 이상했다. 하녀와 일하는 건 익숙해도, 떠받들어지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다들 좋은 사람 같아. 분명 훌륭한 귀족을 모실 기회가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을 모시게 될 게 뭐람.’
레인디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명령했단 사람은 틀림없이 에이든이겠지. 저들은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사용인이다. 그리고 사용인이 아니라 한들, 제국에서 황족의 명령을 거부할 이가 얼마나 될까. 엎지른 물을 닦는 게 하녀의 역할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도와준다고 해 봤자 나중에 그 남자의 귀에 들어간다면 결국 피해를 보는 건 저들이겠지.
그 남자. 에이든 헬렌베르크.
저를 이렇게 혼자 두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럼, 저는 방해하지 않을 테니 하던 일들 마저 하세요.”
“네, 아가씨. 감사합니다.”
레인디아는 창가에 꼭 등을 붙이고 섰다.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바깥을 보자 이제 막 멈춘 듯한 검은 마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우아한 절개 라인이 들어간 검은색 프록코트 차림의 풍채 좋은 신사였다. 그가 한 손으로 신사모를 벗으며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
레인디아는 헉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났다. 등을 돌리니 청소를 하는 줄 알았던 하녀들이 그녀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곧 주인 어르신께서 오실 거예요.”
그중 하나가 샐쭉 웃으며 말했다.
레인디아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들은 평범한 하녀가 아니었다. 이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이, 레인디아를 예의주시하는 감시자이자 이 감금의 공범자였다.
* * *
“디아, 어젯밤엔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해.”
에이든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사과했다.
회색 머플러가 에이든의 넓은 어깨 아래로 영대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의 키만큼이나 긴 머플러는 걸을 때마다 가볍게 흔들렸다. 그러나 발걸음은 묵직했다. 에이든은 하루 만에 아주 멀끔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지난 며칠간의 차림이 추레했단 건 아니다. 다만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야성적인 느낌이 났다면, 지금은 무도회에 옮겨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단정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풍겼다.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지?”
에이든이 침실 중앙에 멈춰 서서 주변을 슥 둘러봤다. 천천히 돌아가는 고개가 백조처럼 우아했다. 침실 상태가 마음에 드는지 에이든은 흡족한 미소를 띤 채 레인디아를 바라봤다.
“가구도 가져왔어. 오래된 건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할 생각이야. 일단 내 취향대로 구해 오긴 했는데 마음에 안 들면 말해 줘.”
에이든이 손을 까딱하자 바깥에서 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와 망가진 가구를 옮기기 시작했다.
“침대는 그대로 써도 될 것 같아. 여기서 잠든 네 모습이 정말 예뻤거든.”
에이든은 침대 앞으로 걸어가 캐노피 기둥에 손을 얹었다. 그는 커튼 자락을 쥐어 코끝에 가져다 댔다. 마치 레인디아의 체취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그의 거대한 손안에서 커튼이 구겨졌다. 레인디아는 그의 손아귀에서 뭉개질 제 미래를 보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에이든은 살며시 숨을 들이켜더니 쥐고 있던 커튼을 놓아버렸다. 커튼은 펄럭 소리를 내며 힘차게 아래로 떨어졌다. 값비싼 원단이라 구김은 남지 않았다.
“커튼 색이 짙어서 바깥에선 보이지 않고 말이야.”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뒤늦게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레인디아는 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땀이 난 손을 눈에 띄지 않게 쥐락펴락하는데 에이든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말만 해. 이 방에 가구를 전부 빼고 새로 들일 수도 있어. 디아가 원하는 것들로만 채우는 거야.”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서 머리카락이 비벼질 때마다 레인디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저는, 괜찮아요. 지금도 좋다고 생각해요.”
레인디아는 푹 시선을 떨군 채 대답했다.
이 저택이 처음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길 바라지 않는다. 이미 자체로도 완벽한 공간이었다. 자신은 바로 그 완벽한 그림에 튄 이물질이었다. 섞일 수 없는, 아니, 섞여선 안 되는 이물질.
“식사는?”
레인디아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에이든은 머리카락을 놓아주며 화제를 돌렸다. 레인디아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가자. 넌 좀 먹어야 해. 너무 말랐어.”
“아……!”
에이든이 레인디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작게 터진 탄성은 그의 힘찬 발걸음 소리에 짓눌렸다.
* * *
레인디아가 도착한 곳은 본관 1층의 오찬장이었다.
오찬장은 거대한 육각형 모양이었는데 바깥으로 돌출된 구조였다. 또 돌출된 벽면은 길게 늘인 반원 모양의 통유리가 붙어 있어 바깥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밖에선 조경사들이 풀을 심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조금 전 사용인들을 인솔하던 집사장이 의자를 빼주었다. 에이든은 레인디아를 먼저 앉히고 옆자리에 앉았다.
식사를 기다릴 것도 없었다. 새하얀 천으로 덮어둔 원형 테이블 위에는 이미 뚜껑이 닫힌 은그릇 안에 든 음식뿐 아니라 은제 식기, 자기로 만든 고급스러운 티 세트, 그리고 화려한 꽃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이프는 손잡이부터 칼날까지 아름다운 문양이 세공되어 있었다.
하인들이 하나둘 받침이 달린 은그릇의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안에는 통째로 구운 닭고기와 송아지 스테이크, 연어, 가시를 발라둔 청어찜 등 육류를 비롯해서 해산물 요리가 골고루 즐비했다.
각종 허브와 향신료를 넣고 구운 닭고기는 겉면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다. 레몬 소스를 곁들인 연어 요리는 보기만 해도 맛깔난 붉은 표면 사이사이에 새하얀 지방층이 선명했다.
함께 올라온 디저트들도 하나같이 훌륭했다. 메추리 알을 올리브와 켜켜이 쌓아 성 모양을 만들었는가 하면, 동방에서 분재에 사용한다는 작은 묘목에 체리를 매달아 진짜 체리 나무처럼 보이게 한 것도 있었다. 나무가 작아 체리가 주먹만 해 보였다.
그리고 궁전 모양의 젤리와 생크림을 듬뿍 올린 자허토르테까지. 정찬에 차례차례 나올 법한 메뉴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외부 손님을 접대하거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보지 못할 요리가 가득했다.
레인디아가 어디에 눈을 둘지 몰라 하자, 에이든이 맑은 수프를 한 숟갈 떠서 건넸다.
“자, 아.”
에이든이 입을 벌리며 스푼을 가볍게 흔들었다.
“아-, 해야지?”
레인디아가 반응이 없자 그는 스푼을 재차 흔들었다. 레인디아는 서둘러 테이블 스푼을 손에 쥐었다.
“……직접 떠먹을게요.”
레인디아의 입술 언저리에 있던 스푼이 천천히 하강했다. 이윽고 주르륵 소리와 함께 그릇 안으로 수프가 떨어졌다. 에이든은 수프를 휘휘 휘젓다가 그릇 옆에 탁 소리가 나게 스푼을 내려놨다.
“그래. 수프 정돈 알아서 먹어.”
화난, 건가?
레인디아가 수프를 뜨며 흘낏 옆을 보자 에이든이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표정이 조금 부루퉁해져 있었다.
“집사장, 나이프랑 포크 치워.”
“예, 에이든 님.”
집사장이 레인디아의 나이프와 포크를 가져갔다. 레인디아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수프로도 배는 채울 수 있으니까, 하고 생각할 때였다.
“나머진 내가 직접 먹여줄게.”
꿀을 흠뻑 찍어 바른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옭아맸다.
에이든이 한입 크기로 썬 소고기를 레인디아의 입에 가져다 댔다. 감칠맛 나는 냄새에 입 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레인디아는 그릇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타깝게도 나이프와 포크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레인디아는 조심스럽게 고기를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고기를 씹자 입 안에서 육즙이 흘러넘쳤다. 위가 어서 삼켜달란 듯이 쪼그라들었다. 레인디아는 꼭꼭 씹은 고기를 꿀꺽 삼켰다. 이제껏 식사란 음식을 씹고 넘겨 배를 채우는 단순한 행위에 불과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맛과 향을 음미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됐다.
고작 수프 한 입, 고기 한 조각이었는데. 다시는 이전의 식사로 만족하지 못할 만큼 미각이 예민해진 기분이었다.
“맛있어?”
그러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의 존재를 자각한 순간, 입 안이 버석하게 메마르고 모래 알갱이를 씹는 것처럼 꺼끌꺼끌했다.
“네, 아주 맛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나이프와 포크를 다시 받을 순 없을까요? 에이든 님도……, 식사를 하셔야 하잖아요.”
레인디아는 처음으로 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혀를 굴려 직접 이름을 내뱉고 나서야 그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실감하게 됐다. 평범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와 같은 인간이란 사실을.
“지난번엔 개밥 같은 걸 줘서 미안했어. 용서해 줄래?”
에이든이 처연하게 시선을 늘어뜨리며 사과했다.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아이 같은 표정이 그의 육중한 몸과 이질적으로 어우러졌다.
이렇게 직접 음식을 먹여주려는 이유는 어쩌면 그날 일에 대한 반성일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굳이 그의 화를 돋울 이유는 없었으니까. 레인디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사과하실 것 없어요. 저는 그저, 에이든 님이 제게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할 뿐이에요.”
레인디아의 대답에 에이든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무료할 때마다 사냥을 나가서 이곳엔 널린 게 썩은 짐승 사체지만, 그때 먹은 고기는 갓 사냥한 거야.”
에이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깨갱 부르짖으며 죽은 늑대가 떠올랐다. 설마 변종 늑대의 고기를 먹인 건 아니겠지? 레인디아가 살그머니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자 에이든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무릎 위에 얹었다.
“늑대는 아니니 안심해. 사슴이었어. 초식동물은 늪의 영향을 받지 않거든.”
에이든은 다시 고기를 쓱쓱 썰기 시작했다. 그러며 이제 북부의 야생동물은 모든 종류를 잡아본 것이나 다름없다 덧붙였다. 마치 부모님에게 호수에서 잡아 온 개구리를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랑하는 아이 같았다. 안타깝게도 레인디아에겐 그를 칭찬해 줄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 어색한 미소에 에이든은 더욱 씩씩해져서 힘을 주며 고기를 썰었다. 그러다 그만 접시에 나이프가 닿아 소리가 나자 에이든은 살짝 인상을 찡그린 채 웃으며 ‘미안.’ 하고 속삭였다.
이런 모습들 때문에 레인디아는 혼란스러웠다.
깔끔하게 정돈된 대저택과 처음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제 할 일을 하는 사용인들. 이 모든 것의 주인인 에이든은 정말로 평범한 귀족 신사 같았다. 마치 지난 일들이 전부 꿈이었던 것처럼.
눈 한 번 꿈쩍 않고 사람을 죽이고, 초상화 앞에서 정액을 흩뿌리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고, 도망치는 사람의 뒤에서 총을 쏘는 무뢰한으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전부 현실이었어.’
레인디아는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가까이 있는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가 적포도주가 들어 있는 걸 확인하고 깜짝 놀라 잔을 내려놨다. 빨간색만 봐도 피가 연상됐다. 순식간에 입맛이 사라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것을 본 에이든은 비어 있는 잔에 직접 물을 따라 그녀의 앞으로 슥 밀어줬다.
“또 뭐가 먹고 싶어?”
“……네?”
“같은 거만 먹으면 질리잖아. 말해. 먹기 좋게 썰어서 줄게.”
에이든이 턱을 괸 채 레인디아를 보며 싱긋 웃었다.
“저,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빈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 음식이나 상관없었다. 레인디아는 선택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녀가 익숙한 건 선택이 아닌 명령이었다. 정확히는 명령받는 것.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동안엔 몸이 고되긴 하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그리고 에이든의 목적은 레인디아의 배를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에이든이 제 입 안에 무엇을 넣든 상관없었다. 아니, 감히 상관할 수 없었다. 돌을 넣어도 기꺼이 씹어 삼켜야 했다.
그는 황족이었으니까.
“왜 상관없는데?”
에이든의 질문에 레인디아는 이러한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고르고 고른 끝에 그녀는 모범적인 답안을 찾아냈다.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던 것들이라, 무엇을 먹어도 맛있을 테니까요.”
레인디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에이든을 바라봤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은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을 알아챈 에이든은 추궁하는 대신 다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전부 한 입씩 먹어봐. 그중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다음 식사 때 반영하라 이를게.”
에이든은 청어 요리를 접시에 옮겨 담았다.
“취향은 중요해.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가 중요한 건 평범한 백성이야. 그게 곧 밥벌이 수단이 될 테니까. 하지만 우리 같은 인간은 적성보다 취향을 개발할 필요가 있어.”
우리 같은 인간.
그건 분명 고귀한 황족과 귀족들을 아우르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러한 신분 제도를 철저히 뭉개버리는 주장이었다. 동시에 에이든이란 남자의 생애를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 같았다.
“삶은 짧아, 디아. 나는 신분의 고하와 상관없이 전장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사람을 수도 없이 보았어.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해지지. 남은 삶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즐기며 살아도 모자라. 그게 내 지론이야. 가능한 한, 죽을 때까지 행복하기.”
죽을 때까지.
에이든은 유독 이 부분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의 검지가 레인디아의 뺨에 내려앉았다. 그는 손가락 등으로 뺨을 슥 문질렀다. 손길이 닿은 곳이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에이든의 손길이 닿으면 레인디아는 마치 열이 오르는 듯했다. 두려운 마음에. 그래. 분명히 두려운 마음 때문이다.
“우린 죽을 때까지 함께할 거야. 행복하게 말이지.”
붉은 눈동자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그 후론 어떤 음식이 입에 들어와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벗어날 수 없는 아득한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깊이, 깊이, 바닥을 모르고 침전한다.